선농문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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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치없는 기다림

 

 

유명인이 되어야 하는 이유

 

나는 일찍이 유명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어렸을 적에 늘 배고픔에 시달리며 살았던 나는 유명한 사람이 되면 배는 곯지 않을 거라는 확신 같은 것이 있었다. 그러나 내가 성인이 된 지금 더욱 유명해지기를 갈구하는 이유는 주의 부름을 받아 주리고 목마른 이들을 위해 먹거리를 마련하는 일이 삶의 목표와 목적이 된 까닭이다. 길거리에 서성이는 수많은 홈리스들의 모습을 보면서 ‘내 양을 먹이라’는 주의 말씀을 기억했다. 엘에이 다운타운 뿐 아니라 길거리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수많은 홈리스들, 목적도 희망도 없이 우왕좌왕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그들을 위해 먹을 것을 제공하는 일이 나의 사역이다. 그러나 그들 모두에게 배불리 먹일 수는 없다. 다만 더욱 유명해지면 더 많은 사람들의 배를 채울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외람되게도 나는 사회에서 홈리스들 덕분에 유명해지긴 했다. 그 증거로는 나를 부르는 이름이 많다는 것이다. 내가 돌보던 아이들로부터는 ‘이모’, 홈리스들은 ‘마마’, 먹거리를 주고받는 시설에서 일하는 이들은 ‘도넛 레이디’, 사회적으로는 ‘뒷골목의 대모, 각설이’, 친구들로부터는 ‘거지 왕초’ 우리 교회에서는 ‘나의 목사님’(My pastor), 자원봉사자들은 ‘목사님’으로 부르고 있다.

 

그러나 나의 동창들 중에는 아주 유명한 사업가들이 많다. 어떤 이는 모교를 위해 억대의 기금을 냈다는 미담이나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커다란 액수의 금액을 나라에 기부했다는 화들짝 놀랄만한 이야기를 들을 때, 그들이 나의 학교 동창이라는 사실이 너무나 뿌듯하고 자랑스럽다. 그 뿐이 아니다. 높은 건물 벽에 걸린 삼성(Samsung)의 광고판이나 홈리스들이 입고 있는 자켓에 붙어있는 노스페이스 (North Face) 상표만 보아도 왠지 반갑고, 어깨가 으쓱해진다. 그러나 한편 샘이 나고 질투가 나는 것은 나의 못된 성격 탓일까? 나는 오히려 기부금을 받아야만 하는 처지이니 나 자신의 무능함이 부끄럽기까지 하다. 유명해지고자 하는 것은 나의 일을 도와 줄 독지가나 후원자를 찾기 위함이 아니던가. 괜히 있는 자의 뻔뻔함과 없는 자의 비굴함을 대비해 본다. 한편, 유명해지는 길은 돈을 잘 버는 사업가가 훨씬 빠르다는 것을 왜 몰랐을까? 나의 성장과정에서는 사업이라는 개념조차 알지 못했다.

 

잊고 싶은 학창시절

 

황해도 조그마한 농촌마을에서 태어난 나는 1.4후퇴 때 가족들을 따라 이남으로 내려온 아주 가난한 피난민 가정의 2째 딸이다. 늘 춥고 배고픈 것은 기본이요, 누추하고 초라한 옷차림은 영락없는 홈리스 수준이었다. 출세를 하려면 공부를 열심히 해야 된다는 말을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다행히 조금은 똑똑한 편에 속해서인지 초등학교 시절에는 수재라는 말을 들어가며 공부를 곧 잘 했다.  담임 선생님 덕분에 중학교는 명문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다. 허나 6.25 덕분에 같은 반 아이들보다 2살이나 더 먹었던 나는 중학교 들어가자마자 사춘기와 가난함이 맞물려 무슨 영문인지 도무지 수업시간에 집중해서 강의를 들을 수가 없었다. 초등 시절에는 선생님 말씀 잘 들으라는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학교에서 듣는 수업만으로 충분했다. 그러나 중학교에서는 학교 수업만으로는 도저히 따라 갈 수 없었고, 학교 성적을 높일 수가 없었다. 그럭저럭 중학교 과정을 마치긴 했지만 고등학교 진학은 생각조차 사치였다. 중학교 입학을 도와주셨던 스승님을 찾아뵙고 진학을 포기하겠다는 말씀을 드려보았지만 걱정만 하실 뿐 학교를 그만두라는 말씀을 하시지 않으셨다. 마지못해 시험을 치렀는데 합격이 되어 고등학교도 억지로 떠밀려 다녔다.

 

그러나 즐겁고 재미있어야할 학창시절은 항상 힘들고 어렵게 보냈기에 기억하고 싶은 추억이 별로 없다.  납입해야 할 등록금은 늘 미납이었고, 준비해 가야 할 교재들, 미술 도구나 필요한 재료 등을 준비할 수가 없어 잊고 왔다는 변명으로 교실 뒤에서 벌을 서는 일이 다반사였다.  손재주가 좋은 나는 도구나 재료만 있으면 아주 잘 할 수 있는 과목들까지도 비참하게 늘 형편없는 성적표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 중에 가장 힘이 들었던 과목이 영어였다. 아이러니(irony)하게도 지금은 영어가 내 삶을 지배하고 있다. 다른 친구들은 가정교사나 학원엘 다니며 과외공부를 했건만 난 숙제조차도 하지 못해 수업시간마다 고역이었다. 물론 도서실 같은 곳이 있기는 했어도 점심도 굶고 다닌 처지에 배고픔을 참을 수 없어 그러지도 못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특별 활동이 많았다. 음악은 따로 배우지 않아도 이론과 실기 모두 자신이 있었다.  합창반 부반장과 기독학생회에서 음악부장을 맡았었다.  수업시간에 들었던 주눅을 특별활동으로 풀곤 했다.  마음속에는 지옥 같은 수업시간들을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을까 극복하려는 생각보다 늘 피하고만 싶었다.  경제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친구들을 볼 때면 왕자들이나 공주들 같아 보여 너무도 부럽고 샘이 났다. 나의 처지는 무수리나 만년 상궁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마음속으로 상궁의 반란을 꿈꾸기도 했다. 그건 바로 언젠가 유명해지면 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문만 나서면 어깨를 펴고 다닐 수 있었다. 명문학교 교복을 입고 명문 배지(Badge)를 달고 다녔기 때문이다. 그 때는 학생들의 교복과 배지로 신분이 보장되기도 했다. 동네 사람들은 물론 길거리에서조차 칭찬을 듣는 것이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다. 얼마나 똑똑하면 그렇게 좋은 학교에 다닐 수 있느냐는 자녀를 둔 부모들의 부러움 섞인 말이었다. 어렵사리 3년의 세월 속에 낙제는 겨우 면하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되었지만, 대학 진학의 꿈은 언감생심 엄두도 내지 못하고 그저 유명해져야 한다는 처절한 생각만이 구구절절했다.  

 

일자리를 찾아서

 

졸업을 하고 교복을 벗으니 입고 나갈 옷 한 조각이 없었다. 한 달 정도를 이웃에 사는 친지들의 옷을 빌려 입고 일자리를 찾아 다녔다.  명문 고등학교는 나왔으나 일자리를 찾기는 그리 쉽지 않았다. 그저 공장에서 생산직원을 뽑는다는 광고뿐이었다. 우선 빈손에 이것저것 가릴 것 없어 공장 일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 곳에는 초등학교 졸업도 제대로 하지 못한 직공들로 붐벼 명문 출신인 나의 자존심을 마구 짓밟았다. 한 달을 겨우 다니고 일 삯을 받은 돈으로 옷 하나 사 입고 또 다른 회사로, 그 곳에서 한 달 채우고, 또 다른 곳으로... 이렇게 몇 달을 다니니 옷 한 벌을 겨우 차려입게 되었지만, 계절이 바뀌는 웃지 못 할 상황을 맞이하곤 했다. 그렇게 일 년 정도의 세월이 흐른 후, 우리 가족들이 출석하는 교회 담임 목사님이 소개해 준 회사에 입사를 하게 되었다. 그 회사는 운동화와 고무신 등을 생산하는 고무공장과 방바닥에 까는 장판을 제조하는 굴지의 재력을 가진 유명한 말표 고무신 주식회사다. 나는 그 회사의 재정을 담당하는 회사원으로 일을 하게 되었다. 그 시절에는 이중거래 즉 이중장부가 엄연히 존재하던 시절이었다. 내가 하는 일은 세금을 줄이기 위해 떳떳하게 장부에 기재하지 않고 숨기며 뒷거래를 해야 하는 것이 주요업무였다. 아무튼 그 회사에서 유명해지는 꿈을 조금은 실현할 수 있었다. 나는 그 회사를 다니며 나 자신을 위해 틈틈이 짬을 낼 수 있었다. 내가 유명해지려면 무엇이든지 남보다 뛰어나야 한다고 생각해서 시간을 쪼개서 배우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대학은 다닐 형편이 아니기에 대학을 졸업한 친구들보다 무엇이든지 뛰어나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들이 하지 못하는 분야를 열심히 배우기 시작했다.

  

우선 가지고 있는 재주, 내가 남보다 잘 할 수 있는 일부터 시작했다.  초등시절 선생님들로부터 목소리가 예쁘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 후로도 목소리 칭찬을 많이 들었기에 목소리로 유명해질 수 있지 않을까 궁리 끝에 성우학원엘 다녔다. 그 곳 강사들로부터 목소리가 곱고 예쁘다는 칭찬을 많이 들었지만 성우가 될 수 있는 길은 열리지 않았다. 그 다음 글씨를 잘 쓴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은행에서 입금전표를 작성할 때나 다른 사람들 앞에서 글씨를 쓸 일이 있을 때 칭찬을 적지 않게 들었기에 펜글씨 학원엘 다녔다.  펜글씨 선생님은 펜글씨는 그만하면 되었으니 붓글씨를 배우라고 권고해서 붓글씨를 배우게 되었는데 그 때도 역시 많은 칭찬을 들었다.  붓글씨 학원은 회사 일이 끝나고 저녁에 다녔다.  처음에는 먹의 향기가 얼마나 좋았던지... 먹을 가는 일이 체력에  달리기도 했지만 열심히 붓글씨 연습을 했다. 학원에 다니는 동안 단체 전시회에 두 번이나 참여하여 열 두 폭 짜리 커다란 병풍을 만들어 전시하여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또 한문으로 쓴 족자나 액자를 만들어서 회사에 높은 분들께 선물로 주면서 존재 가치를 높이기도 했다. 

 

사업을 배우다

 

세월은 흘러 회사를 더 이상 다닐 수 없는 나이가 되었다. 그 때 두 여동생들이 결혼을 해야 했다. 가정형편상 또 회사 사정상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퇴직금이 필요해서 사표를 내고 말았다. 백수가 되어 놀고 있을 무렵 친구가 꽃꽂이 학원을 열고 도와달라는 부탁을 하여 학원을 지키면서 꽃꽂이를 배웠다. 그 학원에서 1급 사범 자격증을 따고 또 다른 직장을 찾아 다녔다. 그 때도 나를 받아 줄 직장은 마땅히 없었다. 두 동생을 결혼시킨 터라 조금은 홀가분한 신분이 되어 여기 저기 다니던 중 동두천으로 시집간 친구네 집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 친구가 결혼한 신혼 때는 남편이 제법 수입이 좋았고, 풍족해 보였다. 그러나 내가 그녀를 다시 방문했을 무렵 남편이 사업하자는 친구에게 사기를 당하고 쫄딱 망했다며 이제 갓 첫돌이 지난 아이의 우유 살 돈이 없다는 것이었다. 주머니에 있는 몇 푼 안 되는 돈을 털어주고 돌아오려는데 사업을 하자고 제안을 했다.  백수였던 나는 솔깃해서 그러자고 쉽게 대답했지만, 나도 그들도 무일푼, 소위 사업자금이란 게 한 푼도 없었다. 나는 초등학교 동창들을 불러 모아 계를 만들어 약간의 돈을 마련했다. 얼마 안 되는 액수였지만 그 돈으로 작은 가게를 얻어 조화와 서양매듭(macrame)을 취급하는 수예점을 열었다. 배운 것이 도둑질이라고 꽃꽂이를 배운 나의 솜씨로 실크조화를 조립하여 예쁘게 꽃꽂이를 해서 쇼윈도우에 진열해 놓으니 제법 인기가 좋았다.  가게를 찾는 손님들은 대부분 미국 군인들과 그들과 함께 사는 한국 여자들이었다.

 

미군부대 교회에서 봉사와 대학진학

 

그런대로 사업이 되어 먹고 사는 데 지장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미군 목사님(Chaplain) 한분이 민간인 동네 순찰 중에 진열해 놓은 꽃꽂이 작품을 보고 가게 안으로 들어와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던 중 나에게 교회 꽃꽂이를 부탁하였다. 그 때가 1977년이었으니 44년 전 일이다. (조지아주에 사시는 그 분은 지금도 달마다 선교비를 보내주신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미군부대 교회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파트타임(Part Time) 꽃꽂이를 하고, 그 다음 성가대 지휘자(Music Director)로, 교육담당자(Education Coordinator), 재정담당자(Fund Technician) 등으로 모든 분야의 일을 맡아 정규직원(Full Time)의 몫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교회의 전반적인 일을 열심히 하다 보니 이사단은 물론 8군에서도 이름을 알리게 되었고, 특히 한국에 관심 있는 미군목들과 영내 장교들은 물론 별을 단 장성들에게도 잘 알려진 유명인이 되었다. 참으로 즐겁고 행복한 나날들이었다. 그런 가운데 학업에 대한 욕구가 생기기 시작했다.  유명해지기 위해 한 걸음 내디딜 여유가 생긴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의 교육정책과 체계에선 나에게 입학이 가능한 정규학교를 찾을 수 없었다. 다만 미군부대 안에 미군들을 위한 학교를 관리하는 교육청(Education Center)이 있었다. 그 때는 미군이 주둔하는 각 캠프(Camp)마다 Maryland University와 Los Angeles Community College(LACC) 분교가 있었다. 목사님 한분을 통해 LACC에 등록을 하게 되었다. 그 학교가 바로 LACC 분교인 Los Angeles Metropolitan College Overseas Program이었다. 첫 강의는 동두천에서 들었다. 강의실에 들어가니 한국인 신분의 민간인은 나 혼자였다.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오직 ‘Miss Na’라는 내 이름밖에 들리지 않았지만, 감개무량하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17년 만에 이어지는 정규교육이었다. 

 

벙어리와 귀머거리 같은 학교생활 3년을 보내고 졸업을 하게 되었는데 기적 같은 일이 있었다. 영어는 제대로 할 수 없음에도 학업 성적이 우수했다는 것이다.  그 뿐이랴. 운이 좋았던지 졸업식은 얼마나 성대하게 치렀었는지... 서울 마포에 위치한 8군 전용호텔인 가든호텔(Garden Hotel)에서 LACC 분교의 마지막 졸업식을 가진 것이다. 한국 학교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졸업축하파티를 성대하게 열었다. 동생들, 가족들이 참여하여 거하게 축하해 주어서 정말 행복한 졸업이었다. 그 후 텍사스(Texas) 공대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나는 그 학교를 졸업하고 이사단을 떠나 서울로 와서 어린이 영어 강사를 했다.  미국 오기 바로 전까지는 안양 YWCA에서 어린이 영어와 생활영어를 가르쳤다.

 

미국 신학교 유학

 

그러는 동안 한국에는 88올림픽 행사를 하게 되었다. 온 세상이 스포츠 이야기가 만발할 때 초등시절 유년주일학교(Sunday School) 교사였던 김상우 목사님이 미국에서 88올림픽 자원봉사자들을 이끌고 한국에 오셨다.  목사님은 오랜 동안 우리 가족들과 친분이 있어 외국에 사시면서도 한국에 오시면 우리 가족들의 안부를 묻곤 하셨다. 내가 YWCA에서 영어를 가르친다니 궁금하셔서 안양으로 직접 방문을 하셔서 하신 말씀이 영어를 할 줄 아니 미국이나 가자고 했다.  그러나 나는 미국 갈 수 있는 여건과 조건이 못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사님의 도움으로 캘리포니아(California)주에 있는 신학교 입학허가서(I-20)를 받아 정식으로 미국유학을 위한 수속을 밟기 시작했다. 정말 흥미로운 일은 수속 기간이 2달도 채 걸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재정보중까지 서주신 김 목사님 덕분에 유학의 길이 초고속으로 열렸다. 그 시절 유학을 가려면 유학 시험을 치러야 했기 때문에 2-3년은 족히 걸린다고 했다.  내가 쉽게 여권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가 더욱 흥미롭다. 나의 졸업장이 모두 영어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고, 비자를 빨리 받을 수 있었던 것은 통역이 없이도 인터뷰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나는 YWCA 강의계약을 끝내고, 88올림픽을 치른 다음해인 1989년 3월 4일 미국 땅에 도착하였다.        

     

전도사 사역

 

내가 도착한 학교는 샌디에고(San Diego)라고 하는 아름답기로 유명한 세계적인 항구도시 끝자락에 위치해 있었다.  학교는 나지막한 언덕을 중심으로 주변에 자그마하게 지어진 건물들과 언덕 정상에 아담한 교회당이 두 그루의 야자나무들(Palm Tree)과 함께 나란히 서 있었다.  3층으로 지어진 비교적 커다란 건물이 여자 기숙사였고, 작고 낮은 건물들은 도서실과 강의실이었다.  우선 조그만 기숙사 독방에 들어가 보따리를 풀고 입학수속을 마쳤다. 전교 학생이 50여명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아주 작은 신학교인데 학생의 반 이상이 한국 유학생들과 미국에 사는 한인들이었다. 그 때부터 영어보다 한국어를 더 많이 사용하는 미국생활이 시작되었다. 내가 학교에 도착한 시기는 이미 학기가 시작되었기에 도착한 다음날부터 강의를 듣기 시작했다.  미국생활은 미제2사단 군목실(Chaplain’s Office)에서 이미 훈련이 되어 있던 터라 별 다른 어려움이 없었다. 강의를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았지만 이미 미국에 살고 있던 사람들보다도 오히려 더 미국사람 같다는 칭찬 아닌 칭찬을 듣기도 했다. 

 

학교에 도착하던 날, 학교까지 데려다주신 김상우 목사님을 통해 샌디에고 영락교회 담임목사님을 소개받았다. 마침 영어를 조금은 할 수 있다니까 교회에 이중언어 전도사와 한글학교 교사가 필요하다며 다음 주일부터 당장 출석을 하라고 했다. 일사천리로 일자리가 생긴 셈이다.  샌디에고는 미해군본부가 있는 곳이다. 교인들은 대부분 미해군과 국제 결혼한 한국여인들의 가정이었는데 남편들은 집을 떠나 배를 타고 장기근무를 하기 때문에 가정에는 가장 없는 가족들만이 살고 있는 특수한 환경이었다. 교회에 나오는 아이들은 혼혈아들(Amerasian)뿐이었다. 이들은 조금은 수선스럽고 집중이 잘 되지 않아 예배를 드리거나 성경공부를 할 때 가르치는 선생님들이 몹시 힘이 든다고 했다. 나는 샌디에고 영락교회에 한국학교를 개설하고 학생들을 모집하여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 다음해 여름, 한국에서 한글을 가르치는 해외 교사들을 위한 특별교사강습회가 있어 영락한국학교 대표로 참가하게 되었다.  항공료를 제외하고 10일간의 숙박을 비롯한 모든 비용을 나라에서 무료로 제공해주는 프로그램이었는데, 항공료는 교회에서 지불해주었고, 언어강습은 물론 무료여행의 행운을 얻기도 했다. 그 프로그램에서는 최고급 숙박시설을 제공하면서, 경주와 설악산 등 아름답기로 유명한 관광지를 돌며 DMZ와 땅굴 같은 중요한 장소들을 체험하게 해주기도 했다. 강의는 1990년도 새로 수정된 한글 맞춤법과 발전하는 한국의 실정을 소개해 주는 정도였다. 나는 그 때 익힌 한글맞춤법에 익숙해 지금도 한글 서류를 작성하거나 글을 쓰는데 조금은 자신이 있다.

 

LA 이주와 석사과정

 

1991년 어느 날, 학교 강의를 들으러 오신 목사님 한분이 나에 대하여 무척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유인즉 미국 한인교회에서는 이중언어하는 교사나 교역자를 찾기가 쉽지 않아 교회학교(Sunday School)를 운영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라며 엘에이(Los Angeles)로 가자고 강력하게 권유했다.  사례비는 물론 신분까지도 해결해주겠다는 약속을 하여 남은 교과과정은 통신으로 하도록 하고 그 목사님을 따라  LA로 이사를 했다.  LA로 이사 오자마자 마침 한미노회라는 종교기관에서 이중언어를 할 수 있는 비서가 필요하다고 하여 미국에 오도록 도와주신 목사님의 추천으로 Full Time 직업을 갖게 되었다. 나의 본격적인 이민생활이 그 때부터 시작되었다.  남들이 그토록 어렵다는 신분문제 역시 이민 온 지 2년도 채 되기 전에 해결되었다. 그 때 바로 또 하나의 기회가 찾아왔다.  130여년이나 된 미국장로교(PCUSA) 교단 신학교인 샌프란시스코신학대학원(San Francisco Theological Seminar)이 LA에 Extension Program(SFTS/SC)을 열면서 그 과정을 교단 소속인 한미노회를 통해서 작업을 했는데 그 심부름을 주로 내가 하게 되었다. 미국장로교는 미국 최고의 주류교단이다.

 

1992년 SFTS/SC는 미국장로교(PCUSA) 교단인 유서 깊은 엘에이 임마누엘(Immanuel) 장로교회 건물을 빌려 학생을 모집했다. 나는 앞뒤 가리지 않고 입학원서를 제출했다. 그 교육과정은 한국 학생들을 위한 이중언어(Bilingual Program) 신학강의였다. 그 동안 이곳저곳 닥치는 대로 다닌 학교의 졸업증명서와 함께 성적증명서도 제출했다. 10여 년 전에 졸업한 Los Angeles Metropolitan College에 성적증명서를 신청했더니 며칠 걸리지 않고 배달이 되어 너무나 신기했다. 사실 얼떨결에 미국 유학이라고 왔지만 다니는 학교가 마음에 흡족하지가 않았다. 학교 규모가 작은 건 고사하고 건물이 너무 낡고 초라하여 도로공사 임시 사무실 같다는 생각을 하며 더 좋은 학교를 기웃거리던 참이었다. 그러나 명문은 뭐가 달라도 달랐다. 학교에서 돌아온 소식은 입학 자격이 없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내가 다닌 학교는 LACC를 제외하고는 모두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미국 신학교에서 공부한 것까지도 학점을 인정할 수 없다고 했다. 다만 LACC는 인정은 하되 AA Dree 즉 학사가 아닌 전문대이기 때문에 2년의 과정을 더 수료해야 한다고 했다. 프로그램은 교역학 석사(M.Div) 과정이기에 SFTS에서 인정하는 종합대학 4년제 과정을 끝낸 졸업장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 강의를 들을 수 있는 방법 가운데 다행히도 ‘Unclassfied’라는 제도가 있었다. 학교 등록금을 납부하고 강의를 들을 수는 있고, 학점도 적립할 수는 있어도, 학생이 될 수 없어 학생신분으로 받을 수 있는 장학금이나 학생으로서 누릴 수 있는 혜택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무조건 학교가 좋고 강의가 좋아 등록금을 꼬박꼬박 내면서 강의 듣기를 즐기며 열심히 공부했다. 어느 듯 함께 입학했던 학생들은 졸업을 했거나 졸업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 동안 적립된 학점이 졸업 준비를 해야 할 처지임에도 학생의 신분이 아니었던 것이다.  나로 인해 학교에서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다. 나만을 위한 교수회의를 열 수 밖에 없었다고 하는데 그 회의에서 앞으로 3학점짜리 3과목을 B학점 이상 받으면 학생으로 받아주자는 결의를 했다고 한다. 나는 그 때 이미 여름 특별 단기과정(Intensive Course)으로 3과목을 이수하여 모두 A학점을 받은 터였다. 다시 교수회의를 열어 나를 정식학생으로 받아주어 그 후부터는 등록금을 내지 않고도 장학금으로 모든 과정을 마치고 졸업을 할 수 있었다.

 

드디어 1996년 5월 28일 역사적인 졸업식에 석사 가운과 석사모를 착용하고 참여했는데 얼마나 감격스러웠는지 모른다. 한국에서 언니 내외분이 참석하여 더욱 흐뭇하고 행복했다. 그 때 받은 학위는 교역학 석사(M.Div) 즉 미국장로교 목사 자격시험을 치를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이었다.  처음에는 호기심과 즐거움으로 한 두 과목씩 수료했는데 그 학위를 받기까지 정말 오랜 세월이 걸렸다. 그 시절 나는 SFTS 학교에서 꽤 유명한 학생이었다. 교수들과 학생들 그리고 교직원들까지도 나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고 했다.

 

목사 안수와 울타리선교회(The Well Mission)

 

그 후부터는 여러 교회에서 청빙요청이 쇄도했다. 나는 이중언어(Bilingual) 교육전도사로서 열심히 일을 할 수 있었다. 그 때가 50대였던 나는 학생들을 가르치기에는 너무 많은 나이였지만, 나이가 걸림돌이 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학생들에게도 제법 인기가 많았다. 즐겁고 신나는 추억이 적지 않다. 그러니까 교육전도사로서도 유명세를 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럭저럭 세월이 흘러 어렵다고 소문이 나 있는 미국장로교단(PCUSA) 목사고시에도 합격하여, 드디어 1999년 2월 8일에 목사안수를 받게 되었다.  안수식은 최초로 세워진 미국장로교단 한인교회로 어머니교회라고 일컫는 엘에이한인연합장로교회에서 200여명의 친구들과 지인들을 모시고 성대하게 치렀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기억은 서울사대부중 3학년 담임이셨던 강신호 선생님과 미주동문들이 자리를 함께 하여 축하를 해주었던 것이다.  가족으로는 여동생인 나하나 교수가 함께 했었다. 안수를 받은 1999년 같은 해 7월 12일에 울타리선교회(The Well Mission)라는 자그마한 선교단체를 설립했다. 이 선교회를 설립하고부터 교역자로서의 나의 사역의 폭이 넓어지고 더욱 활발해졌다. 마음속으로 이제부터는 나의 삶에서 멋과 낭만 그리고 보람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걸기도 했다. 그러나 지나고 보니 멋은 돈이 없어서, 낭만은 시간이 없어서 엄두도 내지 못했지만 보람은 있었다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양로병원을 방문하며 한국 어르신들을 위해 찬양도 하고 설교도 했다.  선교지를 정하지 못한 전도사들을 비롯하여 자원봉사 학생들을 모아 함께 봉사를 다녔다. 한편 신학교에서 요구하는 현장실습을 LA 다운타운에서 홈리스들을 위해 빵과 커피를 나누어 주면서 사역하는 목사님을 따라 다니며 현장을 경험했다.  나는 홈리스들을 보면서 이들을 돕는 사역이 바로 나의 천직이라는 생각에 머물렀다. 

 

홈리스를 위한 프로그램 참여

 

LA다운타운에서 인턴쉽(Internship) 같은 실습으로 7년을 보낸 후 홈리스들을 위한 독자적인 프로그램을 실천하기 시작했다. 그건 바로 홈리스들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제공하며 그들과 교우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바로 라면이라는 사실을 다운타운에서 사업을 하는 분들에게서 들었다.  한인들이 궁여지책으로 한 끼 때우는 라면을 그들은 너무도 부러워한다는 것이다. 그 때부터 준비를 시작했다. 라면 회사 이곳저곳에 전화를 걸었는데 그 중 가장 성심껏 대답을 해준 농심 신동엽 사장님과 인연을 맺게 되어 지금까지도 도움을 받고 있다. 그 다음 문제는 물을 끓이는 작업이었다. 길을 가다가 자그마한 삼륜차를 발견하고 그 차에 쓰여 있는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고 그곳을 찾아갔다.  사장이 이집트 사람이었는데 아주 친절하게 무엇을 하려느냐고 묻기에 홈리스들에게 라면을 끓여 주려고 한다니까 삼륜차는 운전면허증이 필요하다며 그냥 물을 끓일 것이라면 디자인만 알려주면 기본 가격만 받고, 만일 고장이 나면 언제까지나 무료로 수리를 해주겠노라 했다. 나는 간단하게 물통을 정착한 작은 수례를 주문했다. 그 수례를 선교회 전용 미니벤 뒤에 달고 다니며 라면을 끓여주는 일을 위해 준비했다.

 

2003년 1월 18일, 미국으로 갓 이민 와서 우리 선교회에서 잠시 머물고 있던 전도사 가족들과 함께 기도를 하고, LA 다운타운으로 가서 봉사를 시작했다. LA 다운타운 6가와 타운(Towne) 모퉁이에서 사역을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멋도 모르고 기웃거리기만 하던 사람들이 라면 맛을 보고는 입맛을 다시며 더 달라고 난리가 났을 정도였다.  하루에 150여 명 분을 준비했지만 며칠 지나니 그 분량으로는 어림도 없게 되었다. 그 뿐이 아니고 그 비용 또한 만만치 않았다.

그 때 마침 우리가 사는 동네에 공장이 달린 대형 도넛 가게가 생겼는데 바로 Krispy Kreme 회사 직영 가게였다. 나는 그 동안 봉사하면서 찍은 사진을 들고 도넛가게에 가서 매니저를 찾았다. 매니저는 아주 자그마한 체구인 흑인이었는데 어찌나 친절하던지... 사정을 말하니 단박에 내일 새벽부터 오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도넛을 담을 그릇과 영수증을 가지고 오면 된다고 했다.  다음날 새벽 동이 트기도 전에 커다란 플라스틱 그릇을 들고 갔다. 그런데 종업원이 흘깃흘깃 나를 쳐다보기에 들고 간 박스가 너무 커서 그런가 하고 속으로 조금 부끄러웠다. 그런데 아뿔싸.  우리가 수거할 도넛은 92다즌(dozen) 즉 1,140개나 되었다.  들고 간 용기로는 어림도 없었다. 비닐 쓰레기봉지에다 주어 담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와 즉시 다른 종이 상자에 옮겨 담았는데 너무 부드럽고 싱싱해서 서로 눌려 찌그러진 것이 많았지만, 그대로 들고 다운타운에 가니 난리 아닌 난리가 났다. 모두들 얼마나 좋아하던지... 그때부터 그 일을 하루도 빠짐없이 13년을 했다. 날마다 엘에이 다운타운 같은 장소에 우리 차가 도착하면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던 홈리스들이 환호성을 질러댔다. 그런 가운데서도 질서를 지켜주는 그들이 고맙고 신기하기만 했다. 그러나 한편 홈리스들의 특성은 누구나 마약을 복용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보고 있는 눈앞에서도 버젓이 주사를 맞고 있는 광경을 많이 보았다. 그들의 정신세계는 이미 파괴되어 부끄러움이나 해야 될 일과 하지 말아야 될 일을 구별 못하는 이들이 많다. 때론 벌거벗은 채로 춤을 추거나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배꼽아래를 가리키면서 보고 감상하란다. 그런가 하면 웃옷은 입었지만 밑에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로 치마를 위로 치켜 올리며 춤을 추는 모습을 보는 일도 흔히 볼 수 있다. 그야말로 기겁을 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신기한 것은 그들의 얼굴은 늘 웃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아침이었다. 그 때는 별로 사람들이 많지 않아서 봉사를 접으려는 때였다. 퉁퉁한 흑인 여성이 나에게 다가오더니 주르륵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닌가. 왜 우냐고 물으니 오늘은 왠지 눈물이 나고 슬프다는 것이다.  정말 마음이 짠했다. 차에 싣고 다니던 자켓을 어깨에 얹어주니 몇 번이고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이와 같은 일은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 아니다. 홈리스들 중에는 소리소리 지르며 저주를 퍼붓는 이들의 광경은 흔히 볼 수 있다. 분노조절이 안 되는 이들인데, 그들이 홈리스가 된 원인은 알 수 없으나 자신의 처지가 누구를 원망하고픈 게 아닌가 생각한다. 그야말로 우리는 볼 것 못 볼 것을 모두 보면서도 모른 채 견디며 봉사를 계속해 왔다. 그 결과인지는 몰라도 운전을 하고 다니다 보면 어디서 나왔는지 손을 흔들며 반가와 하는 홈리스들이 부지기수다. 다운타운에서는 마마를 연상 불러대며 교통이 복잡할 땐 우리의 길을 안내해 주기도 한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시정부는 길거리에서 음식을 나누어주는 일을 금했다. 

 

길거리 음식 나눔에서 시설로

 

길거리 무료급식이 금지된 후부터는 다운타운에 있는 시설 즉 엘에이미션(LA Mission), 유니온레스큐미션(Union Rescue Mission), 미드나잇비션(Midnight Mission), 나사렛교회(Nazareth Church) 등에 배달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직접 나누어 주던 일을 그들과 협력하여 시설에 머물고 있는 홈리스들에게 배분해 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각 시설에서는 길거리에 거주하는 모든 이들에게도 음식을 제공하게 되었다. 우리가 시설에 도넛을 배달해주면 그들에게도 나누어 주게 되니 오히려 다운타운 홈리스들에게 골고루 나누는 셈이 되었다. 그 뿐이 아니고 시설에서는 후드뱅크(Food Bank)도 겸하고 있어 그들에게 필요하지 않거나 쓰고 남은 식품류는 우리 선교회에 기부해 주게 되었다. 우리 선교회는 그런 식품들을 수거해서 다시 한인 저소득층 가정과 한인교회, 그리고 멕시코 선교지에까지 제공해 줄 수 있는 또 다른 즐거운 사역이 주어졌다. 

 

어떨 결에 만난 딸과 위탁가정

 

목사 안수를 받고 선교회를 설립하고, 이제는 무언가 안정이 되어가는 느낌이 들 무렵 신학교 동창인 친구 목사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14살 먹은 여자 아이를 돌볼 사람을 찾아달라는 것이었다. 그 때 나는 아무런 생각조차 하지 않고 내가 하면 어떠냐고 했더니 그 목사님 무조건 OK.  사실 그 해 8월 31일 한국방문을 준비하느라 항공권을 구매하고, 여권갱신 신청을 해놓은 상태로 여권을 찾아야 하는 날이었다. 그 와중에 친구 목사님은 그 아이를 데리고 나를 찾아왔다. 그 때 나는 선교방문으로 양로병원에 있었기에 그 옆 맥도날드에서 아이와 그 아이 친모와 함께 만나게 되었다. 그 아이는 아무 말도 없이 눈만 깜빡 거리고 앉아있고, 친모는 연신 눈물을 닦으며 고맙다고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냥 돌보기만 하든지 입양을 하든지 원하는 대로 하고, 약간의 비용은 보조해주겠노라고 했다.  나는 그저 딸이 생긴 것에만 흥분해서 아무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심지어 한국 여행을 위한 여권을 찾는 것조차 잊고 있었다. 그날 밤이 되어서야 겨우 생각이 났지만 이미 늦어 탑승 날짜를 바꾸고, 그 다음날에 떠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친구 딸 하나와 조카를 데리고 살았기에 그들에게 아이를 맡기고 한국엘 다녀왔다. 

 

그러나 미국에는 남의 아이를 기른다고 무조건 좋은 사람이 될 수는 없다.  미국 법은 남의 아이를 돌보려면 자격증이 있어야만 한다. 고아원 시설이 없는 미국에는 위탁가정(Foster Family Home)이라는 제도가 있다. 이 제도에 따라 자격증을 취득하고 법을 지키며 법대로 아이들을 키워야 한다. 이 자격증을 취득하려면 대학 수준의 교육을 6개월 이상 받아야 하고, 그들이 원하는 지시사항이 수없이 많다. 나는 그 아이 때문에 소정의 교육을 받고 자격증을 취득하여 양엄마(Foster Mother)가 되었다. 이 아이는 곱고 예쁘게 잘 자라주었다. 지금은 한국에서 결혼도 했고, 원어민 교사로 일하며 잘 살고 있다. 나는 이 딸로 인하여 많은 즐거움을 맛보았고, 적지 않은 보람을 가질 수 있었다.  이 딸 덕분에 가족/아동 보호소 (Family and Children Center)에 소문이 나서 다른 아이들을 돌보아달라는 부탁을 자주 받았다. 한 가정에 18살 미만에 아이들 6명을 돌볼 수 있다. 그 때부터 우리 선교회에는 여러 아이들이 북적이게 되었다. 아이들의 연령은 원하는 대로 고를 수 있어 나는 주로 9학년 이상인 청소년을 원했다.  10여 년 동안에 15여명의 아이들이 그들의 사춘기를 나와 함께 보냈다. 지금은 모든 일들이 추억이 되었지만 이런 아이들(Foster Children)은 나름대로 특징이 있다. 이런 아이들은 가정이 파괴된 이혼부모를 가진 경우, 가정폭력으로 부모와 함께 살 수 없거나 불의의 사고로 부모를 잃게 된 아이들이다. 그 아이들은 대부분 부모들로부터 버림을 받았다는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다.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들은 예민한 성격과 분노를 견디지 못하는 분노조절장애를 가진 아이들, 게다가 거식증을 가진 아이까지 각양각색이었다. 아이들의 생활태도는 학교 결석이나 거짓말은 기본이요, 미성년자들임에도 불구하고 담배나 술, 마약도 남몰래 살짝 손에 대기도 하여 자잘한 사건 사고들이 끝없이 생기곤 했다. 그 아이들과 함께 하면서 웃지 못 할 에피소드(episode)도 적지 않다. 

 

아이들과 겪었던 에피소드

 

미국에는 미성년자들을 위해 부모나 보호자가 등교와 하교를 책임져야 한다. 아침마다 전쟁하듯이 깨워서 학교 준비를 마치면 차로 학교까지 데려다 주어야 한다. 허겁지겁 학교 문 앞까지 데려다 주고 집에 도착하면 학교에서 전화가 온다. 댁의 아이가 결석을 했노라고. 더욱 기가 막히는 것은 하교 시간에 아이들을 데리러 가면 틀림없이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곤 했다. 어느 날 학교에서 공문이 왔다. 댁의 학생의 결석이 너무 많아 학부모를 호출한다고. 마음속으로 부끄럽기도 하고 걱정근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무거운 마음으로 학교에 도착하니 강당으로 모이라는 안내가 있어 그곳으로 갔다. 그 안에는 학부모들이 가득 차 있었다. 부모가 있는 아이들도 그러한데 우리 아이들이야 오죽하랴. 그런가 하면 학교엘 가면 언제든지 학교 담을 넘어 땡땡이치는 녀석들을 항상 볼 수 있다. 우리 아이들이 엘에이 고등학교(LA High School)에 4명이나 다녔다. 하도 불려 다니다 보니 학부모회 부회장까지 맡는 웃지 못 할 일도 있었다. 우리 아이들 중에 공부를 잘 하여 학부모인 내가 격려금까지 받는 영광도 있었다. 학교에서는 우리 아이가 졸업생이기에 그 장학금을 학부모인 나에게 준다고 했다. 우리 아이에게 너무 고맙고, 학교에 정말 고마웠다. 그 일이 있고 몇 년이 지난 후에 우리 홈리스교회에서 음악회를 열고 LA High School 서류 미비자 가정의 자녀 12명에게 장학금을 2번이나 수여하여 그 빚을 갚았다. 

 

어느 날 저녁이었다. 하루가 힘들었던 나는 이른 저녁 깊은 잠에 빠져들고 있었다. 아이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 눈을 뜨고 보니 꼬맹이 녀석이 아프다고 난리다. 그 아이를 드려다 보니 침대에서 대굴대굴 구르며 배가 아프단다. 조금은 망막했다. 급한 것 같아 911에 전화를 했다. 무슨 일이냐고 묻기에 아이가 갑자기 아프다고 했다. 주소를 알려주고 잠시 있으니 동네를 뒤집듯 사이렌 고리가 요란하게 들려 밖을 내다보니 집체만한 아니 대형 컨테이너 트럭만한 어마어마한 소방차가 오고 있었다. 차가 멈추고 장대 같은 장정 5명이 내리더니 내 주위를 에워싸고 질문공세를 퍼부었다. 아이가 어디 있느냐고, 보자고 하기에 꼬맹이를 데리고 나갔더니 이 정도면 병원엘 데리고 가야지 왜 전화를 했느냐고 나무라는 것이다. 난 위급하다고 생각했다. 급성맹장염 같다고 했더니 그래도 병원엘 가야한다고 계속 다그치는 것이었다. 아마도 네 아들이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니냐고. 난 이 아이는 양아들(Foster Son)이라고 했다. 그 때 4명의 장정이 슬슬 뒤로 물러서고 한 사람만이 계속 말을 이어가고 있을 때, 구급차가 도착했다. 구급차에 아이를 태우고 나도 탔다. 또 같은 질문을 하기 시작하여 거의 끝날 무렵 병원에 도착했다. 구급실로 들어가 침대에 눕히고 30분 정도 기다리게 하더니, 체온 재고 한 시간, 혈압재고 한 시간, 피검사 한 시간 하는 동안 아이는 침대에서 쿨쿨 자고 있었다. 앉을 곳도 마땅치 않은 병실에서 온 밤을 새우고 새벽 4시쯤 의사가 나타나더니 아이의 배를 이곳저곳 꾹꾹 눌러보더니 그저 변비 때문이라 했다.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던지...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와 나는 일주일 간 몸살을 앓았지만 아이는 멀쩡했다.

 

딸아이의 생일이었다. 라디오 코리아에서 특별히 기념할 만한 일이 있을 때 사연을 적어 보내면 꽃바구니를 배달해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아이의 사연을 적어 보냈는데 채택이 되어 라디오로 방송을 하면서 꽃바구니를 배달하게 되었다. 한인사회에서는 유명한 여자 아나운서였는데 사연을 읽으면서 어찌나 우는지 나도 울고, 딸아이도 울고, 삼자통화를 하면서 눈물바다를 만들었다. 그 때 우리 아이는 영재학원에서 보조교사를 하고 있을 때였다. 저녁에 꽃바구니와 선물 보따리를 한 아름 안고 들어와서 하는 말이 “이모 때문에 하루 종일 울었어. 고마워.” 아이들과 한 가족이 되어 사는 동안 몇 명의 아이들이 들어오고 나가고 했다. 새로 아이가 들어오면 가족사진을 찍었고, 생일이 되면 식당에 가서 생일축하도 해주며 아이들의 잃어버린 생일을 찾아주곤 했다.

 

어느 날 저녁에 아이들 모두가 옹기종기 모여 앉아 왁자지껄하게 떠들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하여 살짝 엿들어보니, 글쎄 아빠들의 흉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누구 아빠가 더 나쁜 아빠인지 성토를 하고 있던 셈이다. 그 아이들의 마음속에는 가정의 파탄이 아빠의 잘못이라는 것이다. 난 한 아이의 말을 모두 엿듣게 되었는데 자기는 아빠가 5명이고 엄마도 5명이나 된다고 한다. 그러기에 자기의 가족 구성이 매우 복잡하다는 설명이다. 친아빠, 길러준 아빠, 의붓 아빠(step father) 2명과 길러준 엄마의 새남편이 모두 아빠라고 불러야 하는 게 아니냐며 그게 모두 친아빠 때문이란다. 엄마도 역시 아빠와 이혼하고 재혼을 하였으니 엄마 역시 5명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real brother and sister, help brother and sister, step brother and sister이 존재한다고 설명한다. 영어공부 할 때 잘 이해가 가지 않던 가족 구성원의 실체를 실제로 체험하게 되었다. 그런데 더욱 신기한 것은 그 형제자매들이 모두 화목하게 잘 지낸다는 것이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마음이 짠하고 가엾다는 생각을 하면서, 바로 이 아이들이 내가 품어주어야 하는 나의 아들들과 딸들이라는 애착이 더욱 커지기도 했다.    

 

어느 날, 저녁 식사를 하고 잠시 후 웅성웅성하는 소리가 나더니 비명소리가 들렸다.  아이들의 방을 들여다보니 남자 녀석 둘이 결투를 하고 있었다. 말려보려고 시도해 보았지만, 싸움은 계속되었다. 분노조절이 잘 안 되는 아이들의 싸움은 무서울 정도다. 거울을 주먹으로 깨고, 손에는 피가 흐르는데 벽을 쳐서 구멍을 내고 난장판이었다. 결국 911에 전화를 할 수 밖에 없었다. 10대 양아들(Foster Sons)들이 싸움을 하고 있는데 제어가 불가능해 보인다. 도와달라고 했다. 잠시 후 요란한 사이렌 소리와 함께 온 동네가 불난 것처럼 난리가 났다. 문밖으로 나가보니 집 앞 골목에 소방차 2대와 미국인 경찰차 2대 그리고 한국인 경찰차 한 대가 달려 와서 눈부신 불빛과 함께 웅성거리고 있었다. 미국에서는 10대들의 사고를 아주 큰 사건으로 여긴다. 더구나 양아들들이 싸운다고 하니 대형사고가 일어날 것을 우려하여 온 동네가 난리가 났던 것이다. 나를 본 경찰이 싸우는 아이들이 어디 있느냐고 묻기에 방에서 그 아이들을 데리고 나갔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사이렌 소리를 들은 아이들이 싸움을 멈추고 화해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유인 즉 전과자가 되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다나. 한국 경찰이 나서더니 그 아이들을 잔디밭에 무릎을 꿇게 하고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공손히 대답하고 다시는 싸우지 않겠노라는 약속을 단단히 했다. 그리곤 경찰차도 소방차도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 슬그머니 되돌아갔다.

 

어느 날 이웃 아저씨가 나를 보자고 한다. 창고를 가리키면서 아이들이 저 곳에서 매일 저녁 담배를 피우는데 불을 낼까봐 두렵다고 했다. 믿어지지가 않아 그 구석을 살펴보니 담배꽁초가 수북하게 쌓여 있는 것이 아닌가. 아차 하는 생각이 들며 두렵기 까지 했다. 그 뿐이 아니다. 아이들이 지붕위에 올라가서 담배를 피우고 담배꽁초를 빗물받이에 던져 또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그 때는 나도 너무 화가 나서 소리소리 지르며 나무랐지만 별일 아니라는 듯 슬그머니 제방으로 각각 들어가 버렸다. 이때는 나하나 선교사가 함께 일을 하던 때였다. 보다 못한 나 선교사가 그들을 불러 모아 타이르니 그들의 하는 말이 “이모, 이모네 아이들은 모두 우량품이잖아. 우리들은 불량품이야. 더 무엇을 바라는데? 그냥 이해해 주세요.” 더 이상 할 말을 잊고 그들을 감싸주기로 했다.

 

제대로 된 살림의 경험이 없는 나는 음식을 만드는 일이 큰일이었다. 할 줄 아는 음식이라곤 김치찌개, 된장찌개, 부대찌개, 닭도리탕 정도인데 그것도 국적과 전통을 무시한 내 방식의 요리였지만 우리 아이들은 이모가 만든 음식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며 잘들 먹어 주어 얼마나 고맙고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그런가 하면 애를 낳아보지도 않은 사람이 어찌 남의 아이들을 기르느냐며 무모한 것이냐, 용감한 것이냐 비아냥거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험한 순간까지도 지혜롭게 슬기롭게 무사히 잘 넘기고 지나갔다. 혹 아이들이 왕따나 당하지 않을까 염려했지만, 저희들끼리 ‘언니, 오빠, 동생’ 하면서 잘 어울리기도 하고, 서로 보호해 주기도 하여 천만다행이었다.

 

불행한 아이들의 착한 이모

 

그 아이들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은 수없이 많았다.  부모의 보살핌을 제대로 받지 못한 덕분에 치아가 고르지 않은 아이들이 많았다. 그 중 4명의 아이들에게 교정치과의사 권중건(17회) 동문의 도움을 받아 엉클어진 이들을 예쁘게 교정해주었다. 그리고 태권도나 드럼 같은 것을 따로 가르치기도 했다. 그 덕분의 아주 즐겁고 행복해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나도 많이 즐겁고 행복했다. 그들을 보면서 몹시 대견하기도 했다.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힘들고 어려웠던 때보다 즐겁고 행복했던 기억이 더욱 새롭고 그립다. 모두 장성하여 결혼도 했고, 아이도 낳고, 가정을 꾸려 잘들 살고 있다. 그 중에는 커다란 인터넷사업을 하는 사업가도 있어 시시때때로 티셔츠나 모자, 가방 등을 기부해 주어 선교회에 도움을 주고 있다. 공무원이 된 아들 녀석 하나는 가끔 순두부 백반을 사들고 와서 함께 저녁식사를 하기도 한다.  원어민 교사로 일하는 딸을 비롯하여 아직도 학생인 녀석들과 군인이 된 녀석들까지 뿔뿔이 흩어져 잘들 살고 있지만, 가끔 전화로 소식을 듣는다. 아이들과 함께한 삶은 한 아이가 평균 4년 정도였다. 그 덕분에 사회적으로 불행한 아이들을 잘 돌보는 착한 이모로 유명인이 되었다. 아이들을 위해 좋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모임이나 그들을 위한 어떤 혜택도 놓치지 않으려 불철주야 열심히 찾아 다녔다. 교회에서 주는 장학금과 사회에서 주는 장학금도 결사적으로 찾아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도록 했다. 장학금이란 그들에게는 꿈도 꾸어보지 못했던 일이라 공부를 잘해서가 아니라 가정 형편상으로 격려의 장학금이었지만, 아이들에게는 커다란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그들과 함께 하면서 라디오 같은 언론기관에서 실시하는 글쓰기에도 열심히 사연을 보냈다. 운 좋게도 보낼 때마다 상을 받았는데 보통 금상이나 은상은 물론 대상을 두 번이나 받았다. 한번은 라디오 서울과 아시아나 항공이 함께 실시한 ‘아름다운 사람들의 아름다운 이야기’라는 글의 공모가 있었는데, 아이들과 함께 사는 이야기를 써서 보냈다. 그것이 대상을 받게 되었다. 멋진 상패와 함께 부상으로는 항공권 비즈니스(Business)석 2매와 일반인석 1매를 받았다. 그러나 지금도 아깝고 아쉬운 것은 그 항공권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턱없이 싼 값으로 현금과 바꾸어 밀린 방세를 지불할 수밖에 없었다. 또 유명한 라디오 코리아에서도 대상을 받았다. 그 때마다 받은 상패와 상품들은 지금도 사용하고 있다. 김치 냉장고, 고급 보석장, 소금 전등과 같은 생활용품이나 장식품 그리고 예쁜 꽃다발 선물도 있었다.  유명해지려고 열심히 일을 했지만, 열심히 일을 하다 보니 유명해지기도 했다.

     

동생과 함께하는 선교회

 

그 후 아이들과 대식구를 거느리고 살던 나는 조금은 버겁기도 하고 친 가족이 그립기도 했다. 그 때는 이미 동생들도 정년퇴직을 할 무렵이었다.  동생들 중에 오래전에 이미 시어머니를 통해 비자 신청을 해두었던 나하나 교수에게 타진을 해서 2007년에 가족이민을 오게 했다.  나하나 교수는 한국에서 유명한 유아교육과 교수로 동화나 유치원 교사 교과서를 비롯한 책들을 100여권이나 집필한 재원이다. 제부인 18회 배규석 동문은 14회 배규태 동문의 동생이다.  나하나 교수가 온 후로는 선교회가 정말 활발하게 활동을 하게 되었다. 미주에 KACH(미주노숙인한인선교단체협의회, 회장: 정득실 목사)라는 단체가 있다. 이 단체에서 나하나 교수를 정식 선교사로 파송했다. 지금은 나 선교사의 활동이 너무도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나는 아이들을 돌보면서 한인 사회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해졌다. 평판이 좋아지는 만큼 유명해지고 수입이 비례하는 것이 확실했다. 무엇보다 아이들의 미래와 교육을 중요시 여기는 한인사회로부터 집중적인 관심을 받게 되어 일간신문 전면기사로 여러 번 소개되기도 했다. 이렇게 유명해지다 보니 위탁가정의 실정을 모르는 한인가정에서 한심한 부탁이 자주 들어왔다. 마약하는 자식놈 더 이상 다룰 수 없으니 맡아 키워달라는 것이다. 위탁가정은 아무나 돌 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더욱 기가 막힌 것은 한국에서까지 국제전화를 해서 아이들을 맡아 달라는 부탁이 오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그런 아이들을 돌보아 준다면 경제적인 도움은 크게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마약에 물든 아이들은 전문인이 아니면 함부로 상대할 수조차 없다는 것을 모르는 듯하다. 미국에서의 일이다. 마약에 중독이 되었던 어떤 청년이 개과천선하여 목사가 되어서 마약에 물든 아이들을 교육시킨답시고 산속 깊은 수양관으로 모아놓고 마약파티를 했다는 기가 막힌 사건이 있었다. 아연실색을 안 할 수가 없다. 아무튼 좋게 소문난 우리 가정은 교계와 사회단체들도 경제적인 도움을 적지 않게 주었다. 나는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최우선으로 하고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물속이든 불속이든 뛰어들 각오로 열심을 다했다. 아이들이 고등학생이 되니 하나 둘씩 알바(part time job)를 갖기 시작했다.  그들이 버는 돈은 모두 그들이 사용하도록 했고, 그들의 잘못의 모든 책임은 내가 져야했지만, 다행히도 별 어려움이 없었다.

어느 해인가 윌셔연합감리교회에서 우리 아이들을 위해 5K 마라톤대회를 열고 이익금을 우리에게 모두 주었다.  3만불이 넘는 금액이었다. 나는 그 때 아이들을 위해 좀 더 편하고 자유롭게 해주려고 2층집을 구입했다. 그런데 그 때부터 선교비가 끊어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경제파동’이라는 사회적 현상이 모든 분야에서 많은 사람들의 고통과 시련을 안겨주는 사건이었다. 그 뿐이 아니라 10여년을 아이들과 함께 지내는 동안 어느 듯 아이들이 커서 독립을 해야 될 나이들이 되었다. 만 18세가 되면 성인으로 간주되어 정부에서 제공하는 보조금이 끊기게 된다. 다행인 것은 어려서부터 알바를 해서인지 모두 직업을 갖게 되어 하나둘씩 자립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기거할 숙소를 마련하는 것은 쉽지 않아 그들이 숙소를 구할 때까지는 선교회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그들이 모두 독립을 할 때까지 1-2년이 더 결렸다. 설상가상으로 아이들을 위한 보조금이 끊기고 사회적인 도움도 줄어드는 현상으로 어려움은 가중되었다. 아이들은 차츰 하나둘씩 자립하여 집을 떠나게 되었지만, 주택 할부금(Payment)을 지불할 수가 없어 그 집을 포기하고 맨 손으로 쫓겨나게 되었다.  강제퇴거를 당한 것이다.

 

중고물품가게를 열다   

 

그 때 어느 권사님이 여유로 산 집이 있으니 2년은 무료로 살고, 2년 후부터 집세를 싸게 내고 살도록 해주었다. 그 때는 이미 아이들이 모두 자립을 하고 떠난 후였다. 우선 그 집으로 이사를 하고 궁여지책으로, 그리고 자립을 목적으로 이사들을 설득하여 중고물품가게를 열고, 언론기관을 총동원하여 한인사회에 널리 알리고 거창하게 비즈니스를 시작하였다. 처음 몇 달은 꽤 괜찮았다. 언제부터인가 그 근처의 골목마다 벼룩시장이 몰려들었다. 그로 인해 손님이 뚝 끊기고 인권비와 월세가 부족해지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문을 닫고야 마는 용두사미 격이 되고 말았다. 2년간은 집세를 내지 않으니 그럭저럭 살 수 있었고, 중고물품 가게 수입도 괜찮은 듯 했다. 2년이 지나 살림집 월세를 내야 하는데 도무지 월세는 고사하고 공과금 정도도 해결하기가 힘들어졌다. 집주인 권사님은 중고물품가게 영업이 잘 되지 않는 사정을 알지 못했다. 가게를 하고 있으면서 저렴하게 청구하는 월세조차 지불할 수없는 사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인정사정없이 강제퇴거명령을 내렸다. 나는 주택을 2년간이나 무료로 사용한 혜택의 고마움을 전할 기회조차 잃고 딱한 처지가 되어 변명 한번 제대로 못하고 뻔뻔한 인간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 은혜는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바로 그 무렵에 중고물품 가게마저 강제퇴거를 당하여 갈 곳이 없어 그야말로 홈리스 신세가 되었다. 그 동안 홈리스들의 숙소를 마련해주어야 할 때 가끔 사용해본 쪽방을 얻어 살며 몇 달을 버티고, 저소득층 아파트를 구해서 살면서 또 다른 6.25를 경험했다. 그 후 허름한 건물(house)을 얻어 저렴한 월세를 내며 지금까지 살고 있다.    

 

가게 문을 닫으며 팔던 중고물품들을 잠시 창고(Public Storage)에 맡겼던 터라 저소득층 아파트에서 살면서 아주 싼 값으로 자그마한 가게를 또 얻었다. 여러 동네를 헤매던 끝에 우리가 살고 있는 아파트 근처인 미국 흑인교회에 속한 허름한 가게자리가 오랫동안 비어 있었던 건물을 발견한 것이었다. 그 가게를 얻어 수리를 하고 다시 중고물품 가게를 열었다. 수입이 충분하지는 않았지만, 그런대로 2년 정도를 버틸 수 있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나이를 먹으니 점점 체력이 달리기 시작하여 가게를 지키면서 선교회 일을 함께 하기는 너무 힘이 들었다.  결국 가게를 포기하는 수밖에 없어 모든 물건들은 멕시코와 필리핀을 비롯하여 캄보디아 등 아프리카 선교사들을 통해 보내면서 마지막까지 선교에 도움을 주었다고 스스로 위로하며 중고물품 가게를 깔끔하게 정리했다. 

 

홈리스 교회의 문을 열다

 

가게를 하면서도, 아이들을 돌보면서도 도넛 수거와 분배는 계속했다. 그러는 동안 홈리스들에게는 그들만을 위한 교회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2007년 2월에 허름한 창고를 얻어 수리를 하고 그들만을 위한 교회의 문을 열었다. 마침 동생인 나하나 교수와 제부가 와서 교회를 시작하는 일에 커다란 힘이 되었다.  첫 주에 1명, 둘째 주에 2명 셋째 주에 8명이나 출석을 하게 되었다.  그 때는 길거리에 나가 지나가는 홈리스들을 붙들고 먹을 것을 주겠노라 교회 안으로 데리고 왔는데 얼마 되지 않아 소문이 나더니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고물상에 가서 중고 피아노를 외상으로 들여놓고 어느 장로님에게 자랑을 했더니 전도사 시절 시무하던 교회 장로님께서 전해 듣고 전액을 지불해주셨다. 예배를 인도하면서 덜덜 떨리는 목소리지만 너무 감격스러웠다. 설교문을 밤새 작성해서 교인들 앞에서 읽는 수준이어서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나 자신도 몰라 때론 두 번씩 읽기도 하고, 빼먹고 읽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량한 나의 영어 설교에 감동하고, 크게 웃기도 하고, 때론 눈물을 닦는 교인들이 너무나 고맙고 감사했다. 그들 역시 지금까지 사람취급을 받아보지 못했지만 The Well Mission Church에 와서 이런 후한 대접을 받으니 너무 행복하다며 눈물을 흘리는 이들이 많았다. 뿐만 아니라 오직 우리 교회라는 자부심도 대단하다. 우리 홈리스 교회는 배고픈 이들이 모이는 곳이다. 모두가 양식(meal)을 찾아 방황하는 이들이 모인다. 우리 교회는 이들의 배고픔을 채워주려 무던히 애를 쓴다. 우리 교회에서 이들이 필요(needy)로 하는 것들, 베풀어 주고 채워주어야 하는 것이 육신의 양식 (Physical Meal)만이 아니다. 영의 양식 (Spiritual Meal)과 더불어 감성의 양식 (Emotional Meal), 그리고 지성의 양식 (Intellectual Meal)까지도 챙겨주어야 한다. 이들의 갈급함을 보통 사람들은 이해하기가 어렵다. 이들이 바로 외롭고 소외된 계층에서 가장 취약한 무리가 아니던가.

 

어느 듯 3년여 세월이 흘러 조그만 교회당에 홈리스들로 가득 차고, 그들이 끌고 온 손수레(Cart)들로 주차장을 가득 채우게 되었다. 그 상황을 지켜보던 건물 주인이 왠지 어떤 위협을 느끼고 나가 달라고 명하더니 강제퇴거 명령을 내리겠다는 으름장을 놓기 시작했다.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마침 나의 목사 안수식을 거행했던 한인교회에 빈 건물이 있어 들어갈 수 있었는데 새로 부임한 목사가 홈리스들에게 겁을 먹고 또 강제퇴거를 명하여 1년 만에 2번째 강제퇴거를 당하고 말았다.  다행히 흑인교회당을 얻게 되어 교회가 잘 부흥해 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 교회 역시 새로 부임한 목사가 우리 교회와 연합하고 나에게 부목이 되라는 명령조의 제의를 해왔다. 우리 교회를 은근히 시기하며 질투하는 눈치였다.  단칼에 거절했다. 그런데 어느 토요일 예배를 드리러 갔더니 교회당 문마다 커다란 지물쇠로 굳게 잠가버리고 경비까지 세워놓고 강제로 내쫓았다. 그 후 갈 곳이 없던 우리 교회는 2년간이나 교회당 뒷골목 길가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러던 중 골동품 같은 아주 오래된 자그마한 교회당을 발견하고 그 교회를 방문하여 사정을 말하니 쾌히 승낙하는 듯했다. 그러나 만만치는 않아 2번의 임원회를 거치고 2개월이 지난 후에야 겨우 교회당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 후부터 몇몇 한인교회에서도 협력해 주어 매주 교회 주차장은 맛있는 음식 냄새로 온 동네 사람들의 코를 즐겁게 자극하면서 지금까지도 그 교회당을 잘 사용하고 있다. 교단이 미국성공회인데 담당 교역자가 여성이다. 이 분은 홈리스들에게 많은 관심이 있어 그들을 돕고 싶다며 우리 사역에 많은 호의를 가지고 있어 너무도 편안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사역을 하고 있다.

 

홈리스 사역을 위한 특별기획

 

살림집에서 여러 번 강제퇴거를 당하고, 세를 들어 사용하던 교회당에서도, 중고물품 가게에서까지 쫓겨 다니다보니 9번이나 이사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넛을 수거해서 홈리스들에게 나누어주는 일은 빠짐없이 지속적으로 계속했다. 우리가 가야하는 길을 멈추지 않고 뚜벅뚜벅 열심히 걸어갔지만, 아이들 때문에 유명하던 미담도, 한인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화려한 에피소드도, 세월이 흐르니 거의 잊혀 갈 무렵, 또 다른 길(기획)을 찾게 되었다. 이제는 남들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굉장한 기획을 하게 된 것이다. 이런 기획은 주류사회 부유한 상류층에서나 생각할 수 있는 수준의 행사다. 바로 궁궐과 같이 웅장하고 화려한 음악당에서 거대한 모금음악회를 열고자 하는 것이다. 사실 해마다 2-3번씩 ‘홈리스들과 함께 찬양예배’를 성가대나 합창단 그리고 음악가들을 초청해서 행사를 했었다. 이제는 그 정도로는 승산이 없다고 여겨 국내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유명한 디즈니 음악당에서 모금음악회를 기획하고 실천에 옮기는 일을 추진하기로 했다. 1년에 준비과정을 거쳐 드디어 2016년 선교회 창립 17주년 기념으로 디즈니음악당(The Music Center’s Wart Disney Concert Hall)에서 역사적인 음악회를 개최했다. 이 음악회로 많은 사람들의 놀라움이 대단했다. 우리는 한번 열기도 어렵다는 그 음악회를 4년간이나 연속으로 진행했다. 그로인해 크게 유명해지는 데 한 몫을 단단히 했다. 역시 고기는 큰물에서 놀아야 한다는 속담이 맞는 말이다.  연주회 횟수를 거듭할수록 수준이 높아지고, 특징이 다른, 호화롭고, 황홀하고, 멋진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말로도 글로도 표현할 수가 없다.

  

첫해에 가진 음악회의 테마(Theme)는 ‘How Beautiful’ 이라는 명제로 성대하게 잘 치렀다. 홈리스 수준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비웃음을 뒤로 하고, 다음 음악회를 준비했다. 두 번째 음악회는 한번 가진 경험을 토대로 좀 더 짜임새 있게 기획하고 심혈을 기울였다. 테마는 “Give Thanks’였다. 두 번째 음악회는 정말 잊을 수 없는 특별한 추억거리가 되는 행사였다. 모교의 동창합창단을 초청했던 것이다.  48여명의 남녀 합창단(지휘: 권혁준, 반주: 고은희)과 미주선농합창단이 연합하여 ‘꿈꾸는 세상 가요 메들리’와 ‘고향의 노래’를 연주해주었다. 특히 지휘자인 권혁준 동문의 바리톤 독창과 반주자인 고은희 소프라노의 독창, 그리고 ‘서울사대부고한미연합합창단’이라는 길고 긴 이름을 가진 동문합창으로 미주동문들은 물론 듣는 청중들에게 진한 감동을 선사했다. 3번째 음악회부터는 선교회의 새로운 목표를 정하고 실천하고자했다. 그것은 바로 홈리스 학생들을 돕고자 하는 것이다. 미국에는 지상천국에 걸맞지 않게 홈리스들이 무척이나 많다. 그 중에도 학생 신분의 홈리스들이 많은데 5명 중 1명이 홈리스라는 통계를 언론에서 여러 번 보도했다. 물론 그 중에는 가난한 나라에서 유학 온 학생들이 홈리스로 전락하여 낡은 자동차에서 생활하거나 길거리에서 생활하는 비참한 학생들도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아무튼 홈리스 학생들을 위한 무료기숙사를 운영해 보고자 기획을 하고 음악회 모금목표를 세웠다. 음악회 테마는 ‘Fish Tank’였다. 그들을 위한 주거지 마련을 위함이다. 이 음악회에서 또 한 가지 특이한 사항은 한국은 물론 미국에서도 유명한 가수 박정현이 찬조출연을 해주었다는 것이다. 그 다음 4번째의 음악회는 선교회 창립 20주년으로 더욱 성대하게 준비했는데 테마는 ‘Fishers of Men’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음악당을 꽉 메우고 코리아 판타지(Korea Fantasy)로 피날레(Finale)를 장식했는데 감격스럽게도 관객들의 떼창으로 애국가를 불러 많은 이들의 눈가를 적시기도 했다. 그러나 2회에 걸쳐 성황을 이룬 모금음악회임에도 목표한 모금액이 주거지(건물)를 마련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여 염치없게도 어디에선가 나타날 독지가나 후원자를 기다리며 대신 7명의 저소득층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수여할 수밖에 없었다. 

 

다섯 번째인 2020년 음악회는 지난해에 이루지 못한 목표액을 채워보고자 더욱 성의와 열심을 다해 기획하며 준비하고 있었다.  테마를 ‘Marching of Fishers of Men’으로 정하고 더 높은 수준의 음악으로 더 많은 관객을 동원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갑자기 불어 닥친 코로나 팬데믹(Co-19 Pandemic)으로 인하여 어쩔 수 없이 음악회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음악당이 임시 폐쇄된 것이다. 2020년에 이어 2021년에도 연거푸 팬데믹이 우리의 음악회를 방해했다. 그러나 그 계획을 절대 포기할 수는 없다.  희망컨대 2022년에는 반드시 성대한 음악회를 열어 그 동안의 빈자리를 메꾸어 줄 것으로 희망한다. 남들은 우리에게 황당무계한 일을 꾸민다고 흉을 보기도 하지만 하나님 안에서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믿음으로 밀어붙이곤 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이다.

 

박사 학위를 받다

 

한편, 음악회를 열다보니 유명인들은 모두가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었다. 나에게도 학위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할 즈음 마침 서부에서는 명문 중에 명문인 클레어몬트신학대학원(Claremont School of Theology)에서 학생모집 광고가 이메일(E-mail)로 와있었다. 나는 우물쭈물하지 않았다. 즉시 입학허가 과정을 밟기 시작했다. 전에는 서면으로 입학원서와 함께 졸업증명서와 성적증명서만 제출하면 되었는데 입학전형을 모두 인터넷으로만 할 수 있었다.  졸업증명서는 물론 성적증명서와 추천서까지 인터넷으로 처리되었는데 어느 시점에서 멈추어버린 것이다. 입학사정에서 나의 대학교 졸업이 문제가 제기된 것 같았다.  학교로 직접 방문해서 담당교수를 만났다. 샌프란시스코신학대학원(SFTS/SC)의 입학과 졸업과정에서 있었던 특수상황을 설명한 후에 입학이 허락되었다. 입학허가가 떨어지니 등록금 걱정이 생겼다. 그 때부터 장학금을 위해 신문과 인터넷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느 날 지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등록금 청구서를 가지고 만나자고 했다. 그 때 가족 장학금이라며 한 학기 등록금 전액을 전해 받았다. 그 다음은 남가주서울사대부고동창 장학금을 비롯하여 사회에서 주는 장학금과 기업에서 주는 장학금 등의 혜택을 받은 것으로 등록금은 완전히 해결되었다.  석사 과정의 성적이 매우 우수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이었던가. 아무튼 SFTS/SC에서 교역학 석사(M.Div) 학위를 받은 지 20년째 되는 해였다. 

 

첫 강의를 듣던 날은 역시 감개무량했다. 그런데 이중언어인 강의임에도 이해하는 데 무척 힘이 들었다.  20여 년 간 책 한 권을 제대로 못 읽고, 손발만을 움직이는 단순노동자의 바쁜 세월을 보냈다.  학문적인 단어나 문자어, 문장에 익숙할 리가 없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젊고 똑똑하고 유식하게 보여 슬그머니 겁에 질리기도 했다. 나는 부끄러워도 자존심이 상해도 그들에게 도움을 받아 겨우 그들의 뒤를 따라 이해를 해나갔다. 그렇게 어설프게 이론 강의는 일 년 반 만에 마무리가 되었다.  문제는 논문이었다.  문자언어의 장애 수준인 내가 낯설기만 한 논문을 쓴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작업이 아니었다. 그 때부터 고난의 길이었다. 같은 책을 읽고 또 읽고, 인터넷을 뒤지고 또 뒤지고, 신문을 읽고 또 읽고... 1년 반 동안 젊은 담당 교수를 얼마나 괴롭혔는지 모른다. 수많은 날들, 밤잠을 설치며 오랜 시간 피나는 노력을 했다. 그 결과 논문이 완성되어 겨우 통과하게 되었다.  논문의 개요는 홈리스들을 위한 그들에 관한 연구였다.

 

드디어 졸업식을 거행하던 2019년 5월 19일 졸업생으로 박사 가운을 입고 박사모를 쓰고 학위식에 참여했다. 내가 박사학위를 받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한인사회 언론마다 나의 박사학위 사건이 보도되고, 구글(Google) 인터넷상에는 클레어몬트(Claremont School of Theology) 졸업식 장면에 박사 가운에 박사모를 쓴 나의 모습이 여러 화면에 나와 있어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제 학위를 이용하여 전격적으로 무엇인가 해보려 할 무렵 코로나 팬데믹이 들이닥쳤다. 앞이 캄캄했다. 그렇다고 일을 게을리 할 수는 없다. 사역은 멈추지 않았다.  사회적으로 금지사항이 많았지만 일용할 양식을 담당하는 우리에게는 그런 재제는 없었다,  때론 자동차 휘발유 값을 걱정해야 할 때도 없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적은 있었다. 어디선가 누군가는 선교회를 기억하고 선교비를 보내주어 오히려 지난날보다 편안하고 넉넉하게 지내며 어둡고 긴 터널을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지금은 백신을 맞고 방탄조끼를 입은 기분으로 두려움 없이 활동하고 있다.  팬데믹이 시작된 2주간은 너무도 무섭고 긴장이 되어 오금이 저렸다.  더욱이 우리 사역은 엘에이 다운타운을 하루도 빠짐없이 오고 가야 한다. 더럽고 지저분한 다운타운을 코로나 바이러스 집산지 같은 느낌이지만, 날마다 오가며 두려움에 떨었다.

접을 수 없는 홈리스 사역

 

나는 지금도 현역이다. 교회 담임목사로, 선교회의 대표로 일을 하고 있다. 어려운 과정을 거쳐 겨우 박사가 된 나는 음악회와 더불어 사역의 질을 높여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제는 홈리스들을 위해 물고기를 주는 것보다 물고기를 잡는 방법을 가르치는 수준의 사역이 필요함을 절감했다. 그러기에 길가에 서성이는 홈리스들은 물론 학생신분인 홈리스들을 따로 챙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바로 홈리스 학생들을 위한 무료기숙사를 운영하는 것이다. 누군가는 한 사람의 똑똑한 지도자가 만 명을 먹여 살린다고 하지 않던가? 만 명을 먹여 살릴 수 있는 똑똑한 사람을 길러내고 싶다. 아니 길러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좀 더 유명해져야 한다. 유명해야 독지가나 후원자를 만나기가 수월하다. 박사가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팬데믹은 선교회가 가는 길을 막아 버렸다. 어서 빨리 장애물이 치워지기를 기대해 본다.  교회문도 다시 열고, 모금음악회도 다시 열어서, 홈리스 학생들을 위한 무료기숙사를 반드시 마련해야만 한다. 이 사역은 너무도 필요하고, 꼭 달성해야하는 일이며, 나의 마지막 사역이 될지도 모른다. 이 사역을 통해 똑똑한 지도자를 배출해 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해 본다.

 

한편, 혹 이글이 채택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조금이라도 유명해지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실낱같은 희망을 걸어본다. 그러나 내 희망 사항은 결정권이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처분만 기다릴 수밖에 없는 나의 처지가 부끄럽기도 하고, 자존심이 몹시 상한다. 내가 유명해져야 하는 이유까지도 남의 호의를 기다려야만 한다는 것이 얼마나 염치없는 일인가. 매우 부끄럽고 괴롭다. 그래도 힘들여 받은 박사 학위가 똑똑한 사람의 지도자를 배출해 내는 데 도움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나의 사역은 나를 필요로 하는 홈리스들을 위한 주의 심부름에 불과하다. 다만 슬기롭고 정직하게 심부름꾼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나의 의무요, 유명해야만 하는 당위성이라 주장하고 싶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내가 처한 곳이라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리라 다짐한다.

 

 

                                                                                             2021년 9월 6일

                                                                                             나 주 옥 (17회)

                                                                                             Dr. (Rev.) Esther J. 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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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2021.08.27 By강진경 Views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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