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찔레꽃
중국인들은 어디서나 마작을 한다. 작은 가게들이 밀집한 시장 거리의 한 귀퉁이에서, 상점이 즐비한 대로변의 건물 처마 밑에서, 낮이고 저녁이고 시도 때도 없이 마작을 한다. 도교(道敎)의 발상지인 학명산(鶴鳴山)의 황폐해가는 도관(道觀)을 찾았을 때에도 찔레 비슷한 넝쿨이 꽃을 피우는 그 곁에서, 아침나절임에도 웃통을 벗고 앉아 마작을 하는 중국인 남녀를 예외 없이 볼 수 있었다. 마작과 찔레꽃, 관내를 둘러보기보다 나는 문득 돌아가신 아버지를 먼저 머리에 떠올렸다.
광복 다음해의 3월, 우리는 남으로 왔다. 징발을 피해 해주항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무인도의 은밀한 곳에 숨겨 놓았던 증기선을 찾아 끌고 온 아버지는 한밤중에 이웃들 몰래 도둑처럼 이삿짐을 배에 실었다. 조선(操船)업을 하면서 수리공과 부품의 운송수단으로 쓰던 길이 3~40m의 똑딱선, 가끔은 가족들과 낚시를 즐기곤 하던 작은 증기선이었다. 곤한 잠에서 깨어나 영문을 모른 채 불안에 떠는 식구들을 아버지는 말도 없이 배에 태웠다.
뱃전에 부딪치는 파도소리마저 두려워하며 마치 북극바다의 유령선이기나 한 것처럼 새벽안개 옅게 퍼진 빈 항구를 소리 없이 빠져 나왔다. 아버지와 어머니, 나와 여동생 둘, 겨울에 태어난 남동생에 할머니가 가족의 전부였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 큰아버지 댁에 기거하던 할머니가 뜻밖에도 월남 행을 함께 했다. 가냘픈 몸매에 언제나 하얀 치마저고리를 정갈하게 입고 계시던 할머니는 곁에만 있어도 매양 흐뭇하고 좋았다.
뒤늦게 낌새를 챈 로스께가 연안의 초소에서 몇 발의 총을 쏘아댔지만 배는 이미 사정거리를 벗어나 전혀 위협이 되지 못했다. 총알 몇 개가 배의 고물 훨씬 못미처에 퍽 퍽 하는 둔탁한 소리를 내며 물위로 떨어져 박혔다. 그제야 어머니는 품에서 간난 동생을 떼어내 할머니에게 내어드리며 손바닥으로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바깥바다는 다행히 파도가 심하지 않았다. 그래도 얼마만큼의 풍랑은 있어 제법 자장가 역할을 할 정도로는 배를 흔들어댔다. 아버지를 제외한 식구 모두 선실에서 모자란 잠을 덧 자고 아침햇살에 깨었을 때는 배는 이미 한강 어귀의 훨씬 안쪽까지 들어와 있었다. 선원 하나가 강물을 길어 해 내온 김이 모락모락 나던 하얀 쌀밥의 달큼 구수한 맛, 새로 맛보는 갖가지 젓갈 반찬에 곁들여 두 그릇이나 먹었다. 볼에 닿던 차가운 강바람과 함께 생생하게 남아있는 월남 당시의 기억이다.
마포나루에 내리자 바로 트럭을 타고 사직동 집으로 향했다. 지난겨울, 아버지는 삼팔선을 몰래 걸어 넘어와 서울에다 집을 미리 장만해 두셨던 터였다. 기역자 형 기와집, 고향집에 비해 마당이 옹색하게 좁았다. 앉은 자리 또한 동북향이어서 해가 오래 머물지도 않았다. 겨울은 견디기 힘들게 추웠다. 그 집에서 2년 반을 살았다.
두해 터울로 동생들이 태어나다 보니 마당에는 언제나 기저귀가 널렸다. 배릿한 아기 똥냄새가 집안 어디에나 배었다. 짧은 햇살에 기저귀를 말리기 위해, 자잘한 집안 살림에 할머니는 이른 아침부터 바쁘게 동동거려야 했다. 대부분이 기저귀빨래인 ‘양은 다라이’를 펌프 옆에 놓고 할머니는 아침마다 빨래를 했다.
잠이 덜 깬 눈을 비비고 나가 펌프질을 해 드리다보면 할머니는 똥물이 노란 기저귀를 빨랫돌에 안차게 비벼내어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헹궈내고는 했다. 내가 대문을 나설 쯤이 되어야만 커다란 양은솥에 빨래를 삶으며 그때서야 겨우 허리를 펴고 서서 나와 동생이 하는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인사를 웃으며 받았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골목에서도 우리 집은 금세 눈에 띄었다. 장대로 높게 받쳐진 빨랫줄에는 하얀 기저귀들이 무슨 깃발이나 되는 것처럼 담장위로 펄럭펄럭 날리고 있기가 다반사였다. 비가 오는 날만이 예외였다. 기저귀를 걷어내려 기름하게 직사각형으로 접어 아랫목에 쌓아놓는 건 나와 바로 아래 여동생의 몫이었다.
뽀송뽀송하게 마른 새하얀 소창 기저귀에서는 더 이상 동생의 똥냄새도 지릉내도 나지 않았다. 코에 갖다대면 따뜻한 햇볕 냄새만 났다. 손바닥에 닿는 감촉도 산뜻해 쨍한 날씨라도 만져지듯 기분이 새침했다. 새로 산 공책 종이처럼, 바삭바삭하면서도 부드러워 한차례씩 뺨에 대고 문지르면 마음마저 환해졌다. 기저귀에서는 간난동생의 냄새, 어머니의 냄새, 할머니의 냄새들이 모두 섞인 그리운 냄새가 났다.
두해가 지나고 난 봄, 할머니는 몸이 불편한데다 큰집이 걱정된다며 다시 삼팔선을 넘어 해주의 큰아버지 댁으로 되돌아가셨다.
할머니가 월북하신 후로 아버지는 월남하기 이전에나 가끔 하던 마작을 다시금 시작했다. 밖에서 하루 이틀씩 밤을 새우고 들어오는 날도 드물지 않게 있었다. 집에는 새로 사귄 친구 분들이라며 낯선 어른들이 찾아와 밤을 새우고 가는 날도 더러 생겼다. 출근도 매일처럼 하지 않으셨다. 이모부와 하던 자동차사업도 시들해가는 눈치였다.
그해 가을 우리는 사직동 집을 떠나 영천으로 이사를 했다. 아버지는 사업을 접고 친구 분이 하는 회사에 취직을 했다.
다음해 5월, 화창한 일요일에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임진강변으로 낚시를 갔다. 자전거 뒷자리에 나를 태운 아버지는 가는 내내 북으로 가신 할머니와 고향이야기를 했다. 지나는 길가에는 하얀 찔레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사방에 온통 꽃향기가 진동했다. 찔레넝쿨 앞에서 자전거를 세운 아버지는 나를 뒷자리에 그대로 둔 채 무더기로 꽃이 핀 넝쿨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허리를 구부려 꽃 냄새를 맡던 아버지가 뜬금없이 뜻 모를 말을 했다.
“네 할머닌 찔레꽃 같은 분이란다.”
할머니가 찔레꽃 같다고? 궁금했다. 아버지에게 물었다.
“왜 할머니가 찔레꽃 같아요?”
얼굴을 들어 잠시 하늘을 올려보고 난 아버지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차분하게 말했다.
“언제나 흰옷을 즐겨 입으시는 데다 오죽 깔밋하시냐, 마음은 또 얼마나 온화하시더냐. 마치 찔레꽃 꽃말처럼 말이다.”
“그래서 그래요?”
나는 할머니에 관한 이야기를 더 듣고 싶었다. 짐작을 한 듯 아버지가 말을 계속했다.
“또 있지. 내 동생, 즉 네 삼촌이 아파서 열이 사흘씩이나 계속 펄펄 끓자 단지(斷指)까지 해서 피를 먹여 살리신 적도 있으시단다. 찔레가시처럼 맵기도 한 분이지.”
나도 광복군에 나가 싸웠다는 삼촌이야기는 여러 번 들어 알고 있었다. 광복이 되고도 삼촌은 돌아오지 않았다.
“삼촌은 살아 있을까?” 혼잣말처럼 아버지에게 물었다.
“죽은 게야, 그러니 소식이 없지.”
“할머니가 아픈 것도 삼촌 때문인가 봐.”
할머니는 왜 다시 북으로 돌아가셨을까, 아파서만 돌아가셨을까? 혹시-
“삼촌을 기다리느라 고향으로 돌아가신 건 아닐까요?”
“그럴지도 모르지”
잠시 뜸을 두어 대답을 마친 아버지는 다시 또 멀리 북쪽하늘을 한참동안 쳐다보다가 굼적하게 자전거에 올라 페달을 밟았다. 진한 꽃향기에 취해서일까, 아버지의 자전거가 잠시 비칠비칠 흔들렸다.
강가에 닿아서도 낚시질에 신나하는 나와는 달리 아버지는 강 건너 산 너머로 멀리 구름만 자주 바라보시고는 했다.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는 가시에 손바닥이 마구 찔리고 손등이 심하게 긁히는 것도 아랑곳 않고 찔레꽃을 한 다발 가득 꺾어 자전거 핸들에 조심스럽게 묶었다.
“할머니도 찔레꽃을 좋아하셨어요?”
불쑥 아버지에게 물었다. 긁힌 손등에서는 피가 배어나와 가로세로 가느다랗게 핏 금을 그렸다. 어눌하게 아버지가 대답을 했다. 보일 듯 말듯 목소리가 젖어 있었다.
“그럼 좋아하셨지. 찔레꽃이 하얗게 핀 달 밝은 밤이면 자주 뒤울안에 나가 꽃 냄새를 맡으시며 혼자 서성이고는 하셨단다.`
“아, 그게 찔레꽃이었구나.”
“뭐가 말이냐?” 아버지가 궁금한 듯 물었다.
“큰 아버지네 집 뒤꼍 울타리 말이어요.`
“그렇단다. 할머니가 찔레꽃을 좋아하시는 걸 알고는 할아버지가 찔레넝쿨로 울타리를 만드셨단다.”
집에 돌아온 아버지는 가져온 찔레꽃을 작은 오지항아리에 몽땅 꽂아 대청마루구석 뒤주위에 곧바로 올려놓았다. 며칠이 지나면서 꽃잎이 떨어져 볼품이 없게 된 다음에도, 어머니가 곱지 않게 눈살을 찌푸려도 아버지는 시들은 꽃다발을 쉽게 치우려하지 않았다. 그해 겨울에도 아버지는 마작을 했다. 5월이 오자 다시 또 나를 데리고 임진강변으로 낚시를 갔다. 지난해와 똑같이 한 아름 찔레꽃을 꺾어왔다.
그다음 해 5월의 끝 주말, 아버지는 밤이 깊어서도 들어오지 않았다. 벌써 이틀째였다. 영천으로 이사와 얼마 지나고부터 아버지는 집에서만은 마작을 하지 않으셨다.
5학년이 되어 조금 철이 들자 비록 아버지의 친구 분들이라고는 하지만 나는 낯선 사람들이 집에 와 밤을 새우는 게 참으로 싫었다. 밤을 새워하는 마작도 마작이려니와 방에서 나는 진한 담배냄새가 역겹도록 싫었다. 밤참을 해내느라 힘들어하는 어머니를 보는 것도 적지 아니 화나는 일이었다. 잦은 잔심부름도 짜증스럽기는 매한가지였다. 꾀를 냈다. 너 댓 차례, 아버지의 마작 곽에서 몇 쪽을 훔쳐내어 몰래 아궁이속 깊숙이 나 몰라라 던져 숨겼다. 물어도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뗐다. 짐작이야 갔겠지만 증거를 찾지 못한 아버지는 몇 번 화를 내시는 걸로 아예 마작장소를 집밖으로 옮겨버리고 말았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산길에 찔레꽃이 탐스럽게 피어있던 것에 생각이 미쳤다. 일어나자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아버지를 찾아 나섰다. 윗동네의 한 작은집 문간방에서 간신히 아버지를 찾아냈다. 아버지는 핼쑥해진 얼굴로 무표정하게 나를 맞았다. 방안은 낸 내라도 든 것처럼 담배연기가 자욱했다. 한쪽 구석에는 꽁초가 수북이 쌓인 커다란 재떨이가 세 개나 놓여있었다.
나무라지도 않고 수굿이 따라 나오는 아버지는 꾸부정해진 허리를 제대로 펴지도 못했다. 홀쭉하게 살이 빠진 볼 아래로 뾰족해진 턱에는 염소수염이 볼품없게 자라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이다음 커서도 나는 절대로 마작은 배우지 않겠노라고, 근처에도 가지 않겠노라 그때 굳게 마음속으로 맹세했다. 대학병원 인턴시절, 동료들 대부분이 숙소에서 마작을 배워 즐겼어도 나와 몇몇은 단 한차례도 거들떠 보지조차 않았다.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버지, 찔레꽃이 폈어요. 낚시 안가요?”
순간 아버지는 깜짝 놀라시는 듯 했다. 노여운 듯 슬픈 듯 복잡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는 아버지의 눈빛에는 적지 아니 부끄러워하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 다음주에 낚시를 갔다. 찔레 덤불 아래에는 벌써 꽃잎이 수북이 떨어져 있었다. 가지에 남아있는 꽃들도 색이 추레하게 바래있었다. 아버지는 주섬주섬 꽃가지를 꺾었지만 그때마다 그나마 남아있던 꽃잎들도 힘없이 후드득 떨어져 사방으로 흩어져 내렸다. 몇 번을 되풀이 골라가면서 가지 몇 개를 꺾어 들기는 했지만 자전거를 세워놓은 곳까지 왔을 때에는 꽃잎은 대부분 떨어져 나가고 긁혀 피가 나는 손에 들린 가지에는 시들은 꽃잎도 겨우 몇 개 밖에는 남아있지 않았다. 가시 많은 두릅나무 가는 가지묶음처럼 그저 시굽게만 보였다.
마약과 노름은 어지간한 굳은 결심이 아니고는 절대로 끊지 못한다고 했지만 그 뒤로 아버지는 더는 마작 판을 기웃거리지 않았다. 마작친구들도 더 이상 집으로 아버지를 찾아오지 않았다. 단지를 하셨다는 할머니의 매운 성품을 물려받아서인지 한번 하고자 마음만 먹으면 행동에 옮기는 것쯤은 오뉴월 엿가락 구부리는 것보다도 더 쉽게 실천했다. 하긴 나에게도 30년을 넘게 피워온 담배를 하루아침에 끊은 전력이 있는 걸로 보아 그러한 결단력은 윗대에서부터 이어져오는 독자(獨自)한 유전인지도 몰랐다.
셋째가 대학을 입학하여 나와 여동생 둘이 대학을, 그 아래로 고등학교 둘, 나머지 둘이 중학생이 되자 아버지는 내색은 안하면서도 우리들의 등록금이 힘에 부치는 눈치였다. 당시 아버지는 이름 있는 개인회사의 인사부 부장으로 있었다.
겨울방학 내내 ‘돌체’다 ‘르네상스’다 하며 매일이다시피 음악 감상실에서 살던 어느 토요일, 밤 9시가 다 되어서야 친구들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오늘 들어오지 않을 거라며 어머니가 아랫목에다 저녁상을 차려줬다. 궁금했다.
가족밖에 모르는 소문난 애처가인 아버지는 한번도 토요일을 늦게 들어온 적이 없었다. 마작을 할 때에도 주말은 한사코 피하시던 아버지였다. 숭늉을 떠가지고 들어온 어머니가 내 표정을 읽더니 이유를 말한다.
“응, 상가 집이 생겨서 못 들어오신다더라.”
“그래요? 누군지 아셔요?”
“몰라, 말씀 안하셨다. 그런데 참, 너 내일 시간을 좀 내라고 그러셨다. 오후 4시쯤 회사 숙직실로 오라고 하시더라.”
의아했다. 시장기에 밥을 걸터먹다말고 어머니에게 재우쳐 물었다.
“왜요, 상가 집에 가셨다며? 아버진 숙직을 안 하실 텐데......”
“상가(喪家)가 회사 근처라 밤을 새우고 나서 숙직실에서 한잠 주무실 모양이지 뭐.”
“무슨 일이 있어요?”
궁금해서 다시 더 물었다.
“낸들 아냐, 너도 컸으니까 뭘 좀 의논하고 싶으신 게지.” 말끝을 흐린다.
다음날 4시에 회사로 갔다. 숙직실에서는 한창 마작 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마작을 하는 한 옆에서 아버지는 웅크린 채 새우잠을 자고 있었다. 담요 한 장도 덮여 있지 않았다. 나를 본 아버지는 언제 잠이 들었었냐는 듯 바로 일어나 뒤를 따라 나왔다. 일부러 잠든체하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건물 밖 골목어귀에 나오자 아버지는 한 움큼의 지폐다발을 남이 볼세라 서둘러 나에게 건네준다.
“이게 뭐예요, 마작을 하신 거예요?”
“가지고 가거라. 너희들 셋의 등록금이다.”
부끄럽고 창피했다. 어쩐지 떳떳치가 못한 느낌이었다. 따지듯 아버지에게 대들었다.
“그동안 안하셨잖아요?”
대답대신 아버지는 보일 듯 말 듯 고개만 끄덕였다. 언짢고 낭패스런 표정이었다.
“더 묻지 말고 어서 집에 가거라. 나는 좀 늦는다고 어머니께 말씀드려라. 나중에 말하마.”
더는 말을 않고 입을 다문 채 아버지는 돌아서서 다시 숙직실로 들어가시고 말았다. 구부정한 뒷모습, 눈물이 핑 돌았다. 그 순간만은 아버지도 마작도 미워할 수가 없었다. 무슨 수를 쓰셨을까, 마작을 모르는 나로선 알 길이 없다. 왜 다시 들어가셨을까.
그날 저녁 아버지는 약주를 한잔 걸친 불콰한 얼굴로 늦게야 들어오셨다. 나와 어머니를 보더니 손바닥으로 주머니를 털털 두드려 보이며 호탕하게 웃었다. 주머니가 비었다는 아버지만의 너스레였다. 얼마간 남겼던 돈을 모두 잃어주고 왔노라며 대수롭지 않은 듯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가장이란 때로는 철석같은 자기와의 약속도 어겨야하는 무거운 자리임을 뼈저리게 알게 된 아픈 날이기도 했다. 그 뒤로 돌아가시기까지 아버지는 다시는 마작을 하지 않으셨다.
나의 대학 입학을 그렇게도 고마워하던 아버지, 회사 내에서도 오랜만에 어깨를 한껏 펼 수 있었다며 아들을 무척이나 자랑스러워하던 당신. 마작 판에서만은 잃고 따고를 마음먹은 대로 재량하면서도 과한 욕심을 경계하던 분. 돌아가시던 그날까지 북으로 간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끝내 접지 못하시던, 찔레꽃이 피는 5월이면 들어내 놓고 내색을 못하는 채 속으로만 꽃 몸살을 하던 아버지. 지금은 나의 가슴에 진한 찔레향으로 남아있는 아버지를 이국의 벽지에서 새삼스럽게 만나는 아릿한 한 순간이었다.
* 시굽다 : 하는 짓이 눈에 벗어나 비위에 맞지 않다.
‘시다’의 충청 경상 강원 함북 방언.
* 걸터먹다 :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휘몰아 먹다.
* 깔밋하다 : 간단하고 아담하며 깨끗하다.
* 도관(道觀) : 도사가 수도하는 산의 깊은 곳.
찔 레 꽃
조곤조곤 아침 비 내리는
낮은 산길
모롱이 돌다
찔레꽃
흐드러지게 핀 무더기
만나는 보셨는지요.
꽃 빛 만도 당신 그리움인데
코끝 아릿한 향은
어쩌란 건지
두고 오기 아쉬워 조금 걷다
돌아서
다시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