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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용의 재계춘추(財界春秋)] (14) 추격하고 창조했다

  • 권오용 한국가이드스타 상임이사(전 SK그룹 사장)


 
- 삼성 반도체, 현대 자동차•조선, SK 섬유•유화…세계 초일류기업 도약
- 선진기업•기술 벤치마킹했지만 단순모방 넘어 개량 거듭한 창의력 산물
울산 현대중공업의 조선소 짓기전 백사장(사진 위)과 현재 모습. 현대그룹 창업자 고(故)정주영 회장은 조선소 부지인 백사장 사진과 거북선이 담긴 500원짜리 지폐를 들고 영국에서 돈을 빌렸고 그리스에서 배를 수주했다. (사진=현대중공업)

우리나라의 전경련은 일본의 게이단렌과 몇 년전까지만 해도 매년 한•일 재계중진회의를 열었다.

80~90년대 이 회의의 단골멤버인 현대자동차의 고(故) 정세영 회장은 역시 단골멤버의 하나인 도요타자동차의 도요다 쇼이치로 회장에게 항상 각별한 부탁을 했다. 지난해 몇 백명의 현대자동차 근로자들이 도요다자동차에 가서 현장 연수를 받았는데 성과가 좋으니 올해도 그만큼은 연수인원을 받아 달라는 것이 요지였다. 그러면 도요다 회장은 웃음을 띠면서 작업에 방해가 되지 않으면 선처(?)하겠노라는 약속을 하곤했다.

오늘의 현대자동차는 이런 과정을 거치며 컸다. 도요다자동차를 성지로 삼아 순례하듯이 매번 몇 백명이 방문하면서 그들의 근로정신, 생산방식을 배워가면서 세계적인 기업으로의 도약을 준비했다.

 

반도체가 삼성의 새로운 사업모델로 채택되던 80년대초 이 사업을 준비하던 사람들은 매주 금요일이면 항상 도쿄행 비행기를 탔다. 그리고 도시바나 히타치 같은 일본기업의 임직원들을 만나 접대를 했다. 주로 낮에는 골프를 치고 저녁에는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월요일 서울로 돌아온 삼성의 임원들은 퍼즐 맞추기에 들어간다. 상대방의 말과 행동 속에 녹아있는 일본기업들의 반도체 육성 전략과 신기술 정보를 하나하나 모아 삼성의 전략에 반영시킨다.

구름잡기 같은 조각 맞추기를 대충 마무리하고 이들은 주말에 다시 도쿄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오늘날 세계 1위로 올라선 삼성의 반도체는 극단적으로 말하면 주말 도쿄행 항공기를 성지삼아 오가며 커왔다.

한일재계회의에서 인사하고 있는 최종현 전경련 회장과 이를 듣고있는 도요다 쇼이치로 일본 도요타자동차 회장,정세영 현대자동차 회장. (사진=전경련)

지금 SK의 전신인 선경직물은 데이진이라는 당대의 거대기업과 협력하며 커갔다. 데이진이 도와주면 컸고 그렇지 못하면 어려워지곤 했다. 당시 국내에는 800개가 넘는 직물회사가 있었지만 지금 몇개나 남아 있을까. 그러나 선경은 데이진의 도움을 받아 원사 공장을 설립함으로써 평범한 직물회사에서 최고의 섬유기업을 넘어 석유화학기업으로 도약했다.

 

초창기 우리 산업의 경쟁력 강화 전략은 대개 이런 식이었다. 성지를 순례하고도 이를 무작정 베끼거나 외운 것이 아니라 창조적으로 개량에 개량을 거듭했다. 그들에게 나라 밖의 산업 성지 순례는 나라 안에 새로운 산업 성지를 만들기 위한 긴 여정이었다.

정주영 회장은 울산의 백사장 사진과 거북선이 새겨진 500원짜리 지폐를 들고 영국으로 가 조선소를 지을 돈을 빌렸고 배를 수주했다. 지금 그가 점지한 울산의 백사장은 세계 최대의 조선소가 됐다.

 

이병철 회장이 반도체 산업에 뛰어들 때 삼성이 망하려고 작정을 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지금 수원공장은 세계 반도체의 37%가량을 생산한다.

최종현 회장은 무자원 산유국을 표방했다. 기름 한방울 나지 않는 국가에서 휘발유 등 석유제품이 수출 품목 1위로 등극하는 사건을 일으켰다. 일본에서 대지진이 나자 일본 석유회사들이 제일 먼저 손을 내민 곳이 SK였다. 중동에서 떠난 원유를 대신 받아주고 바닥 난 석유제품 재고를 채워달라는 요청이었다.

이들은 단순한 추종자(Follower)가 아니었다. 정치권이나 일부 논객들은 빠르게 베꼈을 뿐이라고 폄하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 변화 주도자(First Mover)로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들이 주장하기 훨씬 이전부터 한국의 기업 구성원들은 변화의 주도자로 자리매김했다. 돈이 없어 빌려 올 때도, 기술이 없어 훔쳐 볼 때도 그들의 목표는 단순조립이 아니라 고부가가치를 생산해 내는 세계 최고의 기업을 염두에 뒀다. 이것이 애플이 삼성을 공격하고, 도요다가 현대차를 견제하고, 듀퐁이 코오롱을 제소하는 진짜 이유다.

 

성지순례를 하듯 우리는 해외의 유사사례를 벤치마킹해왔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교조적이거나 획일적이지 않았다. 우리가 반세기동안 이룩한 경제성장은 단순한 모방이나 맹목적 암기가 아니었다. 새로운 기술과 아이디어로 상품을 개발하고 시장을 개척한 선구자적 발상이었다. 창조적 혁신역량이 지속적으로 발현된 자랑스런 역정이었다. 신속한 의사결정과 규모의 경제, 수직 계열화 등 세계에서 가장 독창적인 경영시스템으로 달성한 성과이기도 하다.

멀리있는 실리콘밸리나 오마하가 성지가 아니다. 지난 50년의 땀과 혼이 뒤섞여 녹아내린 수원, 울산, 포항이야말로 우리가 가꾸고 기려야 할 진정한 성지라고 할 수 있다.

권오용은

고려대를 졸업했으며 전국경제인연합회 국제경제실장•기획홍보본부장, 금호그룹 상무, KTB네트워크 전무를 거쳐 SK그룹 사장(브랜드관리부문), 효성그룹 상임고문을 지낸 실물경제와 코뮤니케이션 전문가다. 현재 공익법인 한국가이드스타 상임이사로 기부문화 확산과 더불어 사는 사회 분위기 조성에 힘쓰고 있다. 저서로는 대한혁신민국(2015), 권오용의 행복한 경영이야기(2012),가나다라ABC(2012년), 한국병(2001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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