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철 지붕 위 무지개
신현숙
각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함께 사는 천국이 여기
지금, 이 곳일까
실버 워터, 황혼기에 접어든 강물이 유유히 흐르는 동네이다.
한 집 걸러 양철 지붕에 허물어가는 담, 때로 얼룩진 벽돌집,
거미줄이 늘어진 울타리, 누렇게 말라가는 풀꽃들이 동네 골목을 지킨다.
터키인 파키스탄인 인도인 섬나라 피지인 중국인 베트남과 중동 사람들과
그리고 가끔 보이는 한국인들이 모여 사는 이 곳은
대문과 담이 없는 집이 많다.
담이 있어도 거의 허물어져 경계가 불분명하다.
집 안을 살짝 들여다 보면 ‘한 지붕 세 가족’ 같다.
그 들 옆구리에 주렁주렁 아이들이 자라
헐거운 창문 밖은 풀쑥 나온 풀꽃 냄새로 밤과 낮이 출렁인다.
엎어진 쓰레기통 밖으로 나온 먼지로
정지된 자동차들이 망가진 장난감처럼 보인다.
아침 출근시간이면 올망졸망 사람들
상처 많은 차 속으로 서로 엉덩이 붙이고 쌩하고 달린다.
잡동사니 내놓는 날이면
삶의 부스러기가 집마다 산처럼 쌓여 있다.
부러진 책상, 곰팡이 쓴 카펫, 살갗 벗겨진 선풍기
속이 멍든 컴퓨터, 삐딱한 냉장고, 뼈가 드러난 소파 의자 등
어떻게 살아 왔는지 힘들었던 기억들 하나하나 털고 있다.
그늘 바닥에 서로 기대어 어깨 등 토닥거리며
체념한 듯이 하늘만 보고 있다.
바람소리 우는 날이면 번개 천둥은 쿵 쿵 공기 팽개치고
까마귀 꺼억 울음 뱉어 이 동네를 지탱하는 길은 검붉다.
옆집 아줌마 고함소리 굵게 퍼지고
사내 아이들 반항 소리 넓게 퍼지는 날 뒷집 개 컹컹 답하는 소리 뒤섞여
흔들리는 빛과 어둠이 반복된다.
호기심에 잘린 나뭇가지와 이파리들
얕은 담장 너머 집안을 기웃거린다.
하모니카처럼 닥지닥지 붙은 단칸방
그 중 하나에 세 들어 사는 가냘픈 여자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한 방울씩 떨어지는 눈물을 세고 있다.
얼음처럼 차가운 방에 한 줄기 빛이 들어온다
침대 밑에 숨어 지낸 먼지 알갱이 반짝인다.
자정이 너머 여자는 일어나 앉아 귓구멍 속을 마구 판다.
병마개 터지 듯 창유리 흔들리고
그녀 손가락 사이에 낀 볼펜까지도
휘몰아 치는 검은 소리 못 견뎌 툭, 자빠진다
창밖에 허물 벗은 나뭇가지 위에서 떨고 있는 새 한 마리
글자 소리 흉내 내고 있다.
그녀는 성난 파도 소리 베끼고 싶어
바닥에 떨어진 볼펜 다시 집는다.
꼭꼭 눌러가며 한 자 한 자 적는다.
점점 손목은 퉁퉁 부어가고 손가락 통증으로 잠을 설친다.
햇살은 그녀의 기억을 돕기 위해 손목을 감싸주지만
글자는 까만 점처럼 작아 지다가 사라진다.
먼동이 터 오는 창 밖에 아스라이 남아 있는 글자들
검은 개 목줄에 묶여 흔들리는 들풀처럼 늙은이가 끌고 지나간다.
흐트러진 글자를 꿰매는 것은 비 온 뒤, 양철 지붕 위 무지개 뿐.
감사합니다. 혹시
그곳에 부고동문회는 없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