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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게보기    조선왕조 5백년 134 편  |  조선왕조 5백년 136편  

토지 신고제는 농민들에게 잘 알리지 않은것 까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신고 기간도 너무 짧았고 신고 절차가 보통 복잡 한것이 아니었다

일본이 까다로운 절차를 택한 것은 한국인이 신고를 포기 하겠금 유도 하기 위한 술책이었다.
조선 전체의 토지를 삿삿히 조사 하기는 역사 이래 이번이 처음 있는 일이었다 . 그만큼 총독부는 미신고 토지를 비롯하여 왕실 토지, 임야 ,잡종지 까지 망라 하여 불법적으로 전국토의 약 40%를 총독부 토지 소유화 하기에 에 열을 올리었던것이다

어쨋든 조선 총독부의 토지 조사 사업 실시는 지금 까지 토지의 소유권과 경작권 까지 마음대로 하던 농민들은 토지조사 사업이후 기한부 계약에 의한 소작농으로 전락하고 만것이었다

총독부가 일본인들에게 헐값에 불하된 농토는 그들과 한국의 농민들과 매년 새롭게 계약을 맺었는데 마음에 안드는 조선인 소작농민은 연말 갱신때 소작을 박탈 하였다
소작 까지 못하게 된 농민들은 먹고 살수가 없으니 일본인들의 돈을 높은 이자로 꾸어 연명 하다가 이기지 못하여 살던 고향을 버리고 강원도 산골에 들어가 임야에 불을 놓아 화전(火田)을 일군 다음 화전민으로 살아 가거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남부여대(男負女戴)하여 중국의 만주나 쏘련의 연해주로 이주 하지 않으면 않되었다

파인 김동환 1901년 함경북도 경성에서 태어나 서울 중동 중학을 거쳐 일본 도꾜에있는 동양 대학을 수료하고 귀국하여 동아일보 기자로 있으면서 또 삼천리 라는 잡지를 발행 하였으며 민족 의식을 찾기위하여 노력한 시인이었다
그는 '국경의 밤'이라는 서사시로 중국의 만주나 연해주로 떠나 사는 조선인들의 애환을 시로서 표현한것은 유명하다
여기 한구절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국경의 밤

아하 무사히 건넜을까?
이 한밤의 남편은
두만강을 탈없이 건넜을까?
저리 국경 강안을 경비하는
외투쓴 검은 순사가
왔다- 갔다-
으르명 내리명 분주히 하는데
발각도 안하고 무사히 건넜을까?
소곰 실이 밀수출 마차를 띄어놓고
밤새가며 속태이는 젊은 아낙네
물레 젓는 손도 맥이 풀려서
파! 하고 붙는 어류(漁油) 등잔만 본다
북국(北國)의 겨울밤은 차차 깊어가는데

일본은 조선에서 소작으로 반 타작한 쌀을 수리 조합비 ,증산 투입비로 받아 간데다가 일본에서 만든 생활 용품까지 들여와 비싼 값으로 팔아 생활함으로서 농민들은 봄이 되면 먹을 쌀이 떨어지어 일본인들로 부터 꾸어쓴 고리채(高利債)에 시달리게 되어 사실상 착취나 다름 없었다.

세계 제1차대전에 참전한 일본은 공업화에 따라 부족한 식량을 착취 하기 위하여 이른바 산미 증식계획을 세워 이것을 조선 농촌에 강요하였다
1920 년부터 15 년 계획으로 추진된 산미증식 계획은 920 만석이라는 무리한 목표 설정때문에 증산 폭표를 달성 하지 못하였다 .조선에서 생산된 쌀이 모두 일본 본토로 다들어 가도 모자라는 판이었다

조선의 식량 사정은 날로 악화 되어가기 시작 하자 일본은 부족한 쌀 대신 값싼 좁쌀 ,수수, 콩등을 중국 만주에서 들여와 한국인들의 허기진 배를 잡곡으로 채우게 하였다
쌀을 생산하여 농민 자신들은 한 톨도 먹지 못하고 만주에서 들여온 잡곡으로만 배를 채우니 한국인들의 생계는 날로 악화 되어갔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민족 자결주의 원칙을 발표 하자 남의 지배를 받던 세계 여러나라 들이 독립을 찾았다
이에 자극을 받은 한국인들은 이 기회에 독립을 이룩 할것을 계획 하였다
드디어 손병희를 비롯한 33 인 의 민족대표들이 전국적으로 독립 운동을 일으킬 것을결의 하였다
1919 년 3 월 1 일 서울 탑골 공원에서 터진 만세 함성은 삽시간에 전국을 휩쓸었다
그러나 무자비한 일본 헌병 경찰들은 총칼로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일본경찰의 만행은 전국 곳곳에서 자행되었다
수원 화수리에서 만세 부른 사건을 기화로 일본 헌병들은 제암리사람들을 예배당으로 몰아 넣고 교회에 불을 지른 다음 나오는 사람 마다 총질을 하여 무자비하게 학살하였다
특히 정주, 맹산, 강서,대구 , 밀양,함안, 합천,남원 등지에서 많은사람들이 학살되었다.
충남천안군 목천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 부르던 유관순도 체포되어 사형 당하였다

유관순의 집안은 기독교 감리교의 독실한 신자들이었다 . 그녀는 독실한 신자인 아버지와 어머니를 딸아 다니며 지령 마을 이란 곳에 있던 교회를 다니면서 신 교육에 눈을 뜬 아버지가 나라를 일본에게 빼앗긴 울분을 듣고 우리민족 자주 독립을 위해서는 성경에 나오는 모세같은 사람이나와 민족 정신을 이끄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하는 훈계를 귀담아 들었다 .스스로가 독립 하려는 의지가 있어야 하나님도 도와 준다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교회 계통을 통하여 공주에있는 외국인계 영명 학교에 입학 하게 주선한다
그녀는 다시 영명 학교 설립자인 사애리사(Alice)부인의 소개로 1916년 서울에 있는 이화 학당(지금의 이화여고) 3 학년으로 편입된다 .
재학중에도 그녀는 늘 아버지의 민족을 왜놈들의 압제에서 독립 하여야 한다고 하는 말을 잊지 못하였다
같은 학급의 급우들과도 늘 성경에나오는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인 모세를 예를 들어 모세가 여호와로부터 민족을 해방시키라는 계시를 받고 애급으로 되 돌아가 노예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구햇듯이 이화학당 학생들도 노예 생활과 다름없는 조선 민족을 구출 해야하는데 앞장서야 한다고 말 버릇 처럼 항상 주장 하였다

그녀는 모세가 시내 산에 들어가 여호와 로부터 십계명을 받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서 광야에서 40년간의 유랑 생활 끝에 마침내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들어간 성경도 자주 인용했다 몽매한 조선의 백성들에게 일제가 신교육을 배우지 못하게 하여 어리석은 백성들을 압제의 도구로 이용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이것을 극복하려면 조선의 백성들은 배워야 한다고 늘 강조하였다 .
특히 조선의 여인들은 옛날 부터 내려오는 구습에서 완전히 탈피하여 민족의 수난의 구렁텅이에서 조국 근대화에 앞장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여성이라고 뒤에 앉아서 안주하여 나라를 뺴앗겨기고 고통을 당하고있어서야 되는냐는것이었다

1919년 3월 1일 전국에 걸쳐 독립 운동이 발발 하자 그녀는 가만히 있어서는 않된다고 친하게 지내던 구현숙 ,김희자,서명학 , 김분옥등 6명의 고등과 1학년 급우와함께 시위 운동에 직접 뛰어 들었다 .이화 학당에서도 뒤늦게 학생단 만세 시위 운동이 조직되어 만세 운동이 확산되자 이곳에 적극적으로 가담한다 .
온나라가 대한 독립 만세로 불붙자 당황 한것은 일본 총독 장곡 천 호도였다 .그는 무차별 발포 명령을 했고 서울 장안은 피 바다로 변하였다 .
총독부는 헌병대를 동원 무차별 살륙을 하는동시 3월 10일 중등 학교 이상 휴교령을 내렸다

임시 휴교 령으로 학교가 폐쇄 되자 유관순은 고향 인 천안 병천으로 내려간다
고향집에 내려온 그녀는 아버님께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는 고향의 조선인들을 각성시켜 독립 의지를 왜놈들에게 알려야 한다고 주장 했다 ,평소부터 나라 빼앗긴 울분을 말하던 아버지는 딸이 몰라 보게 장성하여 나라와 민족을 생각하는 기특한 생각에 감동을 받았다

부녀는 인근 지역 뜻있는 지사들과 연락하여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아우내 장터에서 장날인 4월 1일 을 기하여 정오에 독립 만세 행사를 하기로 하였다 .
그녀는 직접 격문을 써서 인근 지역인 경기도 안성, 충북 진천, 조치원, 천안에서 4월1일 봉기할것을 약속 받아냈다 .혹시 차질이 벌어 질지 몰라 당일 전날 매봉산에 봉화가 오르면 거행할것도 잊지않았다
3월말 밤 매봉에는 봉화불이 올랐다

이튿날 4월1일 정오
아우내 장터에서는 장보러 나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유관순은 앞장서서 태극기를 나누어 나누어주고 높은 단위에 올라 대한 독립의 필요성을 설파하고 일제히 만세 삼창을 하자 장꾼들이 일제히 만세 만세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친다
얼마나 그리던 독립이었던가 ? 사람들의 함성이 아우내 장터를 휩쓸자 놀란것은 주재소에있던 헌병대였다 .
헌병들은 부지런히 어디엔가 전화를 걸고 나더니 모두 총을 들고 시위대를 향하여 무차별 사격하기 시작했다

유관순의 부친이 총에 맞았다. 어머니도 .....여기저기 총에 맞아 피비린내가 진동하였다 .
"이놈들아 내 나라를 독립 하겠다고 평화적으로 의사 표시를 하는데 왠 총질이냐?"
헌병들이 앞장서서 나오는 처녀의 당돌 함에 놀라 감히 총을 겨누지 못 하더니 결국 체포하고 말았다
그녀는 부모를 잃고 자기집은 왜 헌병의 방화로 불타고 체포된 몸으로 공주법원에서 6년 징역형을 받는다 .그녀는 갖은 회유와 고문으로 생각을 돌리려는 헌병 수사관들의 노력에도 아랑곳 하지않고 끝까지 저항한다 .
그녀는 항소 하라는 국선 변호인의 충고를 거절했으나 절차에 의하여 경성 복심 법원에서 다시 3 년형으로 확정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된다

그녀는 옥중에서도 성경을 항상 옆에 두고 모세가 80 세 되던 해에 해호렙산에서 계명을 받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햇듯이 언젠가는 조선이 자주 독립 될 것이라고 일제에 항의 하고 1920 년 3월 1일 독립만세 1주년을 맞이하여 감옥내에서 독립 투사들이 일제히 만세 부르도록 주동하자 이에 격분한 일제가 가혹한 폭행과 고문을 하자 ,이에 못이겨 1920 년 10월 12 일 18 세 처녀의 몸으로 순국 하였으니 이날 밤 하늘도 노하고 슬퍼했는지 번개가 치더니 비가 내리었다

국내에서 이렇게 학살극이 벌어지자 많은 애국지사들이 중국에서 망명 정부를 세웠다 .

일본은 한국민들의 독립 운동이 거세지자 일본은 한국민을 달래려고 문화 정책으로 들고나왔다

신문을 발간 하게 끔 허락도해주었다
그동안 총독부는 합방 이전에 신문이란 신문은 모두 폐간 했었다
1920 년 3 월 6 일 조선일보가 창간 허가를 받고 신문을 내기 시작하였다
그해 4월 1일 동아 일보가 창간되었다

일본이 급작스럽게 언론을 허용하고 신문 발행을 허가 한것은 한국인들에게 언론을 막아 놓고 보니 한국인들의 속 마음을 알수 없기 때문이었다
총독부는 언론과 출판의 자유를 인정하는척하고 그것을 미끼로 조선인의 동태를 알아보자는 음모가 깔려 있었다

그렇게 하기 위한 첫 조치로 헌병 경찰제도를 없애고 보통 경찰 제도로 바꾸었다
하지만 이름만 보통 경찰제도이지만 제복만 갈아 입힌 경찰이었다
헌병 경찰을 없앤다고 해놓고 오히려 경찰관 숫자는 더늘어 났다

학교선생도 칼을 차고 가르치던 군인 같은 제복도 벗기었다
이때 까지도 한국인들은 조선 왕국 시대 모양으로 과거 급제하여 일신양명 한다는것은 꿈도 꿀수없는 세상이었다 .
그러나 일본 싸이또 총독은 문화정치라는 달콤한 사탕 발림을 한국인 입에 넣어 주기시작했다
한국인들 중에 자기 입맛에 맞는자중 아주 적은 숫자를 공무원으로 채용했으나 촉탁직원이거나 말단 하급직원으로 월급도 일본인 관리보다 적었고 오히려 근무시간은 더 길게잡아 착취의 손길은 이런곳 까지 뻗히었다

동아일보를 창간한 사람은 중앙학교 교장으로있던 김성수가 주동자였다
김성수는 총독이 문화 정치를 표방하자 기회는 이때라고 생각했다
(그렇다, 한국인의 슬픔과 억울함을 호소하고 독립 정신을 불러 일으키려면 어떻게 해서라도 신문 발행 허가를 받아 내어야 한다 )
김성수는 송진우를 만나 신문 발행 계획을 설명하였다
"우리 민족의 얼을 살리는 길은 신문 발행 밖에 없는데 어떻하십니까?"
"좋은 생각입니다. 일본 총독이 허가를 내 준다는데 못 할것은 없지요 하지만 신문사를 만들려면 자금이있어야하는데..."
"걱정마십시요 제가 사재를 털어 100 만원을 내 놓겠소 "
"하지만 신문을 만들려면 우리 조선인들의 대변지가 되어야 할터인데 교장 선생님 개인의 힘으로만 할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참여토록 해야겠지요"
"자금을 내놓을 사람이 있을까요?"
"물론이지요 , 아무리 일본놈들이 설친다해도 나라 잃은 설음을 가슴에 안고 사는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박영효 대감을 비롯하여 김홍조, 고하주, 박창진, 최준, 안희제 같은 분들이 우선 머리에 떠오르는데 찾으면 많이 있을겁니다 "
김성수가 거론하는 인물들과 함께 모두 17 명이 발기인이 되어 신문사를 설립하였다
김성수는 허가받는것을 쉽게 하기 위하여 대신으로 있었던 박영효를 사장으로하고 이상협을 주필로 하였다

동아일보는 중앙학교 안에 있는 작은 건물에 회사 사무실로 차리고 1920 년 4월 1일 창간한것이다
동아일보는 창간호 첫페이지에 창간 취지를 올리었는데 대개 다음과같은 내용이었다

아래와 같이 주지(主旨)를 선명(宣明)하노라
조선민중의 대변인이 되겠노라 .
민주주의와 문화를 창달 하겠노라

조선일보는 경제 단체인 대정 실업친목회가 주축이되어 창간이되었다
1920 년 1 월 6 일이었다
조선일보는 창간호를 내고 4호 발행때가서 중단 할수 밖에 없었다
자금난 때문이었다
대정 실업 친목회가 당초 20 만원을 모아 시작하려 했던것이 5 만원 밖에 불입 하지 못하자 송병준의 손에 판권이 넘어가 발행을 일시 중단 되었던것이다
1924 년 독립 운동가인 신석우가 이를 분개하여 송병준으로부터 조선일보 판권을 사들였다 .
신석우는 상해 임시정부 교통총장을 지내면서 대한 임시정부 명칭을 두고 여운형이 국호를 조선이라고 쓰자는것을 대한이라고 주장하여 관철 시킨 사람이었다
그는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국내에서 옥고를 치른 다음 다시 중국으로 떠나려 하였으나 그의부친이
"꼭 외국에 나가서 독립 운동을 해야만 애국이냐? 절간에가서 수도하는 중만 수도승이냐? 기독교 모양으로 민중속에 파고들어 도탄에 빠진 국민 정신을 일깨우는것도 나라를 위하는 길이다.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에집트를 떠나 자기 나라로 가던 정신을 생각해보라"
하고 말하자 국내에 남아서 독립 운동하기로 마음을 고쳐 먹었던 것이다

그는 부친으로부터 물려 받은 전답과 재산을 모두 팔아 조선일보에 쏟아부었다
'조선 민중의 신문'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월남 이상재를 추대했다
이상재는 사장을 수락하는조건으로 신상우에게 라이벌 신문사인 동아일보와 다투지말고 합심해 민족 계몽에 앞장서야 한다는 조건을 내세웠다니 흥미로운 조건이 아닐수 없었다
신석우는 부사장으로있으면서 민세 안재홍을 주필에 앉히었다.

다시 조선일보가 발행되기 시작하였고 처음부터 연일 '조선 민중의 민족적 불평'이라는 연재물을 올려 10 회에 걸처 일본을 공격하는 기사를 올렸다
그러나 극심한 경영난은 그들을 그냥 두지 않았다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대학 강사로 있다가 국내로 들어와 독립운동을 하다가 옥고를 치른 조병옥이 조선일보에 입사하여 자금난을 해소하겠다고 영업국장을 자청하였다
그는 자기가 존경하는 주요한과 함께 자금난으로 쓸어지기 일보직전의 회사를 다시일으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에게도 그럴만한 자금 조달 능력이 없었다
조만식이 이사정을 듣고 광산을 해서 돈을번 방응모에게 조선일보 판권을 넘기도록 주선했고 조만식이 사장을 맡았다 .조만식은 방응모에게 사장수락조건으로 민족을 우선 생각하고 인재를 보배로 삼아 야한다고 했다

이와같이 총독부의 모진 탄압 속에서도 민족의 대변인이라 할수있는 신문이 속속나왔으니 이 두신문 말고도 시대 일보니, 중외일보가 나와서 민족지역활을 톡톡히 하였다

처음에는 유화적으로 나오던 일본 총독부는 자기들의 비위를 건드리는 기사가 속출하자 태도를 바꾸어 날이가면 갈수록 탄압의 옥쇠를 조여왔다
하지만 신문들은 이에 굽히지 않고 민족의 등불 역활을 하였다
총독부의 정책은 조선의 아름다운 문화를 말살 하려는데 까지 촉수를 뻗히었다.
그러나 이런 탄압속에서도 굽히지않고 서서히 나가고있는 인물이 있었다
최남선, 이광수, 방정환 같은 인물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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