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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의겨 대상자들      

"선생님 , 이제 저는 마지막 입니다 .제가 이 세상에와서 갖고 있는 온 재산 이라고는 이것 밖에 없습니다 "
윤봉길은 주머니에서 손목시계와 얼마 안되는 돈을 김구에게 내놓았다
"윤동지 ...."
김구는 윤봉길을 끌어 않으며 눈물을 흘렸다
4 월 29 일은 일본 천황의 생일 날이었다
윤봉길은 김구가 마련한 가짜 물통과 도시락을 가지고 중국 상해 홍구 공원에서 하려는 기념식장을 폭파시키려는 계획이었다
식장에 나타난 윤봉길은 일본인 행세를 하며 무사히 들어갈수있었다 .손에는 입구에서 나누어준 일장기를 든채로.....
드디어 일본 애국가인 기미가요가 울려퍼지고 장내는 엄숙해지고있을때 별안간 군중을헤치고 단상앞으로 뛰어나가는 괴한이 있었다 .
윤봉길이었다
윤봉길은 몸에 차고있던 물통과 도시락을 있는 힘을 향하여 단상에 집어 던지었다
이어 품속에서 태극기를 꺼내들고
"대한 독립 만세"
라고 목이 터저라 소리질렀다
일본 헌병들이 윤봉길에게 달려들어 마구 폭행을 하며 그를 체포하였다
이날 윤봉길이 던진 폭탄으로 일본 거류민단장 가와바다(河端)중국방면 최고사령관 시라카대장이 즉사하고 시게쓰미(重光)과 제9사단장 우에다(植田)중장은 각각 다리하나씩 잃었으며 해군대장 노무라 제독은 장님이되었다
또 무라이 총영사 등십여명이 중상을 입었다
그날 윤봉길은 성공적으로 식장을 아수라장으로 만든 것이었다.

이소식이 일본 정계에 알려지자 조선총독의 탄압은 더 거세지었다

나라가 없는 백성들에게 자유는 없다 .
쇠 사슬에 꽁꽁 묶인것 처럼 마음대로 할수 없는 민족의 갈길은 막막 하기만 하였다

토지는 일본인들 수중에 들어가고 소작을 해 보았자 일본인들의 반 타작에다 물세 등을 내고 나면 살길이 없었다 .일본 총독부는 그나마 도지권(睹地權)까지 박탈하였다

도지권(堵地權) 이란 일본인들의 논 밭을 부치고 그 세로 매 년내는 벼를 말하는데 이 벼를 수확 할수 있기 위하여 벼로 갚고 빌려쓰는 논 밭이나 집터의 권리를 말한다
이 도지권 조차 일본이들이 박탈 하고 나니 갈곳이 없었다
갈곳은 만주나 일본의 하층 노동자로 나가는 길 밖에 없었다

1918 년 1 월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 14원칙'을 발표 하자, 이에 고무된 동경 유학생들은 1919 년 1 월 6 일 동경 간다구(神田區)에 있는 조선 기독교 청년 회관에서 조선의 독립을 요구하는 결의문을 채택, 조선의 독립 을 만방에 호소하는 유학생 대회를 개최하였다.
이광수에 의해 작성된 독립선언서 초안 1부는 한반도에 전해 졌을 뿐만 아니라 국문 이외에 일문 과 영문으로 번역된 독립선언서가 각국 대사관, 공사관 그리고 일본의 장관, 귀족원, 중의원, 조선총독 등에 우편으로 발송되고 각 신문사에도 배포됐다.
1919 년 2 월 8 일 유학생 전원(약 60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동경 조선기독교 청년회관에서 역사적인 2·8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었는데, 이것을 일 명 '2·8 선언'이라 한다. 2·8 독립선언서는 한반도에서 3·1운동이 일어나기 20 일 전에 낭독돼 서울의 3·1운동에 영향을 주었으므로 역사적 의미가 크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역사적 사건으로 인하여 절 반 이상의 조선인 유학생들이 국난의 순국을 결의, 일본에서의 학업을 중단하고 한반도로 귀국하였다.

일본은 과거 소작인에게 인정되어 왔었던 도지권(賭地權)을 말살했을 뿐 아니라 주인 없는 땅을 개간 할 때도 지주에게 유리 하도록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농민들을 소작인화 혹은 영세화 하도록 하였다.

토지 조사 사업 이 끝난 1918 년의 통계를 보면, 논 64.6%와 밭 42.6%가 소작지가 되었고 자작 겸 소작과 소작농을 합친 것이 전체 농민의 77.2%에 이르렀다.
이와 같이 영세화 과정에서 토지를 갖지 못한 농민들은 빈곤과 궁핍으로 벗어나지 못하여 결국 임금노동자가 되어 해외로 진출하게 되었다.

당시 일본은 산업이 급속도로 팽창하면서 부족한 노동자를 한반도에서 보충하기 위해, 일본 노동자가 한반도에 와 양복과 시계를 자랑하였다
"일본 에 가서 일을 하면 돈을 벌수 있습니다"
하면서 조선 사람들을 감동시켜, 일본으로의 취업을 권장하는 이른바 '출장모집'을 하게 된다.
1911년 오사카(大阪)에 있는 방직 공장에서 추진한 최초의 조선인 출장모집은 그 후 계속되어 1917 년까지 11 회에 걸쳐 조선인 208 명이 취업했다.

1914 년 제 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일본의 대전 참가로 일본은 호경기를 맞게 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노동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게 되었다.
따라서 일본의 여러 회사들은 노동력 부족을 한반도에서 보충하기 위해 모집사무 소를 설치하고 노동자를 경쟁적으로 모집하였다.
그 결과 일본으로 이주하는 조선인들은 1916 년에 2,000 명이 되더니 해마다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여, 1917 년에는 14,000여 명, 1918 년 17,000 여 명, 1919년 20,000 여 명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조선총독부는 1919 년 4 월 조선인이 한반도 이외의 지역으로 여행할 때 관할 경찰서에서 여행증명서를 발급 받아 한반도를 떠나는 출발지의 경찰서에 이것을 제출하게 하는 이른바 '조선인의 여행취체(旅行取締)에 관한 건'을 발표함으로써, 조선인들이 대책 없이 일본으로의 이주를 사전에 억제하였다.

이러한 제지에도 불구하고 일본으로 이주한 조선인은 1920 년 27,000여 명 , 1921년 38,000여 명, 1922년 70,000여 명, 1923년 97,000여 명 등 매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이것은 국내적으로 1920년부터 실시된 '산미증식계획'으로 조선 농민을 더욱 궁핍하게 하였으며, 국외적으로 염가의 조선 노동자를 일본 기업들이 필요로 하였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이다.

일본으로 이주한 조선인 노동자들은 농민이 아닌 단순 노동자, 육체 노동자로 일을 했는데, 이들은 장기 체류하거나 영주할 목적으로 간 것이 아니라, 단지 1∼2년, 길어야 3∼4년간 일본에서 돈을 벌고 귀국할 예정이었고 도중에도 명절이나 집안 대사에 잠시 귀국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에 따라 귀환하는 사람들도 많아 1917년 4,000여 명, 1918년 9,000여 명, 1919년 13,000여 명, 1920년 21,000여 명에 이르렀다. 이러한 점에서 당시 중국이나 러시아로 이주한 한(韓)인들과 근본적으로 처지가 달랐다.

일본에서 조선인들이 종사한 직종은 초기에 주로 방직·제사·염색·유 리 공장 등에서 단순 노동자로 일을 했고 인원이 증가하면서 토목공사 노동자, 도로공사 노무자, 운송잡부, 탄소인부, 벌목공 그리고 탄광 광부로 직종이 확대되었다. 나중에는 오물 치우기, 수중작업 등 더럽고 힘들어 일본인이 기피하는 영역까지 담당하게 되었다.

이들 직종에서도 조선인들이 많이 종사한 영역의 하나가 토목공사였다. 1924년의 통계에 의하면, 조선인 전체 노동자 88,000여 명 가운데 약 85% 에 해당되는 77,000여 명이 단순 육체노동자였으며, 단순 육체노동자의 약 80%에 해당되는 61,000여 명이 토목공사장에서 일하는 인부였다.
흔히 ‘노가다’라고 알려진 토목공사 인부들은 조장의 지시에 따라 일정량의 작업을 진행하기 때문에 일어를 몰라도 괜찮았다.

조선인들은 공업의 중심지인 오사카를 중심으로 하는 긴키 지방(近畿地方)과 한반도에서 가까운 규슈 지방(九州地方)을 중심으로 거주하였으나 일본으로 이주하는 조선인들이 늘어나면서 거주지역도 전국으로 확대돼 갔다.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44초 동경에서 남쪽으로 약 80㎞ 떨어진 곳을 진원지로 하는 규모 7.9의 대지진이 발생, 약 7∼8분간 계속됐다.
당 시 일본 가옥은 대부분 목조 건물이었기 때문에 지진으로 쓰러진 집에 화재가 발생하고 삽시간에 동경 시내에 퍼져 나갔으며 지진의 여진과 불이 동경을 중심으로 요코하마시, 가나가와현 등 관동지방에 3일간 지속됐다. 이 지진은 일본에서 발생한 지진 중 가장 규모가 큰 지진으로, 일명 ‘관 동 대지진’이라 한다.

동경에 있는 진재시 방재 조사회(震災市防災調査會)가 밝힌 인적 피해사항 은 사망자 99,331명, 부상자 103,733명, 행방불명 43,376명에 달하였고, 물적 피해사항은 가옥 소실 447,128호를 비롯하여 물적 손실이 200억 엔에 달했다. 이와 같이 일본은 관동대지진으로 47억7천만엔 (1922년도 일반 예산액 14억7천만 엔의 3배 규모)에 육박하는 엄청난 피해를 본 것이다.

지진으로 인하여 엄청난 사회적 혼란이 발생했을 때, 동경을 위시하여 피해지역에 『“부정한 조선인과 사회주의자들이 방화를 했다.”, “2만 명 의 조선인이 쳐들어온다”, “조선인이 방화를 했으며 우물에 독약을 뿌리고 일본인을 살해하며 일본 여인을 강간한다” “경찰서, 국립극장, 아사히신문사, 미쓰비시 백화점 등을 조선인이 폭파시켰다”』 등 조선인에 관한 터무니없는 유언비어가 유포됐다.

이에 더하여 경찰이 발표하는 경고문이나 신문 기사에 유언비어를 뒷받침하는 문구들이 있었으며, 특히 지진이 일어나던 날 동경 시내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근위 사단과 제1사단 이 파견된 것 이외에 조선인의 침공을 막기 위해 군인을 출동시켰다.

당시 한반도는 조선총독부 산하에 있었기 때문에 일본까지 쳐들어갈 군인도, 무기도 없었으며 더욱이 대한해협을 넘을 군함도 없었다
이로 인하여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유언비어를 믿게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조선인에 대해 극도의 공포심과 증오심을 갖게 하였다. 따라서 일본인들은 자위대를 결성하여 지역의 복구와 구제를 위해 일하는 한편 부정한 조선인 과 사회주의자들로부터 마을을 지키기 위해 수상한 자를 발견하면 경찰에 동행하기도 하였다.

특히 조선인을 잡으면 사항에 따라서 살해해도 무방하다는 일본 관리의 지시가 있었던 관계로, 일부 일본인들은 조선인에 대하 여 폭행하거나 살해하기도 하였다.

심지어 경찰서에 쳐들어가 그 곳에 보호되어 있는 조선인들까지도 손을 묶어 불에 던져 타 죽게 했으며, 심지어 어린이까지 조선인이라면 모두 살해했을 정도로 잔인했다.
관동대지진시 일본인이 조선인을 공포의 대상으로 지목한 원인 중의 하 나는 바로 일본의 경제적 불황에 있었다.
1920년에는 일본 경제가 불황에 접어들면서 실업자가 증가하게 되는데, 이것을 무마하는 방법으로 조선인 을 매도한 것이다.

즉 한반도에서 건너온 조선인 노동자로 인하여 일본인 실업자가 증가하였다고 믿고 있었던 일본 노동자들은 조선인 노동자에 대 하여 적대적 감정을 갖고 있었다.

또한 해고당해 실업자가 된 조선인들이 떼를 지어 거리를 방황하는 것을 보고 일본인들은 조선인에 대한 공포심을 갖게 됐으며 이들이 폭도로 변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 일부에서는 방위 대를 조직하기도 했던 것이다
.
관동 대지진 사태는 9월 16일이 지나서야 수습되었으며, 이 때 일본인에 게 살해된 조선인이 동경에서 3,000명, 관동지방에서 6,000명으로 집계되고 있으나, 당시 관동지방에 조선인이 약 30,000명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약 20,000명은 살해되었으리라 추정된다.

관동대지진이 있은 후, 많은 조선인이 귀환하게 되는데, 관동대지진이 있은 해인 1923년에는 1922년의 약 2배 정도인(1922년 46,000여 명 귀환) 89 ,000여 명이 귀환한다. 그러나 일본은 지진복구사업에 다시 조선인을 동원, 조선인의 이주를 장려하여 1924년에는 120,000명, 그리고 1925년에는 130, 000여 명이 일본으로 다시 건너왔다.

이후에는 오히려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이주하려는 조선인이 지나치게 많아, 1925년 10월 일본으로의 이주를 저지하는 '도항 저지제'라는 법안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한편 일본의 쌀 수탈을 위한 산미 증산 계획이 추진되는 동안, 조선인 농민의 몰락과 빈궁 현상은 더욱 심해졌다.
1920년에 소작 농가는 전체 농가 의 39.8%였으나, 1932년에는 53.8%로 급증하였다. 그리고 소작 농민의 증가는 곧 지주의 수탈을 더욱 강화시켜 주는 결과로 연결되어, 1930년대 초반에는 70%의 농가가 해마다 보릿 고개를 당하여 초근 목피로 연명하였다.

결국 식민지 농업 정책의 결과 몰락한 농민들은 농촌을 떠나 만주로 이주 하거나 도시로 몰려들어 도시 빈민층이 되었다.
국내의 심각한 경제 상황으로 인하여 비록 일본의 '도항 저지제'에도 불구하고 많은 조선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물론 밀항이 대부분 이었다

한편 일본은 일본에 온 조선인을 무마하기 위하여 조선인 친목회를 통하여 조선인들의 울분과 일본에 대한 적개심을 달랠 뿐만이 아니라 일본에 동화하도록 하고 나아가 일본에 정착할 것을 장려하기도 하였다.

일본 총독부는 학교 제도까지 아주 바꾸어버렸다
보통학교 6 년제를 4 년제로 바꾸는 한편 고등보통학교 4 년제도 5 년제로 바꾸었다
1938 년부터는 한글 수업이 필수에서 선택으로 하더니 1941년에는 한글수업을 완전 폐지하고 일본어만 가르치었다
이제 국어 시간에는 한국어 시간이 아니라 일본어 시간이되었다.

1939 년에는 일본 총독부에서 한국식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라고하였다
소위 창씨 개명이었다
이렇게 이름까지 바꾸라는 식민정책은 세계 어느나라에도 없는짓을 일본인들은 강요하고 있었던것이다

설진용이라는 사람은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일어나자 울분을 참지 못하고 의병에가담하여 왜병과 싸우다 일제 강점후에는 낙향하여 살고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아들이 울면서 집에 들어왔다
"이놈아 학교에 갔다 왔으면 왔지 왜 울고있어?"
하고 야단을 치었다
"아버지 오늘 교무실에 가서 요시다 담임 선생에게 뺨 따귀를 맞았어요"
"왜 때려?"
" 아직도 황국 신민이 되기 싫어서 이름을 조선 이름으로 쓰느냐는 것이었어요"
"죽일놈들"
설진용은 할 말이없었다

그러나 설진용은 애써 못 들은척하였다

다음날도 아들은 일본인 선생에게 막대기로 머리를 맞았는지 머리가 퉁퉁 부어 왔다
"네 머리가 왜 그모양이냐"
"아버지 나 학교에 안 갈래요 요시다 선생이 왜 또 이름을 바꾸지 않았느냐고 머리를 때렸어요"
" 그냥 다니거라 너는 일본인이 아니야 "
"가기 싫어요 "
"이놈이..."
설진용은 헛간에있던 작대기를 들고나와 마구 아들을 마구 때리었다

"이놈아 ,조선놈이 조선 이름을 갖고 있어야지 어디자꾸 이유가 많아 "
부인이 뛰쳐 나와 막아서 다행이었지 하마트면 아들을 죽일뻔 하였다

다음날 아침 물꼬를 보러 논에 나간 설진용이 점심이 지나도 나타 나지 않았다
부인은 방을 치우러 들어 갔다가 그의 책상 위에서 유서 한통을 발견하였다

"부인 , 내게 시집와서 그동안 수고 많았소
우리 집안은 신라 시대 부터 때대로 내려온 설씨 양반의 집안이 이었소 그런데 요사이 일본놈들이 창씨 개명을 하라고 상진이를 왜놈 선생이 못살게 구는 모양 아니오? 어린 아이가 무엇을 안다고 아비가 안 갈겠다는 창씨 개명을 왜놈들이 왜 아이들을 가지고 들볶는지 한탄스럽소
여보
나는 일본놈들이 강요하는 창씨 개명을 한다면 나는 이세상에 살수 없는 쓸모없는 불효자가 되는것이오 .
만일 그놈들의 요구대로 내 눈 앞에서 창씨 개명을 한다면 조상에게 짓는 불효죄를 누가 막겠소?
내 일찌기 우리의 국모를 죽인 왜놈들을 이땅에서 몰아 내려고 의병에 가담하여 왜병들과 싸울 당시 그때 죽었어야 할몸이었지만 그래도 가문의 명맥이라도 유지 시켜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초야에 묻혀 조용히 살려 했더니 이제는 이 름까지 바꾸 라는구려
여보
어제 생각해보니 상진이를 죽도록 때려 준것은 나의 불찰이었소
그애는 일본놈들이 이땅을 점령 한후 태어난 아이이니 그애인들 무엇을 알겠소
아. 억울하다
왜놈 한놈이라도 죽이고 죽었어야 마땅 하지만 후에 조선이 독립하면 우리 가문이 다시 재기 하기 위해서라도 나만 먼저갑니다
절대 조선이름을 일본이름으로 바꿀수 없다고 훗날 이 나라가 독립 되거든 아비의 뜻이나 아이들에세 전해주오 "

이튿날 설진용의 시체는 논가운데있는 웅덩이에서 익사체로 발견되었다

조선은 집안을 존중하고 족보에 오르며 여자도 결혼해도 성이 바뀌지 않는 전통이 이어왔다 그야 말로 욕중에서도 못된 욕이 "성을 갈을놈"이라는 것이있다

그런데 성이라고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이를 테면 조영철(趙永哲)이라는 한국 이름을 풍전영철(豊田永哲) 이니 정영수(鄭英洙)라는한국이름을 삼봉영수(三峰英洙)이니 하는 이름으로 창씨 개명 하라니 어이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성은 일본식 이라도 이름자라도 한국명을 넣도록하는것은 괞찬았다 .

성(姓)과 이름이 완전히 일본식으로 바뀐 사람도있었다
조해동(趙海東)아라는 사람의 이름은 해동방보(海東邦保)라고 지은 사람도있었다
이러한 일본의 강제 창씨 개명에 자기의 근본은 버리지 않으려고 조선의 성씨 밑에 한자 더 붙여 보이지 않는 항거를 보이기도 했다
이를테면 권태혁(權 泰赫)이라는사람의이름의 경우 권전태혁(權田 泰赫)으로 성명 가운데 전(田)자를 집어 넣어 뿌리는 흔들리지 않으려는 의지를 보이기도 했다 .

우리나라에서 성씨가 많은 김씨들 경우 예를 들면 김정동(金正東)이라는 사람의 경우는 김산정동(金山正東)으로 한 사람도 있었다 .

장씨 경우에는 한자의 장(張)자를 분해하여 궁장(弓長))씨로 변한 웃지 못할 일이 생기기도 하였다 .장도성(張度成)이라는 이름이 아닌 밤의 홍두깨 격으로 궁장도성(弓長度成)으로 성씨가 변하였으니 누구한테 하소연하랴?

결국 조선 백성들은 본의 아니게 이상한 성씨로 바꾸어갔다
자기 한자 성씨 명을 버리고 생전 알지도 보지도 못한 이를테면 길전(吉田)씨라고 고치고 이름은 전에 부르던 이름두자를 붙여쓰는 사람이 많았다

남원 진(晉)씨라면 남원을 상징하여 짓기는 했는데 남강(南岡)씨로 변하였으니 본이고 족보는 따질것 없이 고치었다.
일본은 궁극적으로 한국의 전통을 무너뜨리고 일본화 한다는 소위 '황국신민 정책'을 강행려는 속셈이었다 .
그리고 일본과 한국은 같은 할아버지라며 일조동조론(日朝同祖論)이라는 그럴듯한 말을 만들어 놓아 한국인들의 뿌리 의식조차 혼란스럽게 만들어놓았다
국민학교 학교내에서도 일본말을 써야지 한국말을 쓰면 여지 없이 매를 맞았다 .

1926년 4월 26일 마지막 비운의 황제였던 순종이 세상을 떠났다
순종의 장례일인 6월 10일 순종의 상여가 을지로를 지날때 한떼의 학생들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렇지않아도 3.1운동이 고종의 승하시 발생된 사건 이었든지라 일본 경찰의 철통같은 감시로 도중에 끝났지만 총독부는 조선인들이 자기들 마음 먹은대로 되지 않자 더욱 탄압이 거세지었다

그러나 한국인의 항일 투쟁도 지지 않았다 .광주 학생사건, 김좌진의 만주 청산리 전투,이봉창의 일본 천황 암살 미수사건 , 윤봉길의 중국 홍구 공원에서 폭탄 투척으로 일본 고급장교와 일본 공사등 사상자를 내게 한사건은 일본의 간담을 서늘케하였다 .

그러나 일본은 이러한 한국인의 끈질긴 항거에도 아랑곳 하지않고 동경유학생을 학병으로 전선에 내 보내더니 이번에는 조선 청년들을 강제 징집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중국 본토로 진격해 들어가기 시작한데 따른 병력을 일본인만으로 부족하니 조선 청년들을 끌어다가 전쟁에 투입하기 위해서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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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01J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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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1970.01.01 By5443738 Reply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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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01Jan

    조선왕조이야기 (127회)-조선군을 해체시켜라-

    Date1970.01.01 By5443738 Reply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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