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동포와 한인교회
구 자 문
로스앤젤레스(LA) 코리아타운은 중국타운이나 일본타운처럼 역사가 길지 않아도, 더욱 넓은 지역을 차지하고 있다. 중국타운이나 일본타운이 100~150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면, 코리아타운은 1945년 이후 근근히 싹트고 1970~80년대를 지나면서 많은 발전을 이룩한 것이다. 1910년에서 1945년에 이르는 기간은 20세기초 하와이 농장이민 1세대들이 계약기간이 끝나고 일부가 남가주로 옮겨오게 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본다. 1945년 이전에는 나라를 잃은 절망속에 나라를 떠나 나돌다가 고생 끝에 미국 땅에 자리잡게 되었다고 한다면, 그 이후는 해방되고 독립된 나라의 국민으로서 미국에 오게 된 것이다.
1932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 선수가 일장기를 달고 금메달을 따낼 때의 심정과 1945년 해방된 조국, 미군정 아래 우리 정부가 준비되고 있던 1947년에 보스톤 마라톤에 참석하고 금메달을 따낸 서윤복 선수의 심정은 무척이나 달랐을 것이다. 우리 한국교민들의 1945~60년대에 이르는 미국에서의 생활은 잘 사는 나라에 대한 부러움, 우리도 나라가 있다는 자부심, 그리고 기필코 성공하겠다는 신념으로 뭉쳐져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1970년대 이후 좀 더 많은 이들이 이민을 오게 되면서 미국의 코리아타운은 한국인의 근면성, 성취욕, 그리고 자녀 교육의 열성을 보여주는 장소가 되고 있었다. 분명 이들은 나라를 잃고 북간도로 살길 찾아 이주하고, 스탈린에 의해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하고, 일본 탄광촌에 징용되었던 이들의 가슴 아픈 사연들과는 조금 다른 상황에서 이주를 한 그룹들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재미 동포(Koreans in the United States)은 재미 한국인과 한국계 미국인 등을 통틀어 지칭하는 말이다. 재미 동포들은 주로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 뉴욕 등의 도시 지역에 집중된 경향이 있지만, 아이오아, 네브라스카 같은 한적한 지방에 가도 적은 수나마 존재하고 한인교회, 한국식품점 등을 통해 서로 네트워크하는 경우가 많다. 명칭에 대한 혼동이 많이들 있는데, 재미동포와 재미한국인의 차이는 이미 영어 명칭에서 보았듯이 사전적으로는 큰 차이가 없지만, 편의상 재미한국인은 한국국적을 지닌 사람, 재미동포는 한국국적 여부와는 관계없이 한국혈통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보고 있으며, 여러 이유로 혈통을 나타내지 않는 경우도 많아 정확한 숫자는 잘 잡히지 않는다.
1903~4년에 미주에 첫 한인교회가 세워졌으므로 미주한인교회는 120년의 역사를 지니게 되었다. 미주한인교회는 한인 이민과 함께 시작되었고, 한인 이민자들의 삶이 교회를 중심으로 이뤄졌기에 미주한인 이민의 역사가 곧 미주한인교회의 역사라고 본다. 1903년 첫 이민선 갤릭호를 타고 하와이 농장에 노동자로 온 분들 102명 가운데 50여 명이 인천 내리감리교회 교인들이었고, 그들은 곧바로 ‘그리스도연합감리교회’를 세웠다. 1904년에는 하와이에 한인교회가 14개, 1914년에는 39개가 되었다. LA한인연합감리교회의 설립자는 한국에 의료선교사로 파송되었던 미국인 프랜시스 셔먼 여사이다. 그녀는 의사인 남편과 함께 한국에서 의료선교를 하다가 안식년인 1900년에 미국으로 돌아왔는데, 남편은 한국에서 걸린 전염병으로 사망했다. 이후 두 아들과 함께 LA에서 지낸 셔먼 여사는 2004년 하와이 농장을 떠나 미 본토로 건너오던 한인들과 함께 한인교회를 설립했다. 1906년에는 ‘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가 역시 LA에 세워졌다. 그러나 1924년에 아시아인들의 미국 이민을 불허하는 이민법이 미 의회에서 통과된 후로는 한인 이민자 수가 정체되고 이민 교회도 정체될 수밖에 없었다. 1900-1950년 사이에 미주 한인수가 1만 명을 넘지 않았다.
1950-2000년 대략 50년 사이에 한인 이민자와 유학생 수의 증가와 모국 교회의 발전과 더불어 미주한인교회도 큰 발전을 이루었다. 한국전쟁 이후 1950년대에는 미군과 결혼한 한인 여성 5만여 명과 4천여 명의 전쟁고아들이 미국으로 입국했고, 그들은 대부분 한인교회의 품에서 낯선 미국에 정착하였다. 1965년에는 이민 규제법이 삭제되고, 매년 아시아 각 국가들로부터 2만 명 한도의 이민이 허용되면서, 이후로 매년 1.5만명 정도의 한인들이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 한인 이민자들은 LA/뉴욕/시카고를 중심으로 영세한 규모의 한인 사업체들을 운영했으며, 1980년대에는 코리아타운을 형성하기에 이른다. 경우가 좀 다르기에 추후 별도로 다루고자 하지만 1960~1980년대에 10만명이 넘는 한국고아들이 미국으로 입양되었다.
1980-1990년대에는 미주이민교회도 최전성기를 구가했다. 한인 이민자가 50만 명을 넘어선 1980년대에는 교회 수가 1,000여 개, 100만여 명인 1990년대는 2,000여 개로 알려졌다. 이민자들이 증가하면서 한인교회는 이민자들의 이민정착을 돕는 센터 역할을 주도하게 되었고 규모 면에서도 대형화된 교회도 나타났다. 미주한인교회는 ‘이민자’와 ‘이민사회’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빚어진 공동체이기에 신앙적 동기와 기능만이 아니라 사회적/문화적/민족적인 동기와 기능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형성된 특성을 지니고 있다. 공항픽업에서 시작하여 주거 구하기, 전기/수도개설, 은행구좌 개설, 운전면허증 발급, 차량구입, 자녀 학교 입학, 일자리 주선 등 정착에 필요한 모든 것들이 교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이민을 옴과 동시에 대부분 교회에 나가게 되고, 그 결과 기독교인이 재미동포의 70% 이상을 차지하게 되었다. 미국교회들은 건물만 클 뿐 적은 수의 노령층이 주를 이루는데, 한인교회들은 중장년층이 열심히 참석하며 하루를 일주일을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2024년 7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