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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양(1).jpg

 

 

귀양살이란 귀양의 형벌을 받고 정해진 곳에서 부자유스럽게 지내는 생활을 말한다
세상과 동떨어져 외롭고 불편하게 지내는 답답한 생활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기도 하고 죄인을 고향이 아닌 먼 변방(邊方)이나 외딴섬 같은 데로 보내어, 일정 기간 제한된 지역 안에서만 살게 하던 형벌인셈이다 .

최익현의 유배는 왕족 ·고위관리 등에게 적용한 유배형으로,위리안치(圍離安置)라는 유배형이었다 .
위리(圍籬)안치란 원칙적으로는 본인의 거주지를 제한 하기 위해 집 둘레에 울타리를 둘러치거나 가시 덤불로 싸서 외인의 출입을 금하는 형벌이었다 .


또 절도안치(絶島安置)라는것도 있는데 본인 혼자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유형생활을 치르도록 하는 중죄인의 안치가 있고 본향안치(本鄕安置)라는것은 본인의 고향에서만 유배생활을 하도록 하는 가벼운 죄인의 안치 등이다.

최익현에게 내린 형벌은 제주도 중에서도 가시가 있는 탱자나무가 많은 지역이었다 .
이때 모습을 면암집 연보에서는 이렇게적고있다 .
유배생활을 곧바로 서재생활로 전환하는데 .면암은 밖앗 출입을 일체 하지 않았고 집안에서 조용히 있으면서 매일 유학에관한 책를 읽고 또 향교에 있는 우암집(尤菴集..... 조선 숙종 43년(1717)에 교서관에서 간행한 송시열의 유고집. 부(賦), 시(詩), 소(疏) 등을 쓴 19종류의 책) 1질을 빌려서 마음을 가라 앉힌후 사색하며 귀양살이의 괴로움을 아주 잊어 버렸다라고 기록되고 있다

다음글은 최익현이 면암집 연보에 기록된 한자 원문 그대로 그의 귀양살이모습을 그린글이다 .
"勉菴集",年譜, "先生杜門燕居日將朱子書楮環韻讀又借校宮所儲尤菴集日帙潛心琓索 忘湘累又苦"

최익현이 두문 불출 함에도 불구하고 제주의 유림으로 있는 김희정이 최익현을 찾았다 .
"선생님 먼 곳에서 오시 느라고 수고 많았습니다 "
"뉘시온지 , 나 같은 중 죄인을 찾는 댁은 뉘시요?"
"김희정이라 합니다 . 제주에서 태어나 지금 까지 유림을 지켜 오고 있는 사람입니다 "

"나는 전하로 부터 위리안치형을 받고 이곳에 와 있는 사람이 외다 .내가 누구를 만나겠소?"
"나는 책 읽는것 외에는 밖에는 만날 사람이 없소이다 "
최익현이 어느 누구와 만나는것을 거절한다

"면암 선생님 ,화서 선생께서도 주자를 종주로 삼지 않으면 공자의 뜰에 들어 갈 수 없고 宋子(송시열)를 본받지 않으면 주자의 정통에 접할 수 없다.라고 하셨는데 송시열선생이 유배되어 살던곳에오셨으니 저희같은 사람들과도 대화를 하셔야지요"

최익현은 화서 이항로가 항상 하는 말을 서슴치 않고 하는 말에 다소 놀란다 .
"나도 그대 처럼 성현의 말씀을 가지고 자기 자신을 되돌아 보며 일일이 체험하기 위해 주자와 우암을 독서의 대상으로 하고 있는데 그대가 이렇게 무례 하게 나의독서를 방해 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지 않는가?"

"제가 알기에는 면암 선생이 유배 생활 중이라 하시더라도 주자와 우암선생이 임금을 받드는 것이나 면암선생이 임금을 받드는 것은 무엇이 다르옵니까? 면암선생과 과 마찬가지로 우암 선생도 역시 한때는 제주도 유배인이 아니었습니까?
무엇보다 조선시대 도학의 이념적 기반인 주자의 경학체계를 수호하기 위해 애쓰던 당대의 거유가 아닙니까? 우암이 선생이야 말로 화서학파의 원류가 분명 할진대 저희들같이 우암 선생을 모시는 사람들로서 면암 선생을 찾아 뵙는것은 당연 하지 않습니까?"
"........................"

최익현이 김희정의 말을 듣고 보니 제주도의 유림을 너무 만만히 본것 같아서 오히려
부끄러웠다 .
"우암의 학문은 추상적 성리학 차원에 안주하지 않고 공자의 중심 철학인 심법학과 도학을 충실하게 계승하고 경세학의 대표자인 조광조(趙光祖,) 이이(李珥) 김장생(金長生)으로 전수되는 도학과 예학을 계승하여 직철학과 심법학을 발전시킨 학문인데 그대 말을 듣고 보니 과연 그 분의 학문을 이어 받은 듯한 그대의 말이 수긍이 가오"

"과분의말씀입니다 ,시생들은 그렇지 않아도 면암 선생의 고명하신 이름을 일찍부터 듣고 먼저 육지로 나가 찾아 뵙고 학문을 전수 받고자 원하였으나 워낙 남쪽 멀리 떨어진 섬인지라 엄두를 못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이렇게 누추한 제주 까지 유배 오셨으니 찾아 뵙지 않을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찾아 주시니 고밉소 .허나 나는 이집에서 한빌 자욱도 나가지 말라 하였으니 마음대로 나가 돌아 다닐 몸이 아니니 독서로 소일을 삼고자하오"

"주자도 어디까지나 독서를 제이의적인 것으로 인식했기 때문에 자연히 제일의적인 중요성을 갖는 자기 자신의 이(理)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선생께서도 제일의적인 저희들의 이(理)를 깨우쳐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허허.....내가 무슨 그런거창한 이론을 깨우쳐 줄 능력이 있소? 과분한 말이오.나도 성현의 위치에 못미치는 사람으로서 독서를 통해 파악된 성현의 뜻과 이치를 몸소 실천 하려고 하자는 사람일 뿐이오.
성현의 말씀은 밝기가 해와 달과 같다고 생각한 주자는 아무리 독서를 많이해도 성현의 밝은 도로 자기의 무지(無知)와 무명(無明)을 깨우쳐 실제 생활 속에서 실천하지 못하였다 하셨소.
주자는 단지 종이 위의 문의의 파악에만 그친다면아무 소용이 없다고 하였는데 그대말을 듣고보니 그대가 먼저 나를 깨우쳐 주니 내가 오히여 그대들에게 배워야겠소이다"
"원 그런 겸손의 말씀을 ....."
김희정은 두 무릎을 꿇고 최익현을 스승으로 모실것을 간청한다 .

면암은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안달삼(安達三), 심의정(金羲正), 강기석(姜基碩), 김용징(金龍徵), 김훈(金壎,) 김치용(金致瑢), 김양수(金養洙)
그리고 이기온(李基瑥), 강철호(姜哲鎬 )등의 제주도 지식인들과 종유를 한다.
원래 종유(從遊)란 학덕이 높은 사람과 어울려서 사귀는 행위를 말한다

이들 가운데 안달삼이라는 사람은 자신의 스승인 노사 기정진의 학문을 베껴 여러 편의 글을 면암에게 보여주었는데 면암은 "이(理)는 우리 화서 선생의 뜻과 대략 비슷하다고 하면서 두 권의 책으로 만들어 그것을 소중히 여기었다

두 권의 책을 소중히 했다는 것은 유배지 제주도에서 면암의 독서활동을 상징적으로 드러내주는 표현으로 그 결과 한말 도학의 2대 학파인 화서학파와 노사 학파가 연결고리가 되는 결정적인 계기로 발전되었다

훗날 이런인연으로 면암은 1년 반의 제주도 유배 생활을 하고 43 세에 해배 되어 올라오는 길에 장성 하사로 78세의 노사 기정진을 예방 하기도하였다 .
노사 기정진은 최익현의 스승인 화서 이항로와 더불어 병인양요 때 척화상소를 올렸던 한말도학의 대표적인 학자였기 때문에 그의 예방은 감격 스러운 것일 수밖에 없었다. 그 감격을 두고 최익현은 훗날 "내가 제주에 있을 때는 한라산을 보았고 전라도 장성을 지날 적에는 기정진을 뵈었다".라고 쓰고있다.

제주도 지식인들 가운데 유일하게 면암이 자신의 문인(門人)이라 칭했던
김희정은 후일 면암의 사우록에도 등재 된 사람으로서 명실 공히 면암의 제주도 1대 제자 이었다.
당시 제주 유림에서는 도학(道學)으로는 안달삼을, 시학(詩學)으로는 김희정을 제주의 제일인자로 손꼽았는데 그들의 능력은 면암과의 종유로 더욱 유명해진다 . 면암이 해배될 때 김희정을 동행 했던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면암의 김희정에 대한 애정도 엿볼 수 있다.

또 최익현을 잘찾았던 인물로는 강기석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1858년에 진사에 급제했고 추사가 제주도 유배되었을 때 내방이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면암보다 연장자였음이 분명 한데 나이에 상관없이 그들은 서로 종유하였다.

이기온이라는 사람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기온은 면암으로부터 귤암(橘巖)이라는 아호(雅號)를 하사받는다. 풀이름 암(菴)자를 쓰던 면암은 귤암에게는 바위 암(巖)자를 하사하는데 이러한 아호의 공유는 그들의 지적 교류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예로서 이른바 의발제자의 전형이다.
원래 의발(衣鉢)이란말은 절에서 스승인 중이 제자에게 주는 가사(袈裟)와 바리때 란 뜻으로 따라서 의발제자란 의미있는 사제관계를 표현하는 수사다.

이기온이 최익현으로 부터 귤암이라는 아호를 받을정도로 가까웁게된것은 사연이있다

이기온은 자주 최익현에게 찾아와서 당돌한 질문을 던지기 일수였다 .
최익현도 젊은 이기온의 질문에 답하기를 서슴치 않았다 .

"선생님 유학(儒學)에서는 인간의 유형을 어떻게 나눌수 있습니까?"
"그야 크게보면 군자와 소인로 나누어 볼수 있지"
"그러면 군자는 어떤사람을 가리키고 소인은 어떤사람을 가리킵니까?"
"군자란 덕이 있는사람을 가리키고 ,소인은 그와 반대로 덕이 없는 사람을 가리키지 "
"하오면 모든 인간은 군자가 되기를 바라겠군요 "
"그렇지, 모든 이간은 군자가 되기를 희망하고 이러한 인간들로 구성된 사회가 되고자하는것이 유학의 이상이야"

"그러면 덕이란 어떤 것입니까?"
"덕이란 쉽게 얘기 해서 인간의 인격이라고 생각 하면 되네...."
"잘이해 할수 없습니다 "
"다시 말해서 ,자신이 부여 받은 선한 본성을 그대로 실현 하여 내면의 인격을 완성한 사람이 군자라 할수 있지..."

"하오면 소인이란 어떤사람을 말합니까? "
"소인이란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무시하고 하려는 사람으로 본성을 위배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을 사람을 말한다네"
"소인같은 짓을 하지 않고 살려면 어떻게해야 합니까?"
"대의를 저바리거나 본성을 위배해서는 않된다는 말일세"

"선생님 , 군자와 소인 구분이 애매한 경우도 있습니다 .어떻게 구분 해야 합니까?"
"군자와 소인배를 구분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아까도 말했지만 덕(德)의 유무와 설사 그 덕이 있더라도 그덕을 실천하는데는 의(義)가 없으면 안되네 "
"의를 따라 하라 하셨는데 대부분 사람들은 덕을 갖으려고 노력은 해도 실천은 불의를 밥먹듯 이하며 군자 행세를 하고 있는데 이를 진정한 군자라 할수 있습니까?"

"허허, 의를 실현하고 의에 따라 행위 하는 사람이야 말로 군자라 할수 있지"
"그러고 보면 저도 소인에 불과합니다 "
"그래서 군자는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여 분연히 일어 나게 되는것이야"
".................."
세상에서는 최익현이 민비와 민승호의 사주를 받아 상소를 올린 꼭두각시와 같다고 대원군 일파들이 모함을 하고 있는데도 그는 아는지 모르는지 태연히 설파하고 있었다 .
"선생님 , 세상에는 선생님을 중전과 민대감의 하수인 이라고 모함하고 있습니다 .그대로 방치 하겠습니까?"
"허허 ...진실은 들어 나는 법이야 . 나는 불의(不義)와 싸우고 있을뿐일세..."
"선생님 대원군이 처음 정권을 잡았을때 개혁을 한다며 요란을 떨기에 백성들 모두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를 보았다가 결국은 막대한 세금과 노역으로 백성들을 못살게 굴어 민심이 떠나지 않았습니까?

그러고도 대신들이나 대원군은 군자인척 하고 있으니 웬 일입니까?"
"그래서 우리 유학에서는 그런 가식적 인간들 때문에 모든 행위가 도덕성이 있어야한다고 주장하는것이라네"
"도덕이란 무엇입니까?"
"첫째가 조화야,조화를 하려면 도를 깨우쳐야 하네 한 나라의 군주는 이러한 도덕적 의무가 어떤개인에게 보다 더 중요하다네 . 덕이있는사람만이 군주의 지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은 군주가 도덕성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그영향이 심각하기 때문일세 "

"대원군이 정권을 잡았을때 큰 기대와는 달리 나중에 그런 악정을 할줄 몰랐습니다 "
"군자는 의(義)를 으뜸으로 삼아야 하고 예(禮)로 행하며 잠시라도 인(仁)을 떠나서는 않되네 .따라서 군자와 소인을 구별하는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기준은 의에따라 행위하느냐 아니면 이익에따라 행위 하느냐에 있지..."
"그러면 예(禮)의 바탕은 어디에 두어야 합니까?"
"말 할것도 없이 의가 바탕이 되어야 하지..."

"군자는 항상 인(仁)을 떠나면 안되네 .백성들의 호주머니를 호구로 알고 정권을 잡자 저지른 모든 행위는 백성들을 사랑으로 대하지 않는다는 징조야"
" 당백전 ,통과세 ,결두전 , .....생각해보니 모두 그렇군요..."

면암은 유배에서 풀려나자 1875년 3월 27일, 어른 10명 그리고 하인 5, 6명을 데리고 꿈에 그리던 한라산 등정 길에 나선다. 이때
사인(士人) 이기남이 길 인도하고 귤암 이기온과 윤규환 등이 동행하게 된다.

중도하차 하려는 일행들을 재촉하여 어려운 산행 끝에 백록담과 천불암 등의 명승을
두루 구경하게 된다. 이런 일을 두고 이른바 사제동행(師弟同行)이라고 한다. 이처럼 옛 선비의 사제관계는 사제동행이라는 '서로의 만남' 속에서 비로서 마음을 사숙(私淑)하는 관계가 성립될 수 있었다. 사제가 서로 만남을 가질 때 독서는 가장 중요한 연결 고리였다

최익현은 한라산에 올라 시한수를 지었다

幾年絶域隔紛塵
4四月南風雨露新
山靄都收波面靜
一場快做壯遊人

??靈山不受塵
鹿潭瀛室渡頭新
?迹雖?仁智樂
庶能誇我遠遊人

(내 외로운섬에서 몇 해를 세상과 등져 살았던가
4월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 ,비와이슬 마저 새로워라
산 안개 걷히고 파도는 고요하니
멋지게 놀아 보는사람 되었구려

저 어럼푸한 한라산은 깨끗도 한데
백록담 영실 더욱 더 새롭구나
나 같은 신세 어찌 산수의 즐거움 알랴마는
그래도 이런곳을 구경 했다 자랑하리라 )

조선조의 제주도 유배인들의 대부분은 유배생활을 서재 생활로 전환하여 저술과 독서활동에 몰두하였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그들은 자신의 인격적 수양은 물론이며 유교적 교양을 바탕으로 한 많은 양의 지적 유산을 유배지에 남길 수 있었다.

특히 면암 최익현이 유배오기전 유배왔던 동계 정온이나 , 우암 송시열 그리고 추사 김정희, 등 3명의 대표적인 제주 유배인은 대표적 예이다 그들의 독서는 성리학자로서 주자(朱子)의 독서관에 의지하는 바가 컸으며 그들의 치열한 독서활동은 제주도 지식인들에게 큰 자극이 되었고 그것은 결국 제주교육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는 계기가 되었다.

동계 정온은 유배 올 때 많은 서적을 가지고 왔는데 유배 활동을 대신했다. 그런가하면 제주도에서 죽음을 목전에 앞두고 우암 송시열은독서에 열중하였다 또한 종신무기수로서 9년간의 중요한 후반생을 제주도에서 보내었던 추사 김정희는 제주유배인들
가운데 가장 모범적이며 왕성한 독서활동을 보여주었다.

면암 최익현도 예외가 아니어서 유배생활 동안에 주자와 우암을 독서의 대상으로 삼고 화서 학파의 도학적 의리론을 지켜 나갔다.
이러한 유배인들의 독서활동은 제주도 지식인들에게는 큰 교육적 자극일 수밖에 없었다. 제주유배인들의 독서활동은 개인적인 활동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근본적으로 교육을 객관적인 정신이 담긴 전통의 수행자들과 미성숙한 인간과의 만남 속에서 정신적인세계를 깨우쳐 주는 교육적 활동이었다.

이러한 계몽의 자극을 통해 일련의 제주도 지식인들은 척박한 제주도의 환경에서 교육의 길을 여는 계기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제주 유배인들의 독서 활동은 지극히 개인적인 수준이었으며 죄수라는 그들의 입장 때문에 제주도 지식인들과의 교류도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


최익현의 제주도 유배 생활은 고종이 대개 그곳의 주민과 어울리는 것을 묵인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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