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과 러시아가 전쟁 한다면 누가 이길 것이라고 생각 될까?
당시 누구든지 러시아가 승리할 것으로 만 믿고 있었다 .
그러나 웬 일인가 ? 러시아는 여지 없이 육군은 만주에서 전멸 당하고 해군은 그 위용을 자랑하던 발틱 함대가 여지 없이 일본에게 격파 당하고 말았으니 세계 각국은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이때였다.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는 일본과 러시아의 중재자로 나섰다.
미국은 미국대로 속셈이 있었다.
일본이 연전 연승을 하자 자기들이 점령한 필리핀 문제로 일본과 충돌이 생길 경우 일본과 전쟁을 치루어야 하기 때문에 큰 부담이 되지 않을수 없었다
미국은 필리핀을 식민지로 하는 경우 일본이 승인해 주기로 하는 대신 일본이 한국을 지배 하도록 승인 해 주려는 속셈을 갖고 있었다.
이같은 흥정은 계획대로 진행되어 포츠머스에서 일본 대표와 러시아 대표가 서로 만나게하여 강화 조약을 맺게하였다.
이 조약내용은 러시아는 한국에서 손을 떼고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는 동시에 만주의 여순과 대련도 일본 식민지로 한다는 내용이었다
미국은 물론 승인했고 영국,프랑스등이 모두 이조약을 승인하였다.
일본은 조선을 자기 입 맛대로 요리 할수있는 권한을 세계 각국으로부터 승인 받은 셈이었다 일본은 첫 단계로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들 흉계를 꾸미고 있었다.
그런지도 모르고 대신들은 황실의 안전을 위하여는 전승국인 일본과 관계를 잘 갖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고종황제도 이렇게 된 마당에 일본과 사이를 나쁘게 가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영악스러운 일본공사 곤스케 (林權助)가 가만히 있지를 않았다 .
곤스케 일본 공사는 고종을 알현하고 한일의정서라는 문서를 내 놓았다
"그것이 무엇이오?"
"폐하 ,읽어 보시면 아시겠지 만 일본과 한국이 서로 잘 살자고 올리는 의정서이옵니다"
"잘 살다니 무슨 뜻이오 ?"
"첫째 조선은 일본에 비해 너무 시설이 뒤떨어저 있습니다 .철도이며 , 전기등 각종 시설을 해야합니다 .이들 근대화 작업을 저희 일본이 해 드릴터이니 승인하여 주시라는 내용입니다
"그다음은?"
"최근 대한제국 황실을 뒤흔드는 사건이 속출하고 있는바 저희들이 황실의 안전을 최대한 보장해 드리겠습니다 "
"다음?"
"대한제국을 위태롭게하려는 청나라나 러시아등으로부터 한국의 안전을 위해 경호를 철저히해드리겠습니다.그외 어느나라라도 한국이 위험한일이 발생시에는 우리일본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막아내겠습니다 .대신 이러한 외적을 막아 내어드리는데 사용할 토지나 시설문제는 한국에서 적극 지원해주시기바랍니다 "
"그다음은?"
"이와같이 일본과 조선이 잘살기위해서는 일본과 한국이 서로 승인해야 할일이있습니다 "
"무슨 승인이오?"
"일본과 한국은 서로 승인이 없이는 이 협정에 위배되는 협정을 제 3 국과 맺을수 없다는 내용입니다 "
고종은 맨 나중의 조약 내용이 의아 했다. 그러나 이문제는 왕 단독으로 처리 할 문제가 아니었다
"알겠소 조정 대신 회의에서 결정 하겠으니 그리 아시오"
"폐하 한시라도 급한사항이니 조속히 결정하여 주시옵소서"
"알겠소"
곤스케는 공사관으로 돌아 가서 하회를 기다렸으나 한국 조정에서는 반응이 없었다
"아무래도....."
그는 종사관을 불렀다
"노다헤이지로 상을 부르라"
노다헤이지(野田平治郞)로는 송병준의 일본 이름이었다
일본공사가 찾는 송병준 (宋秉畯)이라는 인물은 누구인가?
그는 함경 남도 장진 출신으로 그의 부친은 하급 관리인 속리(屬吏)로 가족을 이끌고 경상도 추풍령근방에 이주하여 살고 있었다 .부친 송문수와 본처사이에는 자식이없었으나 첩소생 아들이 셋이나 있었다 그는 첩의 아들로 8살때 적모로부터 도심하게 구박을 받고 살았는데 도둑질을 했다고 누명을 쓰고 적모로부터 매를 맞고 쫓겨나 방황하였는데 동학교도라고 칭하는 도둑들 소굴에 들어갔다가 다시 도망하여 문전 걸식을 하고 다니었다 .
하루는 배가 하도 고파서 남의 참외 밭에서 참외를 따 먹다가 주인에게 들키었다 .
야단칠줄알았던 참외밭주인이 딱한사정을 듣고 불쌍히여겨 같이 주인집일을 봐주고있었다 .얼마후 밭주인이 참외를 팔러 서울로 올라갈때 가게된 송병준은 우연히 장안의 세도가이고 고종의 외숙이며 민영환의 양아버지인 민태호(閔泰鎬)의 눈에 띄어 민태호의 애첩인 홍씨집에 있게 되었다
태어나면서부터 남의 눈치를 잘보고 사람들눈에 들게 행동하던 송병준은 민태호으이 애첩 홍씨를 "어머니 어머니 "하면서 딸았다 .그는 홍씨로부터 신임을 받아 홍씨 옆에 있으면서 그집 일을 맡아보아주는 집사(執事)로있었다
그는 주인인 민태호 부터 신임을 받고 보실핌을 받아 독학을하여 무과 시험에 합격 궁궐을 지키는 수문장이 되었고 훈련원 판관, 오위도총부 도사, 감찰 노릇을 하였던 인물이었다
그후 그는 고종19 년 강화도 조약때 접견사의 수행원(접대요원) 노릇을 하다가 일본측 수행원 대창희랑(大倉喜郞.....오쿠라 기하치로)을 접대하면서 그와 인연을 맺는다
그때 일본 수행원 오쿠라야말로 명치유신 무렵에 총을 팔아서 떼돈을번 죽음의 상인이라 불리우는 일본인 군납 업자인 대창 희팔랑(大倉喜八郞...오쿠라 기하치로)였던것이다 . 오쿠라는 단도 직입적으로 조선의 수행원 따위를 집어 던지고 돈을 벌라고 회유한다
그는 접견사 수행원 자리를 박차고 부산에다 고리대금업과 무역업을하는 오쿠라와 같이 상관(商館)을 차렸다
그러나 장사가 될리가 없었다
당시 백성들은 일본을 서양 오랑캐나 진배 없는 자들로 보아 서양 문물은 절대 받아들여서는 않 된다는 양물 금단론(洋物禁斷論)이 팽배 되어있어서 일본 물건은 무조건 배척하였다
그는 임오군란이 일어 나자 성난 군중들이 상관에 들여닥쳐 불을 지르는바람에 일본의 앞잡이라고 지목되어 숨어 있다가 일본으로 도망하였다.
임오군란후 박영효를 정사로하는 수신사가 일본에 들어오자 송병준은 박영효를 찾아가 일본말을 할줄안다는것을 내세워 박영효의 수행원으로 다시귀국길에 오른다
송병준은 어느새 일본인들과 장사경험이있을뿐만아니라 일본에서 배운 일본어실력으로 일본에대하여는 전문가가 되어있었다.
그는 옛주인인 민태호 집안을 다시 찾았다 .
민씨 덕분에 어느새 그는 중추원도사, 사헌부 감찰, 양지현감 벼슬을 하게 된다
1884년 갑신정변이 3일천하로 끝나고 박영효 김옥균이 일본으로 망명하자 민비는 이들을 암살하라고 밀명을 내린다
그러나 송병준은 그들을 암살하기는 커녕 공작금으로 준돈을 주색잡기로 소일하다가 그냥 북경을 거쳐 귀국한다
귀국하자 그는 김옥균과 야합 했다하여 명령 불복종죄로 감옥에 수감당한다
이때 민태호가 그를 감옥에서 빼주었다 .그는 민태호의 주선으로 흥해군수, 양지현감까지 하였으나 은진군수를 하고있을때 동학도와 교류를 하고있었다 .
그런데 그의 상전이자 후견인인 민태호가 죽자 그는 동학교도들과 내통한다는 이유로 군수직을 해임당한다
후견인 민태호가 사라진 송병준은 할일없이 건달생활로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그는 별안간 조정으로부터 부름을 받고 장어영진관이라는 벼슬을 제수 받는다 .
이것은 조정에서 동학도와 내통하고있었던 그의 이력을 이용 동학도들의 움직임을 파악하기위한 조정의 첩자로 활용 하기위한 술책이었던것이다
그후 일본군이 동학도들을 섬멸하하자 조정에서는 의화군을 일본에 특파대사로 보내게되자 일본어에 능통한 송병준이 수행원으로 발탁되었다.
그가 도일한후 민비 시해 사건이 터지자 송병준은 귀국할생각을 않고 야전평치랑(野田平治郞 ...노다헤이치로)이라는 일본이름으로 이름을 바꾸고 산구현(山口顯) 오기에서 전경가원 양잠전습소라는것을 차려 놓고 살고있다가 러시아와 일본 전쟁이 일어나자 양잠업를 걷어 치우고 일본군 통역으로 대곡회구장(大곡喜久臟...오다니) 육군소장을 따라 한국에 들어왔다
그는 일본 병사들 상대로 일본 군대 내에 주보를 차려놓고 적지 않은 돈도 벌었다 .
그는 일본군을 따라 만주 까지 갔는데 다시 성울로 일본군을 따라 들어 왔다가 당시독립협회 활동을 눈여겨 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독립협회가 해산 되자 그는 다시 한국의 정치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여 일본공사관을 자주 드나들며 윤시병과 함께 유신회를 만들고 다시 이용구와 함께 일진회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곤스케 공사관이 눈독을 들인것은 우연이아니었다
공사관을 자주 드나들던 송병준을 이용 하자는 속셈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