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운궁으로 돌아온 고종은 제일 먼저 독립협회의 상소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상소문 내용은 김홍집.박영효 연립 내각때 문무 백관을 거느리고 종묘에나가 독립서고문(獨立誓告文)을 바친 내용대로 독립선언을 하라는 내용이었다
고종은 독립서고문(獨立誓告文)의 근간이되었던 홍범 14 조 문서를 다시 가지고 오라 하여 읽어 보았다
제1조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청에 의존하는 생각을 버리고 자주 독립의 기초를 세운다 "
고종은 잠시 그 다음을 읽지 않고 눈을 감았다
(그렇다 , 독립은 해야한다 ...지금 까지 우리가 외세의 입김 때문에 이루어 놓은 것이 무엇이 있었던가? 지금 까지는 청나라를 중심으로 하는 동양의 의례적 위계 질서때문에 국왕의 위치를 청나라의 천자와 똒 같은 대등한 지위에 올려 놓지도 못하고 황제(皇帝)라는 말도 쓰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고종은 아침 경연장에 나온 대신들에게 자기의 환궁 첫 소감을 피력 하였다
" 이제 새로 경운궁으로 환궁 하였으니 경들도 나라의 장래도 새로 생각 할때가 왔소이다.
경들이 우선 당면 문제로 해야 할일은 안으로는 이나라가 외세의 간섭을 막고 자주 독립의 근대 국가를 세워야 한다는것이오,"
법부대신 이범진이 임금의 말을 받았다.
"옳은 말씀입나. 그렇게 하자면 우선 조선이 대 내외적으로 홍범14조 정신을 계승하여 독립국임을 선포하는것이 옳을 줄압니다"
"과인도 러시아 공관에 1 년 가까이 있으면서 생각을 곰곰히 생각 해보았소이다 ,
과연 외국 공사관들의 눈치나 보면서 왕 노릇을 하고 있어야 하나 하고...."
고종은그동안의 생활이 편치 않았는지 피로한 표정을 나타내었다
"전하 , 지난 일이야 어쩔수 없아 오니 지금 부터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 너무 걱정하지 마시옵소서"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찌해야 좋겠소?"
"전하 지난 갑오.을미 개혁이 실패 원인을 살펴 보시었는지요?"
"바로 그것이오 .김옥균,김홍집, 박영효,같이 개혁을 잘한다는 사람들이 해 놓은것이 무엇이 있소이까 ? 떠들기만 요란했지..."
"그렇습니다 ,무엇이 든지 개혁 이라는 이름을 붙여 밀어 부치기만 하면 일을 잘 한다고 생각하는 부류들이 문제입니다 .
그들이 내 세웠던 갑오,을미 개혁이 왜 실패 했아옵니까?
무엇이든지 바로 누가 쳐들어 오기나 하는것 처럼 밀어 부치는 급진성 때문입니다 "
"그점에 대하여는 과인도 동감이오"
"전하, 구본신참(舊本新參) 이란 말이 있습니다. 옛 제도를 근본으로하고 새로운 제도를 참작 해야 한다는 뜻이지만 매사는 점진적으로 살펴서 개혁을 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옳은 얘기요"
고종은 그동안 러시아 공사관에서 생각 했던 속내를 들어 내었다 .
"경들도 잘 알겠지만 이제 이 나라가 새로히 태어 나려면 종묘에 받치었던 독립서고문(獨立誓告文)의 서약한바대로 독립국가를 선포 해야겠소, 독립국가를 새로 세우려면 새로운 국명이 필요한데
과인이 그동안 생각 하고 있는 국명은 대한(大韓)이라고 하는것이 좋을 듯하오 ,
한(韓)이라는 말은 우리나라가 옛날 부터 내려오는 말로 크다는 뜻이었으니 고구려의 광대한 꿈이 이 말속에 스며 들어 있다고 보오 .
그러므로 앞으로 우리도 아시아 대륙을 호령하는 큰 나라가 되려면 이 한 이라는 말이 아주 적합한 말이라고 생각되오"
대신들은 고종의 말을 듣고 모두 놀랐다 .
그동안 고종은 현실에 안주 만 하는 소심한 왕으만 알고 있었는데 이런 웅대한 꿈이있었다니 ....
왕은 말을 이었다
"경들도 아시다 싶이 우리 민족은 중국과 달라 말 어순 자체가 다르고 민족 자체가 한족과는 다른 순수한 민족이오 ,
중국 민족은 중국 서쪽에 있는 곤륜산 쪽이 근원 이지만 우리 민족은 백두산 북쪽에서 부터 내려온 순수한 민족이오,
지금도 고구려가 있던 지역에는 우리의 얼굴과 너무나 비슷한 민족이 살고있는데 그들의 말속에는" 칸"이라는 말이 많이 통용 되고 있다하오.
이 칸 이라는 말이 그쪽에서는 "크다'라는말인데 우리의 "한"과 일맥 상통하는 말이오 "
"언제 그런 연구를 하셨습니까?"
"러시아 공사관에서 여러 책을 읽어 보았는데 아주 좋은 글이 많이 있었소"
임금은 러시아 공사관에 1 년동안 있는동안 바깥 출입을 거의 하지않고 무료한 시간을 독서로 시간을 보낸것이었다.
왕이 그동안 읽은 책은 주로 역사서로 한치윤(韓致奫) 이지은 해동역사(海東繹史).안정복(安鼎福)이지은 동사강목(東史綱目),유득공(柳得恭)의 발해고(渤海考)등이었다
드디어 정부는 국호를 대한제국(大韓帝國), 왕을 황제로 칭하고 자주 국가임을 내외에 선포 하기로하였다
국왕과 정부는 1897 년 8 월16 일에는 연호를 건양(建陽)에서 다시 광무(光武)로 고치고 건양 2 년을 광무 원년으로 하기로하고 국왕을 황제(皇帝)로 칭하기로 한것이다 .
1897 년 10 월12 일 고종이 문무 백관을 거느리고 원구단(圓丘壇...지금의 조선호텔자리)에나아가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이어 정부는 조선의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쳐 내외에 선포하였다
대한제국의 선포는 대한이 자주 독립 국가임을 국내외와 세계에 알리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
그리고 죽은 왕후 민비를 명성황후(皇后)로 추봉하고 왕태자를 황태자로 바꾸었고 광무 원년 11월에는 명성황후 국장을 성대하게 치루었다
흥선 대원군은 이제 할일이 없어진 한낱 늙은이로 전락해있었다.
아들이 황제가 되고 죽은 며느리가 황후가되고 손자가 황태자가 되었으니 그가할일이 어디있겠는가?
아들이 황제가되던 다음해인 광무 1년 (1989년)1월여흥부 대부인 민씨(고종의 생모)가 세상을 떠난다 .
대부인 민씨가 죽으니 흥선 대원군은 적적하기 짝이없었다 .결국 그도 그해 2월 자기방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
(그의 묘는 1989 년 죽던 해에 경기도 고양군 공덕리에 장사 지내었다가 다시 1906 년 파주군 대덕리로 이장 하였고 다시 2 차로 1966 년 경기도 남 양주시 로 이장 하였다는데 현재 남양주시 지정 기념물로 되어 있다고 하나 어디있는지조차 찾기가 어렵다고 한다 .
역사적 인물의 묘지가 혹시 개발이라는 이유 때문에 또 수난을 당하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결국 살아서 파란 만장한 삶을 살던 그가 죽어서도 묘지를 세번 씩이나 옮겨야하다니 죽어서도 수난을 당하고 있는 셈이 아닐까? )
한편 서재필은 조선이 스스로가 자기 자원을 개발해서 먹고 살아야지 외국에게 산업을 개발 하도록 하여서는 자주 독립을 할수 없다고 역설하였다 .
정부가 외국에 양여한 이권을 외교로서 빨리 회수 하여야 하고 회수가 쉽지 않을때는 돈을 주고서라도 회수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 독립협회는 의정부 자문 기관인 중추원을 미국 모양으로 의회로 개편할것을 주장했다.
다시말하면 전제 군주제를 입헌 군주제로 바꾸자는 얘기였다.
러시아는 공사관 내에 러시아 은행을 만들고 수신, 여신, 송금등 은행 일을 보았는데 말만 은행 일이었지 실제는 철도 이권 , 조선 화폐 발행 및 국고출 납 업무를 보면서 재정 까지 깊이 개입하려 들었다.
독립협회가 반대 운동을 벌려 공사가 바뀌는 등 파장이 매우 커지어 결국은 은행도 폐쇄 되었다
또 러시아는 겨울에도 얼지 않는 항구를 확보 하기 위하여 부산 절영도를 차지하려고 하였다
독립협회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정부의 조차 결정이 있자 규탄 대회를 열자 정부는 이를 취소하고 말았다
독립 협회는 재판 관계에도 신랄하게 독립 신문을 통하여 정부를 비판 하였다 재판소라는것을 만들어 놓고 부당한 재판과 고문등 재판 과정이 옛날이나 다름 없기 때문이었다.
또 독립협회는 재산권 확보를 위한 싸움도 하였는데 법부대신 이유인과 고등 재판소 판사 마준영이 서로 짜고 백성들의 재판을 엉뚱하게 내리도록 독립협회가 논설로 이를 규탄 하자 법부 대신은 해임되고 마준영은 좌천 시키게하였다
골치 아픈 곳은 정부였다 .
정부 대신들은 독립신문을 이를 갈고 미워하며 없애야 한다고 했으나 정동 크럽의 외교관들이나 독립협회 회원들의 반발이 무서워 차마 입을 열지 못하였다
부패 관리들이 극성을 부리자 시폐 상소문을 올려 부패관리 숙청도 숙청 해줄것을 주장하였다
즉 1898 년10 월, 광화문 앞에서 조선의 전근대적 화페를 근대적 화페 로 바꾸면서 전환국장 이용익이 은 본위 화페를 제멋 대로 바꾸어 은화는 발행 하지 않고 보조 화페인 백동화를 너무 많이 남발하여 인플레가 발생 되었을 뿐만아니라 유통상에 큰 혼란이 발생 되자 독립신문은 이를 신랄하게 비난하고 이용익을 정부당국이 처벌 할것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그러나 왕실의 끄나풀인 이용익은 독립 협회와 독립 신문을 싸 잡아 입에 담을수 없는 욕설을 퍼부었을 뿐만아니라 평소 부터 이용익으로 부터 뇌물을 챙기던 대신들은 이용익을 두둔만 하였다
이에 독립 협회는 광화문 앞에서 연좌 시위 끝에 일곱 대신들을 실각시키는데 성공하였다
그들은 여세를 몰아 정치에 깊이 빠저 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정부에다 중추원 관직의 절반을 독립협회 회원들에게 주어 관민 연석 회의를 하자고 까지 주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부는 이를 묵살 하고 오히려 황국 협회라는 어용 단체를 만들어 대항 하도록 만들었다.
황국협회는 독립 협회에 대항하려고 정부가 조직한 단체로 참정대신 조병식이 만들었다 .
처음 만들때 명칭은 황국 총상회라 불렀다가 후에 황국협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참정 대신 조병식은 일찌기 부산의 절영도 사용권을 러시아에 넘기려다 독립협회의 공격을 받고 이를 이룩하지 못하자 독립 협회를 없앨 방법을 연구한 인물이었다 .
독립협회는 절영도 사건을 이유로 조병식에게는 참정 대신 사직 권유서를 보내고 이후 정부에 해임을 요구 하자 결국 해임 당한자이었다
황국협회는 보부상 중심의 단체로 107명 으로 구성되었다
보부상이란 시장 장사꾼으로 있으면서 값 비싼 잡화를 싸 들고다니는 봇짐 장수를 의미 하는 보상(褓商) 과 일용품 같은 가내 수공업을 취급하며 지게로 짊어지고 장사하는 등짐 장수를 말하며 부상(負商)으로 부른다 .
보부상들은 조선 초기 부터 있었는데 조정에서는 국가의 대사나 국란 위기때 마다 이들을 써 먹었다가 이들을 조직화 한것은 고종 19 년 혜상공국을 설치 하고 나서 부터였다
그때 까지도 이들을 파악만 하고 있었지 독립협회 견제용은 아니었었다
보부상은 국가로부터 인정을 받는 대가로 정치적으로 많이 이용 되어 왔다.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때는 식량과 무기를 운반도하고 보급 하기도하고 전투에도 참여하였다
동학 농민군 진압 작전에도 관군에 소속되어 동학군을 몰아내는데 한 몫을하였다 .
그러한 보부상이 황국협회라는 이름으로 독립협회에 대항 하기위한 전위대로 부상한것이었다
독립협회는 당초의 순수한 의도 와는달리 정치에 깊이 말려들기시작하였다 .
그들은 백성의 뜻이 정치에 반영 되어야지 정부의 몇몇 대신들의 의사나 임금의 단독적 판단만이 정치에 반영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소위 만여명의 시민과 학생들이 모여 백성들의 의사를 반영한다는 관민협의로서의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라는 집회를 종로 네거리에서 열게 되었다.
만민공동회에서는 6개조항의 결의안을내놓았는데 내용은 러시아 침략을 규탄하고 조선의 독립을 촉구하는 내용으로 이를 정부에 건의하였다
그러나 정부는 독립협회와 타협하는척하면서 황국협회를 부축여 독립협회를 탄압할 계획을 진행시켜 나갔다.
이범진이
"이놈들이 이제는 자기들이 정치를 해 나가겠다는 속셈이군, 무식한 군중을 이용 저희들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나쁜놈들"
하고 이를 갈았다
그러나 세상은 자꾸만 변해 가고 있었다
정부는 할수 없이 중추원 직제를 뜯어 고치어 독립협회의 주장을 받아 들이기로 하였다 .
그래서 만든것이 중추원의 의원을 관선과 민선을 각각 반반씩으로하여 선출하도록하되 민선은 27 세이상 민간인들 중에서 투표로서 뽑기로 하였다
민선은 미국 같은 데서나 볼수있는 조선으로서는 획기적 조치였다
그러나 민선이라는 과반수도 사실은 보부상 출신들로 메꾸려는 음모 였다
말로만 민선이지 모두 황국협회 출신 민간 으로 채워지었다.
이와 같은 정부의 간계(奸計)는 독립협회와 황국협회라는 두 단체간의 싸움으로 몰고갔다
황국협회 보부상들이 만민 공동회 집회 장소로 나타나 독립협회와 싸움을 걸어 왔다
순검은 있으나 마나였다
양자간의 피투성이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
싸움은 눈만뜨면 서울거리 곳곳에서 싸움이일어났다
일이 복잡 해지자 정부는 때가 왔다는듯이 중대한 조치를 취하였다.
독립협회와 황국협회를 동시에 해산 명령을 내리고 독립협회에 대하여는 해산 이유를 윤치호가 미국 모양으로 대통령이되고 박정양이 부통령이되어 공화국을 만들려한다고 뒤집어 씌워 독립협회 해산 명령을 내리었다
뒤이어 이상재등 간부 17 명을 잡아들이었다
광무 3 년에 일어 난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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