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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 10 년 봄이었다.
창덕궁 춘장대 앞뜰에서는 과 거시험이 한참 열렸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유생들이 춘당대 뜰에 앉아 있다가 동이 트면서 왕이 직접 영화당에 앉아 시험을 주관했다 .
조선에서는 관리가 될수있는 아주 큰 행사였다.
왕이 좌정하고 드디어 시험 제목이 내 걸렸다 ,시험은 그 날자로 당일 급제자가 결정 되게 되어 있었다.
이날 평안도 용강에서 태어나 열 아홉살이 되기 까지 글 공부를 하고 자신있게 응시하러 상경한 홍경래라는 청년도 유생들 시험 에 응시하려고 춘당대 뜰에 앉아 있었다 .
그는 자신있게 글을 써서 내고 장원 급제하리 라고 다짐하고 있었다.그러나 막상 시험 결과는 낙방이었다 .
(아니 이럴수가 있는가?)
조선시대의 과거제도는 사대부가 되기 위한 실력 본위의 등용문이다 .그러나 임진왜란이후부터 과거제도는 그럴듯하게 치루었으나 과거 제도를 통한 인재 등용은 형식에 불과 했다.
과거시험의 공정한 관리가 여러가지 폐단이 나타 나기 시작 한것이다.급제자 들은 권세가에 줄을 대어 뒤로 청탁이 들어가 있었고 또 달리는 노론 , 소론등 당권 에 연계시켜 양반 자제들만 합격 시키기도 했다..
조선 전기 때는 과거가 문치주의의 꽃을 피우기도 했으나 후대로 가면서 출세와 족벌정치의 산실로 변해있었다
더구나 평안도 출신들은 벼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 보다 더 힘들었다 .
서울에 와서야 과거제도의 헛점을 알게된 홍경래는 이를 갈았다
(아무리 공부를 열심히 해보았자 무슨 소용인가 썩어 빠진 이런 나라에서 과거 급제하여 입신 양명할 생각은 아예 버려야지...)
그는 서북 출신이라 심사 대상에서 아예 제외 되었을 것이라는 한 낙방생의 말에 더 분개했다.
(서북 출신이라 시험에서 제외 시켰다고? 어디 두고보자, 이놈의 나라 ....)
홍경래는 평안도로 돌아 가는 길에 백성들의 민심을 살폈다
곡산 땅에 왔을 때였다 .
주막에 들려 과객 끼리 지꺼리는 말을 듣고 아연 실색하였다 .얼마전 이마을에 37 명의 주민들을 관군이 학살하여 가장이 없는 집이 한집 건너 두집이라는 것이었다
"관군이 왜 불상한 농민들을 그렇게 죽였답니까?"
"아, 글쎄 곡산 관아에서 환곡을 받을 때 반백이니 분백이니 하여 나누어 주는 것도 분한데 관아 창고에 둔 환곡이 쥐가 파 먹어 줄어든 양곡분 까지 농민들에게 활당시켜 분배량을 낮추니 견디다 못한 백성들이 항의 했다고 관가에서 막 잡아 죽였습니다 .그려..."
"저런.....항의 정도로 그렇게 사람들을 많이 죽여서야...."
"하긴 앞장선 박대성이나 심낙화가 과격 하긴 했습니다만 ..."
"어떡했기에...."
"박대성이가 주민 200 명과 함께 곡산 부사에게 항의 할겸 찾아 갔더니 맨 앞에 있던 박대성이를 관원이 주민들 보는 앞에서 마구 패는 것이었어요 "
"저런...."
"그것을 본 주민들이 흥분하여 관원에게 대들어 마구 두들겨 몰매로 팼더니 관원들이 뺑소니 치었지요...."
"저런 ...그래서...."
"부사를 죽여라 하고 소리치며 동헌으로 처들어가 곡산 부사를 포박하여 곡산군 밖에다 내다 버렸지요...."
과객은 당시의 모습을 보고 있는듯이 신 바람나게 얘기하다가
"그런데 댁은 누구요?"
하고 묻는다
"지나는 과객 이외다 . 나는 관가와 인연이 없는 사람이니 걱정마시오."
하고 홍경래가 안심시킨후
"그래 관군이 가만히 있습디까?"
".사흘째 되는 날 까지는 조용했지요 ,곡성 관아 창고에 있는 쌀을 창고문을 뜯어내고 골고루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지요"
"잘했군요"
"그런데 관군이 나흘째 되는 날 들이 닥친 거에요"
"저런...."
"관군의 숫자가 많아 막아 낼수가 없지요 .그래서 항복했더니 관군들이 온동네 남자들을 모두 끌어 내더니 뒷산 골짜기에서 학살 했지뭐요 . 나도 그중에서 죽은 척하고 있다가 도망나온 사람이오"
"음"
홍경래는 한숨을 크게 쉬었다
(국가가 하는 일이 이래서 되겠는가 ? 이놈의 나라 이 썩은 정치를 뿌리 뽑고야 말리라)
홍경래는 다시 평안도 가산땅에 이르러 고개를 넘다가 한 암자에서 잠간 쉬어 가게 되었다 .암자는 인기척이 없었다
"게 누구없오?"
하고 홍경래가 방문을 열고 들여다 보니 중 한 사람이 눈을 감고 불경을 외고 있었다 .홍경래는 좀 기다렸다가
"말좀 합시다"
하고 청하였다
그 중은 그때서야 홍경래를 쏘아보더니
"댁은 뉘시오?"
"나는 홍경래라는 사람이외다. 과거를 보러 한양에 갔다가 낙방하고 돌아가는 길이외다"
하고 대답하자 그때서야 자리에 앉으라고 권한다
"나는 우군칙 이라는 사람이외다 .보아하니 나모양으로 낙방한 사람인 모양인데 앞으로 과거 볼생각은 꿈도 꾸지마시오 .조정은 평안도 사람이라면 무조건하고 낙방 시키는 모양이외다 .우리 가 평안도에 살고 싶어서 사나 ? 왜들 조정에서는 우리를 갖고 그러는지 모르겠소"
"맞습니다 썩은 조정이나 임금이 어찌 바로 이 나라를 끌고 나갈수 있겠소? "
"나도 동감이오 ,나도 평안도 출신에다 서자 출신이오 벼슬길이 이래도 막히고 저래도 막히게 되어 어짜피 벼슬은 못할거고 머리깎고 중아닌 중이되어 살고있소이다"
홍경래는 자기와 비슷한 처지의 우군칙이 범상한 인물이아님을 알아채고
"우선생 같은 분이 이런 암자에 썩어서 되겠습니까? 썩은 정치를 일삼는 조정과 임금을 갈아 치우고 새로운 나라를 세웁시다"
하고 우군칙에게 단도 직입적으로 의견을 제시했다.
"좋습니다 "
하고 우군칙의 눈이 빛났다 .
두사람은 앞으로 큰일을 위해 돈많은 동지와 힘있는 장사를 찾아 나섰다
먼저 가산군에서 글 잘하는 김창시와 가산군 갑부인 이희저를 만나 동지로 맞아 들었다 .이들은 글도 잘하고 청나라와 무역으로 돈을 모았으나 조정이 평안도 지역 차별에 불만을 품었던자들 이었기 때문에 홍경래와 우군칙 제의에 순순히 응한것이다.
두사람는 개천군의 장사로 소문난 이제초와 태천의 김사용등을 동지로 맞아들였다.
홍경래는 그동안 철산, 정주, 선천, 박천, 안주등 20개 고을에서 유력한 사람들로부터 호응응 받아냈다 .
드디어 평양을 빼고 평안도 일대는 홍경래의 손 아귀에있는것이나 다름 없었다.
드디어 순조는 순조 11 년 홍경래는 가산의 다복동을 총 본부로하여 군사훈련을 시작하였다
12월이되자 모든 준비는 다 끝 났다 .조정의 가렴주구로 농촌을 떠나 유랑하던 농민들이 거의 홍경래군에 속속 들어왔다
12월 18일 홍경래는 깃발을 높이세우고 한성으로 공격 명령을 내렸다
그는 우선 가산읍을 공격하여 군수 정시를 잡아 죽이고 잇달아 정주와 박천을 점령하였다
가는곳마다 동지들이 성문을 열어주고 공격에 가담하였다 . 이어서 구성과 태천을 점령하고.관아에 싸여있던 쌀을 모두 백성들이 마음대로 가져 가라 하였다.또다시 곽산을 점령하고 선천까지 점령 하였다 선천부사 김익순은 싸움 한번도 못하고 항복하였다.불과 6일만에 8게군을 점령한것이다.
이제는 평양을 점령할 차례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홍경래가 부상을 당하였다
파죽지세로 내닺던 홍경래군이 잠시 주춤하였다
조정에서는 홍경래가 주춤하자 정만석을 대장으로 하는 토벌군을 만들어 서북지방으로 출진 시켰다.
관군의 숫자가 점점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홍경래는 부상중에도 일일히 작전지시를 하며 관군과 대항했다. 전투는 역전되어 홍경래군이 밀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일단 정주성으로 물러나 재기를 기해야 하겠소 ,정주성은 성벽이 견고하여 관군들과 대항하기 아주 좋은곳이오.그곳에서 김사용과 약속이 있어 원군이 올것이니 그때 공격하도록 합시다"
홍경래군은 일단 정주성으로 후퇴하였다
관군 사령관인 정만석은
"홍경래가 정주성으로 들어간것을 보면 필히 원군 도착을 기다리고있는것이 분명하다 . 어떻게 하지?"
하고 망설이자 부장 이요헌이
"소문들으니 홍경래가 부상하여 전면에 나서지는 않는모양인데 이기회에 정주성을 함락 시키지요"
하고 공격을 하자고 하였다
"아니야 ,정주성은 보통 견고하게 축성된 성이 아닐세 .여기서 소모전만 할게 아니고 일부는 서어을 포위하고 일부는 곽산으로 진군 해야 할것 같아 .원군 도착의 고리를 끊을수도있고..."
곽산은 홍경래경비병이 얼마되지않아 손쉽게 빼앗을수 있었다.김사용은 선천에서 홍경래군이있는 정주성을 향하여 나가다가 관군이 거세게 몰아부치자 할수 없이 선천에 계속 머물고 기회만 엿보고있었다
한편 홍경래는 김사용의 원군이 도착하지않자 불안하였다
12월에 시작한 전투는 해가 바뀌어 1월달이 되었다.
찬바람이 스산하게 부는 성위에서 홍경래는 관군의 현란한 깃대를 바라보며
"썩어빠진 이나라를 바로잡아야 한다 .이놈들 부패한 군대가 감히 우리 혈기왕성한 의기를 꺾을수있겠느냐?"
하고 부상당한 왼쪽손을 감싸고 내려다보았다
관군도 웬일인지 공격할생각을 않고 있었다 .
우군칙이 어느새 옆에 나타났다
"홍장군, 아무래도 김사용이 배신한게 아닐가요?"
"별 말씀을 김사용은 그럴사람이아니오 "
"그러면 왜 지금까지 소식이없을까요?"
"우장군, 조금 더 기다려 봅시다"
하지만 1,2월이가고 3월이되어도 기다리는 김사용은 연락도 없고 관군은 공격도 하지않고있었다
홍경래가 우군칙을 불렀다
"아무래도 김사용이 사고가 생긴것 같소. 적들이 성내의 양곡이 바닥날때를 기다려 공격하려 하는것 같으니 이대로 있다가는 모두 굶어 죽겠소 .먼저 선제 공격을 합시다"
"예 알겠습니다"
새벽 먼동이 틀무렵이었다 우군칙은 500명의 군사를 이끌고 관군을 기습하였다. 포위하라고 지시만해놓고 주력부대를 모두 끌고 김사용 추격전에만 몰두하고있던 관군은 정주성 포위 부대는 새벽잠을 자다 기습하여오는 우군칙부대에 모두 몰살당하고 말았다 .
"적 170여명응 죽이고 나머지는 도망치었고 막대한 식량을 빼앗아왔습니다"
"수고했소"
홍경래는 우군칙의 손을 잡고 오래간만에 위로했다.
관군 총사령관 정만석은 그때서야 홍경래가 있는 정주성을 소흘히한것을 후회하고 병력을 정주성으로 보강하여 포위망을 더 압축하였다
정만석은 김사용을 정주성에 접근 못하게 하고 이번에는 정주성에 집중하기로 작정했다.
3월이 지나 4월이되었다 .
관군 토벌대장 유효원이 정만석에게
"장군 , 지금 쯤이면 먼저 우리로부터 뺏아간 양식이 모두 바닥이 났을겁니다 . 우리가 선제 공격을 않으면 저들이 다시 공격을 해 올것이 분명합니다 .이기회에 뿌리를 뽑지요"
하고 제의한다
"옳은 말이오 내일 새벽에 공격합시다 .그런데 성이 워낙 견고해서 사다리나 밧줄로 성벽을 공격하기에는 희생이 너무 클것 같은데 "
"걱정마십시요 .제아무리 견고한 성이라도 화약을 터뜨려 폭파시키면 않 무너질 성이없습니다 .오늘밤내로 몰래 성밑에 장치해 놓겠습니다 "
"허...좋은 생각이오, 임진란때 명나라 군대가 평양성을 공격할때 그런 방법을 써 성공했다는 말은 들었소 , 좋은 생각이오"
다음날 새벽이었다
유효원의 명령이 새벽하늘을 흔들었다
"화약에 불을 붙여라"
유효원의 명령과 함께 화약을 향하여 불이 타들어가고 성벽이 우뢰같은 소리를 내며 무너지기 시작했다
"쾅 쾅 "
여기저기 성벽이 무너지는소리가 새벽하늘을 흔들었다
"총 공격"
유효원의 명령이 떨어지자 관군은 총과 활을 쏘아대며 성안으로 처들어 가기 시작했다.
"어서 도망치시오 어차피 나는 부상당한 몸 싸우다 죽겠소"
홍경래가 옆에 있던 우군칙과 홍총각 과 부장들에게 비장한 말을 던지고 칼을 차고일어선다
"아니 홍장군 왜 그러시오, 우리가 나가지요"
우군칙이 말리나 홍경래는 뿌리치고 말에 올라타고 밀려 들어오는 관군속으로 뛰어 들었다
"이놈들아 썩어 빠진 나라의 녹을 받아 먹는 놈들 내 칼을 받아라"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말위에서 칼을 후두르는던 홍경래는 관군들이 집중적으로 쏜 탄환과 화살에 맞아 말아래로 힘없이 떨어진다.
순조 12년 4월 19일이었다
홍경래가 죽자 반군은 풍지 박산이 되었다 .우군칙 이희저 김사용이 모두 죽고 말았다 .
살려 달라고 비는 홍경래군에게 관군은 무지비하게 죽이었다 .그숫자가 자그만치 1000여명이나 되었으니 조선이 생긴 이래 정규 군사 반란군이 아닌 순수 민간 반란으로서는 최대였다
결국 평안도에 일어난 반란 사건은 홍경래의 사망으로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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