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용 한국가이드스타 상임이사
권오용 한국가이드스타 상임이사

한국 경제가 두 자리 수 이상의 고도성장을 거듭했던 때가 1970~80년대 였다. 1970년의 GDP성장율은 12.9%, 1988년은 11.7%였다. 이 때는 7~8%의 경제성장율이 불안하다며 분발을 다짐하던 때 이기도 했다. 

“아들도 한번쯤은 아빠가 뭔가 해내는 걸 봐야할 걸 아니야.” 영화 미나리의 남자 주인공 제이콥이 아내에게 던진 말이다. 고도 성장기 한국인은 유난히 소명의식이 높았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국민교육헌장) 태어난 세대였음이 틀림없다.

 

독일에 파견되는 광부는 애국가를 4절까지 부르는 시험을 통과해야 했다. 중동의 뜨거운 건설현장에서도 국기 하강식은 매일 있었다. 아칸소의 시골 마을로 가족들을 상의도 없이 끌고가 개 고생을 시키면서도 꿈은 놓지 않았다. 빛나는 미래는 이 시절의 키워드였다. 이 유별난 소명의식으로 반세기 전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했던 나라가 이제는 GDP기준 세계 10위의 경제대국으로 우뚝 섰다.

 

당시 우리는 이민을 보내는 나라였다. 젖먹이도 해외에 입양시켰다. 입을 하나라도 줄여야 남은 가족들이 먹고 살 수 있었다. 100년 전 하와이 사탕수수 밭 노동자로 팔려간 게 이민 1세대였다. 그들은 수레 끄는 사람 취급을 받았다. 가진 건 몸통 하나뿐 이었다.

영화 '미나리'에 나오는 이민 2세대는 기술 하나는 달고 떠났다. 병아리 감별사가 그 중의 하나였다. 같은 사료를 먹어도 살이 잘 붙지 않고 달걀을 낳지도 못하는 수컷을 골라내는 게 일이다. 부화된 지 30시간 만에 암수를 구별해야 하니 손맛이 섬세 해야 한다. 그래서 병아리 감별사는 손재주 좋은 한국 사람에게 잘 맞는 기술이었다. 한 때 세계 병아리 감별사의 60%를 한국인이 차지했었다고 한다.  

 

영화 '미나리'의 정이삭 감독은 병아리 감별사의 아들이다. 그들이 이민 2세대라면 다음 세대는 이제 워싱턴 정가와 뉴욕 월스트리트까지 발판을 굳히고 주류 사회로 편입됐다. 세탁소와 한식당을 경영하고 태권도 사범이 주류였던 이민자들의 직업도 전기, 전자, 의료, 공공영역의 전문직으로 변했다.

 

이런 변화는 어떻게 가능했을까? '미나리'에서 제이콥은 농장의 우물 만들 곳을 찾다가 어린 아들에게 “한국 사람은 머리를 써.” 라고 말한다. 변화의 동력은 머리였다. 지금도 한국인의 IQ는 세계 1, 2위를 다툰다. 노동 집약적 산업인 섬유, 가발에서 자본 집약적 중화학공업의 제품 까지가 이민 2세대까지 한국경제의 성취였다.

그러나 최근 K팝, K무비, K푸드, K게임 등 지식 집약적 산업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고 있는 것은 한국 사람들이 머리를 쓰기 때문이다. 제이콥은 우리 경쟁력의 핵심을 정확히 꿰뚫어 봤다. 영화에서는 머리를 썼기 때문에 우물을 찾는 300달러를 아낄 수 있었다. 지식은 비용을 줄이고 효율을 높이는 혁신의 첩경이다.

이국 땅에서 뿌리 내리기는 힘들다. 그래도 할머니는 온다. 겁도 없다. 어디든 잘 적응하는 여러 해 살이 풀 미나리처럼 할머니는 개의치 않고 짐을 바리바리 챙겨서 온다.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셔도 가장이 되지 못한다. 자기가 낳은 아들이 가장이 된다. 그런데 묘하게도 할머니가 계시지 않으면 집안이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다. 손자는 침대에 재우고 자신은 바닥에 누우니 새로운 공간의 부담도 없다. 겉보기로는 조연이지만 실제로는 주역이나 진배없다.
한국은 세계사의 주역이 된 적이 없다. 남의 영토를 탐 낸 적도 없고 남의 국민을 노예로 부린 적도 없다. 침략을 당했고 전쟁을 겪었고 폐허에서 새로 출발해야 했다. 그런데 미나리 같이 살아 남았다. 미나리에 물이 있다면 한국에는 사람이 있었다. 이들 인재들의 덕분에 세계 반도체의 3분의 2를 만들어 내고 선박의 절반을 건조하고 있다. 석유 한 방울 안 나는 나라에서 석유제품이 수출 1등이 되는 이변을 일으켰다.

마치 늦게 핀 꽃과도 같다. 시련과 고난을 겪고 이룩한 늦깎이(레이트 블루머) 경제 대국. 주역이 된 적은 없지만 이제는 한국 없이 세계 경제의 흐름을 얘기할 수 없게 됐다. '미나리'의 순자(윤여정 분)가 했던 역할이다.

'미나리'에서 순자는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위험하다고 했다. 물가에 나타난 뱀을보고 놀라는 손자에게 한 얘기다.

지금의 한국 경제도 마찬가지다. 외형적 성과에 도취해 보이지 않는 위험을 간과하고 있지는 않은가? 고도성장의 그늘에 안주 해 막연한 낙관 만을 노래하는 베짱이가 된 것은 아닐까? 보이지 않는 위험은 도처에 도사리고 있다. 기업가 정신의 쇠퇴, 정치논리의 경제영역 침입, 비대한 공공부문, 만연한 공짜 의식, 공정과 정의의 실종, 지역⋅소득⋅계층⋅성별⋅이념을 아우르는 양극화 현상. 이 모든 것을 엮어 나는 부모 세대보다 못 사는 최초의 세대를 걱정한다. 그렇게는 안 되겠지만 제도를 정비하고 우리의 의식과 관행을 다시 잡아야 한다.

공짜 점심은 없다. 비린내를 없애고 아삭한 식감을 살려주는 미나리를 구해와야 한다. 김치에도 넣어 먹고 아플때는 약도 되는 '원더풀', '놀라운풀' 미나리의 당당한 존재감이 꼭 필요한 때가 됐다.

한국 경제의 성장 과정을 꿰뚫었던 영화 '미나리'는 끝자락 “Rain Song(비의 노래)”에서 더 아름다운 미래를 암시했다. “겨울이 가는 사이 / 봄을 반기는 아이 / 온 세상과 숨을 쉬네 / 함께 맞이하는 / 새로운 밤의 꿈.” 한국 경제는 미나리처럼 강인하게 커 나가 혁신과 성공의 꿈을 이룰 것이라 믿으며 '늦깎이' 윤여정의 오스카 상 수상에 다시 한번 박수를 보내고 싶다.

출처 : 글로벌경제신문(http://www.g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