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속 듣기-
UNCHAINED MELODY-Righteous Brothers(라이처스 브라더스)
HEY JUDE-Beatles(비틀즈)
SADDLE THE WIND-Lou Christie(루 크리스티)
WASHINGTON SQUARE-Village Stompers(빌리지 스탐퍼즈)
HEY TONIGHT-Creedence Clearwater Revival-C.C.R. (씨씨알)
`세시봉 생각이 납니다`
프랑스어로 `C’est si bon`이고 중구 무교동에 자리잡고 있던 음악감상실이다.
위치를 정확하게 설명한다면 무교동 네거리에서 광교 방향으로
스무걸음 정도 가면서 왼쪽길 골목을 들어서자 마자 `세시봉`이 자리잡고 있었다.
스타더스트란 클럽이 옆에 있었고, 60,70년대에 청춘들에게
최고의 음식으로 꼽혔던 낙지볶음집이 그 근처에 있었다.
그리고 입구에는 한밭식당이란 설렁탕집이 있었다.
세시봉은 청년들의 쉼터이고 사색의 공간이었으며 문화사랑방이었다.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는데 지금 돈으로 3,000원 정도 하지 않았을까?
입구에는 키가 큰 주인아저씨가 버티고 서 계셨는데
그분은 평안도에서 피란오셨고 힘이 장사여서 주먹 좀 쓴다고
어깨 흔들고 다니던 젊은이들이 그분한테 혼이 나는 일이 가끔 있었다.
이 음악감상실에 들어가면 우선 의자가 푹신해서 좋았고 음악이 만만했다.
허구한날 클래식만 틀어대는 다른 음악감상실에 반해 여기에서는
팝이나 재즈·샹송·칸초네 등을 주로 들려주었기 때문이다.
3,000원 내고 들어가면 차가 한잔씩 나오고 때로는 약간의 과자도 서비스됐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종일 있어도 나가라는 소리를 하지 않아서
젊은이들에게 매우 인기가 있었다.
좌석은 아래 위로 두 단계로 나눠져 있었고 들어가면서 왼쪽에 무대가 있었다.
무대 위에서는 매일 새로운 이벤트를 벌이곤 했다.
나는 세시봉에서 수많은 이벤트를 벌였다.
이 집 주인인 이선생이 내 이야기라면 무조건 들어주는
바람에 일을 벌이기가 수월했다. 심지어는 내 명함에 사인을 해주면
돈 없는 대학생들 몇 명 정도는 입장료 안내고 들여 보내주기도 했다.
내가 여기에서 기획하고 진행했던 이벤트는 `성점감상실`
`신곡합평회` `시인만세` `신인가수 선발` `스타 데이트` 등 다양했다.
거의 매일 이곳을 들렀고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때 세시봉에서 많은 가수들이 탄생을 하게 된다.
<정홍택 기자>
청바지와 통기타,생맥주로 상징되던 70년대 청년문화.
시내 곳곳의 음악다실엔 그 청년문화를 이끌던 DJ들이 있었다.
음악을 신청하던 사람들도,그들의 신청곡을 받아주던 DJ도
모두 낭만을 이야기하던 시절.그때 그시절 선망의 대상이자
`원조 신세대 문화`의 상징적 아이콘이었던 그들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DJ는 디스크(레코드)와 자키(기수)가 합쳐진 디스크 자키의 약자.
전문적인 해설과 즉흥적 이야기로 라디오 음악프로그램을
이끌던 진행자로 1930년께 등장했다.
우리나라에선 이종환 김광한 임국희 최 모(기억이..) 김기덕등으로
대표되는 방송 DJ들이 전파를 타고
추억의 음악을 실어 날랐고 시내 음악다실 DJ들은 좁은 공간에서 훨씬
더 친밀하게 대중들과 교감을 나누며 대중적 감성을 전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