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취산-깃대봉-육십령 / 4월 27일
백두대간을 양날개로 편 거대한 솔개-영취산
`솔개 떴다, 병아리 감춰라`
따뜻한 봄날 어미닭이 병아리들을 몰고 다니며 먹이를 찾고 있는데 동네 아이들이 팽이치기, 자치기를 하고 놀다가 푸른 하늘에 박힌 까만 점 하나를 보고 소리를 지르면 어미닭은 울 안으로 좀종걸음을 쳐 품에 제 새끼들을 감춘다.
솔개는 수컷이 길이 60여cm, 암컷은 70여cm나 되는 큰 새로 한번 노린 먹이는 절대 놓치지 않는 날래고 담대한 맹금류이다. 또한 그 부리와 발톱은 굳세고 날카로워 뱀조차 공포에 떤다.
이러한 솔개가 좌우로 날개를 길게 늘어뜨리고 창공에서 먹이를 노리고 있는 솔개 형국의 산이 영취산이다. 백운산 쪽으로 굽이치는 대간 능선이 오른쪽 날개이고 깃대봉으로 흐르는 대간 줄기는 왼쪽 날개이며 호남금남정맥으로 흐른 장안산이 꼬리 부분에 해당한다. 강건한 기상을 상징하는 솔개 형국의 영취산이라는 이름의 산은 경남 창녕에도 있고 여수에도 있다.
갑자기 무슨 풍수지리 얘기를 늘어놓으시냐고 하겠지만 우리 민족의 역사가 열린 이래 풍수지리는 하나의 세계관이었으며 민간신앙으로까지 파고들었고 오늘에 와서는 우리 조상들의 전통지리사상으로 평가하는 학자들도 있다.
단군이 신시를 선정하고 온조와 비류가 백가제해(百家濟海)하여 도읍을 정한 <삼국유사>나 <삼국사기>에 나오는 이야기가 바로 풍수설과 관련된 최초의 기록으로 보아야 한다는 학자들이 있다.
중국에서는 기원전 4, 5세기경 전국시대 말기에 풍수설이 싹트기 시작했다고 한다. 한 치 앞도 내다보기 어려운 혼란기에 개인의 운명이나 국가의 흥망성쇠를 설명할 논리가 절실히 요구되었던 것이다. 그 뒤로 한나라 때 청오자(靑烏子)가 쓴 <청오경>과 동진의 곽박이 쓴 <금낭경(錦囊經)>에 의해 체계화 되었다.
당대에 이르러 도교를 신봉하던 당왕실에 의해 풍수설은 극성기를 맞게 되었으며 당과 활발히 교류하던 신라의 지식인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으리라 추측이 된다. 이러한 배경에서 우리나라 풍수지리의 할아버지인 옥룡자 도선이 출현하였다.
신라 말의 승려 도선(道詵, 827~898)은 우리나라 산수의 혈맥이 조화를 이루지 못한 까닭에 작은 땅이 삼국으로 쪼개져 싸움이 잦고 변란이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삼국의 산수를 그리고 3,800군데에 점을 찍어 그곳에 사찰을 세워나가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는 인간이 급한 병이 생기면 혈맥을 찾아서 침도 놓고 또는 뜸질도 해야만 병을 고치게 되는 이치와 같은 것이었으니 이것을 바로 '비보(裨補)'라고 한다. 도선은 500 군데에 사찰을 세우고 왕건을 도와 삼국을 재통일하게 하였고 지맥이 허한 곳을 찾아 절이나 불상, 불탑, 장생표를 세워 지맥을 보허케 하였다. 신라말 고려초의 이러한 풍수지리에서 파생된 산천비보 사상은 풍수지리 사상과 함께 지배층은 물론 서민들에까지 주요 신앙으로 자리잡았다.
조선시대에 와서도 풍수설은 더욱 신봉되었고 이의 폐단도 많이 나타났다. 특히 가문의 길흉화복이 조상의 묘자리에 의해 결정된다는 음택풍수가 기승을 떨었다. 조선시대의 송사문제 상당부분이 가문끼리의 묘자리 분쟁이었다. 실학자 박제가는 그의 저서 <북학의>에서 `전라도 일대는 우심한 버릇이 들어 열 집 가운데 아홉 집이 지관 노릇을 한다`고 꼬집었다. 풍수연구가 김광언(인하대 교수)은 이를 두고 `전남 영암 출신인 도선이 입적할 때까지 35년간 전남 광양의 옥룡사에서 수백명의 제자를 길러내며 이 지역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호남지방이 풍수설의 탯자리이며 이곳에서 성장 발전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여하튼 풍수지리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백두대간을 이어가며 만나는 숱한 지명들을 제대로 소화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산줄기 강줄기에 베인 조상들의 숨결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4월 27일 새벽 4시 30분에 무령고개에 도착하여 5시 30분에 산행을 시작하였다. 고개 마루 바로 밑에 있는 무령약수터는 항상 샘물이 콸콸 쏟아져 내를 이루고 흘러간다. 서늘한 약수를 배에 담고 병에 담아 배낭에 차고 악랄하게 잘린 무령고개 에 올라 호남금남정맥으로 올라챘다. 고닥새 영취산 정상에 올랐다. 정상에는 언제부터 시작했는지 모르지만 돌무더기가 점점 쌓여 탑을 이루고 있다. 솔개의 정수리를 돌탑이 누르고 있는 것이다. 솔개가 그 기상을 펼 수 없음은 당연한 이치이다. 그래서 새의 형국을 한 산에 묘를 쓸 때에는 석물(石物)을 쓰지 않는다. 탑 옆으로 쑥이 자라고 있었다. 영취산 정상의 쑥은 특별한 약효가 있을지 모르겠다.
일본을 떠도는 논개의 혼령
대간 줄기를 따라 북으로 길게 골짜기가 이어지는데 이것이 바로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이다. 저수지 위로 마을 하나가 손에 잡힌다. 바로 주촌 마을인데 이곳은 주논개가 태어난 마을이다. 논개의 간단한 약력을 알아본다.
<1세-1574년> 현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주촌에서 탄생.
<5세-1578년> 부친 주달문 사망후, 모녀는 한 마을에 사는 숙부 주달무 집에 의탁함.
숙부는 어린 조카를 김풍헌 집에 민며느리로 보낸다는 약조를 하고 금품을 받아 달아남.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어머니는 논개를 데리고 친정으로 피했다가 체포되어 장수관아에 수감됨.
<6세-1579> 이른봄, 장수현감 최경회의 심리로 재판이 열림.
무죄 선고를 받았으나 돌아갈 곳이 없는 모녀는 침방관비를 자청.
김씨 부인의 배려로 내아에서 심부름을 하며 살게 됨.
늦가을, 모녀는 무장현감으로 전직된 최경회를 따라감.
<9세-1582> 최경회가 영암군수로 전직되자 따라감
<14세-1587> 최경회가 사도시정으로 갈때 수행함.
<17세-1591> 최경회의 부실이 됨.
최경회가 모친상을 당하여 고향 화순으로 갈때 논개는 고향 장수로 와서 기다림.
<19세-1592> 최경회가 전라우도 의병장으로서 장수로 와 의병을 모집하고 훈련시킬 때, 논개는 의병 훈련 뒷바라지함.
<20세-1593> 최경회가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제수되어 2차 진주성 전투를 할때 논개는 성안에서 전투의 뒷수발을 함.
성이 함락되고 최경회가 순국한 뒤, 논개는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의암으로 유인하여 남강에 투신 순절함.
이러한 주논개의 넋이 억울하게 일본 땅에서 통곡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못난 후손들이냐. 쓸개도 창자도 없는 넋빠진 후손들이 그의 혼을 다 팔아먹은 것이다.
`용서하라, 그러나 잊지는 말아라`(Forgive, but don't forget`)
나찌 치하를 겪은 프랑스의 독립기념관 입구에 새겨진 문귀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쉽게 망각해버리는 것은 아닐까. 그 사연을 <한겨레21>에 난 기사를 그대로 옮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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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인이 의롭게 죽었으니/ 곰과 물고기의 덕이라 하겠네/ 밝게 빛나는 청정한 자태여!/늠름하고 결백한 지조여!// 왜장 한놈 죽였다고 말하지 마라/ 모든 왜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네/ 한 작은 여인이라 말라지 마라/ 만 장부의 팔뚝처럼 떨쳤다네// 흐르는 강물도 바위를 갈지 못하니/ 천년의 의암은 언제나 남아 있네.”
조선 말기, 희재 안종창이 쓴 ‘의기암에서’라는 시다. 이 시에 나오는 ‘한 작은 여인 의암’은 임진왜란 때 왜장을 잡고 강으로 뛰어든 ‘논개’를 일컫는다.
최근 논개의 영정과 가묘가 그가 죽음으로 이끈 왜장과 함께 일본의 한 사당에 모셔진 것으로 확인돼 그의 후손들과 학자들의 의분을 일으키고 있다. 특히 논개는 기생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실제로는 의병장 최경회의 부인이었음이 밝혀져 분노가 더욱 증폭되고 있다.
이야기는 1970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은퇴한 일본인 건축설계사 우에쓰카 하쿠유는 후쿠오카현 다가와시 근처 히코산 기슭의 자신 소유 밭을 갈다가 한 묘비를 발견한다. 그 비석에는 임진왜란 때 이름을 떨친 게야무라 로쿠스케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신의 칼’이란 별명을 가진 게야무라는 임란 때 쇼군 가토 기요마사의 선봉장으로 승승장구한 전설적인 사무라이였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그런 명성에 걸맞지 않았다. 진주성 싸움의 승리를 기념하는 잔치에서 술을 마시다 조선의 여인 ‘논개’에게 죽임을 당한 것이다.
우에쓰카는 그런 게야무라의 비극적 죽음을 흠모했다. 그래서 그의 ‘부끄럽고도 억울한’ 죽음을 풀어줄 묘안을 생각해 냈다. 바로 그를 죽음으로 이끈 조선 여인의 영혼을 함께 모시는 것이었다. 그는 73년 한국의 진주에 처음 찾아와 그런 뜻을 전했다. 그러나 한국인들의 반발이 거셌다. 그러자 그는 새로운 명분을 내세웠다. 논개와 게야무라의 영혼을 함께 모시는 일이 한-일간의 역사적 화해와 교류, 영혼들의 원풀이라는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었다. 그런 주장으로 그는 진주시와 관계자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진주에서 논개와 게야무라의 넋을 건져 이를 일본으로 모셔가는 의식을 치렀다. 진주 남강에 국화를 뿌리고 1천마리의 종이학을 띄웠다. 나아가 그는 히코산에 게야무라와 함께 논개의 무덤을 만드는 작업을 벌였다. 그는 논개가 순국한 진주시에서 모래와 나무, 흙, 논개의 고향 장수에서 돌을 가져다 게야무라의 무덤 옆에 논개 무덤을 꾸몄다. 또 진주 촉석루 옆 ‘의기사’에 걸린 논개 영정과 똑같은 영정을 만들어 일본으로 가져갔다.
그뒤 논개의 영정은 마치 게야무라의 첩이라도 되는 양 그의 아내, 처제와 나란히 놓이게 됐다. 이에 따라 “전쟁중에 게야무라를 만난 논개가 전쟁이 끝난 뒤 게야무라를 따라 일본에 건너와 함께 해로하다 죽었다”는 사실과 정반대의 이야기까지 생겨났다. 심지어 논개는 이곳을 찾는 일본인들에게 “부부관계를 좋게 만들고 아기를 점지해주는 신”으로까지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76년 게야무라와 논개를 모신 사당인 ‘보수원’ 준공식 겸 합동진혼식 때는 우에쓰카를 도운 진주 유지들이 부부 동반으로 참석했다. 어처구니없는 일은 당시 진주 시장이 우에쓰카에게 감사장까지 줬다는 것이다.
얼핏 생각하면 논개와 게야무라의 영혼과 영정, 무덤을 함께 모신 일은 ‘한-일간의 역사적 화해와 교류’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일본쪽의 ‘방자한’ 행위는 논개의 숭고한 뜻을 훼손하면서 그를 두번 죽이는 일이라는 지적이 거세게 일고 있다.
최경회 장군의 후손들인 해주 최씨 전남 화순군 종회는 민순지의 <임진록> 등의 기록을 들어 논개가 1574년 전북 장수에서 태어나 1590년 어릴 적의 인연으로 최경회의 부실이 된 주논개 부인이라고 확인했다. 그전에는 유몽인의 <어우야담>에 따라 논개를 무심코 ‘진주 관기’로 여겨왔다. 해주 최씨 종회에 따르면 1593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인 최경회 장군은 제2차 진주성 싸움에서 패배한 뒤 자결했다. 최 장군과 함께 이 싸움에 참가했던 주논개 부인은 슬픔과 의분을 참지 못하고 왜적들의 승전 잔치에 ‘기생으로 가장해’ 숨어든 뒤 술에 취한 적장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안고 진주 남강으로 뛰어들었다.
따라서 남편과 조국의 원수를 처단한 그의 영정과 무덤이 바로 그 적장과 함께 모셔진 일은 어떤 이유로도 이해될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논개 부인과 최경회 장군만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역사 자체를 모욕하고 능멸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해주 최씨 종회는 지난 4월부터 진주시와 중앙정부 등에 이런 진상을 철저히 조사해 논개의 영정과 진주에서 불러간 논개 부인 영혼, 장수지방의 돌로 만든 논개 비석 등을 정부 차원에서 찾아올 것을 요구해 왔다.
그러나 회신은 예상 밖이었다. 진주시는 이 일에 나서기가 어렵다는 난색을 표시했다. 일본 정부가 아닌 민간인 우에쓰카가 한 일이고, 그의 진의가 역사 사실이나 논개의 정신을 퇴색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며, 한-일간의 화해와 협력에 나쁘지 않다는 것 등이 이유였다. 논개 영정을 돌려받는 일 등을 굳이 하고 싶으면 해주 최씨 문중에서 주도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도 덧붙였다.
문화관광부는 해외홍보원을 통해 조처하겠다고만 답해왔고, 외무부는 보수원에서 열린 논개·게야무라 합동위령제에 후쿠오카 한국 총영사가 참석한 것에 대해 아무런 해명을 하지 않았다.
장본인인 우에쓰카는 “사전에 논개가 최경회 장군의 부인임을 몰랐다”며 “해주 최씨 문중에서 계속 문제를 삼는다면 영정을 반환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나 영정 외에 영혼과 비석은 돌려줄 수 없으며, 합동위령제는 계속하겠다는 입자이었다. 게다가 논개에게서 정신적 위안을 찾는 재일동포 거류민단의 반대로 영정마저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서사시 ‘논개’와 <논개> 평전을 발표한 문학가 정동주씨는 “논개의 의로운 죽음이 조정으로부터 공인을 받는 데 147년이 걸렸고, 그가 기생이 아니라 의병장의 아내였다는 것을 확인하는 데 400여년이 걸렸다. 적장 게야무라와 함께 있는 그의 영정과 영혼이 한국땅으로 되돌아와 그가 편안히 잠드는 데는 또 얼마나 긴 세월이 필요할지 모르겠다”고 한탄했다. 의로운 조선의 여성 주논개가 땅 속에서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김규원 기자>-한겨레21 1998년 12월 17일 제23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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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십령의 도적떼
갈참나무가 우거진 대간 마루금을 따라 오르락 내리락이 없이 수월하게 진행했다. 군데군데 피어난 이름모를 야생화를 카메라에 담으며 걸었다.
`허형! 이리 좀 와보시오`
뒤따라오던 탁사장이 부른다. 회색, 흰색이 어우러진 참새보다 작은 앙증맞은 새 한 마리가 신갈나무 가지에 앉아 울고 있다. 카메라를 들이댓더니 이 새는 도망을 치지 않고 오히려 더 가까이 날아와 앉았다. 참으로 희안한 일이었다. 나중에 이 이야기를 했더니 장박사는 등산객들이 흘리고 가는 먹이를 주워먹기 때문에 사람에게 접근한다고 하였다. 과연 맞는 이야기 같았다.
한참을 가다 탁사장이 또 불러서 보니 대간 마루금 풀 섶에 개구리 한 마리가 있었다. 무슨 개구리인지 모르겠지만 청개구리보다 몸집이 두 배 정도 큰 것으로 보아 청개구리는 아닌 듯 싶었다. 보호색을 띄어 주위의 갈색 풀 섶에서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지난 4월 22일 교보환경대상 교육부문 대상을 수상한 류창희 선생이 생각났다. 그는 동면에서 깨어나 알을 낳기 위해 하산하여 물웅덩이를 찾는 개구리를 무사히 옮겨주는 일을 계속 해오는 분이다. 그에 의하면 산란을 위해 아스팔트길을 건너다가 자동차에 치여 개구리들이 떼죽음을 당한다는 것이었다.
깃대봉에 오르기 전에 뒤에 처진 일행 몇이 낮잠을 자기로 했다. 따가운 봄볕을 우산으로 가리고 용과 등을 맞대었다. 깃대봉에 올라 김밥으로 점심을 먹었다. 육십령에 도달할 즈음에 육십령에서 남덕유로 올라채는 대간 한 켠이 처참하게 헐리는 꼴을 보았다. 채석장이 들어선 것이다. 발파 작업 굉음이 간간이 들리는 가운데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덤프트럭이 들락날락 하고 있었다. 이곳에까지 채석장 허가를 내준 함양군수는 분명 옛날 육십령을 오가던 민초들의 봇짐을 털던 강도나 다름없다. 고이 보전해서 후세에게 물려주어야 할 백두대간을 마구 파괴하여 팔아먹고 있으니 이 어찌 강도가 아니겠는가.
해발 650미터의 육십령은 장수와 함양을 잇는 고개로 60명을 채워서 넘어야 호랑이나 도적떼로부터 안전을 보장받았다 한다.(^_^)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오동제 저수지 안에 논개의 생가가 있었다. 지금은 저수지 위에 복원해 놓았다.
백두대간을 양날개로 편 거대한 솔개-영취산
`솔개 떴다, 병아리 감춰라`
따뜻한 봄날 어미닭이 병아리들을 몰고 다니며 먹이를 찾고 있는데 동네 아이들이 팽이치기, 자치기를 하고 놀다가 푸른 하늘에 박힌 까만 점 하나를 보고 소리를 지르면 어미닭은 울 안으로 좀종걸음을 쳐 품에 제 새끼들을 감춘다.
솔개는 수컷이 길이 60여cm, 암컷은 70여cm나 되는 큰 새로 한번 노린 먹이는 절대 놓치지 않는 날래고 담대한 맹금류이다. 또한 그 부리와 발톱은 굳세고 날카로워 뱀조차 공포에 떤다.
이러한 솔개가 좌우로 날개를 길게 늘어뜨리고 창공에서 먹이를 노리고 있는 솔개 형국의 산이 영취산이다. 백운산 쪽으로 굽이치는 대간 능선이 오른쪽 날개이고 깃대봉으로 흐르는 대간 줄기는 왼쪽 날개이며 호남금남정맥으로 흐른 장안산이 꼬리 부분에 해당한다. 강건한 기상을 상징하는 솔개 형국의 영취산이라는 이름의 산은 경남 창녕에도 있고 여수에도 있다.
갑자기 무슨 풍수지리 얘기를 늘어놓으시냐고 하겠지만 우리 민족의 역사가 열린 이래 풍수지리는 하나의 세계관이었으며 민간신앙으로까지 파고들었고 오늘에 와서는 우리 조상들의 전통지리사상으로 평가하는 학자들도 있다.
단군이 신시를 선정하고 온조와 비류가 백가제해(百家濟海)하여 도읍을 정한 <삼국유사>나 <삼국사기>에 나오는 이야기가 바로 풍수설과 관련된 최초의 기록으로 보아야 한다는 학자들이 있다.
중국에서는 기원전 4, 5세기경 전국시대 말기에 풍수설이 싹트기 시작했다고 한다. 한 치 앞도 내다보기 어려운 혼란기에 개인의 운명이나 국가의 흥망성쇠를 설명할 논리가 절실히 요구되었던 것이다. 그 뒤로 한나라 때 청오자(靑烏子)가 쓴 <청오경>과 동진의 곽박이 쓴 <금낭경(錦囊經)>에 의해 체계화 되었다.
당대에 이르러 도교를 신봉하던 당왕실에 의해 풍수설은 극성기를 맞게 되었으며 당과 활발히 교류하던 신라의 지식인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으리라 추측이 된다. 이러한 배경에서 우리나라 풍수지리의 할아버지인 옥룡자 도선이 출현하였다.
신라 말의 승려 도선(道詵, 827~898)은 우리나라 산수의 혈맥이 조화를 이루지 못한 까닭에 작은 땅이 삼국으로 쪼개져 싸움이 잦고 변란이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삼국의 산수를 그리고 3,800군데에 점을 찍어 그곳에 사찰을 세워나가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는 인간이 급한 병이 생기면 혈맥을 찾아서 침도 놓고 또는 뜸질도 해야만 병을 고치게 되는 이치와 같은 것이었으니 이것을 바로 '비보(裨補)'라고 한다. 도선은 500 군데에 사찰을 세우고 왕건을 도와 삼국을 재통일하게 하였고 지맥이 허한 곳을 찾아 절이나 불상, 불탑, 장생표를 세워 지맥을 보허케 하였다. 신라말 고려초의 이러한 풍수지리에서 파생된 산천비보 사상은 풍수지리 사상과 함께 지배층은 물론 서민들에까지 주요 신앙으로 자리잡았다.
조선시대에 와서도 풍수설은 더욱 신봉되었고 이의 폐단도 많이 나타났다. 특히 가문의 길흉화복이 조상의 묘자리에 의해 결정된다는 음택풍수가 기승을 떨었다. 조선시대의 송사문제 상당부분이 가문끼리의 묘자리 분쟁이었다. 실학자 박제가는 그의 저서 <북학의>에서 `전라도 일대는 우심한 버릇이 들어 열 집 가운데 아홉 집이 지관 노릇을 한다`고 꼬집었다. 풍수연구가 김광언(인하대 교수)은 이를 두고 `전남 영암 출신인 도선이 입적할 때까지 35년간 전남 광양의 옥룡사에서 수백명의 제자를 길러내며 이 지역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호남지방이 풍수설의 탯자리이며 이곳에서 성장 발전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여하튼 풍수지리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백두대간을 이어가며 만나는 숱한 지명들을 제대로 소화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산줄기 강줄기에 베인 조상들의 숨결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4월 27일 새벽 4시 30분에 무령고개에 도착하여 5시 30분에 산행을 시작하였다. 고개 마루 바로 밑에 있는 무령약수터는 항상 샘물이 콸콸 쏟아져 내를 이루고 흘러간다. 서늘한 약수를 배에 담고 병에 담아 배낭에 차고 악랄하게 잘린 무령고개 에 올라 호남금남정맥으로 올라챘다. 고닥새 영취산 정상에 올랐다. 정상에는 언제부터 시작했는지 모르지만 돌무더기가 점점 쌓여 탑을 이루고 있다. 솔개의 정수리를 돌탑이 누르고 있는 것이다. 솔개가 그 기상을 펼 수 없음은 당연한 이치이다. 그래서 새의 형국을 한 산에 묘를 쓸 때에는 석물(石物)을 쓰지 않는다. 탑 옆으로 쑥이 자라고 있었다. 영취산 정상의 쑥은 특별한 약효가 있을지 모르겠다.
일본을 떠도는 논개의 혼령
대간 줄기를 따라 북으로 길게 골짜기가 이어지는데 이것이 바로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이다. 저수지 위로 마을 하나가 손에 잡힌다. 바로 주촌 마을인데 이곳은 주논개가 태어난 마을이다. 논개의 간단한 약력을 알아본다.
<1세-1574년> 현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주촌에서 탄생.
<5세-1578년> 부친 주달문 사망후, 모녀는 한 마을에 사는 숙부 주달무 집에 의탁함.
숙부는 어린 조카를 김풍헌 집에 민며느리로 보낸다는 약조를 하고 금품을 받아 달아남.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어머니는 논개를 데리고 친정으로 피했다가 체포되어 장수관아에 수감됨.
<6세-1579> 이른봄, 장수현감 최경회의 심리로 재판이 열림.
무죄 선고를 받았으나 돌아갈 곳이 없는 모녀는 침방관비를 자청.
김씨 부인의 배려로 내아에서 심부름을 하며 살게 됨.
늦가을, 모녀는 무장현감으로 전직된 최경회를 따라감.
<9세-1582> 최경회가 영암군수로 전직되자 따라감
<14세-1587> 최경회가 사도시정으로 갈때 수행함.
<17세-1591> 최경회의 부실이 됨.
최경회가 모친상을 당하여 고향 화순으로 갈때 논개는 고향 장수로 와서 기다림.
<19세-1592> 최경회가 전라우도 의병장으로서 장수로 와 의병을 모집하고 훈련시킬 때, 논개는 의병 훈련 뒷바라지함.
<20세-1593> 최경회가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제수되어 2차 진주성 전투를 할때 논개는 성안에서 전투의 뒷수발을 함.
성이 함락되고 최경회가 순국한 뒤, 논개는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의암으로 유인하여 남강에 투신 순절함.
이러한 주논개의 넋이 억울하게 일본 땅에서 통곡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못난 후손들이냐. 쓸개도 창자도 없는 넋빠진 후손들이 그의 혼을 다 팔아먹은 것이다.
`용서하라, 그러나 잊지는 말아라`(Forgive, but don't forget`)
나찌 치하를 겪은 프랑스의 독립기념관 입구에 새겨진 문귀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쉽게 망각해버리는 것은 아닐까. 그 사연을 <한겨레21>에 난 기사를 그대로 옮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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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인이 의롭게 죽었으니/ 곰과 물고기의 덕이라 하겠네/ 밝게 빛나는 청정한 자태여!/늠름하고 결백한 지조여!// 왜장 한놈 죽였다고 말하지 마라/ 모든 왜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네/ 한 작은 여인이라 말라지 마라/ 만 장부의 팔뚝처럼 떨쳤다네// 흐르는 강물도 바위를 갈지 못하니/ 천년의 의암은 언제나 남아 있네.”
조선 말기, 희재 안종창이 쓴 ‘의기암에서’라는 시다. 이 시에 나오는 ‘한 작은 여인 의암’은 임진왜란 때 왜장을 잡고 강으로 뛰어든 ‘논개’를 일컫는다.
최근 논개의 영정과 가묘가 그가 죽음으로 이끈 왜장과 함께 일본의 한 사당에 모셔진 것으로 확인돼 그의 후손들과 학자들의 의분을 일으키고 있다. 특히 논개는 기생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실제로는 의병장 최경회의 부인이었음이 밝혀져 분노가 더욱 증폭되고 있다.
이야기는 1970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은퇴한 일본인 건축설계사 우에쓰카 하쿠유는 후쿠오카현 다가와시 근처 히코산 기슭의 자신 소유 밭을 갈다가 한 묘비를 발견한다. 그 비석에는 임진왜란 때 이름을 떨친 게야무라 로쿠스케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신의 칼’이란 별명을 가진 게야무라는 임란 때 쇼군 가토 기요마사의 선봉장으로 승승장구한 전설적인 사무라이였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그런 명성에 걸맞지 않았다. 진주성 싸움의 승리를 기념하는 잔치에서 술을 마시다 조선의 여인 ‘논개’에게 죽임을 당한 것이다.
우에쓰카는 그런 게야무라의 비극적 죽음을 흠모했다. 그래서 그의 ‘부끄럽고도 억울한’ 죽음을 풀어줄 묘안을 생각해 냈다. 바로 그를 죽음으로 이끈 조선 여인의 영혼을 함께 모시는 것이었다. 그는 73년 한국의 진주에 처음 찾아와 그런 뜻을 전했다. 그러나 한국인들의 반발이 거셌다. 그러자 그는 새로운 명분을 내세웠다. 논개와 게야무라의 영혼을 함께 모시는 일이 한-일간의 역사적 화해와 교류, 영혼들의 원풀이라는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었다. 그런 주장으로 그는 진주시와 관계자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진주에서 논개와 게야무라의 넋을 건져 이를 일본으로 모셔가는 의식을 치렀다. 진주 남강에 국화를 뿌리고 1천마리의 종이학을 띄웠다. 나아가 그는 히코산에 게야무라와 함께 논개의 무덤을 만드는 작업을 벌였다. 그는 논개가 순국한 진주시에서 모래와 나무, 흙, 논개의 고향 장수에서 돌을 가져다 게야무라의 무덤 옆에 논개 무덤을 꾸몄다. 또 진주 촉석루 옆 ‘의기사’에 걸린 논개 영정과 똑같은 영정을 만들어 일본으로 가져갔다.
그뒤 논개의 영정은 마치 게야무라의 첩이라도 되는 양 그의 아내, 처제와 나란히 놓이게 됐다. 이에 따라 “전쟁중에 게야무라를 만난 논개가 전쟁이 끝난 뒤 게야무라를 따라 일본에 건너와 함께 해로하다 죽었다”는 사실과 정반대의 이야기까지 생겨났다. 심지어 논개는 이곳을 찾는 일본인들에게 “부부관계를 좋게 만들고 아기를 점지해주는 신”으로까지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76년 게야무라와 논개를 모신 사당인 ‘보수원’ 준공식 겸 합동진혼식 때는 우에쓰카를 도운 진주 유지들이 부부 동반으로 참석했다. 어처구니없는 일은 당시 진주 시장이 우에쓰카에게 감사장까지 줬다는 것이다.
얼핏 생각하면 논개와 게야무라의 영혼과 영정, 무덤을 함께 모신 일은 ‘한-일간의 역사적 화해와 교류’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일본쪽의 ‘방자한’ 행위는 논개의 숭고한 뜻을 훼손하면서 그를 두번 죽이는 일이라는 지적이 거세게 일고 있다.
최경회 장군의 후손들인 해주 최씨 전남 화순군 종회는 민순지의 <임진록> 등의 기록을 들어 논개가 1574년 전북 장수에서 태어나 1590년 어릴 적의 인연으로 최경회의 부실이 된 주논개 부인이라고 확인했다. 그전에는 유몽인의 <어우야담>에 따라 논개를 무심코 ‘진주 관기’로 여겨왔다. 해주 최씨 종회에 따르면 1593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인 최경회 장군은 제2차 진주성 싸움에서 패배한 뒤 자결했다. 최 장군과 함께 이 싸움에 참가했던 주논개 부인은 슬픔과 의분을 참지 못하고 왜적들의 승전 잔치에 ‘기생으로 가장해’ 숨어든 뒤 술에 취한 적장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안고 진주 남강으로 뛰어들었다.
따라서 남편과 조국의 원수를 처단한 그의 영정과 무덤이 바로 그 적장과 함께 모셔진 일은 어떤 이유로도 이해될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논개 부인과 최경회 장군만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역사 자체를 모욕하고 능멸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해주 최씨 종회는 지난 4월부터 진주시와 중앙정부 등에 이런 진상을 철저히 조사해 논개의 영정과 진주에서 불러간 논개 부인 영혼, 장수지방의 돌로 만든 논개 비석 등을 정부 차원에서 찾아올 것을 요구해 왔다.
그러나 회신은 예상 밖이었다. 진주시는 이 일에 나서기가 어렵다는 난색을 표시했다. 일본 정부가 아닌 민간인 우에쓰카가 한 일이고, 그의 진의가 역사 사실이나 논개의 정신을 퇴색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며, 한-일간의 화해와 협력에 나쁘지 않다는 것 등이 이유였다. 논개 영정을 돌려받는 일 등을 굳이 하고 싶으면 해주 최씨 문중에서 주도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도 덧붙였다.
문화관광부는 해외홍보원을 통해 조처하겠다고만 답해왔고, 외무부는 보수원에서 열린 논개·게야무라 합동위령제에 후쿠오카 한국 총영사가 참석한 것에 대해 아무런 해명을 하지 않았다.
장본인인 우에쓰카는 “사전에 논개가 최경회 장군의 부인임을 몰랐다”며 “해주 최씨 문중에서 계속 문제를 삼는다면 영정을 반환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나 영정 외에 영혼과 비석은 돌려줄 수 없으며, 합동위령제는 계속하겠다는 입자이었다. 게다가 논개에게서 정신적 위안을 찾는 재일동포 거류민단의 반대로 영정마저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서사시 ‘논개’와 <논개> 평전을 발표한 문학가 정동주씨는 “논개의 의로운 죽음이 조정으로부터 공인을 받는 데 147년이 걸렸고, 그가 기생이 아니라 의병장의 아내였다는 것을 확인하는 데 400여년이 걸렸다. 적장 게야무라와 함께 있는 그의 영정과 영혼이 한국땅으로 되돌아와 그가 편안히 잠드는 데는 또 얼마나 긴 세월이 필요할지 모르겠다”고 한탄했다. 의로운 조선의 여성 주논개가 땅 속에서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김규원 기자>-한겨레21 1998년 12월 17일 제23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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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십령의 도적떼
갈참나무가 우거진 대간 마루금을 따라 오르락 내리락이 없이 수월하게 진행했다. 군데군데 피어난 이름모를 야생화를 카메라에 담으며 걸었다.
`허형! 이리 좀 와보시오`
뒤따라오던 탁사장이 부른다. 회색, 흰색이 어우러진 참새보다 작은 앙증맞은 새 한 마리가 신갈나무 가지에 앉아 울고 있다. 카메라를 들이댓더니 이 새는 도망을 치지 않고 오히려 더 가까이 날아와 앉았다. 참으로 희안한 일이었다. 나중에 이 이야기를 했더니 장박사는 등산객들이 흘리고 가는 먹이를 주워먹기 때문에 사람에게 접근한다고 하였다. 과연 맞는 이야기 같았다.
한참을 가다 탁사장이 또 불러서 보니 대간 마루금 풀 섶에 개구리 한 마리가 있었다. 무슨 개구리인지 모르겠지만 청개구리보다 몸집이 두 배 정도 큰 것으로 보아 청개구리는 아닌 듯 싶었다. 보호색을 띄어 주위의 갈색 풀 섶에서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지난 4월 22일 교보환경대상 교육부문 대상을 수상한 류창희 선생이 생각났다. 그는 동면에서 깨어나 알을 낳기 위해 하산하여 물웅덩이를 찾는 개구리를 무사히 옮겨주는 일을 계속 해오는 분이다. 그에 의하면 산란을 위해 아스팔트길을 건너다가 자동차에 치여 개구리들이 떼죽음을 당한다는 것이었다.
깃대봉에 오르기 전에 뒤에 처진 일행 몇이 낮잠을 자기로 했다. 따가운 봄볕을 우산으로 가리고 용과 등을 맞대었다. 깃대봉에 올라 김밥으로 점심을 먹었다. 육십령에 도달할 즈음에 육십령에서 남덕유로 올라채는 대간 한 켠이 처참하게 헐리는 꼴을 보았다. 채석장이 들어선 것이다. 발파 작업 굉음이 간간이 들리는 가운데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덤프트럭이 들락날락 하고 있었다. 이곳에까지 채석장 허가를 내준 함양군수는 분명 옛날 육십령을 오가던 민초들의 봇짐을 털던 강도나 다름없다. 고이 보전해서 후세에게 물려주어야 할 백두대간을 마구 파괴하여 팔아먹고 있으니 이 어찌 강도가 아니겠는가.
해발 650미터의 육십령은 장수와 함양을 잇는 고개로 60명을 채워서 넘어야 호랑이나 도적떼로부터 안전을 보장받았다 한다.(^_^)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오동제 저수지 안에 논개의 생가가 있었다. 지금은 저수지 위에 복원해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