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농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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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 5일장

오 세 윤


비가 그쳤다. 잔뜩 꾸물거리는 하늘, 6시에 집을 나섰다. 매양 짜증스럽게 정체되던 도로가 김영원의 간단없는 웃음처럼 시원하게 뚫렸다.
청량리 역에 도착한 것이 7시 반, 출발시간까지는 여유가 충분했다. 김영종회장을 비롯해 대부분은 벌써 나와 있었다.
내 뒤를 따라 도착한 김수자동문, 날씬(?)해 진데다 얼굴도 맑아졌다. 명랑해진 표정에 물으니 4kg이 빠졌단다. 옛날보다 근 20kg이나 더 나갔었다니 우리들의 ‘프리마돈나’께서 그간 얼마나 힘이 드 셨 더 랬 을 까!
기차출발 8시10분, 앞자리의 50중반의 극성 아줌씨 열명은 차에 오르자마자 식단부터 편다. 삶은 삼겹살에 김치냄새를 온통 풍겨내며 수다를 젓가락삼아 아침식사를 한다. 고춧가루 범벅의 기다란 배추절임이 고개를 젖혀 벌린 입으로 뱀 껍질처럼 꾸물꾸물 들어간다. 고추장에 풋고추.
저런데도 뱃살이 안나온 게 신통방통하다. 매일 저녁, 헬스에 나가 3시간이 넘게 애꿎은 러닝머신을 짓밟아 대겠지!
먹고 나서 입가심하는 모습에도 전혀 조신함이 없다. 예의롭게 처신하겠다는 의식은 벌써 전에 내다버려 정화조를 거쳐 청계천으로 흘러 떠내려 간지 이미 오래인 모습들이다. 하지만 하나같이 입술연지색은 옷과 얼굴에 어울린다. 누구를 위한 루즈일까. 흐린 날의 실내임에도 티의 목깃을 바짝 세웠다. 5일장을 찾아가는 차림이 웬 브랜드람.
하나같이 곱고 조신한 우리 여동들, 아침을 준다. 삶은 계란 하나, 감자 으깸, 김밥, 준비성 많은 조혜옥 교장은 따로 예쁘고 맛난 떡을 골고루 나눠준다. 곁에만 있어도 편해지는 사람. 커피 한잔. 매조가 뒤뚱뒤뚱 걸어오더니 종이컵에 매주를 가득 따라주며 염소몰이 아이처럼 웃는다. 이어 쐐주 한 잔-
덕소를 지날 쯤, 다행히도 앞자리 ‘극성 마’들이 식사를 끝내고 정리를 한다. 웬걸, 디저트로 방울토마토와 복숭아, 자두를 꺼내 디저트를 즐긴다. 이번엔 매조의 식사용 집게는 저리가라하고 덤프차 삽 손으로 수다를 퍼 나른다.
옆자리의 가는귀먹은 70 노부부는 더 참지를 못하고 그예 식당 칸으로 자리를 옮겨 간다. 그래도 복숭아 냄새만은 향긋해서 좋다. 마치 이정란 동문의 웃음처럼-
오른쪽 차창으로 강이 보인다. 며칠째 내린 호우로 황토 빛으로 변한 강물이 우렁우렁 소리를 내며 흘러내리고 있다.

이번 여행을 주도한 김진혁 동문, 느릿한 사투리가 구수하게 묻어나길래 물었더니 서산이란다. 어쩐지 ‘살 조개’냄새가 나더라니! 한 사람 한사람 찾아 카메라를 들이댄다. 진지한 모습만치나 사진이 잘 나올지 궁금한 건 나만이 아니다.
속내를 결코 가볍게 나타내지 않는, 언제나 한결같은 모습의 이은영(9회 박용무 선배의 부인임을 항시 마음에 새기기를-)동문이 잔잔한 웃음으로 바깥양반을 칭찬한다. 모를까봐 다시 깨우치는 듯 하다. 하나도 듣기 거북하지 않다.(아첨)
황영자 동문, 키가 마침맞아서인지 들고 다니는 삼각대가 오늘따라 더 길어보였다. 사진에 관한 한에는 누구에 뒤지지 않는 열정으로 온 몸을 휘감고 다닌다. 카메라를 들고 걷는 모습을 보라, 얼마나 그 보무가 당당한가! 영자씨의 말투에는 황해도 사투리가 묻어난다. 황주란다. 금년이 광복 60주년인데 고향은 나이도 먹지 않는가보다.
양수리를 지난다. 물길 저 위에는 임정수가 산다. 불의로 사고로 부인 능소화가 다치지 않았다면 지금쯤 함께 이 기차를 타고 특유의 동동주웃음을 흘리며 동문들을 즐겁게 하고 있으련만 참 아쉽게 됐다.
다산의 ‘여유당’앞에는 강물위에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근처, 대학동기의 동생으로 부고 17회의 후배하나가 ‘물안개’란 닉네임으로 그림같이 산다. 그녀의 집은 언제쯤이라야 한번 방문할 수 있을까.
이정란은 맨 뒷자리, 강물처럼 조용한 조혜옥교장 옆에 앉아 강물과 물안개와 조교장의 감성을 즐기면서 혼자만의 상념에 잠겨 나와는 대화도 않는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보통 궁금한 게 아니다. 나 혼자만 궁금해 할까?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까, 침묵하고 앉아 흐르는 강물에 온통 마음을 흐리고 있는 양단석, 어쩌면 그는 아래층 여학생 교실을 흘끔거리던 과거로 가 있는지도 모른다. 심재범처럼 짝사랑하던 그녀의 모습을 찾던 아침 조회시간의 강당에 가 있는지 또 누가 알겠는가.
심재범은 재자와 영원이의 앞자리에 앉아 수다스럽지 않은 수다를 싱글거리며 받아내고 있다. 징그럽게도 넉넉한 친구-
기차가 지나가는 길옆, 마늘을 거둔 빈 밭에는 남겨진 세월이 회한처럼 군데군데 빗물로 고였다. 어느새 차가 원주를 지나고 있었다. 강원도였다.

오대산을 넘다 만나는 명개리처럼 시원하게 속이 트인 권오경동문의 옆자리에는 모임에 자주 나오지 않아 낯이 덜 여문 최평수동문이 아직 분위기파악이 조금 덜된 긴장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일생동안 단 한사람밖에는 사랑해보지 않은 사람처럼, 남녀공학출신답지 않게 새침하게 내외를 하고 앉아있다. 말을 걸어보고 싶어도 눈길도 안준다. 허랑한 내 소문을 익히 들어서 벌써 알고 있는 듯도 하다. 이젠 빌붙을 곳이 단 한군데도 없구나!
앞자리의 극성 마들, 원주를 지나자 다시 입들이 심심해 졌나보다. 콩 대추 넣어 만든 찰떡을 돌려 먹고 나더니 이어 부시 럭 대며 내놓는 것, 아휴 저 꼬랑꼬랑한 냄새. 발가락으로 다듬었을 게 틀림없을, 냄새도 지독한 오징어를 내 놓는다. 몸통 색깔은 왜 또 저리 시커머냐. 수다에도 밑천이 동이 난 게 틀림없었다.
오징어란 대화가 끊겨 무료해 졌을 때 남정네들이 담배를 피워 물 듯 여인네들이 무의식적으로 하는 보편적인 입 운동이다. 가지가지 준비들도 많이도 해왔다. 한편 생각하면 서로를 배려하여 저 저큼 준비해온 그 마음 씀이 가상키도 하다. 남을 기쁘게 하려는 마음에 재는 뿌리지 말지어다. 합창을 한다.

“죽을 때까지 이 마음 버리지 마라!” - 쳇, 무슨 유행가 가락 같다. -

OO이 슬그머니 일어나더니 내 자리로 온다. 호~! 나에게 관심을 보이는 여동문이 그래도 한사람쯤은 있구나! 마침 옆자리가 비어 있었다. 설레면서 내줬다. 씨암탉처럼 깃을 여미며 앉더니 나지막이 속삭이듯 말한다. 야, 이것 봐라.
“저 부탁이 있어요.” 가슴을 손바닥으로 눌렀다. 아무래도 심장소리가 튀어나올까 겁이 났다.
“뭐죠, 얼능 말해봐요오.”
“저, 우산 가져 오셨죠?”
밖에는 다시 는개가 내리고 있었다.
“네, 그럼요.” 우산을 같이 쓰자고? 거 좋지! 속이 제 먼저 좋아 낄낄거린다.
“내리면 좀 빌려줘요, 남자는 이깟 비 좀 맞아도 되잖아요.”

-젠장-

기차를 탄지 3시간쯤이 지나자 조금은 지쳤는지 아니면 이른 출발을 서두르느라 잠들이 부족했는지 모두들 제자리에서 조용히 휴식을 취하고 있다. 다만 김영종 회장 혼자서 이곳저곳, 이사람 저 동문들을 들러보고 다닌다.
언제 보아도, 걸치는 옷도, 사람을 대하는 매너도 세련되고 개성적이면서도 전혀 정도를 벗어나지 않는다. 지내며 볼수록 상황판단이 빠르고 정확한, 빈틈없는 서울 신사다. 멋이 무엇인지를 안다.
여름내 키워온 열매를 모두 내어준 옥수수 대가 아직도 머리에 시들지 않은 꽃대를 이고 빈 밭두렁을 지키고 서서, 그래도 힘없이 늘어져 마른 이파리를 바람에 흐느적거리며 지나가는 기차에 알은 체를 하고 있다.
모두를 자식들에게 내어주고도 또 내어줄 사랑을 남기고 섰는 의연한 나의 동문들, 나이 들어가며 하루하루 더 애틋하게 정이 가는 나의 동문들이 비 뿌리는 차창에 머리를 기대고 강을 숨쉬며 쉬고 있다.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강둑에는 줄을 지어 늘어선 미루나무 들이 안개 밖으로 윗동가리만 내어 놓은 채 강에다 물길을 인도하고 있다.
찻길 옆에는 졸망졸망한 강원도 개구랑논들이 전방부대에 갓 배치된 초년병처럼, 삼부가리로 깍은 머리를 층층이 맞대고 앉아, 산안개 피어오르는 골짜기에 경적을 울리며 지나가는 기차를 맞고 보내며 흐린 하늘 아래 새물새물 웃고 있다.

12시 40분, 네 시간 반 만에 시골장날의 향수를 찾아온 사람들이 꾸역꾸역 객차에서 풀려나고 있다.
비는 그쳤고 하늘은 흐렸다. 산봉우리들은 회색구름에 가려 높이를 감추고 우리들 가슴은 오늘의 볼거리 기대로 설레고 있었다. 실망이 담길 거라고는 누구도 기대하지 않는다. 역전의 마이크에서 울려나오는 정선아리랑가락은 이미 흘러 갈대로 흘러간 주막집 퇴물주모의 단물이 다 빠진 넋두리로 쉰 냄새를 펄렁펄렁 풍기면서, 쉰 막걸리에 절을 대로 절은 남색 치맛단으로 마른먼지를 쓸어내면서 늘어져 내려 우리의 기대를 한없이 곤혹스럽게 한다.

참으로 가물가물한 기억, 이굉우동문이 노추산을 다녀왔노라 회보에 글을 올리던 때의 정선은 이미 아니었다. 청량리에서 밤 기차를 타고 깜깜한 새벽 공기가 을씨년스러운, 희미한 가로등이 썰렁한 증산역에 내려 싸구려 여인숙에 들어가, 옆방에서 나는 괴이한 짐승소리를 참아내며 언 몸을 잠시 녹이고 나와 7시 몇 분인가의 첫 협궤열차를 타고 한가롭게 높은 산봉우리와 깊은 계곡을 낯설어하면서 오지의 방랑자가 되어보던 외톨 지던 때의 그 정선은 이미 아니었다.
실연의 상처 난 가슴을 검은 외투 한 장에 감싸고(그렇다고 산장의 남자는 아니다.)눈물을 오들오들 찔끔거리며 기차가 떠나버린 철로를 하염없이 바라보던 궁상맞은 사내의 정선은 더더욱 아니었다.(이수일과 심순애라도 누가 한바탕 해 주시기를........)
장바닥에는 심지를 돋우어 산골각시의 신방을 밝히던 하얀 사기등잔을 팔던 장수도, 아가의 똥을 먹고 크던 누렁이가 엄마 따라 고개 마루 너머 외가에 간 아가가 그리울 때, 마루 밑을 뒤져 찾아내어 질겅질겅 씹어대던 검정고무신을 팔던 곰배팔이 신발장수도 이미 그 자리에는 없었다.
변질될 대로 도시화된 경동시장의 축소판이 거기에 펼쳐져 있었고, 도시 상인의 매몰찬 상혼만이 연이어 잇대어진 좌판 위를 정신없이 설치고 다니면서 사람들의 주머니만을 살폈다.
1시가 훌쩍 넘자 배들이 고팠다. 번잡한 좌판사이를 헤집고 먹자골목으로 들어갔다. 간판은 그럴싸하게 ‘아우라지 식당’
곤드레 밥(곤드레 나물을 섞은 밥, 숯구이가 한 열흘 숯을 구워가지고 내려와 색주가에서 하룻밤 묵는 동안 여색에 곤드레로 취해 돈을 모두 탕진하고 겨우 공짜로 얻어먹는 아침식사. -믿거나 말거나)에 배추와 부추를 섞어 지진 메밀 전, 메밀꽃으로 담근 동동주.(남자가 마시면 뭣뭣 이상으로 효과가 만점이라고 한다.)
김영종 회장이 무말랭이무침을 섞은 콧등치기 국수를 날라 와 겨우 맛을 볼 수 있었다.
와, 기분 최고다. 이정란 동문이 나에게 손수 동동주 한 잔을 따라준다. 속으로 씨부렁거렸다. 기왕이면 나한테만 따라줄 일이지!
위생은 30점, 친절은 40점, 음식 맛은 30점. 그래서 도합 백점. 전준영 동문이 자기의 본관이 바로 여기라고 한다. 이성계의 관군을 피해 이곳으로 들어온 조상이 왕(王)자위에 갓을 씌워 정선 전씨가 되었노라며 감개가 무량한지 동동주를 거푸 세잔이나 마셨다. 얼레 꼴레다, 오늘밤 어느 분 혼 좀 나겠다.

오늘의 행사를 꼼꼼하게 계획하고 차질 없이 주관하면서도 공치사한마디 없이 묵묵히 모두를 편안하게 이끄는 김진혁 동문, 이정란이 따라준 잔을 들고 후궁에든 강화도령처럼 희희덕거리는 나를 보더니 드디어 못 참고 한마디 한다.
“오늘은 누가 오박의 ‘그니’인가?”
내가 지조 없는 남정네인 걸 어느새 알았지? 또 젠장이다.
그니라!
이틀 전 홈 피에 올린 ‘강둑 길’을 본 어느 친구, “또 그니 타령이냐! 넌 언제까지 사랑타령이고 그니 타령이냐, 내려!” 되게 식상했나 보다. 하기야 이 나이의 글이라면 윤리강론이나 전문논조를 써야 마땅하리란 건 안다. 하지만 그거야 전문인과 학자들이 이미 산처럼 풀어낸 장르니 언감생심 넘볼 수야 없는 법. 전공이 의학이니 인간의 육체와 거기에 담긴 감성, 영혼, 정서, 희.노.애.락.이나 풀어볼 밖에.

때로 푸른 하늘에 떠가는 흰 구름 한 조각이 내 그니 이기도 하고, -
여름날, 안개비 머춤한 푸른 산이 또 내 그니요, 수평선이 아득한 바다가 내 그니다.
솔잎사이를 스쳐드는 바람한점이 내 그니요, 국화잎지는 밤,댓돌에 내리앉는 달빛 한 쟁반이 내 그니다.
물결위에 빛나는 햇살 하나하나가 내 그니요, 이른 아침 풀잎에 맺힌 이슬방울 하나가 바로 내 그니다.
벗의 가슴속, 따뜻하게 핀 미소가 바로 그니요, 작은 베풂에 감동하는 여린 마음이 내 그니다.
어둔 밤, 홀로 기도하는 촟불이 내 그니요, 착하게 충언하는 벗의 바름이 바로 내 그니다.
물결다라 겸허히 흐르는 추억이 내 그니요, 잠자리의 날개처럼 탐욕을 덜어낸 가벼운 마음이 내 그니다. 어찌 그니를 有形으로만 보려는가.

이제 진짜루다 내 그니를 올려놓고 식사를 그만 끝내고 장을 보러 나가자. 실망하지 마라, 장엔 볼게 아무것도 없다구!

-사랑밖엔 난 몰라
그니밖엔 난 몰라-

* 전준영 동문이 6신을 올렸으니 이건 7신으로 하자. 되게도 77맞네. ㅎ ㅎ

식당에 들기 바로 전, 장터 입구에 처음 발을 들여놓으면서 벌써 길가좌판을 한차례 둘러보는 걸로 실망한 몇은 꽈배기 도넛을 몇 개 사들고 먹으면서 마음을 달랜다. 학생 때의 맛을 찾는 향수인 것 같아 어쩐지 씁쓸했다. 정선까지 와서 도넛이라니-
식당을 나와 장꾼(관광객)들에 섞여 좌판사이를 걸었다. 올챙이국수와 콧등치기 국수. 음식을 만들고 내놓는 여인들의 손이 왜 저렇게 급할까?
감자전과 밀 전병, 쟁반처럼 넓고 종잇장처럼 얇다. 두툼하던 인심은 더 깊숙한 오지로 쫓겨 들어간 듯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곳곳에 더덕을 쌓아놓고 껍질을 벗기면서 판다. 어느 것도 향이 없다. 때가 아니라서 그런가, 아니면 중국산인가. 안심이 되도록 농협을 찾아가 구입 하렸더니 철이 아니라서 물건이 없단다.
여러해 전, 광덕산에서 실하기에 사온 더덕이 질긴 중국산인 걸 안 뒤로, 속리산에서 사온 작은 자루에 담아 파는 서리태가 중국산인 걸 안 뒤로는 관광지에서 곡물을 사지 않는다.
좌판의 얄팍한 인심의 감자전과 황기와, 더덕과 말린 취나물을 제하면 어디에도 시골장의 정감이 없다.
앞서 걷던 재자가 말려 잘 포장된 황기 한 봉지를 집어 든다. 모르는 척 물었다.
“뭔데?”
“응, 이거 황기란 약잰데 원기를 돋운대.” 재자는 그 큰 눈을 더 크게 떠서 굴리며 초등학교 사내 녀석처럼 대갈지게 대답한다.
저 나이에도 그녀는 시치미를 뚝 떼고 잘도 ‘순진’을 연출한다.
“누구 멕이려고?”
“아들 녀석이 땀을 잘 흘려, 황기가 방한(防汗)이 된대. 이번에 걔가 컴퓨터도 한 대 새로 놔 줬거든.”
“효잘세.”
흐뭇하게 웃는다. 아들하나 잘 뒀네.
요즘이야 손 내밀지 않고 제식구만이라도 잘 건사하면 그게 효자라고 잘도 말들을 한다. 글쎄, 과연 그럴까.
15인승 봉고, 이번 여행의 우리 일행 숫자도 15, 심재범이 운전기사가 됐다. 교통사고가 아닌 고관절 괴사 수술로(본인이 친절하게 알려와 바로잡아 고침) 철심을 박은 다리로 렌트한 새 차를 잘도 운전한다.
가라왕산의 두레계곡, 입구에 들어서기 무섭게 요란한 물소리가 먼저 우리를 맞는다. 영자씨를 비롯한 사진작가들의 눈빛들이 불 맞은 산짐승처럼 흐린 하늘도 태울 듯 기세 사납게 타오르기 시작한다. 누군가 한사람쯤은 나한테라도 저렇듯 타오른다면 오죽이나 행복하랴!

폭 7~8미터, 녹음이 맑게 물든 옥수, 용솟음치며 급하게 때로는 멈칫 숨을 돌리며 굽이쳐 흐르는 계곡물. 몰려 내려간 모두가 물과 함께 하나가 된다.

낚시터에 다다른 꾼들처럼, 어느새 장비점검을 마친 사진작가들이 삼각대를 이리저리 세워보고 자리를 옮겨가면서 물소리를, 물의 마음을, 물의 표정을 담느라 정신이 없다.

대상에 저렇듯 자기를 투사시키고 몰입하는 진지함과 열정이 없었다면 어떻게 오늘의 우리들이 이루어질 수 있었으랴. 한 사람 한사람 모두 더할 수 없이 보기에 좋고 흐뭇하여 숙연해지기까지 한다. 성실하게, 성공적으로 삶을 살아온 자의 아름다움. 성공이란 지위도 명예도 돈도 아닐 것 같다. 사랑이고 열정이고 넉넉한 마음일 듯 하다는 생각으로 그네들을 바라본다. 바로 내 그니들이다.

겁도 없다. 영자는 격랑 바로 옆 뾰족한 바위위로 성큼성큼 올라선다. 교사생활을 할 때, 학생들을 어떻게 다루었을지 하는 모습이 선하게 눈에 든다.

조혜옥 교장, 목소리를 기억해내기 힘들 정도로 말수가 적다. 마치 한 마리 키 큰 나비처럼 순간이 도망가기라도 할 듯 조심스럽게 렌즈를 갖다대며 셔터를 누른다. 셔터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교장을 지낸 게 맞나.

담찬 게 어디 영자씨뿐이더냐, 권오경의 찍 폼에는 평소나 한가지로 절도와 기품이 있다. 그녀의 심미안을 깊숙이 들여다보고 싶어도 전혀 틈을 주지 않는다.

최평수, 한 마리 솔잣새라고나 할까, 그녀 또한 말수 적기로 조교장이나 한가지이면서도 몸놀림이 경쾌해 쉽게 눈에 뜨이지 않는다. 숲 바람처럼 은밀하게 움직인다. 두리번두리번 찾는 나의 마음을 알아차리기는 했을까.

김영종 동문은 회장답게 촬영은 뒤로 미루고 눈치 채이지 않도록 모두를 감시하며 어슬렁어슬렁 주변을 살피고 다닌다. 안전감시요원이다. 역시 보스다.

언젠가 아프리카 여행을 가게 되면 반드시 ‘사파리 모자’ 하나를 여유 있게 사와야 하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정란 동문을 보라, 날렵하게 움직이는 모습하며 그 차림새가 천 상 아프리카 사파리여행자가 아닌가. 호기심 많은 영원한 미의 탐구자,

이미 사진의 프로가 된 박선배의 어 부인인 은영씨는 산과 물이 부끄러움을 타서 고개를 숙이고 말 화사한 웃음을 잔잔하게 사방에다 뿌리며 남동들을 설레게 한다. 이런 땐 좀 박선배가 뇌리에서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매조(임효제)를 벤치에 앉혀놓고 진혁이 사진을 찍어준다. 재범이 그 특유의 너글너글한 웃음으로 그들을 보고 있다.

매조도 물이 찍고 싶어 바닥에 털퍼덕 주저앉아 성한 한 손으로 카메라를 만지작거리지만 쉽지는 않은 듯, 옆으로 밀어놓으면서 먼 하늘로 고개를 돌린다. 씩 하고 한차례 웃어버리고 만다. 하늘처럼 그의 얼굴은 흐려있지 않았다. 엄청 허리가 아파 무엇도 못하면서 그래도 친구는 항상 밝게 웃는다. 감성 여리게 시를 써 홈 피에 올릴 때마다 나는 그의 ‘참 고운 마음’에 눈시울을 붉힌다. 참 착한 친구. -

가리왕산 정상만큼이나 훌쩍 마음이 큰 토박이(?)친구 전준영, 기다란 콤파스로 성큼성큼 바위사이를 건너다니며 사진을 찍더니 맑은 물에 그예 손과 얼굴을 담그며 순수한 어린이가 된다. 얼굴처럼 마음이 해맑아서 좋은 소년.

정자에 앉은 두 여인, 수자와 영원이는 기차에서도 못 다한 말을 정자지붕이 들썩거리게 여울물에 풀어 흘려보내고 있다. 시간이 너무나 아쉬운 우정들이 계곡물 곁을 감히 떠나려하지 않는다. 힘이 넘치게 흐르는 맑은 옥빛 물을 보면서, 벗 한 사람 한사람의 면면들을 다시한번 더 훔쳐본다.

`흘러서 그침없는 한강의 물과 언제나 푸르높은 북한의 하늘, 무궁한 산하정기-`를 함께 부르며 함께 공부하고 함께 소중한 사춘기를 자란 벗들, 강원도 옥수수처럼 찰진 우정들이 티하나없이 맑게 사진기 앞에 모여서서 구김살없이 밝은 웃음을 하늘에 띄워보낸다.
한참 먼 뒤, 이대로 건강하게 오래오래 모여 다니다가 연착하는 기차처럼 그 끝날의 나룻터에는 제일 늦게 도착하기를, 열정의 불꽃과 회한없는 화환으로 지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카메라앞에 선다. 좋은 하루다.





*사족 : -사진에서-
몸은 오른쪽 맨 가녘에 서 있었지만 마음은 왼쪽 어딘가에 가 있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담여, 졸문을 마친다.

2005. 8. 15. 광복절날 아침에 -




Webpage : Jinso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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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 꽁트 >그로부터 30 년이 흘렀습니다. ( 1 ) ...심상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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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세기의 명화 감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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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정선 오일장...오세윤(11회)...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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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수집은 듯 아미를 숙인 예쁜 신부의 모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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