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8/11 (토)
다음은 이태준씨의 집을 찾아갔다.
지금은 이태준씨의 외 증손녀가 경영하는 전통 찻집이 되었는데 그 이름이 수연산방 (壽硯山房)이다.
옛날엔 한적한 시골이였을 이 동네에 지은 집이 정말 산방(山房)처럼 자그마한것이 아기자기하다.
주인 이태준씨가 손수 나서서 일꾼들과 지은 집이라고 한다.
앞 마당에 콩 박힌 백설기 같은 돌담이 예쁜데 너무 낮아 바깥이 다 내다 보이고 도둑 들을까 좀 걱정이다.
집이 하도 단작 맞게 작아보여 어디 다 앉을수나 있을까 했는데 그래도 툇마루에 우리 넷이 다 들어가 앉았다.
오랫만에 보는 장농, 문갑, 벽의 장식에 한국 고유한 멋이 담겨있다.
사람들이 들어 앉아 차 마시고 있는 방이 이태준 씨의 집필 방이였다고 한다.
육이오 사변으로 일찌감치 없어지긴 했지만 우리집에도 저런 삼층으로 된 장롱이 있었다.
옆에 찌그러져 닺쳐지지 않는 장지문 까지 옛날을 생각케 한다.
대추 차를 주문하니 커다란 그릇에 한약처럼 시꺼먼 차가 나오는데 너무 전통식을 따랐나?
맛도 텁텁 씁쓸하고 양은 많고. 달착지근한 대추맛이 없다.
차(茶)는 별로지만 오랫만에 이런 집에 앉아보니 갑자기 옛날로 돌아간듯 감회가 새롭다.
옛날에는 월북 작가라면 다 쉬쉬해서 이름만 간신히 들어 보았는데 나는 이태준씨 보다도 이기영씨를 더 잘안다.
사변전에 이기영 作 "신개지(新開地)" 라는 소설이 신문에 연재되었는데
누가 그랬는지? 그걸 다 오려내서 스크랩 북 (Scrap Book)을 만든것이 어디서 굴러 나왔다.
그 소설이 너무 재미있어 언니와 열심히 읽었는데 이태준이란 사람의 작품은 이제껏 만나본적이 없다.
별수없이 또 공부 삼아 한참 찾아 보았다.
이태준(李泰俊, 1904-?) : 소설가. 호는 상허(尙虛) ·
강원 철원 출생. 휘문고보를 나와 일본 上智 대학에서 수학했으며 <시대일보>에
<오몽녀(五夢女)>를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구인회(九人會)에 가담했고, 이화여전 강사, <조선중앙일보> 학예부장을 역임했다.
<가마귀> <달밤> <복덕방> 등의 단편은 인물과 성격의 내관적(內觀的) 묘사로
한국 현대 소설 기법의 바탕을 이룩한 것으로 평가된다.
<문장> 지를 주관하다가 광복 후 '조선문학가동맹'에서 활동했으며 이후 월북했다.
소설집 <구원(久遠)의 여상(女像)> 외에 <해방전후> 등
작품이 있으며 <문장강화(文章講話)>란 문장론 저술도 유명하다.
왼쪽부터 소남(둘째딸), 소명(맏딸), 부인 이순옥, 유진(차남), 이태준, 소현(막내딸), 유백(장남).
가족 사진이 꼭 옛날 우리집을 보는것 같은데 월북후 뒤끝이 영 좋지 않았으니 참 안되었다.
그때 이태준이 전가족을 데리고 월북한것은 매우 뜻밖의 일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놀랐다고 한다.
시인 정지용은 그가 월북한지도 모르고 그의 집에 놀러갔다가 당황해서 조국의 서울로 돌아오라는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의 월북 결심에는 1946년의 소련 방문이 큰 영향을 미쳤을꺼라 추측한다.
그리고 부인이 황해도 출신이라는 점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조선의 신사라 불렸던 이태준이 갈 곳이 아니였다.
자유로운 영혼을 구가할 수밖에 없는 예술가들에게 북한은 거대한 감옥에 불과하다.
처음 그곳에 도착하여 이태준은 매우 큰 환대를 받았다고 한다.
일설에는 그런 큰 환대가 이태준을 북한에 머물게 했다고도 한다. 처음엔 그저 다녀오려고만 했다는 것이다.
이태준은 소련파의 지원을 받아 편안한 북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카프계 (KAPF: Korea Artista Proleta Federatio,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연맹의 약칭)
문인들은 유미주의 (唯美主義)적이고 부르조아적인 냄새를 풍기는 이태준을 싫어했다.
이태준은 1956년에 숙청되었다. 소련파의 몰락과 같은 때이다.
카프계의 선봉이었던 한설야 (韓雪野)는 카프에 반대 성향을 지녔던 구인회(九人會)에 속했던 이태준을 용서할 수 없었다.
한설야의 비판을 필두로 이태준 문학은 철저히 부정당했고 이태준은 해주 황해도 일보사의 인쇄공으로 쫓겨났다.
그는 1964년부터는 대남 심리전 소설을 쓰는 비밀작가로 활동했다고 한다.
그 같은 대 작가가 시키는대로 이념 소설을 써야했을 그 심정이 어땠을까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는 10년 뒤 평양으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다시 한번 사상비판을 겪고 강원도 장동 탄광지구로 쫓겨났고,
이곳에서 아내 이순옥이 뇌혈전으로 쓰러졌다고 한다. 이태준의 최후는 전해지지 않는다.
그의 비극은 그 하나로 끝나지 않았다. 그의 아이들은 모두 김일성 종합대학에 진학했고,
이태준이 숙청될 때 같이 숙청되었다. 맏딸 소명은 소련에 유학 중이었으나 불려와
남편과 강제로 이혼당한다. 그 남편은 홧병으로 6개월 후 사망했다고 한다.
차녀 소남은 반동작가의 딸이라는 이유로 남편에게 매질을 당하며 살다 이혼 당하고 탄광 노동자와
재혼했으나, 그도 낙반 사고로 죽었으며 결국 수용소로 끌려갔다고 한다. 장남 유백은 독신으로 지냈다고 한다.
차남 유진은 김일성 종합대학을 졸업하고도 오지에 근무해야만 했다.
막내 소현도 강제로 이혼 당했고, 두번째 남편은 남파 간첩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처럼 철저히 부정당한 이태준이 북한 문인들 사이에 여전히 문장의 신(神)으로 살아있다는 이야기다.
금서로 지정된 이태준의 글도 몰래 읽히고 있다고 한다.
물론 1967년은 이태준이 최종적으로 숙청된 해라는 것도 기억해야 할 것 같다.
이태준의 수필집, 무서록 (無序錄)에는 이런 글이 있다.
"오래 살고 싶다.
좋은 글을 써보려면 공부도 공부려니와 오래 살아야 될 것 같다.
적어도 천명(天命)을 안다는 50 에서부터 60, 70, 100 에 이르기까지 그 총명, 고담의 노경 속에서 오래 살아보고 싶다.
그래서 인생의 깊은 가을을 지나 농익은 능금처럼 인생으로 한번 흠뻑 익어보고 싶은 것이다...."
이태준의 문장강화 (文章講話)는 지금 읽어도 훌륭한 글쓰기 지침서라 흔히 말한다.
그러나 사실은 이태준의 소설들은 지금 읽어도 훌륭한 소설이라 말하는 것이 옳겠다.
그가 월북했을때 김일성 대학에서는 이런 말이 유행했다 한다.
"러시아에 체호프, 프랑스에 모파상, 미국에 오 헨리가 있다면 조선에는 이태준이 있다."
단편 "달밤"이 internet에 조금 나온것을 읽었는데 "나"라고 쓴것이 어디서 본 생각이 난다.
"돌다리"는 다 읽었는데 강력한 멧쎄지를 전하는 스타일이 다른 소설. 좋다. 두고 두고 읽어보려고 또 숨겨 놓았다.
다른 책들도 internet 에서 읽을 기회가 있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