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현채 주필
▲ 박현채 주필
위기에 봉착한 국내 반도체 산업을 돕기 위해 정부가 과감한 반도체 종합 지원책을 내놓았다. 반도체 연구·개발(R&D)과 시설투자 비용 등에 대한 세액공제를 확대하고 3만6000명의 인력을 양성하며 용수나 전력공급 등 기반시설에 대해 예산을 지원해 민간투자를 뒷받침하겠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이와 함께 경기도 화성·평택·용인을 중심으로 K반도체 벨트를 조성하기로 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기업들도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을 주도하기 위해 오는 2030년까지 510조여 원을 투자, 한국을 세계 최대·최첨단 반도체 공급기지로 만들어나가기로 했다.
 
세계는 지금 반도체 전쟁이 한창이다. 미국은 바이든 대통령이 앞장서 “반도체는 미래 경제의 근간으로 최우선 순위이자 우리가 공격적으로 다뤄야 할 사안”이라고 강조하면서 향후 8년간 반도체 분야에 56조 원을 투자하기로 하는 등 강력한 지원책을 밀어붙이고 있다. 중국도 은 2015년부터 반도체 굴기에 나서 2025년까지 1조 위안(약 173조 원)에 달하는 막대한 재정을 동원하고 있으며 반도체 전사 50만명 양성하는 작업에도 매진하고 있다. 유럽연합(EU)도 차량용 반도체 공급난을 계기로 500억 유로(67조원 이상)를 투자해 반도체 제조기술 발전 프로젝트를 적극 지원하기로 하는 등 자립화 노선을 걷기 시작했고 대만도 정부주도로 반도체 산업 육성에 적극 나서고 있다.
 
주요국들의 이같은 치열한 경쟁으로 한국의 반도체 위상이 흔들리고 있다. 한참 뒤쳐져 있는 비메모리 분야는 차치하고 지난 30년 가까이 ‘초격차’ 전략으로 세계 1위를 지켜온 메모리 분야에서 조차도 해외 주요 경쟁사들의 거센 추격으로 입지가 흔들리고 있다. 물론 아직까지는 한국이 D램과 낸드플래시 등 메모리 시장에서 압도적인 점유율로 경쟁 우위를 확보하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1993년 이후 단 한 번도 왕좌를 넘겨준 적이 없는 삼성전자는 D램 점유율이 2016년 46.6%에서 지난해 41.7%로 떨어졌다. 기술력에서도 삼성전자와 다른 기업들 간의 격차가 1년 정도였으나 지금은 6개월 이내로 좁혀졌다. 특히 지난해 11월에는 세계 3위 메모리 업체인 미국의 마이크론이 세계 최초로 178단 3차원(3D) 낸드플래시를 출시,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이는 삼성전자가 1년 전 출시했던 128단 제품보다 50단이나 높다. 현재 검토 중인 일본 키옥시마(구 도시바 메모리) 인수에 성공할 경우 마이크론은 일약 삼성전자와 맞먹는 낸드 시장 강자가 된다. 마이크론 뿐만 아니라 대만의 난야도 최첨단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를 활용한 10나노 초반대 차세대 D램 개발에 박차를 가하며 삼성과의 기술 격차를 좁히고 있다,
 
이처럼 한국이 ‘반도체 강국’이란 위상에는 착시가 많다. 매출 1조원 이상인 반도체 기업이 7곳에 불과, 미국(32곳)은 물론 대만(21곳) 중국(17곳)보다도 적다. 기술 면에서도 위기다. 차세대 인공지능(AI)과 차량용 반도체 경쟁력은 선진국의 60% 선에 불과하다. 특히 세계 반도체 시장의 60% 정도를 점유하고 있는 비메모리 분야에서는 사태가 심각하다. 이 시장에서는 대만의 TSMC가 단연 선두를 달리고 있다. 비메모리는 대부분 설계를 담당하는 회사인 팹리스(Fabless)와 생산을 담당하는 파운드리(Foundry)로 분업화되어 있다. 글로벌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TSMC는 올해 1분기 기준 전 세계 파운드리 부문에서 56%라는 압도적인 점유율로 2위인 삼성전자(18%)를 멀찌감치 따돌리고 있다.
 
반도체는 미래산업에서 없어선 안 될 필수재 중의 필수재다. 미·중을 비롯해 주요국들이 안정적인 공급망 확보를 위해 사활을 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특히 최근 반도체 수급난으로 세계 주요 완성차 업체들의 공장 가동이 중단되는 사태가 전개되면서 미국의 인텔이 파운드리 사업 재진출을 선언하는 등 반도체 자국주의가 확산되고 있다.
 
미.중간의 반도체 패권전쟁은 안보동맹과 연계된 기술동맹 형태로 전개되고 있다. 미국은 중국을 견제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 글로벌 반도체 동맹의 강화라고 판단하고 국적과 관계없이 ‘반도체 가치 동맹’(AVC·Alliance Value Chain) 체제 구축을 밀어붙이고 있다. 미국은 지난 달 12일 삼성전자 등 19개 기업을 불러 바이든 대통령 주재로 반도체 화상 회의를 연데 이어 오는 20일 또다시 삼성전자를 비롯한 글로벌 자동차, 반도체 기업들을 호출, 회의를 가질 예정이다. 미국은 이 회의에서 미국내 반도체 투자를 늘리도록 삼성전자에 압박을 가할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들어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정부가 앞장서 자국 업체들을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있다는 점이다. 뒤늦게 나마 우리 정부도 종합대책을 내놓으면서 이 대열에 동참한 것은 천만다행이라 하겠다. <투데이 코리아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