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겨울에 불거져 한국을 뿌리째 흔들고 세계를 놀라게 한 ‘황우석 스캔들’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더욱 우리를 우울하게 하는 것은, 소위 ‘황까’와 ‘황빠’라는 이름부터 혐오스러운, 두 그룹으로 나뉘어 비방을 포함한 대립으로 우리를 혼돈(混沌)에 빠뜨렸다는 점이다.
그간 네티즌들이 보여준 갈등의 중심에는 감성과 이성의 구별이 미약했다.
감성적 판단으로 이성적 판단을 매도하거나 그 반대가 난무하면서 중구난방으로 들쑤시니 혼란은 더욱 증폭될 수밖에 없었겠지.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스캔들이 터질 때 마다 4급 이상 태풍이 지나가듯 들볶여야만 하는 걸까?
호랑이에 물려가도 정신 차릴 수 있는 길은 없냐는 것이다.
인류의 발달을 간단히 살펴보면, 동물시대에서 감성시대로, 감성시대에서 이성시대로 흘러가고 있음을 본다.
여기서 감성시대란 동물적인 모습에 감성이 크게 작용하던 시대요,
이성시대란 동물적이며 감성적인 모습 외에 이성이 크게 작용하고 있는 시대를 말한다.
지금도 어느 사회이든 또는 한 개인 안에서 그 세 가지 모습은 서로 엉키어 작용하고 있지 아니 한가.
‘사람은 생각하는 동물’이라 하여, 몸과 정신을 인간의 특징으로 삼는다.
그런데 감성과 이성을 하나로 묶어 정신이라 하는 것은 ‘황우석 스캔들’에서 보듯 많은 문제가 파생한다.
잘 아는 바처럼 감성은 ‘호(好)와 오(惡)’, ‘미(美)와 추(醜)’, ‘신(信)과 불신(不信)’ 같은 느낌으로 가치판단 영역이 된다.
이성은 ‘맞다 틀리다’, ‘있다 없다’, 안다 모른다‘와 같은 검증이 가능한 사실판단이 그 영역으로 자리하고.
감성의 꽃으로 예술과 도덕을 말하지만 역시 최고의 꽃은 종교라 하지 않을 수 없고,
이성의 꽃은 철학이라 하지만, 현재는 당연히 과학으로 20세기에 이어 여전히 찬란한 과학의 꽃을 피우고 있지 아니한가.
이러히 정리가 되면, 종교적인 창조설을 학교에서 가르치자면서, 그 내용은 과학 교과서에 실어야한다는 주장은 감성과 이성을 구별 못하는 실수에서 비롯된 견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종교인들에게 저들의 경전(經典)을 진리자체로 받들고 믿는 것을 비판하는 자는 아마 이 세상에 없으리라.
아니 자기 종교의 경전을 믿지 않는 종교인이라면 그는 불신자(不信者)라는 비판을 벗어날 수 없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전에 나오는 창조론을 과학 교과서에 실으려면, 그 전에 그 내용이 옳은지 그른지 사실적 검증을 받아야만 하리라.
일단의 종교인들은 진화론은 과학적으로 검증 받았는가 하고 의심한다.
진화론은 ‘이것은 밝혀졌고, 저것은 아직 모른다’는 식으로 진화론 자체 내용을 확실히 구분해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과학의 자세가 무엇인지까지 보여주고 있다 하겠다.
결국 창조설은 사회 교과서에는 실릴 수 있을 지 언정 과학 교과서에는 어림도 없다는 뜻이다.
이성과 감성은 인간 고유의 특징으로 그 고귀함과 성스러움은 값으로 매길 수 없으리라.
누군가 그런 두 가지 정신이 어디서 왔느냐고 물을 때,
신을 믿는 종교인은 신의 선물이라 할 것이요, 이성적인 자라면 정직하게 “모른다”고 할 것이다.
이렇듯 감성의 영역은 가치판단으로, 이성은 사실판단으로 구별하여 판단하고 토론하면.. 낭비적이며 필요 이상 피를 흘리는 경우는 엄청 적어지리라 본다.
우리의 동물적인 요소가 부끄러운 게 아니듯, 감성은 결코 이성보다 못한 정신 능력이 아니다.
이성이 감성을 가볍게 여긴다면 그것은 곧 비이성적인 판단으로 감성적인 판단이 된다.
작가 헤르만 헷세가 <지와 사랑>에서 이성(나르치스)에 대해 감성(골드문트)이 콤플렉스를 느끼는 것처럼 묘사한 것은, 그 당시 유럽의 지성인들의 공감이었을 뿐, 역시 이성의 오만한 장난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
그간 네티즌들이 보여준 갈등의 중심에는 감성과 이성의 구별이 미약했다.
감성적 판단으로 이성적 판단을 매도하거나 그 반대가 난무하면서 중구난방으로 들쑤시니 혼란은 더욱 증폭될 수밖에 없었겠지.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스캔들이 터질 때 마다 4급 이상 태풍이 지나가듯 들볶여야만 하는 걸까?
호랑이에 물려가도 정신 차릴 수 있는 길은 없냐는 것이다.
인류의 발달을 간단히 살펴보면, 동물시대에서 감성시대로, 감성시대에서 이성시대로 흘러가고 있음을 본다.
여기서 감성시대란 동물적인 모습에 감성이 크게 작용하던 시대요,
이성시대란 동물적이며 감성적인 모습 외에 이성이 크게 작용하고 있는 시대를 말한다.
지금도 어느 사회이든 또는 한 개인 안에서 그 세 가지 모습은 서로 엉키어 작용하고 있지 아니 한가.
‘사람은 생각하는 동물’이라 하여, 몸과 정신을 인간의 특징으로 삼는다.
그런데 감성과 이성을 하나로 묶어 정신이라 하는 것은 ‘황우석 스캔들’에서 보듯 많은 문제가 파생한다.
잘 아는 바처럼 감성은 ‘호(好)와 오(惡)’, ‘미(美)와 추(醜)’, ‘신(信)과 불신(不信)’ 같은 느낌으로 가치판단 영역이 된다.
이성은 ‘맞다 틀리다’, ‘있다 없다’, 안다 모른다‘와 같은 검증이 가능한 사실판단이 그 영역으로 자리하고.
감성의 꽃으로 예술과 도덕을 말하지만 역시 최고의 꽃은 종교라 하지 않을 수 없고,
이성의 꽃은 철학이라 하지만, 현재는 당연히 과학으로 20세기에 이어 여전히 찬란한 과학의 꽃을 피우고 있지 아니한가.
이러히 정리가 되면, 종교적인 창조설을 학교에서 가르치자면서, 그 내용은 과학 교과서에 실어야한다는 주장은 감성과 이성을 구별 못하는 실수에서 비롯된 견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종교인들에게 저들의 경전(經典)을 진리자체로 받들고 믿는 것을 비판하는 자는 아마 이 세상에 없으리라.
아니 자기 종교의 경전을 믿지 않는 종교인이라면 그는 불신자(不信者)라는 비판을 벗어날 수 없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전에 나오는 창조론을 과학 교과서에 실으려면, 그 전에 그 내용이 옳은지 그른지 사실적 검증을 받아야만 하리라.
일단의 종교인들은 진화론은 과학적으로 검증 받았는가 하고 의심한다.
진화론은 ‘이것은 밝혀졌고, 저것은 아직 모른다’는 식으로 진화론 자체 내용을 확실히 구분해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과학의 자세가 무엇인지까지 보여주고 있다 하겠다.
결국 창조설은 사회 교과서에는 실릴 수 있을 지 언정 과학 교과서에는 어림도 없다는 뜻이다.
이성과 감성은 인간 고유의 특징으로 그 고귀함과 성스러움은 값으로 매길 수 없으리라.
누군가 그런 두 가지 정신이 어디서 왔느냐고 물을 때,
신을 믿는 종교인은 신의 선물이라 할 것이요, 이성적인 자라면 정직하게 “모른다”고 할 것이다.
이렇듯 감성의 영역은 가치판단으로, 이성은 사실판단으로 구별하여 판단하고 토론하면.. 낭비적이며 필요 이상 피를 흘리는 경우는 엄청 적어지리라 본다.
우리의 동물적인 요소가 부끄러운 게 아니듯, 감성은 결코 이성보다 못한 정신 능력이 아니다.
이성이 감성을 가볍게 여긴다면 그것은 곧 비이성적인 판단으로 감성적인 판단이 된다.
작가 헤르만 헷세가 <지와 사랑>에서 이성(나르치스)에 대해 감성(골드문트)이 콤플렉스를 느끼는 것처럼 묘사한 것은, 그 당시 유럽의 지성인들의 공감이었을 뿐, 역시 이성의 오만한 장난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