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오세윤 소아과 의사
조기 철이면 황금빛 황새기들이 모래밭에 가득 널리고
장어잡이 배가 들어오면 밤 늦도록 동네잔치가 벌어졌다
그 꿈의 고향이 포연이 솟는 땅으로 변할 줄이야
요사이 부쩍 고향 꿈을 꾼다. 간밤에도 그랬다. 꿈에서 내가 탄 배는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똑딱선 뱃전에 앉아 뒤를 돌아보는 나에게 곁의 누군가가 그곳이 '개머리'라고 말했다. 연평도를 포격한 북한군 진지가 있는 곳이었다. 바다는 어둑어둑 어두워지고 있었다.내 고향 용당포는 용당반도 끝에 있는 작은 어촌으로 해주항 서북쪽 경계에 곁눈처럼 붙어 있었다. 조용한 포구, 인근에서는 마을을 '용대이(龍塘)'라고 불렀다. '개머리'는 바로 옆 마을이었다.
삼태기처럼 휘어져 들어간 포구에는 20호쯤 되는 집들이 바다를 마주하고 자리 잡고 있었다. 집들 앞으로 난 폭 3~4m의 길을 겸한 둔치 아래로 모래톱이 펼쳐지고, 모래톱 끝에서 바다가 파도소리를 냈다. 마을 앞 반 마장이 약간 넘는 바다 한가운데에는 모란섬이 있었다.
조기 철이면 연평도에 나가 있던 배들이 예외 없이 만선으로 들어와 황금빛으로 번쩍번쩍 빛나는 누런 황새기(황석어)들을 모래밭 위에 가득 부려놓았다. 누런빛은 언제까지나 살아서 펄떡거리는 황홀한 생명감으로 노을지는 풍성한 바다와 함께 한 폭의 그림이 됐다.
때로 배들은 장어를 한가득 싣고 들어와 마을을 온통 시끌벅적 장바닥을 만들곤 했다. 그런 저녁이면 모래밭에선 늦게까지 떠들썩하게 동네잔치가 벌어졌다. 모래밭 여기저기에 풍롯불을 피워놓고 집집마다 식구들이 둘러앉아 장어를 구웠다.
- ▲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그 고향을, 꿈만 같던 고향을 우리는 쫓기듯 떠나왔다. 광복 이듬해 3월, 공산치하가 된 용대이를 뒤에 두고 우리는 남으로 왔다. 징발을 피해 모란섬 뒤쪽 은밀한 곳에 숨겨 놓았던 동력선을 찾아 끌고 온 아버지는 한밤중 이웃들 몰래 이삿짐을 배에 실었다. 길이 30m의 똑딱선, 통통거리는 배를 타고 우리는 고향을 탈출했다.
곤한 잠에서 깨어나 영문을 모른 채 불안에 떠는 식구들을 아버지는 말도 없이 배에 태웠다. 뱃전에 부딪치는 파도소리마저 두려워하며 마치 북극 바다의 유령선이기나 한 것처럼 어둠 짙은 빈 항구를 소리 없이 빠져나왔다. 아버지와 어머니, 나와 여동생 둘, 겨울에 태어난 남동생에 어머니의 산후조리를 돕기 위해 해주에서 내려와 있던 친할머니가 가족의 전부였다.
뒤늦게 로스께(소련군)가 연안의 초소에서 몇 발의 총을 쏘아댔지만 배는 이미 사정거리를 벗어나 있었다. 총알 몇 개가 배의 고물 훨씬 못 미쳐 '퍽' '퍽' 소리를 내며 물 위에 박혔다. 38선을 넘었다는 소리를 듣고서도 한참이 지나서야 어머니는 품에서 갓난 동생을 떼어내고 손바닥으로 놀란 가슴을 체 내리듯 쓸어내렸다.
누구에게나처럼 나에게도 고향은 특별하다. 잔잔하고 푸른 바다와 커다랗게 수평선 위로 떨어져 내리는 불덩이 같은 해와 노을, 누런 황새기들…. 그 꿈의 고향 옆 마을이 북한군의 포진지가 됐다고 한다. 거기에서 조기 잡던 연평도로 포탄이 날아들었다. 우리 동네 그곳에 모래사장 두꺼비집 대신 포대가 지어지고 별똥별 대신 포화가 난다.
개머리 진지 뒷산 너머에서 북한군이 다시 연습 사격을 해 폭발음이 나고 포연이 솟아올랐다는 뉴스가 나왔다. 가슴이 떨린다. 용대이는, 내 고향은 정녕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꿈속의 고향으로만 남고 말 것인가. 일본 종군 위안부를 피해 광복 전해에 부랴부랴 이웃동네 가막개로 시집간 고모는 영영 못 만나고 마는 건가. 부서진 연평도, 대포 진지가 돼버린 내 고향 위로 흰 구름이 흘러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