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들은 남녀노소, 학벌의 유무, 사회적 지위의 고하에 상관없이 자기가 옳다고 믿는 어떤 삶의 전제에 놀라우리만치 일치한 삶을 살아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재물이 많아야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재물을 모으는 일에 그의 온 관심과 노력을 경주하며 살아간다. 또 권력을 잡아야 사람행세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권력 잡는 일에 자신의 삶의 전부를 건다. 명예와 인기를 탐하는 사람들은 명예와 인기를 얻는 일에 전심을 다하여 살아간다. 그리고 자신들이 옳다고 믿는 전제 위에서 모든 것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자신들이 옳다고 믿는 삶의 전제가 사실이 아닐 경우 그 잘못된 전제위에서 세워진 그 사람의 삶은 결국은 그에게 회한과 고통과 실패를 안겨주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옳다고 믿고 살아가는 우리의 삶의 전제가 우리에게 진실로 유익을 가져다주는 사실과 진리에 입각한 전제인지를 진지하게 검토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신약성경 요한복음 3장에는 당시 유대사회의 70인 지도자중의 한 사람이었던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와 어떻게 하면 참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지를 묻는 장면이 나온다. 이에 예수님은 니고데모가 거듭나야 올바른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대답하신다. 그러자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대답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사람이 나이 들어 어른이 되었는데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느냐?” 고 반문하는 것이다.
니고데모는 시작과 끝 중 끝에 와있는 사람이 어떻게 다시 시작할 수 있느냐고 반문하고 있는 것이다. 니고데모의 삶의 전제는 삶의 끝에 이르면 모든 것은 그걸로 종결되는 것이지 끝 뒤에 다른 가능성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니고데모의 삶의 전제는 우리 인간들 모두의 전제이기도 한 것이다. 우리는 흔히들 “늙으면 죽어야지.”라고 말한다. 인생의 황혼에 다다르면 그 나머지는 죽음뿐이라는 절망을 가지고 사람들은 살아간다. 이러한 우리 인간들의 절망적 삶의 전제에 대하여 예수님은 그것은 사실이 아니며 우리가 근본적으로 우리의 생각과 인격을 바꿀 수 있다면 인생의 끝에서도 새로운 시작, 새로운 탄생이 가능하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의 시작은 항상 저녁(밤)시간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성경 창세기 1장의 창조에 관한 기사에서 보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루가 아침에 시작하여 저녁(밤)에 끝이 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은 언제나 저녁(밤)이 하루의 시작인 것이다. “저녁에 시작하여 아침이 되니 그것이 하루이니라.” 이것이 성경전체를 통해 강조되는 하나님의 창조의 순서와 질서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일을 하실 때 밤에 시작하여 아침에 끝을 내신다. 하나님은혼돈과 무질서(chaos)에서 질서정연함(cosmos)을, 어둠(darkness)에서 빛(light)을, 좌절과 절망에서 희망(hope)을 만들어 내시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창조의 법칙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사건에서도 우리가 분명히 볼 수 있다. 죽음이 먼저 있어야 죽음 뒤에 오는 새 생명의 부활이 있는 것이다.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인 것을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유대관헌에 붙잡혀 빌라도의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시고 돌무덤에 묻히는 순간 예수님을 3년 반 동안 측근에서 따라 다니던 제자들의 희망과 꿈도 함께 묻혔다. 그들은 예수가 구세주라는 사실은 믿었지만 당시 유대인들의 보편적 메시아관인 이스라엘을 로마의 지배에서 해방시켜줄 다윗과 같은 정치적 메시아를 믿고 있었으며 그렇게 될 때 예수가 왕으로 다스리시는 이스라엘에서 높은 지위를 누릴 수 있을 것이란 기대에 부풀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굳게 믿고 따르던 예수께서 힘없이 관헌들에게 붙잡혀 처형당하는 모습을 보자 그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고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고 낙담하며 집으로 돌아가 다시 옛날의 생업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 곧 죽음을 제압하고 다시 살아나는 부활의 시작인 것을 몰랐던 것이다. 3일째 되던 날 아침 슬픔과 충격에 쌓여 있던 제자들은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신 것을 직접 목격하고 그들의 슬픔과 절망은 기쁨과 환희로 바뀌었다. 밤이 있었기에 새벽이 있는 것이고 어둠이 있었기에 밝은 낮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인생에 시련과 어려움이 찾아오면 그것이 우리 삶의 끝이라고 생각하고 좌절하고 낙망하는 것이다. 그러나 참된 성공은 실패 뒤에 오는 법이며 인생의 참된 보람과 기쁨도 고난과 시련 뒤에 찾아오는 것을 우리는 자주 경험하고 있지 아니하는가?
난관과 장애물 앞에서 좌절해 주저앉으면 거기가 우리 인생의 끝이 되고 그 장애물을 이겨내면 또 다른 삶의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 인생드라마의 공식이자 하나님의 창조의 법칙이다. 십자가의 죽음을 거치지 않은 부활은 있을 수 없다. 고난을 거치지 않은 기쁨과 평안은 없는 것이다. 여러분들이 내 인생은 이제 끝났다고 절망할 때가 새로운 가능성, 새로운 희망의 시작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고 하나님께서는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과 늘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구약성경의 모든 선지서들은 앞이 보이지 않는 칠흙같이 어두운 이스라엘 역사의 밤에 시작하여 빛과 희망으로 끝을 맺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한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던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가끔 겪는 인생의 어려움들은 하나님께서 연약한 우리를 연단하여 강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지혜로우신 인간 훈련 방법임을 우리가 바로 알 필요가 있다. 세상살이에 바빠 하나님을 잊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이 바로 옆에 계신 것을 일깨워 주심으로 험악하고 적대적인 세상에서 신실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평안한 삶을 살아가게 해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시가 우리에게 인생의 밤을 허락하시는 이유임을 바로 알아야 한다.
우리가 어려움 가운데 있을 때 다윗처럼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 것을 믿기 때문에 내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라고 우리가 외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하시기 위해 일을 시작하시는 순서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실패한 그 시점이 새로운 시작의 출발점이라는 사실을 명심하고 니고데모와 같은 잘못된 삶의 전제에서 벗어나 “이제 모든 것이 끝장이다.” “이제 이 나이에 무엇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단 말인가?” 하고 절망할 때가 새로운 아침의 시작임을 알아 새로운 이상과 목표를 가지고 우리가 다시 시작할 수 있어야 한다.
신약성경 요한복음 3장에는 당시 유대사회의 70인 지도자중의 한 사람이었던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와 어떻게 하면 참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지를 묻는 장면이 나온다. 이에 예수님은 니고데모가 거듭나야 올바른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대답하신다. 그러자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대답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사람이 나이 들어 어른이 되었는데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느냐?” 고 반문하는 것이다.
니고데모는 시작과 끝 중 끝에 와있는 사람이 어떻게 다시 시작할 수 있느냐고 반문하고 있는 것이다. 니고데모의 삶의 전제는 삶의 끝에 이르면 모든 것은 그걸로 종결되는 것이지 끝 뒤에 다른 가능성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니고데모의 삶의 전제는 우리 인간들 모두의 전제이기도 한 것이다. 우리는 흔히들 “늙으면 죽어야지.”라고 말한다. 인생의 황혼에 다다르면 그 나머지는 죽음뿐이라는 절망을 가지고 사람들은 살아간다. 이러한 우리 인간들의 절망적 삶의 전제에 대하여 예수님은 그것은 사실이 아니며 우리가 근본적으로 우리의 생각과 인격을 바꿀 수 있다면 인생의 끝에서도 새로운 시작, 새로운 탄생이 가능하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의 시작은 항상 저녁(밤)시간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성경 창세기 1장의 창조에 관한 기사에서 보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루가 아침에 시작하여 저녁(밤)에 끝이 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은 언제나 저녁(밤)이 하루의 시작인 것이다. “저녁에 시작하여 아침이 되니 그것이 하루이니라.” 이것이 성경전체를 통해 강조되는 하나님의 창조의 순서와 질서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일을 하실 때 밤에 시작하여 아침에 끝을 내신다. 하나님은혼돈과 무질서(chaos)에서 질서정연함(cosmos)을, 어둠(darkness)에서 빛(light)을, 좌절과 절망에서 희망(hope)을 만들어 내시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창조의 법칙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사건에서도 우리가 분명히 볼 수 있다. 죽음이 먼저 있어야 죽음 뒤에 오는 새 생명의 부활이 있는 것이다.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인 것을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유대관헌에 붙잡혀 빌라도의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시고 돌무덤에 묻히는 순간 예수님을 3년 반 동안 측근에서 따라 다니던 제자들의 희망과 꿈도 함께 묻혔다. 그들은 예수가 구세주라는 사실은 믿었지만 당시 유대인들의 보편적 메시아관인 이스라엘을 로마의 지배에서 해방시켜줄 다윗과 같은 정치적 메시아를 믿고 있었으며 그렇게 될 때 예수가 왕으로 다스리시는 이스라엘에서 높은 지위를 누릴 수 있을 것이란 기대에 부풀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굳게 믿고 따르던 예수께서 힘없이 관헌들에게 붙잡혀 처형당하는 모습을 보자 그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고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고 낙담하며 집으로 돌아가 다시 옛날의 생업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 곧 죽음을 제압하고 다시 살아나는 부활의 시작인 것을 몰랐던 것이다. 3일째 되던 날 아침 슬픔과 충격에 쌓여 있던 제자들은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신 것을 직접 목격하고 그들의 슬픔과 절망은 기쁨과 환희로 바뀌었다. 밤이 있었기에 새벽이 있는 것이고 어둠이 있었기에 밝은 낮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인생에 시련과 어려움이 찾아오면 그것이 우리 삶의 끝이라고 생각하고 좌절하고 낙망하는 것이다. 그러나 참된 성공은 실패 뒤에 오는 법이며 인생의 참된 보람과 기쁨도 고난과 시련 뒤에 찾아오는 것을 우리는 자주 경험하고 있지 아니하는가?
난관과 장애물 앞에서 좌절해 주저앉으면 거기가 우리 인생의 끝이 되고 그 장애물을 이겨내면 또 다른 삶의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 인생드라마의 공식이자 하나님의 창조의 법칙이다. 십자가의 죽음을 거치지 않은 부활은 있을 수 없다. 고난을 거치지 않은 기쁨과 평안은 없는 것이다. 여러분들이 내 인생은 이제 끝났다고 절망할 때가 새로운 가능성, 새로운 희망의 시작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고 하나님께서는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과 늘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구약성경의 모든 선지서들은 앞이 보이지 않는 칠흙같이 어두운 이스라엘 역사의 밤에 시작하여 빛과 희망으로 끝을 맺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한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던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가끔 겪는 인생의 어려움들은 하나님께서 연약한 우리를 연단하여 강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지혜로우신 인간 훈련 방법임을 우리가 바로 알 필요가 있다. 세상살이에 바빠 하나님을 잊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이 바로 옆에 계신 것을 일깨워 주심으로 험악하고 적대적인 세상에서 신실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평안한 삶을 살아가게 해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시가 우리에게 인생의 밤을 허락하시는 이유임을 바로 알아야 한다.
우리가 어려움 가운데 있을 때 다윗처럼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 것을 믿기 때문에 내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라고 우리가 외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하시기 위해 일을 시작하시는 순서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실패한 그 시점이 새로운 시작의 출발점이라는 사실을 명심하고 니고데모와 같은 잘못된 삶의 전제에서 벗어나 “이제 모든 것이 끝장이다.” “이제 이 나이에 무엇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단 말인가?” 하고 절망할 때가 새로운 아침의 시작임을 알아 새로운 이상과 목표를 가지고 우리가 다시 시작할 수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