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3년 2월 9일>
월성리에서 바라본 칠성님
지리산에 폭설이 내려 입산을 철저히 통제한단다. 정령치에서 고리봉을 거쳐 여원재까지 가려던 계획을 수정하여 덕유산으로 건너뛰기로 하였다. 당초 계획대로라면 덕유산은 올 여름에나 지나가게 될 것을 미리 앞당겨 가는 것이다. 설경 속에서 덕유산을 맞는 설레임이 있다.
속리산에서 한남금북정맥을 내주고 남하하던 백두대간이 지리산에 닿기 전에 한번 힘차게 용트림하며 향적봉(1614), 중봉(1594), 무룡산(1492), 남덕유산(1507) 등의 높은 봉우리들을 힘차게 밀어올려, 1천미터 이상의 대간 마루금이 경상도와 전라도를 나누도록 한 것이 덕유산이다.
새벽 5시30분에 경남 거창군 북상면 월성리(月星里) 황점마을에 도착하였다. 초아흐레 달은 이미 서산으로 넘어간 지 오래이지만 별들은 엄숙하게 제자리를 지키며 산골마을 위에서 찬란하다. 북두칠성은 엥돌아져 남덕유 능선 바로 위에 길게 누워있다.
우리 조상들은 북두칠성을 신격화 하여 `자미대제`라 부르고 그가 `자미원`이라는 우주를 다스리는 하느님으로 보았다. 그리하여 북극성을 중심으로 하루 한 바퀴씩 도는 북두칠성을 두고 `자미대제통성군`이라 하여 모든 별들이 제자리를 이탈하지 않도록 하며 우주의 운행도수를 잡아주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또한 탐랑성, 거문성, 녹존성, 문곡성, 염정성, 무곡성, 절병성 등의 일곱 개 별이 각각 역할을 분담하여 인간 세상의 모든 길흉화복을 관장하는 것으로 보았다. 북두칠성 자체가 우리 조상들의 세계관, 우주관이었으며 또한 신앙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인구의 80%가 도시에 사는 지금 우리는 이러한 별과 달을 잊은 채 살아가고 있다. 밤똥을 누기 위해 마당을 가로질러 변소로 가는 도중에는 달그림자가 있었으며, 사랑채에서 안채의 침실로 가는 도중에는 까만 밤하늘에 총총히 빛나던 별빛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농촌에서마저 수세식 변소가 거실 옆에 붙어있다.
건축에서 `동선은 짧을수록 좋다`는 말은 어디까지나 현대건축의 용어이자 기능주의자들의 단순논리이지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보고 자연친화적인 환경을 만들려고 노력한 우리네 전통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이다. 이곳 황점마을의 당산나무 밑에서 새벽하늘에 무수히 떠있는 별들을 쳐다보며 산속에서 너와집을 지어 최소한의 인공으로 자연과 나를 구분하고 한 세상을 살아갔을 백두대간 언저리의 인생들을 생각하였다.
운해로 덮인 하계를 굽어보며
6시에 황점매표소를 지나 입산을 시작했다. 별빛을 스쳐온 산촌의 새벽공기가 폐부 깊숙히 스며든다. 후레쉬를 켜들고 뽀드득 눈길을 밟으며 백두대간 속으로 파고 들었다. 삿갓골 골짜기를 흰눈이 덮은 가운데 맑고 시린 계곡 물줄기가 졸졸 소리를 내며 눈을 스치고 지나간다. 삿갓골재까지 오르는 능선은 눈이 덮여 오히려 걷기에 편하였다.
해가 뜨면서 삿갓봉이 발갛게 물들어가며 덕유산이 곳곳에서 제 속살을 내보이기 시작했다. 떡갈나무 종류가 우점종을 차지한 가운데 온갖 활엽수림이 산비탈을 빼곡히 채우고 있다. 대팻밥처럼 얇게 껍질이 벗겨지는 거제수나무도 눈에 띄인다. 이리저리 내뻗은 가지들은 서로 사이좋게 하늘을 나눠 차지하며 조금도 다툼이 없다. 산죽들이 눈 속에서 고개를 내밀고 청청한 기개를 뽐내며 제 영토를 지키고 있다.
날씨는 쾌청하고 바람 한점 없는 포근한 봄날씨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고드름이 툭툭 떨어진다. 고갯마루 거의 다 오를 즈음에 샘물이 하나 있다. 가파른 고갯길을 올라오느라 목이 마르던 차에 젖처럼 달콤한 물을 마셨다. 단숨에 고갯마루에 올라섰다.
최근에 생긴 삿갓골재 대피소는 협소한 지형 위에 선 아담한 산장이다. 고갯마루에 올라 전라도 쪽을 바라보니 장수군 계북면과 무주군 안성면, 그리고 멀리 진안군의 봉우리들이 운해 속에서 섬처럼 떠있다. 돌아보면 거창군 일대도 다 구름바다에 빠져 있다. 참으로 장관이다. 선해 보이는 산장지기의 보살핌으로 컵라면을 끓여 아침식사를 하였다.
8시 40분에 대간이어가기가 시작됐다. 대간마루금을 따라 눈이 두 자 이상 쌓여 있다. 모랫바람이 사구를 형성하듯 양쪽에서 몰아치는 바람이 눈을 몰아와 대간마루금에 쌓아놓았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오고가 좁은 폭으로 다져진 길이 이어진다. 오른쪽으로 경상도 왼쪽으로 전라도가 모두 운해 속에 묻혔는데 남쪽으로 돌아보니 남덕유로 이어지는 고봉준령이 쾌청한 날씨 속에 제 모습을 다 드러내고 있다. 멀리 지리산 천왕봉에서 반야봉에 이르는 능선이 줄달음 치고 있는 모습이 아스라히 시야에 들어온다. 이처럼 시계가 좋은 날은 1년에 몇 번 없다는 백선생의 설명이다. 바위에 걸터앉아 하계를 내려다보고 있노라니 신선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적상산 사고
왼편으로 멀리 큰 산 하나가 제법 큰 섬처럼 떠 있다. 무주 적상산이라 한다. 무주군 적상면은 오지 중의 오지였다. 그러나 지금은 대진고속도로 적상인터체인지가 있다. 사방이 절벽으로 이루어져 천혜의 요새였던 이곳을 차지하기 위해 백제와 신라가 각축을 벌였었다. 고려말 최영 장군이 왜구를 토벌하고 이곳을 지나다가 이 산의 험절함과 지리적 요충임을 알아보고 성을 쌓자고 한 기록이 있으며, 조선 세종 때에도 체찰사 최윤덕이 이곳을 답사하고, 산성을 쌓고 보존해야 할 곳이라고 건의한 일이 있던 것으로 미루어보아 지금의 성터는 세종 때나 그 후에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둘레 길이 5,584m, 면적 70만 2867m2로 이루어진 이곳은 수많은 전란을 거치면서도 단 한 건의 피해도 당하지 않은 유서 깊은 곳이다.
또한 이곳 산성 경내에는 우리나라 5대 사고(史庫) 중 하나인 적상산 사고가 자리하고 있었다. 사고는 고려말 이후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역사기록과 중요한 서적·문서를 보관하던 곳이었다. 임진왜란 때 서울의 춘추관을 비롯하여 충청도 충주사고, 경상도 성주사고가 불에 타버렸다. 다만 전주사고만이 병화를 면하여 소중한 기록이 천만다행으로 살아남은 것이다. 고려시대에도 8대 현종 때에 거란족이 쳐들어와 개경을 함락하고 태조 때부터 내려오던 고려실록을 다 불태워버렸다. 임진왜란 이후 불에 탄 후 사고는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막대한 예산을 들여 실록을 다시 인쇄하여 춘추관 외에 정족산, 태백산, 묘향산, 오대산 등에 새로운 사고를 설치하였다.
그러다가 정묘호란 후 북방이 위태하다 하여 광해 6년(1614) 천혜의 요새로 이름난 무주의 적상산에다 실록전을 세우고 묘향산의 실록을 옮기게 되었다. 그로 인하여 무주현은 도호부로 승격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적상산을 왼편에 두고 내려다보며 대간 마루금을 이어갔다.
`개발` 앞에 힘 못쓰는 국립공원
적상산은 환경파괴의 현장으로서도 악명이 높은 곳이다. 1982년 16만7천 평의 대규모 야영장이 개발된 이후, 1984년부터 덕유산 국립공원에서 추진되어 온 무주리조트 개발[시행자:(주) 쌍방울]과 무주 양수발전소 건설(시행자: 한국전력)은 국립공원 관리행정사에 한 획을 그을 만큼 중대한 국립공원 파괴의 사례이다.
1993년 조사 결과 덕유산 국립공원지역에 생육하고 있는 관속식물은 모두 97과 297속 541종 류 460종, 68변종, 4품종으로 확인되었고, 이 중에서 19종류는 인공식재된 수종이었으며, 한국 특산식물은 12종류, 희귀식물은 16종류로 조사되었다 한다. 그런데 무주리조트와 무주골프장이 향적봉 꼭대기까지 들어서서 일대의 식생과 생태계를 초토화시키고 말았다. 향적봉 주변 지역만 해도 주목군락, 사스래군락, 철쭉군락 등이 분포하고 있으며, 우리 나라의 특산수종인 구상나무와 가문비나무, 잣나무 등이 분포하는 귀중한 고산지역의 숲이라 한다.
(주) 쌍방울이 건설한 18홀 규모의 골프장이 있는 두문산 주변(해발 800-1,000m) 구역의 식생의 구성비는 소나무-신갈나무-졸참나무군집이 33.2%, 참나무류 군집이 27.3%, 소나무군집이 20.7%, 고산습지가 4.9%로 나타났으며, 녹지자연도 8. 9등급이 전체의 93%로서 안정된 생태계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녹지자연도 8등급 이상 되는 일반 산지에서도 골프장 건설이 제한받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녹지자연도 9등급 지역의 덕유산 국립공원구역에서는 국유림을 불하해주어 골프장 18홀 코스 주변의 수림을 철저히 파괴하도록 하였다.
골프는 맨 처음 스코틀랜드에서 시작되었다. 그곳은 낮은 구릉이 끝없이 펼쳐진 가운데 멕시코만류와 북극해류가 만나 항상 안개가 끼고 연중 강수량이 고르게 분포하는 서안해양성 기후이다. 이러한 구릉지에 잔디가 사시사철 알맞게 자라있어 아무데나 구멍만 뚫어놓으면 골프장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와 같은 자연환경에 골프장을 만들려면 필연적으로 자연파괴가 따르게 마련이다. 나무를 베어내고 산을 깎아낸 다음 본땅을 1미터 깊이로 파헤치고, 비닐을 깔고, 격자모양의 배수로를 설치하고, 자갈과 바닷모래, 마사토를 깔고, 잔디가 살 수 있는 공간은 흙을 다시 10센티정도 깐 후 거기에 수입산 잔디(밴트그라스)를 심는다. 그 푸르름을 항상 유지시키기 위해 엄청난 양의 물과 약이 필요하하다. 관정을 뚫어 지하수를 마구 뽑아 쓴다. 잔디의 수명이 보통 10년이라고하는데 그것을 더 유지시키기 위해 약을 많이 쓴다는 말도 있다. 많은 서민들이 자연의 혜택에 힘입어 근근히 살아오는데 골프치는 인구가 얼마나 된다고 그들을 위해 많은 서민들의 삶의 터전인 자연을 이토록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대간이어가기를 하면서 이러한 자연파괴의 현장을 얼마나 더 만나게 될까.
전북 무주군 적상면, 북창면 일대의 덕유산 국립공원에 위치한 무주양수발전소는 1천m 높은 산등에 댐을 막아 물을 뿜어 올려 이 물로 발전시키는 우리 나라 최대규모의 양수발전소이다. 용량 60만 KWH의 발전시설을 위해 안국사터(표고850m)에 상부댐을 건설하고 포내리(표고 250m)에 하부댐을 만들어 괴목천 물을 저수하였다가 전기 수요가 적은 야간에 적상산 정상 가까운 분지에 막은 상부댐으로 끌어올리고 주간에 589m의 낙차폭을 이용하여 발전하는 시스템이다. 심야의 남는 전기는 원전에서 나온다. 그래서 이러한 양수발전소는 원자력발전소의 사생아인 셈이다. 또한 댐을 두 군데에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자연파괴도 두 배이며, 물을 퍼올리기 위해 전기를 써야 하기 때문에 에너지 효율도 떨어진다. 그래서 양수발전소는 자연파괴와 예산낭비의 주범인 것이다.
독특한 고산 분지생태계 그리고 녹지자연도 9등급의 삼림생태계를 나타내는 적상산성 일원의 삼림, 습지 생태계(약 10만평), 문화재인 적상산성(사적 1백64호)은 이렇게 해서 파괴되었다. 모두 3천억여원이 들어갔다. 환경영향평가 과정에서 녹지자연도 9등급을 8등급으로 조작해 절대보존지역인 자연보존지구를 불법 훼손했다.
이 밖에도 외환위기 이후 공사가 중단되었던 산청·양양 양수발전소 건설공사가 작년 초부터 재개됐다고 한다. 양양양수발전소는 남대천 상류에 하부댐을 설치하게 돼 연어의 회귀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보고도 있다. 끝없이 공사판을 벌여야 먹고 사는 우리나라는 `토건국가`인가.
어지러운 난개발에 백두대간이 앓고 있다. 국가는 `국토 내의 자연풍경지를 보호하면서 국민의 보건, 휴양적 이용을 도모할 목적`으로 1967년부터 20개의 국립공원을 지정해 오면서 국립공원 안의 사유지(약 25%)의 재산권 행사 를 제한하고 있다. 그런데 국립공원정책과 자연보존에 대하여 국민들의 협조를 요청하고 있는 정부가 특정계층을 위해 국립공원의 파괴에 앞장선다면 이것은 범죄행위와 다를 바 없다. 이러한 범죄적 건설공사는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새만금방조제에 토석을 대기 위해 국립공원변산반도의 산이 헐리고 있고 북한산국립공원을 파헤치며 터널공사를 하고 있다.
춤추는 용의 형국 무룡산에서
용처럼 꿈틀대는 대간능선을 따라 해발 1491미터의 무룡산에 올랐다. 과연 춤추는 용의 형국이다. 이 용은 어디에서 온 용인가. 저 아래 운해에 잠긴 진안땅 용담에서 온 것일까. 용담이라는 지명은 진안군 말고도 구미와 제주에도 있다. 구미의 용담은 동학을 일으킨 최제우가 머물며 <용담유사>를 쓴 곳이다. 그런데 진안군 용담은 이제 수많은 전설과 함께 대부분 물에 잠기고 말았다. 2001년 12월에 진안군 용담면 월계리 금강 상류 계곡에 높이 70미터 길이 498미터의 댐을 쌓고 물을 가두기 시작한 것이다.
이 용담댐은 저수량이 소양강, 충주, 대청, 안동에 이어 8억톤을 자랑한다. 그러나 이로 인해 진안군의 3분의 1에 달하는 5개면의 마을 주민 1만여명이 조상대대로 살아오던 정든 고향을 떠나야 했다. 수몰된 것은 사람만이 아니다. 금강상류의 자갈바닥에서 살아가던 감돌고기가 멸종 위기에 내몰린 것이다. 감돌고기는 체구가 작아 식용으로 이용되는 일이 거의 없고 관상용으로도 각광을 받지 못하지만 탄생 이래 한번도 고향을 떠나본 적 없는 우리 땅의 토착담수어이다. 저들도 이 땅에서 살아갈 권리가 있을진대 인간은 그들의 삶을 완전히 박탈해버리고 말았다.
이 용담댐의 물을 만경강으로 빼돌려 새만금호의 희석수로 쓰자는 안이 나왔었다. 그러자 금강 중하류의 대전 충청도의 시민들이 들고 일어났다. 자연의 질서에 최대한 순응하며 살아왔던 이 땅의 사람들이 이 지경에 빠지고 말았다. 우리 조상들은 집사방의 나무 한 그루도 함부로 베지 않았다. 우리 조상들은 자연의 질서를 파괴한 대가로 돌아오는 재앙을 `동티`라 불렀다. `개발의 시대`에 이어 이제 `동티의 시대`가 올 것인가. 무룡산 정상에서 향적봉으로 이어가는 대간 능선을 바라보는 마음은 편치 않다.
또 하나의 준령 동엽령을 지나 송계사삼거리에 당도했다. 이곳에서 중봉을 거쳐 전북 묏부리의 조종인 향적봉을 내고 대간줄기는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지봉(못봉)으로 이어진다. 횡경재를 지나 지봉에 이르기 전 지봉안부에서 대간 마루금을 벗어나 하산하였다. 18km의 산길을 오전 6시부터 오후 6시까지 주파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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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성리에서 바라본 칠성님
지리산에 폭설이 내려 입산을 철저히 통제한단다. 정령치에서 고리봉을 거쳐 여원재까지 가려던 계획을 수정하여 덕유산으로 건너뛰기로 하였다. 당초 계획대로라면 덕유산은 올 여름에나 지나가게 될 것을 미리 앞당겨 가는 것이다. 설경 속에서 덕유산을 맞는 설레임이 있다.
속리산에서 한남금북정맥을 내주고 남하하던 백두대간이 지리산에 닿기 전에 한번 힘차게 용트림하며 향적봉(1614), 중봉(1594), 무룡산(1492), 남덕유산(1507) 등의 높은 봉우리들을 힘차게 밀어올려, 1천미터 이상의 대간 마루금이 경상도와 전라도를 나누도록 한 것이 덕유산이다.
새벽 5시30분에 경남 거창군 북상면 월성리(月星里) 황점마을에 도착하였다. 초아흐레 달은 이미 서산으로 넘어간 지 오래이지만 별들은 엄숙하게 제자리를 지키며 산골마을 위에서 찬란하다. 북두칠성은 엥돌아져 남덕유 능선 바로 위에 길게 누워있다.
우리 조상들은 북두칠성을 신격화 하여 `자미대제`라 부르고 그가 `자미원`이라는 우주를 다스리는 하느님으로 보았다. 그리하여 북극성을 중심으로 하루 한 바퀴씩 도는 북두칠성을 두고 `자미대제통성군`이라 하여 모든 별들이 제자리를 이탈하지 않도록 하며 우주의 운행도수를 잡아주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또한 탐랑성, 거문성, 녹존성, 문곡성, 염정성, 무곡성, 절병성 등의 일곱 개 별이 각각 역할을 분담하여 인간 세상의 모든 길흉화복을 관장하는 것으로 보았다. 북두칠성 자체가 우리 조상들의 세계관, 우주관이었으며 또한 신앙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인구의 80%가 도시에 사는 지금 우리는 이러한 별과 달을 잊은 채 살아가고 있다. 밤똥을 누기 위해 마당을 가로질러 변소로 가는 도중에는 달그림자가 있었으며, 사랑채에서 안채의 침실로 가는 도중에는 까만 밤하늘에 총총히 빛나던 별빛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농촌에서마저 수세식 변소가 거실 옆에 붙어있다.
건축에서 `동선은 짧을수록 좋다`는 말은 어디까지나 현대건축의 용어이자 기능주의자들의 단순논리이지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보고 자연친화적인 환경을 만들려고 노력한 우리네 전통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이다. 이곳 황점마을의 당산나무 밑에서 새벽하늘에 무수히 떠있는 별들을 쳐다보며 산속에서 너와집을 지어 최소한의 인공으로 자연과 나를 구분하고 한 세상을 살아갔을 백두대간 언저리의 인생들을 생각하였다.
운해로 덮인 하계를 굽어보며
6시에 황점매표소를 지나 입산을 시작했다. 별빛을 스쳐온 산촌의 새벽공기가 폐부 깊숙히 스며든다. 후레쉬를 켜들고 뽀드득 눈길을 밟으며 백두대간 속으로 파고 들었다. 삿갓골 골짜기를 흰눈이 덮은 가운데 맑고 시린 계곡 물줄기가 졸졸 소리를 내며 눈을 스치고 지나간다. 삿갓골재까지 오르는 능선은 눈이 덮여 오히려 걷기에 편하였다.
해가 뜨면서 삿갓봉이 발갛게 물들어가며 덕유산이 곳곳에서 제 속살을 내보이기 시작했다. 떡갈나무 종류가 우점종을 차지한 가운데 온갖 활엽수림이 산비탈을 빼곡히 채우고 있다. 대팻밥처럼 얇게 껍질이 벗겨지는 거제수나무도 눈에 띄인다. 이리저리 내뻗은 가지들은 서로 사이좋게 하늘을 나눠 차지하며 조금도 다툼이 없다. 산죽들이 눈 속에서 고개를 내밀고 청청한 기개를 뽐내며 제 영토를 지키고 있다.
날씨는 쾌청하고 바람 한점 없는 포근한 봄날씨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고드름이 툭툭 떨어진다. 고갯마루 거의 다 오를 즈음에 샘물이 하나 있다. 가파른 고갯길을 올라오느라 목이 마르던 차에 젖처럼 달콤한 물을 마셨다. 단숨에 고갯마루에 올라섰다.
최근에 생긴 삿갓골재 대피소는 협소한 지형 위에 선 아담한 산장이다. 고갯마루에 올라 전라도 쪽을 바라보니 장수군 계북면과 무주군 안성면, 그리고 멀리 진안군의 봉우리들이 운해 속에서 섬처럼 떠있다. 돌아보면 거창군 일대도 다 구름바다에 빠져 있다. 참으로 장관이다. 선해 보이는 산장지기의 보살핌으로 컵라면을 끓여 아침식사를 하였다.
8시 40분에 대간이어가기가 시작됐다. 대간마루금을 따라 눈이 두 자 이상 쌓여 있다. 모랫바람이 사구를 형성하듯 양쪽에서 몰아치는 바람이 눈을 몰아와 대간마루금에 쌓아놓았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오고가 좁은 폭으로 다져진 길이 이어진다. 오른쪽으로 경상도 왼쪽으로 전라도가 모두 운해 속에 묻혔는데 남쪽으로 돌아보니 남덕유로 이어지는 고봉준령이 쾌청한 날씨 속에 제 모습을 다 드러내고 있다. 멀리 지리산 천왕봉에서 반야봉에 이르는 능선이 줄달음 치고 있는 모습이 아스라히 시야에 들어온다. 이처럼 시계가 좋은 날은 1년에 몇 번 없다는 백선생의 설명이다. 바위에 걸터앉아 하계를 내려다보고 있노라니 신선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적상산 사고
왼편으로 멀리 큰 산 하나가 제법 큰 섬처럼 떠 있다. 무주 적상산이라 한다. 무주군 적상면은 오지 중의 오지였다. 그러나 지금은 대진고속도로 적상인터체인지가 있다. 사방이 절벽으로 이루어져 천혜의 요새였던 이곳을 차지하기 위해 백제와 신라가 각축을 벌였었다. 고려말 최영 장군이 왜구를 토벌하고 이곳을 지나다가 이 산의 험절함과 지리적 요충임을 알아보고 성을 쌓자고 한 기록이 있으며, 조선 세종 때에도 체찰사 최윤덕이 이곳을 답사하고, 산성을 쌓고 보존해야 할 곳이라고 건의한 일이 있던 것으로 미루어보아 지금의 성터는 세종 때나 그 후에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둘레 길이 5,584m, 면적 70만 2867m2로 이루어진 이곳은 수많은 전란을 거치면서도 단 한 건의 피해도 당하지 않은 유서 깊은 곳이다.
또한 이곳 산성 경내에는 우리나라 5대 사고(史庫) 중 하나인 적상산 사고가 자리하고 있었다. 사고는 고려말 이후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역사기록과 중요한 서적·문서를 보관하던 곳이었다. 임진왜란 때 서울의 춘추관을 비롯하여 충청도 충주사고, 경상도 성주사고가 불에 타버렸다. 다만 전주사고만이 병화를 면하여 소중한 기록이 천만다행으로 살아남은 것이다. 고려시대에도 8대 현종 때에 거란족이 쳐들어와 개경을 함락하고 태조 때부터 내려오던 고려실록을 다 불태워버렸다. 임진왜란 이후 불에 탄 후 사고는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막대한 예산을 들여 실록을 다시 인쇄하여 춘추관 외에 정족산, 태백산, 묘향산, 오대산 등에 새로운 사고를 설치하였다.
그러다가 정묘호란 후 북방이 위태하다 하여 광해 6년(1614) 천혜의 요새로 이름난 무주의 적상산에다 실록전을 세우고 묘향산의 실록을 옮기게 되었다. 그로 인하여 무주현은 도호부로 승격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적상산을 왼편에 두고 내려다보며 대간 마루금을 이어갔다.
`개발` 앞에 힘 못쓰는 국립공원
적상산은 환경파괴의 현장으로서도 악명이 높은 곳이다. 1982년 16만7천 평의 대규모 야영장이 개발된 이후, 1984년부터 덕유산 국립공원에서 추진되어 온 무주리조트 개발[시행자:(주) 쌍방울]과 무주 양수발전소 건설(시행자: 한국전력)은 국립공원 관리행정사에 한 획을 그을 만큼 중대한 국립공원 파괴의 사례이다.
1993년 조사 결과 덕유산 국립공원지역에 생육하고 있는 관속식물은 모두 97과 297속 541종 류 460종, 68변종, 4품종으로 확인되었고, 이 중에서 19종류는 인공식재된 수종이었으며, 한국 특산식물은 12종류, 희귀식물은 16종류로 조사되었다 한다. 그런데 무주리조트와 무주골프장이 향적봉 꼭대기까지 들어서서 일대의 식생과 생태계를 초토화시키고 말았다. 향적봉 주변 지역만 해도 주목군락, 사스래군락, 철쭉군락 등이 분포하고 있으며, 우리 나라의 특산수종인 구상나무와 가문비나무, 잣나무 등이 분포하는 귀중한 고산지역의 숲이라 한다.
(주) 쌍방울이 건설한 18홀 규모의 골프장이 있는 두문산 주변(해발 800-1,000m) 구역의 식생의 구성비는 소나무-신갈나무-졸참나무군집이 33.2%, 참나무류 군집이 27.3%, 소나무군집이 20.7%, 고산습지가 4.9%로 나타났으며, 녹지자연도 8. 9등급이 전체의 93%로서 안정된 생태계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녹지자연도 8등급 이상 되는 일반 산지에서도 골프장 건설이 제한받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녹지자연도 9등급 지역의 덕유산 국립공원구역에서는 국유림을 불하해주어 골프장 18홀 코스 주변의 수림을 철저히 파괴하도록 하였다.
골프는 맨 처음 스코틀랜드에서 시작되었다. 그곳은 낮은 구릉이 끝없이 펼쳐진 가운데 멕시코만류와 북극해류가 만나 항상 안개가 끼고 연중 강수량이 고르게 분포하는 서안해양성 기후이다. 이러한 구릉지에 잔디가 사시사철 알맞게 자라있어 아무데나 구멍만 뚫어놓으면 골프장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와 같은 자연환경에 골프장을 만들려면 필연적으로 자연파괴가 따르게 마련이다. 나무를 베어내고 산을 깎아낸 다음 본땅을 1미터 깊이로 파헤치고, 비닐을 깔고, 격자모양의 배수로를 설치하고, 자갈과 바닷모래, 마사토를 깔고, 잔디가 살 수 있는 공간은 흙을 다시 10센티정도 깐 후 거기에 수입산 잔디(밴트그라스)를 심는다. 그 푸르름을 항상 유지시키기 위해 엄청난 양의 물과 약이 필요하하다. 관정을 뚫어 지하수를 마구 뽑아 쓴다. 잔디의 수명이 보통 10년이라고하는데 그것을 더 유지시키기 위해 약을 많이 쓴다는 말도 있다. 많은 서민들이 자연의 혜택에 힘입어 근근히 살아오는데 골프치는 인구가 얼마나 된다고 그들을 위해 많은 서민들의 삶의 터전인 자연을 이토록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대간이어가기를 하면서 이러한 자연파괴의 현장을 얼마나 더 만나게 될까.
전북 무주군 적상면, 북창면 일대의 덕유산 국립공원에 위치한 무주양수발전소는 1천m 높은 산등에 댐을 막아 물을 뿜어 올려 이 물로 발전시키는 우리 나라 최대규모의 양수발전소이다. 용량 60만 KWH의 발전시설을 위해 안국사터(표고850m)에 상부댐을 건설하고 포내리(표고 250m)에 하부댐을 만들어 괴목천 물을 저수하였다가 전기 수요가 적은 야간에 적상산 정상 가까운 분지에 막은 상부댐으로 끌어올리고 주간에 589m의 낙차폭을 이용하여 발전하는 시스템이다. 심야의 남는 전기는 원전에서 나온다. 그래서 이러한 양수발전소는 원자력발전소의 사생아인 셈이다. 또한 댐을 두 군데에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자연파괴도 두 배이며, 물을 퍼올리기 위해 전기를 써야 하기 때문에 에너지 효율도 떨어진다. 그래서 양수발전소는 자연파괴와 예산낭비의 주범인 것이다.
독특한 고산 분지생태계 그리고 녹지자연도 9등급의 삼림생태계를 나타내는 적상산성 일원의 삼림, 습지 생태계(약 10만평), 문화재인 적상산성(사적 1백64호)은 이렇게 해서 파괴되었다. 모두 3천억여원이 들어갔다. 환경영향평가 과정에서 녹지자연도 9등급을 8등급으로 조작해 절대보존지역인 자연보존지구를 불법 훼손했다.
이 밖에도 외환위기 이후 공사가 중단되었던 산청·양양 양수발전소 건설공사가 작년 초부터 재개됐다고 한다. 양양양수발전소는 남대천 상류에 하부댐을 설치하게 돼 연어의 회귀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보고도 있다. 끝없이 공사판을 벌여야 먹고 사는 우리나라는 `토건국가`인가.
어지러운 난개발에 백두대간이 앓고 있다. 국가는 `국토 내의 자연풍경지를 보호하면서 국민의 보건, 휴양적 이용을 도모할 목적`으로 1967년부터 20개의 국립공원을 지정해 오면서 국립공원 안의 사유지(약 25%)의 재산권 행사 를 제한하고 있다. 그런데 국립공원정책과 자연보존에 대하여 국민들의 협조를 요청하고 있는 정부가 특정계층을 위해 국립공원의 파괴에 앞장선다면 이것은 범죄행위와 다를 바 없다. 이러한 범죄적 건설공사는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새만금방조제에 토석을 대기 위해 국립공원변산반도의 산이 헐리고 있고 북한산국립공원을 파헤치며 터널공사를 하고 있다.
춤추는 용의 형국 무룡산에서
용처럼 꿈틀대는 대간능선을 따라 해발 1491미터의 무룡산에 올랐다. 과연 춤추는 용의 형국이다. 이 용은 어디에서 온 용인가. 저 아래 운해에 잠긴 진안땅 용담에서 온 것일까. 용담이라는 지명은 진안군 말고도 구미와 제주에도 있다. 구미의 용담은 동학을 일으킨 최제우가 머물며 <용담유사>를 쓴 곳이다. 그런데 진안군 용담은 이제 수많은 전설과 함께 대부분 물에 잠기고 말았다. 2001년 12월에 진안군 용담면 월계리 금강 상류 계곡에 높이 70미터 길이 498미터의 댐을 쌓고 물을 가두기 시작한 것이다.
이 용담댐은 저수량이 소양강, 충주, 대청, 안동에 이어 8억톤을 자랑한다. 그러나 이로 인해 진안군의 3분의 1에 달하는 5개면의 마을 주민 1만여명이 조상대대로 살아오던 정든 고향을 떠나야 했다. 수몰된 것은 사람만이 아니다. 금강상류의 자갈바닥에서 살아가던 감돌고기가 멸종 위기에 내몰린 것이다. 감돌고기는 체구가 작아 식용으로 이용되는 일이 거의 없고 관상용으로도 각광을 받지 못하지만 탄생 이래 한번도 고향을 떠나본 적 없는 우리 땅의 토착담수어이다. 저들도 이 땅에서 살아갈 권리가 있을진대 인간은 그들의 삶을 완전히 박탈해버리고 말았다.
이 용담댐의 물을 만경강으로 빼돌려 새만금호의 희석수로 쓰자는 안이 나왔었다. 그러자 금강 중하류의 대전 충청도의 시민들이 들고 일어났다. 자연의 질서에 최대한 순응하며 살아왔던 이 땅의 사람들이 이 지경에 빠지고 말았다. 우리 조상들은 집사방의 나무 한 그루도 함부로 베지 않았다. 우리 조상들은 자연의 질서를 파괴한 대가로 돌아오는 재앙을 `동티`라 불렀다. `개발의 시대`에 이어 이제 `동티의 시대`가 올 것인가. 무룡산 정상에서 향적봉으로 이어가는 대간 능선을 바라보는 마음은 편치 않다.
또 하나의 준령 동엽령을 지나 송계사삼거리에 당도했다. 이곳에서 중봉을 거쳐 전북 묏부리의 조종인 향적봉을 내고 대간줄기는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지봉(못봉)으로 이어진다. 횡경재를 지나 지봉에 이르기 전 지봉안부에서 대간 마루금을 벗어나 하산하였다. 18km의 산길을 오전 6시부터 오후 6시까지 주파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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