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2일>
7시 30분쯤 일어났다. 사방은 짙은 안개 속에 묻혀 있다. 해가 구름 위로 떠오르며 산안개가 흩어지기 시작했다. 덕평봉 봉우리가 햇살을 받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나무 위에 내려앉은 서리가 녹아내리자 햇볕을 받지 못한 곳과 대비를 이룬다. 3진은 늦은 아침식사를 다 할 때까지도 나타나지 않았다.
`연하천산장에서 만나게 되겠지`
기념촬영을 하고 9시에 노고단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다.
형제봉 올라가는 능선에 형제바위가 웅장한 모습으로 서 있다. 여기서부터 형제봉, 삼각봉을 거쳐 연하천에 이르는 구간은 지질 구조가 다른지 능선이 온통 암벽으로 되어있는 구간이다. 마루금을 벗어나 햇볕을 받지 않는 북사면으로 약간 내려와 종주 등산로가 이어진다. 철쭉이 상고대를 뒤집어 쓴 채 추위 속에 서 있건만 아무 불평이 없다. 푸르른 산죽 이파리는 오히려 기개를 뽐내며 군락을 이루고 있다.
해발 1,400여미터 정도 되는 이 구간에는 혹독한 자연환경을 이겨내고 상당히 키가 큰 나무들이 능선 양편에 서 있는데 모두 신령이 깃들어 있는 듯했다. 지면 가까이에서부터 상고대가 녹아내리고 나무들은 온통 눈꽃을 피운 채 선경을 이루고 있다. 사람들은 겉옷을 벗어 배낭 속에 넣고 행진을 이어갔다. 어떤 대원은 러닝셔츠만 입고 걷기도 하였다.

상고대가 핀 능선. 연하천 부근
사방이 온통 운무에 휩싸인 연하천에 도착하였다. 추성리에서 사온 곶감을 안주로 산장에서 파는 맥주를 마셨다. 이곳 연하천(煙霞泉 1,440m)은 능선에서 북사면쪽으로 100여미터 이상 내려와 있는데 구름이 머무는 날이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리라. `연하선경` 또한 지리산 10경 중 하나이다.
다시 나무 계단을 올라 능선을 타기 시작하여 해발 1,533미터의 토끼봉을 오르기 시작했다. 배고픈 멧돼지들이 땅을 파헤치고 풀뿌리를 캐먹은 흔적이 군데군데 보였다. 토끼봉 정상에 있는 바위에 올라 사방을 조망하였다. 오른쪽으로 반야봉이 구름 속에서 간간히 모습을 드러내고 남쪽으로는 시계가 좋아 아스라히 바다가 떠있는 모습이 보였다. 대간 능선에서 뻗어내린 지맥들이 흘러내려 섬진강으로 떨어지고 있다. 왼편에서 흘러내린 지맥이 벽소령에서 흘러내린 지맥과 만나는 빗점골은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이 머물던 곳이었다.

토끼봉에서 흘러내린 능선. 아래에 칠불사가 있고 왼쪽 형제봉에서 흘러내린 능선과 만나는 빗점골에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의 아지트가 있었다. 호남정맥의 종점 백운산 너머로 아스라히 바다가 떠있다.
남과 북의 역사에서 처참하게 말살된 비운의 군상들 남부군과 그 총사령관 이현상. <남부군>의 저자 이태는 그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말단 대원이던 나로서는 그와 대화할 기회는 거의 없었지만, 진회색 인조털을 입힌 반코트를 입고 눈보라치는 산마루에 서서 첩첩 연봉을 바라보고 있던 이현상의 어딘가 우수에 잠긴 듯하던 옆 모습은 지금도 선명한 인상을 남기고 있다.
이태는 의문에 싸인 이현상의 최후를 다음과 같이 추정했다.
북의 은밀한 지령
`9월 17일(1953년) 해질 무렵에 이현상은 진주군당 공작을 명분으로 지리산의 경남부대를 찾아가려고 길을 떠났다. 아마도 북의 은밀한 지령을 받았을 X가 호송원 두명을 붙여주었다. X는 호송원들에게 김일성의 직접 지시라며 밀명을 내린다. 호송원들은 이현상이 북의 소환명령을 거부한 사실을 알고 있었고, 이현상의 계열들이 이미 북에서 처형된 사실도 알고 있었다. 설사 그가 이현상을 존경하고 있었다해도 그는 당명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그들은 이현상에게 아무런 친근감도 갖고 있지 않는 X계열의 심복당원이었다. 호송원1은 도중 돌밭 언저리에서 앞서 가는 이현상을 등뒤에서 저격해 쓰러뜨리고, X에게 복명한 증거자료로 이현상이 지녔던 권총을 챙긴다. 그들은 또한 이현상의 신분이 토벌군에게 드러나지 않게 하기 위해 이현상의 모든 소지품을 거두어 부근의 바위 밑에 감추어 놓고 황급히 현장을 이탈한다. 그러나 호송원들은 뒤이어 달려온 국군 수색대의 매복에 걸려 호송원1은 사살되고 나머지 한명은 도주한다. 군 수색대는 호송원1이 지니고 있는 권총을 압수하고 그것이 이현상의 것이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이현상을 사살했다고 환성을 올린다. 그리고 그 목을 베어가지고 내려왔으나 정작 이현상의 시체는 발견하지 못한다. 한편 이현상은 한 발의 저격으로 절명하지는 않고 있었다. 그는 호송원들이 돌아간 것을 확인한 후 얼마만큼 기어가다가 바위 위에 주저앉는다. 내의 바람이 돼 있었지만, 호송원들은 그가 겨드랑이에 지니고 있던 소형권총까지는 몰랐다. 뒤미처 군수색대가 나타난다. 이현상은 단말마의 의식속에서 물을 청하며 장교를 불러오라고 요청했으나 수색대는 불문곡직 사살하고 하산해 버린다. 뒤미처 618부대가 올라가 이현상의 시체와 그 유류품을 확보한다. 618부대는 시체를 담요로 말아가지고 내려와 마을 사람들 동원해서 메고가게 한다. 한편 가까스로 도망쳐 아지트까지 돌아온 호송원2는 이현상 처단의 경위를 X에게 보고한다. X는 어떤 루트(아마도 일본 경유?)로 9월17일 이현상을 처단했다고 북에 보고한다. 지상에 남아있던 유일한 국내파의 거성도 마침내 청산됐다. `남조선 혁명가 이현상 동지`는 1953년 9월17일 전사했다고 후일 `열사묘`에 새겨진다. 이현상의 부인 최성녀와 아들 이극은 물론 재북 남로계 잔여 세력은 이현상을 죽인 원수를 저주하면서 그를 후장해준 어버이 김일성에게 감사한다.
그의 시체는 화장되어 섬진강에 뿌려졌다지만 그의 혼백은 지금도 지리산 골짜기를 떠도는 것일까. <남부군>이 영화로까지 나온 후 언제인가 그의 의문의 죽음을 다룬 한 티브이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그 프로그램의 내용에 경기도 양평에 사는 한 학생의 증언이 있었다. 기억을 되살린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강원도 한 산 골에서 한 아낙네가 제사 준비를 위해 밤에 음식을 준비하는데 산사람이 1명이 들이닥쳐 음식을 얻어 다시 산으로 사라졌다. 그날 밤 한 사람이 꿈에 나타나 자신의 억울한 죽음을 호소하는 것이었다. 초저녁에 나타난 그 사람이 나를 죽인 사람이고 북으로 가는 중이라며 나의 이 억울한 죽음을 꼭 세상에 알려달라는 것이었다. 이 아낙네는 꿈이지만 하도 생생하여 이 일을 잊을 수가 없었다. 훗날 경기도 양평에 살면서 이 사실을 자신의 손자에게 말해주었다. 손자는 어릴 때부터 이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할머니는 돌아가시고 이 소년은 자라 대학입시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이태의 <남부군>을 읽게 되었고 할머니가 들려준 이야기의 주인공이 바로 이현상일 것이라 생각하여 방송국에 알리게 되었다.
지리산을 떠도는 원혼이 어디 빨찌산들의 혼 뿐이겠는가. 정유재란, 동학혁명, 구한말 의병운동 등을 보면 민초들이 탈진하여 마지막으로 숨어든 곳이 바로 지리산이었다. 그러나 이현상을 생각지 않고 어찌 지리산을 오를 수 있으리오. 그는 전북(당시) 금산 출신이었다. 고창고보를 다니다 서울 중앙고보로 전학했고 보성전문을 나온 지식인이었다. 그가 지리산에서 지은 한시가 전한다. 다음은 그 번역이다.
지리산의 풍운이 당홍동에 감도는데
검을 품고 남주 넘어오기 천리로다
언제 내 마음속 조국을 떠난 적 있었을까
가슴에 단단한 각오 마음엔 끓는 피가 있도다

천왕봉에서부터 뻗은 대간 능선을 구름이 넘지 못하고 있다. 대간은 기후를 나누고 있다.
능선을 따라 화개재로 내려와 라면을 끓여 점심을 먹었다. 화개재에서 3진과 통화를 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들은 아침에 뱀사골로 올라와 노고단으로 가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장엄한 모습의 반야봉 옆으로 난 1천여개에 이르는 나무 계단을 올라 삼도봉에 올랐다. 삼도봉은 경남과 전남, 전북이 갈리는 기점이다. 본래 이름은 낫의 날처럼 생겼다 하여 낫날봉이었는데 날라리봉으로 와전되어 불리다가 지금은 삼도봉이다.
삼도봉에서 남쪽으로 전남과 경남을 가르며 불무장등 능선이 내려가고 있다. 이 능선 서쪽으로 피아골이 있고 섬진강과 만나는 끝지점에 화개장터가 있다. 산맥은 사람을 가르고 물은 사람을 모은다. 전라도 구례와 경상도 하동은 같은 섬진강 수계이다. 하동에서 진주로 가려면 낙남정맥을 넘어야 한다. 구례에서 광주나 나주로 가려면 호남정맥의 고갯길을 넘어야 한다. 판소리에서도 호남정맥 동쪽 섬진강 수계는 동편제이고 서쪽은 서편제라고 한다. 이처럼 산경표에 나오는 산줄기는 문화의 차이를 설명해준다. 하동이나 구례나 다 같은 섬진강 수계로 멸치젓 문화이다. 말씨도 비슷하다. 자연 환경의 품 속에서 사는 사람들의 어쩔 수 없는 문화의 차이이다. 그런데 오늘의 정치행태가 인위적인 지역감정으로까지 치닫게 만들어 놓았다.
멀리 왕시루봉이 노고단쪽에서 내려가다가 우뚝 서 있다. 왕시루봉 아래에 화엄사가 있고 능선이 끝나 분지를 이룬 구례 광의면에 구한말 절명시를 남기고 순국한 매천 황현의 사당인 매천사가 있다.
그는 전남 광양 출신이었지만 32세 때부터 구례 광의면 방광리에 들어와 살았는데 1910년 한일합방으로 나라를 잃자 절명시(絶命詩) 4편을 남기고 음독 순절하였다. 그의 절명시 칠언절구 4수 중 세 번째 시를 적어본다.
鳥獸哀鳴海岳嚬
槿花世界已 淪
秋燈掩券懷千古
難作人間識字人
새, 짐승 슬피 울고 산과 바다도 찡그리는데
무궁화 이 강산 이미 가라앉고 말았구나.
가을 등불 아래 책을 덮고 옛일을 돌이키니
인간으로서 식자인 되기가 정말로 어렵구나.
돼지평전의 드넓은 철쭉밭을 지나 임걸령을 거쳐 노고단에 도착하였다. 노고단(老姑壇)은 높이 1,507 m로 천왕봉(1,915 m), 반야봉(1,732 m)과 함께 지리산 3대봉의 하나이다. 신라시대에 화랑국선(花郞國仙)의 연무도장이 되는 한편, 제단을 만들어 산신제를 지냈던 영봉(靈峰)으로 지리산국립공원의 남서부를 차지한다. 노고단이란 도교(道敎)에서 온 말로, 우리말로는 ‘할미단’이며, ‘할미’는 국모신(國母神)인 서술성모(西述聖母:仙桃聖母)를 일컫는 말이다. 어느새 반야봉이 뒤따라와 구름 속에서 봉우리를 우뚝 내밀고 있다. 반야봉은 지리산의 중심이다. 지리산 어느 봉우리에서고 반야봉을 볼 수 있다.
노고단 산장으로 내려와 3진 2명을 만났다. 그들은 어제밤 11시경 에 삼정리에서 하차하여 벽소령으로 찾아오다 길을 잘못 들어 삼정산으로 올랐다. 새벽 4시까지 삼정산 일대를 헤매다 보니 갑자기 실상사가 나타나더란다. 그 아래 민박집에서 자고 아침 7시에 일어나 뱀사골로 와서 화개재로 올라 노고단으로 향하다 우리와 연락이 된 것이다. 달빛을 받으며 삼정산을 누빈 그들은 이미 신족통(神足通)을 얻었으리.

노고단에서 바라본 반야봉

노고단
성삼재로 내려오다 보랏빛 낙조 속에서 섬진청류를 보았다. 이는 지리산 10경 가운데 하나이다. 30여분 만에 성삼재에 닿았다. 7시이다. 어제 아침 백무동에서부터 시작한 33km에 이르는 지리산 종주를 마치고 지친 다리를 버스 안으로 들여 놓았다. 지난번에 갔었던 인월의 그 식당을 다시 찾았다. 막걸리를 곁들여 김치찌개와 된장찌개로 허기를 채웠다.
지난 11월 24일에 성삼재에서 정령치까지는 마쳤으니 이제 지리산권을 거의 벗어난 셈이다. 하동군, 산청군, 함양군, 남원시, 구례군에 걸쳐 있는 지리산. 백두산의 정기를 담고 있어 두류산이라고도 했다. 고대로부터 민초들의 아픈 상처를 쓰다듬어온 지리산은 오늘도 남도의 한복판에 우뚝 서 있다.
7시 30분쯤 일어났다. 사방은 짙은 안개 속에 묻혀 있다. 해가 구름 위로 떠오르며 산안개가 흩어지기 시작했다. 덕평봉 봉우리가 햇살을 받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나무 위에 내려앉은 서리가 녹아내리자 햇볕을 받지 못한 곳과 대비를 이룬다. 3진은 늦은 아침식사를 다 할 때까지도 나타나지 않았다.
`연하천산장에서 만나게 되겠지`
기념촬영을 하고 9시에 노고단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다.
형제봉 올라가는 능선에 형제바위가 웅장한 모습으로 서 있다. 여기서부터 형제봉, 삼각봉을 거쳐 연하천에 이르는 구간은 지질 구조가 다른지 능선이 온통 암벽으로 되어있는 구간이다. 마루금을 벗어나 햇볕을 받지 않는 북사면으로 약간 내려와 종주 등산로가 이어진다. 철쭉이 상고대를 뒤집어 쓴 채 추위 속에 서 있건만 아무 불평이 없다. 푸르른 산죽 이파리는 오히려 기개를 뽐내며 군락을 이루고 있다.
해발 1,400여미터 정도 되는 이 구간에는 혹독한 자연환경을 이겨내고 상당히 키가 큰 나무들이 능선 양편에 서 있는데 모두 신령이 깃들어 있는 듯했다. 지면 가까이에서부터 상고대가 녹아내리고 나무들은 온통 눈꽃을 피운 채 선경을 이루고 있다. 사람들은 겉옷을 벗어 배낭 속에 넣고 행진을 이어갔다. 어떤 대원은 러닝셔츠만 입고 걷기도 하였다.

상고대가 핀 능선. 연하천 부근
사방이 온통 운무에 휩싸인 연하천에 도착하였다. 추성리에서 사온 곶감을 안주로 산장에서 파는 맥주를 마셨다. 이곳 연하천(煙霞泉 1,440m)은 능선에서 북사면쪽으로 100여미터 이상 내려와 있는데 구름이 머무는 날이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리라. `연하선경` 또한 지리산 10경 중 하나이다.
다시 나무 계단을 올라 능선을 타기 시작하여 해발 1,533미터의 토끼봉을 오르기 시작했다. 배고픈 멧돼지들이 땅을 파헤치고 풀뿌리를 캐먹은 흔적이 군데군데 보였다. 토끼봉 정상에 있는 바위에 올라 사방을 조망하였다. 오른쪽으로 반야봉이 구름 속에서 간간히 모습을 드러내고 남쪽으로는 시계가 좋아 아스라히 바다가 떠있는 모습이 보였다. 대간 능선에서 뻗어내린 지맥들이 흘러내려 섬진강으로 떨어지고 있다. 왼편에서 흘러내린 지맥이 벽소령에서 흘러내린 지맥과 만나는 빗점골은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이 머물던 곳이었다.

토끼봉에서 흘러내린 능선. 아래에 칠불사가 있고 왼쪽 형제봉에서 흘러내린 능선과 만나는 빗점골에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의 아지트가 있었다. 호남정맥의 종점 백운산 너머로 아스라히 바다가 떠있다.
남과 북의 역사에서 처참하게 말살된 비운의 군상들 남부군과 그 총사령관 이현상. <남부군>의 저자 이태는 그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말단 대원이던 나로서는 그와 대화할 기회는 거의 없었지만, 진회색 인조털을 입힌 반코트를 입고 눈보라치는 산마루에 서서 첩첩 연봉을 바라보고 있던 이현상의 어딘가 우수에 잠긴 듯하던 옆 모습은 지금도 선명한 인상을 남기고 있다.
이태는 의문에 싸인 이현상의 최후를 다음과 같이 추정했다.
북의 은밀한 지령
`9월 17일(1953년) 해질 무렵에 이현상은 진주군당 공작을 명분으로 지리산의 경남부대를 찾아가려고 길을 떠났다. 아마도 북의 은밀한 지령을 받았을 X가 호송원 두명을 붙여주었다. X는 호송원들에게 김일성의 직접 지시라며 밀명을 내린다. 호송원들은 이현상이 북의 소환명령을 거부한 사실을 알고 있었고, 이현상의 계열들이 이미 북에서 처형된 사실도 알고 있었다. 설사 그가 이현상을 존경하고 있었다해도 그는 당명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그들은 이현상에게 아무런 친근감도 갖고 있지 않는 X계열의 심복당원이었다. 호송원1은 도중 돌밭 언저리에서 앞서 가는 이현상을 등뒤에서 저격해 쓰러뜨리고, X에게 복명한 증거자료로 이현상이 지녔던 권총을 챙긴다. 그들은 또한 이현상의 신분이 토벌군에게 드러나지 않게 하기 위해 이현상의 모든 소지품을 거두어 부근의 바위 밑에 감추어 놓고 황급히 현장을 이탈한다. 그러나 호송원들은 뒤이어 달려온 국군 수색대의 매복에 걸려 호송원1은 사살되고 나머지 한명은 도주한다. 군 수색대는 호송원1이 지니고 있는 권총을 압수하고 그것이 이현상의 것이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이현상을 사살했다고 환성을 올린다. 그리고 그 목을 베어가지고 내려왔으나 정작 이현상의 시체는 발견하지 못한다. 한편 이현상은 한 발의 저격으로 절명하지는 않고 있었다. 그는 호송원들이 돌아간 것을 확인한 후 얼마만큼 기어가다가 바위 위에 주저앉는다. 내의 바람이 돼 있었지만, 호송원들은 그가 겨드랑이에 지니고 있던 소형권총까지는 몰랐다. 뒤미처 군수색대가 나타난다. 이현상은 단말마의 의식속에서 물을 청하며 장교를 불러오라고 요청했으나 수색대는 불문곡직 사살하고 하산해 버린다. 뒤미처 618부대가 올라가 이현상의 시체와 그 유류품을 확보한다. 618부대는 시체를 담요로 말아가지고 내려와 마을 사람들 동원해서 메고가게 한다. 한편 가까스로 도망쳐 아지트까지 돌아온 호송원2는 이현상 처단의 경위를 X에게 보고한다. X는 어떤 루트(아마도 일본 경유?)로 9월17일 이현상을 처단했다고 북에 보고한다. 지상에 남아있던 유일한 국내파의 거성도 마침내 청산됐다. `남조선 혁명가 이현상 동지`는 1953년 9월17일 전사했다고 후일 `열사묘`에 새겨진다. 이현상의 부인 최성녀와 아들 이극은 물론 재북 남로계 잔여 세력은 이현상을 죽인 원수를 저주하면서 그를 후장해준 어버이 김일성에게 감사한다.
그의 시체는 화장되어 섬진강에 뿌려졌다지만 그의 혼백은 지금도 지리산 골짜기를 떠도는 것일까. <남부군>이 영화로까지 나온 후 언제인가 그의 의문의 죽음을 다룬 한 티브이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그 프로그램의 내용에 경기도 양평에 사는 한 학생의 증언이 있었다. 기억을 되살린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강원도 한 산 골에서 한 아낙네가 제사 준비를 위해 밤에 음식을 준비하는데 산사람이 1명이 들이닥쳐 음식을 얻어 다시 산으로 사라졌다. 그날 밤 한 사람이 꿈에 나타나 자신의 억울한 죽음을 호소하는 것이었다. 초저녁에 나타난 그 사람이 나를 죽인 사람이고 북으로 가는 중이라며 나의 이 억울한 죽음을 꼭 세상에 알려달라는 것이었다. 이 아낙네는 꿈이지만 하도 생생하여 이 일을 잊을 수가 없었다. 훗날 경기도 양평에 살면서 이 사실을 자신의 손자에게 말해주었다. 손자는 어릴 때부터 이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할머니는 돌아가시고 이 소년은 자라 대학입시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이태의 <남부군>을 읽게 되었고 할머니가 들려준 이야기의 주인공이 바로 이현상일 것이라 생각하여 방송국에 알리게 되었다.
지리산을 떠도는 원혼이 어디 빨찌산들의 혼 뿐이겠는가. 정유재란, 동학혁명, 구한말 의병운동 등을 보면 민초들이 탈진하여 마지막으로 숨어든 곳이 바로 지리산이었다. 그러나 이현상을 생각지 않고 어찌 지리산을 오를 수 있으리오. 그는 전북(당시) 금산 출신이었다. 고창고보를 다니다 서울 중앙고보로 전학했고 보성전문을 나온 지식인이었다. 그가 지리산에서 지은 한시가 전한다. 다음은 그 번역이다.
지리산의 풍운이 당홍동에 감도는데
검을 품고 남주 넘어오기 천리로다
언제 내 마음속 조국을 떠난 적 있었을까
가슴에 단단한 각오 마음엔 끓는 피가 있도다

천왕봉에서부터 뻗은 대간 능선을 구름이 넘지 못하고 있다. 대간은 기후를 나누고 있다.
능선을 따라 화개재로 내려와 라면을 끓여 점심을 먹었다. 화개재에서 3진과 통화를 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들은 아침에 뱀사골로 올라와 노고단으로 가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장엄한 모습의 반야봉 옆으로 난 1천여개에 이르는 나무 계단을 올라 삼도봉에 올랐다. 삼도봉은 경남과 전남, 전북이 갈리는 기점이다. 본래 이름은 낫의 날처럼 생겼다 하여 낫날봉이었는데 날라리봉으로 와전되어 불리다가 지금은 삼도봉이다.
삼도봉에서 남쪽으로 전남과 경남을 가르며 불무장등 능선이 내려가고 있다. 이 능선 서쪽으로 피아골이 있고 섬진강과 만나는 끝지점에 화개장터가 있다. 산맥은 사람을 가르고 물은 사람을 모은다. 전라도 구례와 경상도 하동은 같은 섬진강 수계이다. 하동에서 진주로 가려면 낙남정맥을 넘어야 한다. 구례에서 광주나 나주로 가려면 호남정맥의 고갯길을 넘어야 한다. 판소리에서도 호남정맥 동쪽 섬진강 수계는 동편제이고 서쪽은 서편제라고 한다. 이처럼 산경표에 나오는 산줄기는 문화의 차이를 설명해준다. 하동이나 구례나 다 같은 섬진강 수계로 멸치젓 문화이다. 말씨도 비슷하다. 자연 환경의 품 속에서 사는 사람들의 어쩔 수 없는 문화의 차이이다. 그런데 오늘의 정치행태가 인위적인 지역감정으로까지 치닫게 만들어 놓았다.
멀리 왕시루봉이 노고단쪽에서 내려가다가 우뚝 서 있다. 왕시루봉 아래에 화엄사가 있고 능선이 끝나 분지를 이룬 구례 광의면에 구한말 절명시를 남기고 순국한 매천 황현의 사당인 매천사가 있다.
그는 전남 광양 출신이었지만 32세 때부터 구례 광의면 방광리에 들어와 살았는데 1910년 한일합방으로 나라를 잃자 절명시(絶命詩) 4편을 남기고 음독 순절하였다. 그의 절명시 칠언절구 4수 중 세 번째 시를 적어본다.
鳥獸哀鳴海岳嚬
槿花世界已 淪
秋燈掩券懷千古
難作人間識字人
새, 짐승 슬피 울고 산과 바다도 찡그리는데
무궁화 이 강산 이미 가라앉고 말았구나.
가을 등불 아래 책을 덮고 옛일을 돌이키니
인간으로서 식자인 되기가 정말로 어렵구나.
돼지평전의 드넓은 철쭉밭을 지나 임걸령을 거쳐 노고단에 도착하였다. 노고단(老姑壇)은 높이 1,507 m로 천왕봉(1,915 m), 반야봉(1,732 m)과 함께 지리산 3대봉의 하나이다. 신라시대에 화랑국선(花郞國仙)의 연무도장이 되는 한편, 제단을 만들어 산신제를 지냈던 영봉(靈峰)으로 지리산국립공원의 남서부를 차지한다. 노고단이란 도교(道敎)에서 온 말로, 우리말로는 ‘할미단’이며, ‘할미’는 국모신(國母神)인 서술성모(西述聖母:仙桃聖母)를 일컫는 말이다. 어느새 반야봉이 뒤따라와 구름 속에서 봉우리를 우뚝 내밀고 있다. 반야봉은 지리산의 중심이다. 지리산 어느 봉우리에서고 반야봉을 볼 수 있다.
노고단 산장으로 내려와 3진 2명을 만났다. 그들은 어제밤 11시경 에 삼정리에서 하차하여 벽소령으로 찾아오다 길을 잘못 들어 삼정산으로 올랐다. 새벽 4시까지 삼정산 일대를 헤매다 보니 갑자기 실상사가 나타나더란다. 그 아래 민박집에서 자고 아침 7시에 일어나 뱀사골로 와서 화개재로 올라 노고단으로 향하다 우리와 연락이 된 것이다. 달빛을 받으며 삼정산을 누빈 그들은 이미 신족통(神足通)을 얻었으리.

노고단에서 바라본 반야봉

노고단
성삼재로 내려오다 보랏빛 낙조 속에서 섬진청류를 보았다. 이는 지리산 10경 가운데 하나이다. 30여분 만에 성삼재에 닿았다. 7시이다. 어제 아침 백무동에서부터 시작한 33km에 이르는 지리산 종주를 마치고 지친 다리를 버스 안으로 들여 놓았다. 지난번에 갔었던 인월의 그 식당을 다시 찾았다. 막걸리를 곁들여 김치찌개와 된장찌개로 허기를 채웠다.
지난 11월 24일에 성삼재에서 정령치까지는 마쳤으니 이제 지리산권을 거의 벗어난 셈이다. 하동군, 산청군, 함양군, 남원시, 구례군에 걸쳐 있는 지리산. 백두산의 정기를 담고 있어 두류산이라고도 했다. 고대로부터 민초들의 아픈 상처를 쓰다듬어온 지리산은 오늘도 남도의 한복판에 우뚝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