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운경(15회)-*송년단상*

by 권일강 posted Jun 18,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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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년 단상 *

 

지금.. 밖에는 계속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좍좍 퍼붓는 비라면 차라리 아직도 못 버린 마음 속 잡다함까지도

쓸어내버리는 후련함이되련만...
어제도 오늘도 멈춤이 없이 하루 종일 추적추적 내리는 비는

 오히려 차분히 지난 시간의 갈피를 들춰보게합니다.

아쉬움에 젖은 가버린 날들의 여운이 아롱아롱
이 저물녘에 드는 우수의 기운을 어루만져주는 시간입니다.

 

이렇다할 각오도, 별 계획도 없이
다만 또 한해의 무고함만을 바라며 올랐던 새해란 열차..
매해 12월의 차창은 어찌 그리도 빠르게 스쳐가는지요.
어느새 종착점을 향해 가속이 붙는 덜컹거림에
가슴이 울렁거려지기도,
갑짜기 무엇을 잃었는가 잊었는가
마음이 어수선해지기도 합니다.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는 이 one way ticket 의 내달림..
그 동안 거쳐 온 수 많은 정거장들..
그러나 마음으로라도 혹여 아직도 내 체온이 남아있을지도 모를
그 흔적들을 찾아 되돌아가 볼 수 있음은 작으나 위안입니다.

 

또 한해를 보내는 미진함 속에서도,
이 가슴에 조그만 불씨 하나 지펴 온기를 들여 놓고..
그야말로 생의 한 가운데서 의욕과 활기가 넘쳐나던
참 오래 전의 내 젊었던 모습을 만나봅니다.

 

더 없는 기쁨이었던 시간에도 앉아보고,
낙담해 한숨 짓던 자리도 쓸어보며,
때로는 장미의 아름다움과도 같았고,
때로는 그 가시의 아픔과도 같았던 지난 모든 것들이 어우러져
지금 내 나이듦의 형상이 되어가는가싶어

그 때 걸쳤던 빛바랜 옷들을  하나씩 정겨운 손길로 펼쳐봅니다.

 

그러나 그 빠르게 돌아가던 삶의 소용돌이에서 빗겨 나온 지금,
몸도 마음도 쉬어지는 이 여유가 고마운 나이에서도,
울 트집을 잡는 아이마냥 불평꺼린 또 얼마든지 있지요.
그렇게 맛있던 것도 정작 먹어보면 별 맛도 아니고,
꼭 갖고싶은 물건의 애착도 이젠 별로 없으며..

 

일상이 맨날 신 날 것은 아니지만
가끔씩 이도 저도 다 심드렁하고,
꼭 오늘 하지않으면 안될 일도 줄었으니
게으름이 그 자리를 넓혀가려하네요.
이렇게 매사에 조여있던 나사가 느슨해지는데야
그 틈새로 공허의 바람이 왜 아니 들겠습니까?

 

괜시리 추운 기분, 이 으시시 찬 기운은
이름하여 '외로움' 또는 '쓸쓸함' 맞겠지요.
그러나 그것이 너 나 없이 평생 달고 살아야할 감기같은 것,
그 올랐다 내렸다 하는 미열같은 것이라면,
그 누가  그 한기에 덮으라 담요를 적선 하겠습니까?

 

빡빡했던 시간에선 늘 휴식과 여유를 갈망했으나,
이젠 또 그 예전의 벗어나고팠던 숨차던 박진감을 그리워하다니..
삶에겐 언제까지나 이렇게 투정부리고 보채고싶은 것일까요?
'현재'는 늘상 곁에 있는 덤덤한 아내같고,
 '과거'는 떠나보낸 고운 모습으로만 남은
여인같은 것이기에 그럴까요?

 

그러나 그 누가 나를  수십년 젊게 그 팽팽했던 시간대로
되돌려주겠대도 달갑지 않습니다.
다시 그 외나무 다리의 아슬아슬함을 딛고
온전히 건너 올 자신이 없기에 말입니다.
남들은 꼿꼿한 걸음새인 듯한데, 엉거주춤으로도
굴러떨어지지 않은 것만 다행이었다고 고마워하는 지금입니다.

 

아무튼 꽤 먼 길을 돌고 돌아 어느날 한 숨 놓으며 뒤를 돌아보니..
희미하던 것도 더 환히 보이고, 미미하던 바람도 더 살갑게 느껴지고,
전혀 감을 못 잡던 것도 짐작이 되어집니다.
아, 내가 그동안 많이도 똑똑해졌는가?  뭐, 그럴리야..

 

여러 경우를 보여주고, 겪게하고,
생각하고, 행동하고, 또 후회하게하고...
그래서 또 깨닫고, 고치고, 더 신중해지도록

삶이란 누구나를 한시도 가만두지않고 닥달하는 모양인데,

그러니 오감도 절로 눈 떠지는 것이겠지요.

 

이렇 듯 산다는 것은 갈수록 '이력 나기'인가 봅니다.

그 이력을 또 자랑스레 2세들에게 지름길이랍시고,
또는 내가 다 두드려본 돌다리라며 그리 가라면,
열에 일곱은 안 먹힌다는 것, 서운할 것도 없지요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부모님 시대와 다르 듯,

내 애들이 속한 세상은 그 몇배 더 복잡 미묘한 변화에

감도 제대로 잡을 수 없으니 말입니다.

 

내 나이가 푸르던 때는 몰랐지만,

이제와서 젊은이들을 보며 드는 생각은
남녀를 막론하고 잘 생기고, 못 생기고를 떠나서
젊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싱그러워
참으로 아름다워 보이고, 그 열정과 도전의 에너지 충만은
삶을 향한 당당한 도구이기도하여
그 자신감에 찬 모습은 빛나기마져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래도 곱고, 저래도 멋진 나이에서도
그 확고한 목적 의식과 자긍심으로의 무장은
심신으로 여유없음이되어..
관용없음, 배려없음의 가지를 뻗게하기 쉽고,
오만의 잎사귀까지 키워낼 수도 있을 것이지요.
그러니 우리의 인생 어느 시기에도 온전히 아름다운 모습은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제, 그 기세 좋던 가지의 뻗음도
비바람에 휘둘리다보니 휠 줄도 알게되었고,
그 무성하던 이파리들도 퇴색하여 낙엽이되고보니..
남의 곤경도 기쁨도 슬픔도, 내 것인 듯 와 닿는
보다 연한 마음결이 되어갑니다.

 

그리하여 웬만한 거슬림은 못 본 듯 지나칠 아량도 생겨나
굳이 상대를 꼬집을 일도 없으니, 맘이 편해져간다는 것이지요.
아무튼 마음공부 게으른 내게도 나이가 가르쳐주는 무엇은 있어서
젊었던 날 다잡기 힘들었던 내 안의 출렁임도
이젠 조금씩 더 평정을 찾아 잔잔해지는 것같아
늙음이 든다는 것.. 안 좋은 것만은 아닌 듯싶습니다.

 

게다가 오래 살고보니 이런 즐거움도 다 있나하는 것은..
이렇게 나이가 들고 들어서야 손 닿을 수 있도록 달려있는 과일..
실로 탐스런 이 과일의 그 오묘한 맛이라니...
매일 밤 노크하고 들어오는 손주들과 한 애씩 밤인사를 나누며,
마주 안고 서로 등을 두드리는 그 토닥임의 순간..
아늑히 고여오는 이 행복감.. 어디가서 살 수있을까요?

 

이젠 늘 조급히 뛰어다니던 습관도 고쳐,
보다 느린 걸음으로 이 하늘 저 하늘의 진기한 구름 모양도,
허연 낮 달도 보면서 걷습니다.

조그만 풀꽃도 새삼 어여쁘고,

햇살에 영롱한 이슬도 잠시나마 황홀하네요.

 

이렇듯 주위에 지천인 자연의 아름다움에

새로이 눈길 주며 그 모습들이 가슴에 담기다보니
부질없는 기대도, 욕심도 밀려나가는 듯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지니고픈 욕심이 있다면,
나이와 더불어 더욱 책임이 커져갈 이 얼굴에
스스로도 민망스러운 모습은 들지 않기를...
그리고 이렇게 내가 나를 만나보는 이 때마다

'나' 라는 나무의 나이테

좀 더 곱게 무늬지어졌으면...

 

새해에도 내 주위가 그저 이만만하기를 바라며..

지나온 날들에 다시금  감사의 정을 담아
또 한해를 곱게 떠나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