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회 오세윤 '미루나무 까치집'

by 사무처 posted May 28,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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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루나무 까치집

 

                                                                                         오 세 윤

 

 

까치 부부가 아침부터 부산하다. 잠시도 쉬지 않고 땅과 나무를 오르내리며 둥지를 짓는

다. 발정기인 밸런타인데이가 한 달 남짓으로 가까워져 마음이 급해진 모양이라 짐작하고

놈들을 지켜봤다.

수놈은 주로 근처의 키 낮은 나무들에서 적당한 가지를 꺾어오거나 두 발쯤 떨어진 기존의

둥지에서 쓸만한 잔가지를 빼내 암놈에게 넘겨주고 물러나 앉아 주변을 경계하고, 암놈은

그걸 받아 이리 끼우고 저리 놓으며 둥지를 겯는다.

부부는 미루나무 우듬지에 아침볕이 비쳐들 쯤 날아와 오전 한나절 일하고 정오가 지나면

둥지를 떠났다가 다음날 날이 밝아서야 출근하듯 나타났다. 오후에 나무에서 그들을 보는

일은 좀처럼 드물었다. 일과가 일정했다.

협동심도 강했다. 둥지를 짓는 중에 어쩌다 다른 까치가 날아오거나 지빠귀 등 잡새가 얼

씬거리기라도 할 참이면 두 부부는 지체 없이 놈들에게 날아가 앙칼지게 깍깍 짖고 부리로

쪼아대며 사납게 쫓아냈다. 짓기 시작한 지 달여가 되었지만 둥지는 아직 반쯤밖에는 형태

를 갖추지 못했다.

눈 예보가 있던 그제, 까치 부부가 저녁 해거름에 날아와 둥지를 드나들며 가지들을 빼고

끼우는 등 수선을 떨고 갔다. 무슨 일인가 싶어 바로 공원으로 나가 나무를 올려다봤다. 둥

지 한가운데가 동그랗게 뚫려있었다. 구멍으로 하늘이 빠끔하게 보였다. 의아했다.

이유는 다음날 아침 밝혀졌다. 새벽부터 눈이 오고 있었다. 눈이 쌓일 것을 염려해 미리

손을 본 듯 짐작됐다. 미물 짐승이 어떻게···. 햇살이 환한 낮 시간에 어떻게 다음날 눈이

오리라는 걸 알았을까.

기쁜 소식을 제 먼저 알리는 ‘반가운 손님’으로 친근했던 그들이, 오작교를 짓고 상원사의

종을 울린 보은의 새라고만 알고 있던 그들이 날씨까지 예견하고 재해를 대비하는 지혜로운

새란 사실이 놀랍기만 했다. 그들은 생각 짧은 새대가리가 아니었다. 먹이를 다투고 텃세나

부리는 싸움꾼만도 아니었다. 혜안의 선견자(先見者)였다.

젊은 시절 옛 선비들의 은둔이 부러웠던 나는 은퇴하면 교외에 전원주택을 마련해 세상사

잊고 살리라 꿈꿨지만 오십 대 중반에 앓은 척추관 협착증에 발목 잡혀 실천으로 옮기지는

못했다. 그러다 대신 택한 곳이 용인, 신축 아파트를 분양받아 은퇴와 동시 이주했다. 17년

전이었다.

아파트는 예상 이상으로 만족스러웠다. 산자락 경사면에 위치해 쾌적하기가 콘도 못지않게

안침 했다. 차량 소음도 없고 공기도 맑아 병적으로 소음을 못 견뎌하는, 경도의 폐섬유증

으로 얼마간의 호흡곤란을 겪고 있던 나에게는 안성맞춤의 주거환경이었다. 집 뒤가 바로

산인 데다 단지 내 조경이 잘 돼 새들도 많이 날아왔다. 봄이면 지빠귀를 시작으로 꾀꼬리

와 어치 곤줄박이가 날아오고, 여름 한낮엔 뻐꾸기가 먼 산 메아리로 울었다. 그믐밤 소쩍

새가 피울음을 우는 때면 종종 잠을 설치기도 했다. 집 옆으로 난 등산로를 따라 산을 걷는

사이 폐섬유증 증세도 호전되고 읽음직한 수필도 수 삼 편 넘게 얻었다. 경비는 이곳을 ‘백

담사’라고 농했다.

교통도 나쁘지 않았다. 처음 몇 해는 서울 진입이 광역버스 편 뿐이어서 다소 불편했지만

신분당선이 개설된 뒤로는 강남까지 30분이면 갈 수 있어 여간 편리하지 않았다. 우리는 이

곳으로 이사하기를 참 잘했다고, 피날레를 연주하기 딱 좋은 곳이라고 서로 고마워하며 하

루하루를 평온하게 지냈다.

하지만 우리는 두 사람 모두 똑같이 현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계절이 건듯건듯 바뀌고 지

면의 이웃이 어느 순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해마다의 사진 모습이 민망하게 추레해진

다는 사실을, 음식의 간이 갈수록 세지고 물건을 자주 떨어트리고 열쇠나 돋보기 등을 어디

에 둔지 몰라 한참을 찾고 혈압강하제를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자주 헷갈려하는 사실을 간

과하고, 세월이 우리에게서만은 그날이 그날인 것처럼 멈춰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거푸

접촉사고를 내고 역에 내려 12분 남짓 걸리던 귀갓길이 20여분으로 늘어나고서야 우리는

우리가 이미 한참 늙어있음을, 4막 5장 연극의 마지막 무대에서 얼쩡대고 있음을 확연하게

깨달았다. 머뭇댈 때가 아니었다. 그 바로 ‘백담사’ 생활을 정리하고 전철역 5분 거리의, 대

형마트를 비롯해 병원과 식당 등 편의시설이 지척인 이 평지 아파트로 단호하게 이사했다.

공원을 접한 아파트 단지 맨 뒷동, 서재 앞 40여 미터 떨어져 선 10층 높이의 미루나무와

까치집. 첫날부터 나무는 듬직한 마음붙이로 친근하게 안겼다. 해 설피는 무렵이면 거의 매

저녁 나는 서재 의자에 잦바듬히 앉아 나무와 우듬지 너머에 피어나는 노을을 바라보며 하

루의 근심을 재우고 상념을 지웠다. 바람이 붓칠 한 듯 노랗게 물드는 하늘이 점차 회백색

으로, 드디어는 우중충한 검푸른 빛으로 어두워질 때까지 나는 홀로 나무 더불어 적막하게

저물었다. 나무는 공원 뒤 도로에서 올라오는 자동차의 소음도 그 너머의 산봉우리를 반나

마 가리고 선 건너 아파트 단지의 오만한 위세도 눈감게 하는 훈훈한 위로였다.

까치 부부를 보며 오는 봄을 상상한다. 밸런타인데이 즈음이면 밑동의 구멍도 야무지게 여

며지고 어떤 비바람에도 끄떡없는 보금자리가 완성될 것이다. 튼실하게 완성된 둥지에서 발

정한 암놈은 수놈의 수고를 위로하며 꽁지를 들어 올릴 것이고, 수놈은 늠름하게 자기의 임

무를 완수할 것이다. 그리하여, 빛으로 잉태된 새로운 기적이 5월의 하늘을 힘차게 날아오

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