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스트는 왜 개를 소재로 삼았을까
5년간 깎은 '나무 개' 전시하는 윤석남
"유기견 거둬 키우는 할머니 신문에서 사연 읽고 '영감'
내 자식만 아는 이기심 아닌 폭넓은 모성 표현하고 싶어"
누런 흙이 부슬부슬 밟히는 컴컴한 전시장에 개(犬)를 깎은 목조각 1025점이 섰다. 개들은 각양각색이다. 목조각 사이를 거니는 관람객을 향해 금방이라도 왈왈 짖을 듯이 살아 있는 느낌이다.
11월 9일까지 서울 대학로 아르코미술관에서 《1025: 사람과 사람없이 전(展)》이 열리고 있다. 현대미술 작가 윤석남(69)씨는 경기도 수원 작업실에서 5년 걸려 톱으로 썰고 사포로 갈고 물감으로 그려서 이 개들을 키워냈다.
윤씨에겐 '1세대 페미니스트 작가'라는 이름표가 따라다닌다. 그녀는 이매창, 허난설헌 같은, '남자들의 세상'에서 모질게 고생한 여자들을 나무로 깎아 명성을 얻었다.
그런 윤씨가 나이 60대 중반 들어 돌연 개를 깎기 시작했다. 발단은 신문기사였다.
"남들이 버린 애완견을 거둬서 기르는 할머니 이야기가 신문에 났어요. 1025마리였죠. 감동 받았지만
막상 찾아가려니 걱정스러웠어요. 직접 만났다가 '후덕하고 순수한 모성(母性)'의 이미지가 깨지진 않을까, 하고."
이 에피소드는 윤씨에게 두 가지 충격을 줬다.
첫째, 할머니가 비범한 성녀(聖女)가 아닌 평범한 노인이었다는 점이다.
할머니는 천 마리가 넘는 개를 두고 "한 마리, 두 마리 거두다 보니 이렇게 됐다"고 심드렁하게 말했다.
둘째, 개들이 멀쩡했다. 집에 오면서 윤씨는 "대체 어떤 사람들이 멀쩡한 개를 태연히 내버릴까" 분개했다.
윤씨는 ▲사심 없이 다른 생명을 돌보는 '자애(慈愛)의 힘'을 봤고, ▲약자(개)를 쓰레기처럼 대우하는 냉혹한 세상에 분노했다. 거기엔 그녀의 개인사도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윤씨의 아버지는 한국 최초의 장편 극영화 《월하의 맹서》를 감독하고, 역사소설 《대도전》을 쓴 윤백남(1888~1954)씨다. 그는 글 쓰고 영화 찍는 짬짬이 개가 똥 누는 장면 등을 도화지에 그려서 자식들을 깔깔 웃겼다. 그래도 윤씨는 "예술가 아버지보다 아버지가 별세한 뒤 억척스럽게 6남매를 기른 어머니(94)를 더 사랑했다"고 했다.
▲ 나무로 깎은 개 1025마리가 서울 대학로 아르코미술관 1~2층을 꽉 채웠다. 현대미술 작가 윤석남씨는 평범한 할머니가 남들이 버린 애완견 1025마리를 거둬서 기른다는 신문기사를 읽고 5년 걸려 이 작품을 만들었다. /이진한 기자 magnum91@chosun.com
아버지를 잃은 뒤 윤씨는 생활고로 성균관대 영문과를 중퇴했다.
전업주부로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다가 40세에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43세에 첫 개인전을 연 이후, 그녀는 일관되게 '여성' 혹은 '어머니'를 다뤘다.
그녀는 개 거두는 할머니와 자신의 어머니에게서 폭넓은 모성론을 이끌어냈다.
"난 '내 자식'만 아는 사람들이 제일 싫어요. 그건 모성이 아니에요. 이기심이지."
윤씨는 "자식을 사랑하다 보니 주변까지 아우르게 되는 것, 자기 사랑을 사회로 확장하는 것,
가령 생태 문제에 관심을 갖는다거나 하는 것이 모성"이라고 했다.
생태에 대한 관심의 일환으로 그녀는 2년 전 채식주의자가 됐다. 개를 깎던 와중의 일이다. (02)760-4724
입력시간 : 2008.09.30 03:10 / 수정시간 : 2008.09.30 04:16
김수혜 기자 goodluck@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