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 '논두렁 밭두렁' 김은광씨
부인과 10년간 '그룹홈' 통해 소외아동 돌보다 올해초 타계…
큰아빠라 부르며 따르던 애들, 원년 멤버 박문영씨와 함께 5월 추모공연 위해 노래연습
"우리 집의 제일 높은 곳/ 조그만 다락방/ 넓고 큰 방도 있지만/ 난 그곳이 좋아요."
지난 12일 서울 송파구 오금동의 한 5층 건물 옥탑방에서 기타 선율에 맞춰 노래가 울려 퍼졌다. 혼성
그룹 '논두렁 밭두렁'이 1978년 발표한 '다락방'이다. 열살 안팎인 10여명의 아이들이 30년 전 노래를 잘도
따라 불렀다.
원종빈(10)군이 "큰엄마, 큰아빠가 가수 할 때 부른 노래"라고 하자, 곁에 있던 김수빈(13)양은 1983년에
나온 논두렁 밭두렁의 레코드판 표지를 가리키며 "큰엄마 사진 참 예쁘지요?"라며 웃었다.
이곳 이름은 '별빛 내리는 마을'이다. 부모가 행방불명된 아이, 10대 미혼모의 아이, 엄마·아빠가 있어도
같이 살 형편이 못 돼 맡긴 아이들이 정부 지원을 받아 한데 사는 '그룹홈'이다. 일종의 아동복지시설이다.
생후 20개월 된 아기부터 중학생까지 연령도 다양하다. 저마다 성(姓)이 다른 아이들이 '큰엄마',
'큰아빠'라고 부르는 이는 논두렁 밭두렁의 김은광(57)·윤설희(55)씨다. 한때는 친딸 3명을 포함해 20여명
의 아이들이 한집에 살았다.
윤씨는 "남편과 함께 2000년 어린이집을 시작했다가 우연히 그룹홈 아이들까지 같이 보살피게 됐다"며
"누구는 돈 받고 누구는 돈 안 받는 게 이상해 어린이집 아이들까지 무료로 받다 보니 돈벌이는 안 됐
다"고 했다. 경영악화로 2006년 어린이집을 그만둔 뒤로는 윤씨의 친정어머니와 여동생까지 달라붙어
오갈 곳 없는 아이들을 돌봐왔다.
▲ 지난 12일 서울 송파구 오금동 한 건물 옥탑방에서‘다락방’등을 부른 그룹‘논두렁 밭두렁’의 원년 멤버
박문영(사진 맨왼쪽)씨와 윤설희(아이를 안고 있는 사람)씨가 아이들과 함께 고 김은광씨 추모 공연을
위한 노래 연습을 하고 있다 / 정경열 기자 krchung@chosun.com
하지만 윤씨의 막내딸 채리(9)양은 엄마 품을 뺏기기 싫어해 그룹홈 아이들과 다투기 일쑤였다. 큰딸
아리(31)씨와 둘째 딸 소리(21)씨도 "어릴 적엔 숙제 검사도 안 해주더니 고생을 사서 하신다"고 툴툴거렸
다. 하지만 윤씨는 "딸들이 그러는 건 다 힘들어하는 엄마를 걱정해서 하는 소리"라며 "사실 가족이 가장
큰 지지자"라고 했다.
부부는 지난 2004년부터 문화회관이나 강당을 빌려 기금 마련 콘서트를 해왔다. 정부에서 한 달 그룹홈
운영비 23만원과 아이들 생계비로 1인당 25만여원이 나오지만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윤씨는 "10년
째 아이들 아빠와 친분 있는 작사가, 작곡가, 동료 가수분들이 알음알음 후원해주고 있다"고 말했다. 70년
대 함께 노래를 불렀던 가수 서유석, 최백호, 백영규, '4월과 5월'도 공연에 참여했다.
그러나 그런 행복도 잠시였다. 아이들의 큰아빠이자 윤씨 남편인 김은광씨가 대장암으로 1년여 투병하다
지난달 25일 세상을 떴다. 부인 윤씨 무릎을 베고 누운 채 "사랑해" 한마디를 남기고서였다. 윤씨는 "아이
들과 노래 연습을 하며 공연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우리 곁을 떠났다"고 했다. 아이들은 "스타킹을
얼굴에 쓰고 우리를 골려주던 큰아빠 얼굴이 시커멓고 발도 많이 부어 무서웠다"면서 "재밌었던 큰아빠
가 죽었다고 생각하니 많이 슬펐다"고 했다.
논두렁 밭두렁의 원년 멤버 박문영(58)씨가 내내 상가를 지켰다. 박씨는 1973년 동네 친구였던 김씨와
논두렁 밭두렁을 결성했다가 1975년 입대(入隊)했다. 그 빈자리를 윤씨가 메웠다. 윤씨는 재수 시절 기타
학원에 갔다가 김씨를 알게 돼 그룹에 들어갔다. 1978년 '다락방'을 히트시킨 후 기타 선생과 제자는 결혼
해 부부 듀오가 됐다. 박씨는 군 복무를 마치고 방송국 라디오 PD가 됐고 지금은 미국에서 사업을 하고
있다.
박씨는 윤씨와 아이들에게 김씨를 추모하는 공연을 하자고 제안했다. 이날도 빵 한 아름을 사 들고 찾아
가 아이들과 함께 노래 연습을 했다. 공연은 5월쯤으로 잡고 있다.
이주성(13)군은 "큰아빠는 기타를 '짱' 잘 쳤다. 밤마다 놀아줘 재밌었는데 이젠 우리끼리 놀아야 한다"고
말끝을 흐렸다. 맏형뻘인 이주영(14)군은 "큰아빠가 병원에 계실 때 동생들과 함께 병문안 가서 '큰아빠,
사랑해요'라며 한 번씩 안아 드리고 왔다"며 "큰아빠는 눈을 감은 채 말도 못하셨는데 그게 마지막이
됐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박씨가 기타를 잡고 "예쁜 노래를 만들었던 큰아빠를 생각하면서 공연을 해보자"고 말하자 아이들이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윤씨는 "아이들이 함께 노래할 때 가족애를 느끼는 것 같다"며 "남편도 그런 아이
들을 무척 사랑했었다"고 했다.
☞ 그룹홈
그룹홈은 사회에 적응하기 어려운 결손가정 아동이나 청소년, 노인들을 각각 소수의 그룹으로 묶어 가족
처럼 지낼 수 있도록 정부에서 도와주는 공동생활 가정을 말한다.
박국희 기자 freshman@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