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환은 고(故) 이건희 회장에 대해 “멀리 떨어져 있어도 늘 마음이 통하는 벗”이었다며 “몇 번인가 병원을 찾았을 때 면회를 시도했지만 끝끝내 대면하지 못한 것이 너무도 애석하다”고 했다. /장련성 기자
 
이우환은 고(故) 이건희 회장에 대해 “멀리 떨어져 있어도 늘 마음이 통하는 벗”이었다며 “몇 번인가 병원을 찾았을 때 면회를 시도했지만 끝끝내 대면하지 못한 것이 너무도 애석하다”고 했다. /장련성 기자

“그의 죽음은 세계의 죽음의 하나다…. 어느샌가 이 거인은 세계가 두려워하는 존재가 되었다. 이와 동시에 풍파가 잦아지고 주위로부터의 망언과 악담이 심해져서 옆에서 보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헐뜯고 때리는데 아프지는 않습니까?’라고 묻자 ‘그야 고통스럽죠. 그렇기 때문에라도 좀 더 앞으로,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라고 딱 잘라 말했다. 내 또한 비슷한 바람을 맞는 자라,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는 느낌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한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 이우환(85)씨가 지난해 11월 타계한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을 추모했다. 문화인으로서의 이 회장과 얽힌 개인적 일화를 원고지 18장 분량의 글 ‘거인이 있었다’로 옮겨 월간 현대문학 3월호에 발표한 것이다. 이우환은 3일 본지 통화에서 “고인(故人)도 이미 없고 누구에게 아부하려는 것도 아니다”라며 “그가 이룬 것이 많겠지만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만 썼다”고 말했다. 지난해 12월 그가 거주하는 일본 가마쿠라에서 원고를 집필한 뒤 편집부에 지난달 송고했다.

초일류 컬렉터이자 미술계의 큰 후원자였던 이건희 회장을 이우환은 "한국 미술품이어도 작품의 존재감이나 완성도가 높은 것을 추구하며 언제나 세계적인 시야로 선별했다"고 기억했다. /삼성
 
초일류 컬렉터이자 미술계의 큰 후원자였던 이건희 회장을 이우환은 "한국 미술품이어도 작품의 존재감이나 완성도가 높은 것을 추구하며 언제나 세계적인 시야로 선별했다"고 기억했다. /삼성
2007년 삼성미술관 리움에서 열린 전시 '한국미술 여백의 발견'에 출품된 이우환 '선으로부터'. 이 미술관에 대해 이우환은 "동아시아가 넓다고는 하나 리움과 같은 고전과 현대의 유니크하고 글로벌한 컬렉션과 아름다운 외관을 갖춘 미술관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고 극찬했다.
 
2007년 삼성미술관 리움에서 열린 전시 '한국미술 여백의 발견'에 출품된 이우환 '선으로부터'. 이 미술관에 대해 이우환은 "동아시아가 넓다고는 하나 리움과 같은 고전과 현대의 유니크하고 글로벌한 컬렉션과 아름다운 외관을 갖춘 미술관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고 극찬했다.

“내겐 이건희 회장은 사업가라기보다 어딘가 투철한 철인(哲人)이나 광기를 품은 예술가로 생각되었다”고 이우환은 적었다. “젊은 시절부터 패기가 넘쳐났다. 아직 회장이 되기 전이었던 것 같은데, 집에 놀러갔더니 여느 때와 같이 거실로 안내되었다. 곧바로 눈에 들어온 것은 최근 벽에 건 듯한 완당(阮堂·김정희)의 옆으로 쓴 글씨 액자였다. 살기를 띤 듯한 커다란 글씨의 기백에 한순간 나는 압도되었다. ‘이 글씨에서 뭔가 느껴지지 않습니까’라고 그에게 물었다. 그러자 ‘느껴지고 말고요. 으스스하고 섬찟한 바람이 붑니다. 하지만 이 정도는 좋은 자극이라 생각해서’라며 웃었다. ‘당신은 강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건 미술관 같은 곳에나 어울립니다. 몸에 좋지 않으니 방에서 떼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라고 진언했다. 내가 돌아가자 곧바로 이것을 떼었다는 사실을 후에 알게 되었다.”

 

국내 미술 자원을 한 단계 끌어올린 수집가로서의 면모도 기록했다. “그의 고미술 애호는 선대인 이병철 회장의 영향이 크겠지만, 내가 본 바로는 어느샌가 아버지와는 다른 스케일과 감식안과 활용 방식을 갖추고 있었다. 나는 일본에 살고 있는 관계로 오랜 기간 이병철 회장의 심부름과 도와드리는 일을 해왔는데, 그의 고미술 사랑은 이상하리만큼 집념이 강했고 한국의 전통을 지극히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에 비해 이건희 회장은 한국의 미술품이라 하더라도 작품의 존재감이나 완성도가 높은 것을 추구하며, 언제나 세계적인 시야로 작품을 선별했다…. 덕분에 한국의 고전미술 및 근현대미술, 그리고 글로벌한 현대미술의 수준 높고 내실 있는 컬렉션은 세계 미술계가 주목하는 바가 되었다. 특히 한국의 고(古) 도자기 컬렉션을 향한 정열에는 상상을 초월한 에로스가 느껴진다.” 이어 “이 회장이 갔어도 컬렉션이 잘 지켜지기를 빈다”고 했다.

이우환은 “이 회장이 국내외 문화예술계에 이뤄낸 업적은 헤아릴 수 없다”며 “특히 영국 대영박물관, 미국 메트로폴리탄미술관, 프랑스 기메미술관 등 주요 박물관·미술관 한국 섹션 개설이나 확장은 음으로 양으로 이 회장의 의지를 빼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고 했다. “소중한 벗을 잃었다. 한 시대를 열었던 철인은 떠났다. 지금 코로나 재앙으로 세계는 묵시록의 시대를 보내고 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둡고 추운 겨울이 시작되었다. 마음이 우울해져 산책하러 나갔더니 공원 길가에 작은 풀잎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그 바람 분 길에 풀잎이 향기로워.’ 삼가 이 회장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