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코리아 타운과 외곽 한인 밀집지역 이야기

by 캘빈쿠 posted Jun 30, 2024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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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코리아 타운과 외곽 한인 밀집지역 이야기

 

 

구 자 문

재외 한국인들이 한국 이외의 국가나 지역 등에서 해외 거주를 하는 거주지역으로 가장 대표적인 곳은 미국 로스앤젤레스 (LA)에 있는 LA코리아타운이고, 일본 신오쿠보에 있는 한인촌, 베이징 왕징에 있는 한인촌 등도 나름 유명하다. 이 외에도 세계 각지에 코리아타운이 제법 많이 있다.

 

LA코리아타운은 미국에서 재미동포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곳이며, 이곳에는 한국식당, 한국식 중식당, 한국상품을 취급하는 수퍼마켓, 한국계 은행 및 기업 등이 있으며, 찜질방은 물론 한국계 병원과 의원, 안경점, 한의원, 학원, 방송국, 신문사 등도 있다. LA의 한국식당들은 거의 우리 동포들이 운영하고, 재료도 풍부하고, 경쟁도 심해서 한국인 입맛에 잘 맞지만, 미국인들도 자주 찾기에 순두부, 불고기/갈비 같은 양념고기 등은 다소 달게 양념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고기와 나물이 듬뿍 들어간 진짜 한국 음식을 맛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한국과 미국은 1882년 다소 불평등한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여 교류가 시작되었고, 1880년대 후반 하와이로 이민의 길을 열었다. 하와이 애니깽 농장에서 힘들게 일하던 이들은 계약이 끝남에 따라 1900년대 초부터 리버사이드 오렌지 농장 등 남가주로 향하기 시작했으며, 그곳에서 민족교회를 기반으로 공동체를 만들었다. 한국인의 수가 수백 명으로 증가함에 따라 그들의 주거 및 상업활동은 로스앤젤레스 비즈니스 지구의 남서쪽 구석으로 퍼져서 리틀도쿄와 차이나타운에 가까운 위치에 형성했다.

 

1930년대에는 약 650명의 한국인이 LA지역에 거주했는테, 주로 야채와 과일 배급 사업체뿐만 아니라 식당, 교회, 지역사회단체 등을 설립했다. 1936년에는 한국 최대의 이민 정치 단체이었던 한국국립협회가 정치, 문화, 교육 및 종교활동을 계속하기 위해 중앙본부를 샌프란시스코에서 로스앤젤레스로 옮겼다. 그러나 인종 관련 법, 경제적 제약 등으로 인해 한국인의 활동 및 거주는 아담스 애브뉴와 슬러선 애브뉴를 남북으로, 웨스턴 애브뉴와 버몬트 애브뉴를 동서로 한 지역으로 제한되었다.

 

1948년 셸리 V. 크래머 대법원 사건으로 인해 인종차별 주택정책이 금지된 후, 한국인들은 올림픽대로 북쪽으로 이동하여 주택을 구매하고 사업체를 설립했다. 1960년대 후반, 이 지역은 흑인들이 이동해 오고, 이를 피해 백인들이 북쪽으로 이동해가며 가파른 경제쇠퇴가 발생했다. 한때 화려했던 이 지역은 빈 사무실과 상업 공간으로 가득 차게 되었으며, 이는 한국인들이 저렴한 주택과 건물을 구입하고 많은 비즈니스를 열게 된 계기가 되었다. 1970년대 후반, 올림픽대로와 8번가 지역의 대부분의 기업은 한국인이 소유하게 되었다.

 

한인들의 경제호황은 한국의 언론 매체와 지역 사회 단체의 창설로 이어졌으며, 이 단체들은 이곳의 공동 정체성을 개발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최근에는 LA코리아타운 외곽의 글렌데일, 라크리센터, 밴 나이스, 다이아몬드바 등에도 한인들이 밀집해 있다. 또한 좀 더 멀리 오렌지카운티 애너하임 등 LA 광역권 중에서도 신시가지 상권에 코리아타운의 입지가 커지고 있다. 북 캘리포니아 지역의 산타클라라/산호세 인근에도 코리아타운이 존재한다.

 

이때부터 한인사회의 헤게모니 경쟁이 치열해졌다. 한인회장 선거에서 불복이 잦았고 영호남 회장이 따로 뽑혀 LA시장이 오전에는 영남회장, 오후에는 호남회장을 만난 사례도 있었다고 하며, 심지어 교회, 성당, 사찰 등에서도 호남과 비호남으로 나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선이민자들과 후이민자들간의 세대 차이도 분열의 원인이 되었고,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이후로 한인사회는 또다시 갈라졌었다. 하지만 이러한 한인커뮤니티가 기적처럼 하나로 똘똘 뭉친 사례가 몇 차례 있었다. 사실 코리아타운은 한인들의 비즈니스 밀집지역이라서 낮에는 활기차지만, 밤에 일부 지역은 우범지대로 변하기도 한다.

 

그러니 방글라데시인들이 이점을 노려 2008년 코리아타운 내 핵심지역을 리틀방글라데시로 지정해 달라는 청원서를 전격 제출한 것이다. 한인들의 주거가 학군 좋은 교외지역으로 빠져나간 틈새를 이들이 발 빠르게 메꿔서 1.5만명 (현재는 5만명) 정도가 코리아타운의 특정 지역에 밀집 거주하게 된 것이다. 이들은 방글라데시 축제까지 열면서 이 지역을 자신들의 영토로 주장했다. 이때 기적이 일어났다. LA 한인타운 영역이 공식적으로 반토막이 나려는 순간 한인들은 시청 앞에서 줄지어 데모도 했고, 유권자 투표를 이끌어 냈고, 청원을 제지하였다. 한인들의 묻지마 단결이 일어난 것이다.

 

한때 LA시정부에서 한인타운   중심 지역에 노숙자 쉘터 건설을 한인을 배제한 공청회를 열어 기습적으로 강행하려 했으나, 한인사회가 3개월 넘게 단결하여 저항한 끝에 LA시장이 한인타운 외곽 히스패닉 밀집지역 새로운 부지에 쉘터를 건설하겠다는 타협안을 내놓았다. 물론 1990년대 초 LA폭동 때도 한인들은 ‘Roof Korean’의 예처럼 단결된 힘을 과시하며 코리아타운을 방어하기도 했었다. 최근 LA코리아타운이 콘도, 고층 비즈니스 빌딩, 공공시설들이 들어서는 등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인플레이션 등의 여파로 지역 경기가 위축되기는 했지만, 코리아타운을 중심으로 여기저기서 열심히 일하는 한국인의 모습들이 보인다.

 

이번에 세주었던 타운하우스를 정비하면서 부른 페인트 회사는 60대 중반 아버지와 30대 초반 아들이 멕시칸 팀을 운용하며 일하고 있었고, 청소팀은 50대 중반 한국인 사장이 멕시칸 2, 몽골인 1명을 데리고 일을 하고 있었다. 물론 의사와 변호사로 일하는 한인 2세들도 늘어나고 있다. 대부분이 번영하는 한인타운을 기반으로, 그리고 이제는 발전된 조국 한국을 바탕으로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2024년 6월 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