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왕이된 신대왕은 차대왕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반대 했던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동안 산속에 숨어 살며 차대왕과 마찰을 되도록이면 피하며 살아왔다.
태조왕을 밀어 내다시피하여 왕위를 차지한 차대왕은 조카 까지 죽이고 고복장 같은 충신도 가차없이 죽이는등 권력욕에사로 잡혀 폭정을 일삼었다.
목슴의 위협을 느낀 신대왕은 차대왕이 언제인가는 자기를 그냥 두지 않으리라는것을 예견하고 몸을 피하여 산속에 들어가 살고 있었던 것이었다 .
차대왕은 왕이 된후 이렇다 할 국내외적 치적이 없었다 .
그나마 태조왕이 이루어 놓은 영토는 국내 문제에 치우쳐 영토 확장은 관심 조차 갖을수 없었다 .
엎친데 덮치는 격으로 날씨 조차 변덕이 심하여 흉년이 계속 들자 가난한 대부분 농민들은 아사 지경에 까지이르렀다.
이 모두가 차대왕이 부덕한 탓으로 하늘이 노한것이라 하였다.
그러니 가난한 농민들 끼리는 다 같은 빈 털털이인지라 돈을 빌려주고 빌릴 처지가 못되었다.
어쩌다 부호나 벼슬 있는자들에게서 구걸 하다시피 돈을 빌리면 일할이 넘는 고리채로 돈을 받아 내어 봄에 빌린 곡식이나 돈을 갚을 때는 엄청난 부담을 주었다 .
그러나 농민들은 굶지 않기 위하여 이런 돈이라도 꾸어서 쓰자니 나라안은 뒤숭숭할수 밖에 없었다 .
진대법(賑貸法)이라는 것도 있었으나 그것도 지나간 태조시절 얘기였고 차대왕이 된후에는 아예 그런법이 있었는지 조차 모를 정도로 사라진지 오래 였다.
봄철 어려운때 빌려 쓰는 돈은 추수후 가을에 갚게 마련인데 이때면 벌써 이자가 원금과 비슷한 수준 까지 올라 금방 이라도 터질 풍선처럼 되어 있었다.
가난한 농민들이 돈으로 못 갚자 이번에는 농사 지은 양곡을 받아 갔다 .
농민 문제 뿐만도 아니었다 .
차대왕은 개혁을 한답시고 고구려 조정에서는 백성들이 쓸 생활 필수품 조차도 만들어 주지 못했다.
이에 편승하여 재미 보는것은 중국을 왕래하며 동한(東漢)으로 부터 발달된 생필품에서부터 귀중품까지 팔아먹는 중국인들 뿐이었다.
베가있어야 옷을 해입고 그릇을 만들어야 밥을 담아 먹으며 기름이있어야 밤에 불을 밝힐수있다.
모든것을 중국으로부터 사다 쓰고있었다 .
농사 기구인 삽, 호미등이 있어야 농사를 짓게 마련인데 대장간이 문을 닫은지 오래였다.
사람이 살아 가려면 소금도 있어야 한다 .고구려는 동쪽으로는 창해 (蒼海...동해)가 있고 남쪽에는 발해(勃海)가 있으니 소금이 모자랄 턱이 없었다 .
그런데소금이귀하였다.
고구려 백성들은 차대왕이 집권한 후부터 어쩐일인지 모두 중국으로 부터 수입 해왔다 .
염전 마다 모두 어민들이 염전을 버리고 떠났기 때문이었다 .
백성들은 비싼 양곡을주고 중국에서 들여온 비싼 소금이나 필수품을 사야 했으니 생활고는 말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고구려의 집권자들은 백성들로 부터 걷은 세금을 물쓰듯하여 중국으로 부터 사치품을 수입해 모두 착복 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
특히 고구려와 맞닿은 동한의 낙랑으로 부터 구리거울, 박산로, 금제 교구,나전칠기,금제관식, 은잔 태환식 금귀걸이,금제 조형관 장식,등을 백성들은 배골아 죽던 말던 마구 사들여 사치가 극에 달하였다 .
이러하니차대왕에 대한 눈군가의 반정은 않 일어 날래야 안 일어 날수가 없었다 .
다행히 중국이 차대왕을 공격 않은것 만도 천만 다행이었다 .
중국의 동한은 당시 동한의 제 11 대 환제가 정치를 하던 시절로 외척인 양기(梁冀)가 절제를 시해하고 어린 유지(劉志)를 황제로 내세워 부정부패와 폭정을 일삼는다 .
모후 양태후의 수렴청정이 끝나자 황제의 자리를 굳히기 위하여 환제는 외척 양기를 몰아내기위하여 환관들과 손을 잡는다.
여기서 중국역사의 자주 나타나는 환관이라는 사람들을 살펴보자 .
환관은 거세한 남자를 말하는데 내관이라고도 부르고 내시,또는 환관이라고도 부른다 .
이들환관들은 주로 황제와 후궁들의 일상 생활과 침실을 살피고 잡다한 일을 대신하였다 .환관들은 후궁들의 시중을 들며 그녀들과 접할 기회가 많았지만 여자를 보아도 성적인 충동을 느낄수 없어 남자이면서도 남성 역활을 할수 없는 중성이라 할수있는 남자들이었다 .중국뿐만 아니라 고구려에도 환관은 있었으나 유독 중국에서 환관이 문제가 된것은 외척이라는 강대한 권력을 견제 하기 위하여 중국의 황제들이 환관에게 의탁 했기 때문이었다 .
환관들은 황제와 황후에 접하는 기회가 많으므로서 큰 재산을 모으는것 만이 그들의 유일한 보람이었다 .재산을 모으자니 환관들은 권력이라는 도구를 그냥둘수 없었다.
환제가 이들 환관들과 손을 잡아 정권을 외척으로 부터 빼앗는 것은 성공하 였으나 그바람에 환관들이 발호하여 그들이 권력을 잡자 권력을 남용하는 환관들의 등살에 중국 조정이 흔들리기 시작 하였고 이로 인해 각지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나 나라는 시끄러울 대로 시끄러워 지었다 .
내부가 시끄러운 데다 붂쪽의 흉노족들이 침입하여 동한은 정신을 못 차리게 되었다 .
어부지리로 덕을 본것은 차대왕이었다 .
차대왕은 왕이 된후 중국으로 부터 공격이 없어 그만큼 내치를 잘 운영해 나갈수 있는데도불구 하고 폭정을 일삼고 백성들로 부터 막대한 세금을 받아 들여 내정이 혼란 할대로 혼란하게 만든것이었다
결국 명림답부는 왕을 시해 하고서도 영웅 대접을 받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백성들도 신대왕이 등극 함에 따라 고구려의 백성들은 한숨을 돌려 이제는 잘사는 나라로 이끌어 줄 것을 기대하게 되었다 .
신대왕은 정권을 잡자 지금까지의 고구려 조정과 이반된 민심을 바로 잡기 위하여 화합의 정치로 바꾸려고 노력한다 .왕위에 오른 신대왕은 우선 정국을 안정 시키기 위하여 크게 사면령을 내리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