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고의 남 동생 반초(班超)는 반고와 달리 학문의 뜻을 포기하고 무인(武人)으로서 입신 양명 할것을 결심하였다 .
두고의 별장으로 흉노 토벌의 공을 세워 젊은 시절 부터 무려 30 년간을 서역에 만 머물면서 선선국,우전국, 구자국, 카라샬국 등의 오아아시스 국가들을 차례로 정복하여 한나라에 공을 많이 세웠다 .
벼슬은 군사마(軍司馬),장병장사(將兵長史),서역도호(西域都護), 정원후(定遠后)까지 올랐다
반고의 여동생 반소(班昭)는 일찌기 조세숙이라는 남자에게 시집을 갔었으나 남편이일찍 죽자 그녀는 황후의 눈에들어 황후를 비롯한 외명부 부인 들에게 정숙한 부녀상에대한 강의를 하여 인기를 얻었다 .
이렇게 반고의 집안은 황실의 총애를 받고 있었으나 장남인 반고는 그렇지 못했다 반고는 성격이 대쪽 같아 빈틈이 없는 사람으로 아버지의 유지를 받아 오직 한서(漢書 ...역사서)편집에 만 전념을 다 하였다
명제는 동한 광무제와 음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네째 아들로 본명은 유장(劉莊)이다 .
일찌기 당대의 석학 환영(桓榮)으로부터 글을 배워 춘추(春秋 ) 상서(尙書)에 통달하였다 .즉위 하자 유학을 장려하여 예교주의를 부르짖었며 내정과 외정에 관심을 쏟았다 .명제는 특히 역사에 관심이 많아 사마천의 사기(史記)가 전한 무제(武帝)로 끝난후 역사 기록이 전혀 없자 명제는 무제의 아들인 소제(昭帝)이후의 역사를 편찬할 대상을 찾고 있었다
명제가 반표의 큰아들 반고를 부른것은 이때 였다
부름을 받은 반고에게 명제가 묻는다
"그동안 선친게서 이룩 하지 못한 사서를 편찬 하느라고 수고 많았소. 전한 사마천의 사기(史記)를 보면 수정조선위사군(遂定朝鮮爲 四郡)이라는 대목이 나오는데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오?"?"
"역사에있는 사실 그대로입니다"
명제가 의도하는 것과는 동 떨어진 대답이었다
'"과인의 말은 수정조선(遂定朝鮮)이라고 하는 사기 내용에서 한사군의 위치를 수(遂)라 했는데 수(遂)자가 어디를 지칭하는 지명이냐 그뜻이오"
"북대하(北戴河)와 난하(欒河)주변지역으로 수성현(遂城縣)을 말합니다 "
"어째서?"
"당시 한무제가 단군 조선을 공격 한것은 조선 내부의 참, 음, 장,최,파등 혁명군들이 왕을 갈아 치우려 내란이 일어난 틈을 이용하여 어부지리로 한무제 께서 조선을 공격한 것인데 막상 공격하다가 복병의 역습을 받아 오히려 조선군에게 밀려 패전을 당하자 이에 무제는 패전의 책임을 물어 양복과 순채 및 사신 두 명 까지 모두 처형 한 사건이 아니옵니까?
다만 무제께서 단군 조선이 미처 손을 쓰지 못한 만리장성 남쪽 난하와 북대하 유역 일부를 점령하고 철수 않고 있다가 수성현(遂城縣), 열구현(列口縣)해명현(海冥縣),장잠현(長岑縣),제해현(提亥縣),사망현(駟望縣)등 25개현에 낙랑, 진번, 임둔, 현도등 4군을 나누어 설치한것뿐입니다 "
명제의 심기가 편치 않었다.
명제는 고구려가 만리장성 남쪽에 세운 이 한사군들을 자기네 고토(故土)라며 계속 침략을 일삼고 있는 점을 꺾기 위한 역사의 명분을 찾고 있던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그렇고 역사상 한(漢)나라 사람인 기자(箕子)와 위만(衛滿)이 조선에 가서 조선을 교화 시켰다는 역사적 사실은 어떻게 생각하오?"
" 어디서 나온 설(說)인지는 모르나 위만이니 기자니 하는 사람들은 있지도 않은 허구일뿐입니다 . "
"..........."
명제는기가 막히었다
명제는 반고를 돌려 보내놓고 신경이 날카로워지었다
명제도 당대의 석학인 환영(桓榮)에게 사사(師事)하여 춘추, 상서에 통달한 황제였다
그래서 평소에도 학자들과 논쟁 아닌 논쟁을 즐겨했다 .학자들과의 논쟁에서 항상 지지않았다
그러나 반고의 경우에는 황제가 공부한 범위를 초월한 이론으로 나오는데는 말문이 막힐수 밖에 없었다 .
명제는 다시 반고를 불렀다
"내가 한가지 묻겠는데 그대는 한(漢)나라 사람인가 ? 조선인인가?"
"한(漢)나라 사람입니다 "
"그렇다면 어찌그런 사관(史觀)을 가지고 감히 내 앞에서 선조 시대의 사실을 인정 않는가?"
"폐하 , 역사라는 것은 한치의 허구가 있어서는 않되는 것이옵니다 .생각 해보시옵소서. 위만이니 기자니 하는 중국인들이 어찌하여 조선을 통치 하였다는 말슴입니까? 내용을 왜곡하여 역사에 남기도록 사마천이 한것입니다 "
명제는 반고의 순수한 역사관과 와 다른 생각을 하고있었다
고구려가 번번히 유주(幽州)지역이 자기네 고토(故土)라고 주장하며 북쪽 지역을 자주침범하는 명분을 없애고 더 나아가 언제인가는 고구려를 쓸어뜨릴 명분을 찾으려면 새로운 역사적 명분이 필요 했는데 반고의 역사관은 완전히 명제의 의사와는 동 떨어진 것이었다 .
반고는 명제가 자기의 역사 편수를 황제가 자기 이익에 만 부합되는 소리만 하는데 대하여 명제를 경멸하였다 . 명제는 황제일 뿐이지 한 인간으로 따지면 속물이며 천한 인간에 불과 하다고 생각하였다
명제는 반고의 역사 편찬 사업이 중대한 줄은 알고 있었으므로 의당 자기가 의도 한대로 역사를 편찬 해줄것을 기대 했으나 반고 같이 세상 물정을 모르는 벽창호는 자기의심중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랑곳 없었다
생각 하다 못한 명제가 다시 반고를 은밀히 독대한다
반고로서는 황제가 이렇게 은밀히 독대 하는 것을 큰 영광 이어야 하는데 반고는 그렇지가않았다 .그에게는 만고에 남을 역사적 진실만을 남기고 싶을 뿐이었다
"과인이 그대를 은밀히 부른 뜻을 알겠는가?"
명제는 반고 입에서 답답한 소리가 나올줄 뻔히 알면서도 은근히 묻는다 .
반고가 시침이를 뗀다
"잘 모르겠습니다"
명제가 본격적으로 반고에게 협박 아닌 협박을 한다 .
" 지금 그대가 작성하는 역사서인 한서(漢書)에 다음의 문구<무제가 드디어 조선을 평정하고 4군의 참을 홰청후에, 음을 추저후에, 협을 평주후에, 장을기후에, 최는그 아비가 죽고 공이 있음으로 낙양후에 봉했다 .(遂定朝鮮爲樂浪臨鈍眞番四郡封參爲淸侯有功陰爲萩侯爲平州侯長爲幾侯最以死頗有功爲捏陽侯)>라는 내용을 역사에 기록하되 4 군의위치를 고구려 왕도인 국내성 바로 서쪽에 설치 한것으로 기록하오"
반고가 놀란다
"그러면 역사를 왜곡 시키라는 말씀입니까?'
명제는 반고의 항의성 질문에 당황하였다
"..........."
(이놈이 황제가 하라면 했지 뭐 말이 많아 ...항명이야?)
황제가 은근히 부화가 끓어 올랐다 .일개 사서가가 황제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고 항의조 발언을 하니말이다 .
명제가 막 말로 말한다
"그게 왜, 역사 왜곡이야?"
"한 4군의 위치가 만리장성 남쪽이 분명한데 어찌하여 고구려 국내성 바로 코 앞에 한사군을 설치 하였다고 거짓 기록을 하시란 말씀입니까?"
"............."
명제는 할 말이 없었다
'저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역사를 왜곡 할수 없습니다"
(이놈이 속으로나 거절 하지 들어내 놓고 거절해....)
명제는화가 치밀었다
발설 하고 보니 황제가 황제 답지 않게 역사 왜곡을 하라고 말해놨으니 큰일이다
원래 모든 일에 있어서 비밀을 지키면 성공하고, 상의하다 누설되면 실패 하는 법이다.
그러므로 역사 왜곡을 설득 하려는 황제가 말 한것이 정당치 못한것이라 하더라도 반고가 말이 없으면 그대로 넘어 가지만 그렇지 못할때는 반고의 목슴이 위태로워 질것은 뻔하다 .그러기 때문에 역사를 기록 하는 자나 왜곡을 지시 하는자나 서로의 비밀은 필수적이다
그러나 반고는 역사의 진실을 택하는 고지식한 인간이었다
황제는 수정안을 내놓는다
"그렇다면 국내성 서쪽이 아닌 고구려의 남쪽인 염란수(鹽難水...지금의 압록강) 남쪽을 한 무제가 점령하였다고 하면 될것 아닌가?"
이 말에 반고는 황제를 경멸의 눈으로 처다본다
"폐하 , 왜 점점 그러십니까? 고구려의 염란수 남쪽은 황무지입니다 .그곳에 조선인들이 얼마나 살았다고 군을 4 개씩이나 설치 하였다고 거짓 말을 쓰라는 말씀 입니까? 적어도 군(郡)마다 태수를 두려면 다스려지는 일정수의 백성이 있어야 합니다 .
한 무제께서는 인구가 희소한 조선 반도 황무지에 갈수도 없고 갈일도 없었습니다 .
황제는 이제 더 이상 말을 꺼낼 수가 없게 되었다
"..............."
명제는 반고를 집으로 돌려 보내 놓고 보니 반고가 매우 괫씸 하였다
(이놈이 황제의 말을 무시해도 유분수지...)
다음 날 명제는 간의 대부 공충을 불렀다
"고구려가 번번히 우리 강토인 낙랑과 현도를 저희들의 강토라며 침범을 하고 있기때문에 과인이 반고를 불러 이번에 작업하고 있는 역사서의 고구려를 공략시 명분을 쌓기 위하여 좋게 타 일렀거늘 이 자가 꿈쩍도 않으니 이를 어쩌면 좋겠소?"
명제가 한사군의 위치를 한 무제때 조선 반도에 설치 했었다라고 거짓 쓰도록 음모를 꾸민것은 명제와 공충의 사전 합작품이었다
처음에는 공충이 반고에게 황제를 팔아 압력을 넣으려 했었으나 반고가 말을 듣지 않을것 같아 황제가 직접 반고에게 권하는 형식으로 작전을 꾸몄던것이다.
원래 사서의 간행 목적은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정직하게 기록해 뒤에 본보기가 되게하는것이 목적이었다
사서를 쓰는 자는 황제와 신하들에 이르기 까지 국사에관한 모든것을 기록하는 자였다. 황제와 신하의 인물 평에서 부터 정책 비판에서 부터 후세에 귀감이 될만한 정론 직필의 날카로운 역사평을 사실대로 기록하는게 그의 명예였다.
이 처럼 역사적 기록을 쓰는 사서자는 개인의 명예 이자 가문의 영광이었다 .
반고는 문장에 뛰어 날뿐 아니라 아버지 반표로부터 내려 받은 역사 사초(史草)를 고스란히 떠 맡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강직하고 정직한 인품을 가진 전형적 선비였다
반고가 사가(史家)로 발을 들여 놓은 것은 자기 의운명이라 할수있다 .
평소 황제와 신하들은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으면서도 반고의 따가운 시선으로 부터 벗어나 려고 애쓰지 않을수 없었다 .일거수 일투족이 사서에 오르기 십상이기 때문이었다
반면 반고를 비롯한 사가들은 차가운 눈으로 그들의 행적을 살피기에 여념이 없었다 .
이 과정에서 양자는 갈등이 없을수 없었다
대부분의 사초는 사가가 집에 간직했다가 황제가 죽고 난 다음 역사를 기록 할때 쓰기 마련인데 명제는 유독 이상하리 만치 반표와 반고 부자의 역사 편찬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던것이다.
명제와 반고의 갈등은 결국 권력에 굴복하고 정치적 이용물로 전락 하는가 그러 하지않는가의 싸움으로 변하였다 .황제와 신하들은 정치적 이해 관계에 따라 자신들의 구미에 맞게 각각 역사가 편찬되기를 바랬던 것이다 .
그러나 반고는 정치 권력에 굴복하여 곡필을 거부하였다
간의 대부 공충은 그렇지 않아도 반고가 눈에 가시 같은 존재였는지라 좋은 기회로 보고 명제에게 간언한다
"폐하 차제에 반고를 처치 하십시요 "
명제가 망설인다
' 반고를 처치 하는것은 쉽지만 세상에서 무엇이 라고 하겠소? 역사에 나쁘게 기록하려고 압력을 넣다가 안되니까 .그를 처치 했다 하지 않겠소?"
"폐하 , 무엇을 망설이십니까 ? 긴 설문은 필요 없고 반고가 한나라 역사를 제 멋대로 고쳐 짓는다는 죄를 뒤집어씨워 투옥 시키면 되지 않겠습니까"
"명제가 망설인다
"무엇을 제 멋대로 바꾸었다고 하노?"
"폐하 , 역사라는것은 지나간 날의 기록이기 때문에 트집을 잡으려면 얼마든지 잡을수 있습니다 . 정 곤란 하시면 과거사 왜곡죄라는 죄목을 씌워 잡아 들여도 됩니다 "
"과거사 왜곡죄라......."
황제가 기뻐한다
다음날 황제는 반고를 체포하여 옥에가둔다
이소식을 들은 반고의 아우 반초가 가만히 있지를 않았다
반초는 군사마, 서역도호로있으면서 정원후가 되어 있었다 .반초는 형 반고를 석방해줄것을 명제에게 간청하였다
반초는 흉노를 토벌하고 서역의 모든 정보를 수집하고 수비하는 최고 책임자로 제후로서 막강한 군사력을 갖고있었다
명제는 반초가 혹시 다른 마음을 먹을까 두려워하여 반고를 석방 하고 다시는 반고와의 역사 얘기는 입 밖에 내지 않는다
반고의 강직함과 반초의 반란이 두려웠던 탓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