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시요" 순찰 중이던 아파트 관리원 왕취는 들고 있던 회중 전지를 쓰러져있는 사람의 얼굴에비추며 엎어 저있는 사람을 흔들었다 . "술에 만취 되었나? 이런데서 쓸어저 있으면 어쩐담 ..." 엎드려저 있는 젊은이는 반응이 없었다 "쯧쯧 어디서 술을 먹고 이지경이야 ...."
왕취는 이런 사람들을 자주 보아 온터라 경비초소 점검을 위하여 제2 초소로 발걸음을 옮기었다 여름철이면 이 아파트는 북경 대학 학생들이 술먹고 길 바닥에 들어누어 잠자는 것은 가끔 보아오고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 "에이 재수 없게 오늘도...... " 왕취는 요사이 학생들의 태도가 못 마땅하다고 생각 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왕취는 30 년의 군대 생활을 맞추고 제대 하였을때는 일 자리가 없어 전전 긍긍 했었다.
다행히 그나마 그럭 저럭하여 이 아파트 관리원으로 취직 한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 하고있는 사람이었다. 왕취는 지금의 중국 정부의 개혁 정책에대하여는 별로 관심이없었다 .오히려 요즈음 중국 대학생들은 자유라는 이름의 방종과 타락을 못 마땅하게 생각 하고있는 사람중에 한사람이었다. 이 아파트도 전에와 달리 외국 학생들이 많이 들어와 있고 부터는 아파트의 풍속도가 달라 지었다 .
밤에 고성 방가를 하지 않나 길 바닥에 누어 잠을 자지 않나 눈살이 찌푸러 들지 않을수 없었다 몇 발짝을 옮기던 왕취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 "혹시......? 왕취는 오던 발 걸음을 되돌려 다시 그 술취해 쓸어저 있다고 생각한 젊은이에게로 되돌아 가 보았다 "여보시요" ".........." 대꾸가 없었다 왕취는 그를 일으켜 보려고 하였다
순간 그학생의 얼굴을 들여다 보고 소스라처 놀랐다 피투성이가 된채로 얼굴이 심하게 다쳐 있었다 왕취는 부리 낳게 경비 초소로 달려가 공안 파출소에 전화를 걸었다
공안원이 조금후 나타 확인후 "죽었군..." 하고 중얼거리었다 공안원은 죽었다는 청년의 신분을 확인 하려고 그 청년의 주머니 소지품을 뒤졌다 신분증이나왔다 " 청화 아파트 505동 702호..." 공안원은 신분증이라도 나와서 신분 확인이된것이 다행 이었는지 혼자말로 뇌까리었다 "702호에 연락하여 누가 연고자 라도있나 알아 보시오" "학생들 만 있는 16평 짜리인데요" 공안원은 왕취의 말에 대하여 짜증난 소리로 명령조 말을 쏟아내었다 "연락 해 보라니까요" 왕취가 경비실로 가서 연락하자 한 학생이 헐레 벌떡 뛰어나왔다 .
그 청년은 죽은 청년의 얼굴을 확인한 뒤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니 고기려....네가" 기가 막힌지 아파트에서 나온 청년은 한때 말문이 막히어 말을 못하고있었다 공안원은 청년을 노려보았다 "당신은 누구요?" "죽은 사람과 같은 방에 자주 와있던 학생입니다 " "그래요? 조사좀 해야 겠으니 일단 공안 파출소로 갑시다" 공안원은 이 학생을 공안 파출소로 연행 하였다
공안원은 학생의 거류증을 자세히 들여다 보더니 "당신은 한국 유학생이 구먼 ....." "한국 유학생 이동유라 합니다" 공안원은 이동유라는 한국학생을 심문하기시작하였다 "당신은 죽은 청년과 어떤 관계요?" "고기려라는 친구는 중국 학생인데 가끔 내방에 찾아오는 학생입니다 " "흠 , 주머니속에서 나온 신분증을 보니 서장족(西臟族)이 분명한데 ... " "가끔 찾아 오는데 있을곳이 마땅치않았던 모양입니다 " "그래요? 알았소 .나중에 필요하면 다시 부를지 모르니 일단 돌아 가시오"
중국 대학생들은 입학하면 모두가 기숙사 생활을 하게 되어 있다 . 아무리 자기집이 학교 근방이라 아무리 가차워도 제도적으로 정하고 있는 규칙 때문에 기숙사에 들어가 생활을 하여야 하기 때문이었다 .
이동유는 당초에는 한국에서 중국 한의학을 공부 하러 중국에 유학생으로 간것 이었지만 어쩌다 당초 계획과는 빗나가 역사학을 전공하게된 북경대학 역사학과 3 학년 학생이었다 . 그동안 경험도 쌓을겸 중국어를 배울겸 유학은 왔다지만 북경 대학 전체 에 대하여는 아직 무뢰한 이었다 .이고기려라는 중국청년을 만나고나서 생소한 중국생활에 도움을 받은것은 사실이었다.
이동유가 한국에서 중국에 처음 왔을때는 실망을 하지 않을수 없었던것은 의무적으로 있어야 하는 기숙사라는 것이 한국과는 달리 중국 일반 학생들의 기숙사의 경우 한방에 8 명에서 10 명이 같이 있었는데 전체 인원에 비해 방이 좁기때문에 책상과 수납장을빼고나면 침대가 방을 모두 차지하여 과연 같은 방에 기숙할수 있는가였다
다행히 중국학생 기숙사와는 구분하여 외국 유학생 기숙사는 2 명씩 생활하게 되어 있어 조금 나은 편이었지만 공동탕외 그래도 욕실도 없어 불편하기 짝이없었다 . 그후 한국학생 이동유가 이 비좁고 갑갑한 기숙사를 빠저 나올수 있었던것은 일반적으로 6 개월 이상 대학교 기숙사 생활을 마친사람은 본인이 원할 경우 기숙사를 나와 외부에나가 살수있는 제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동유는 기숙사 생활 6 개월을 채우자 학교의 허락을 받아 학교 근방에 자기가 거주할 아파트를 물색 하였다 , 학교 게시판을 통해 셋집을 찾은 곳이 청화 아파트 505동702호였다 .
중국은 한국 모양으로 전세라는것이 없어 6 개월치 방세를 미리 내고 입주 하였다 .이아파트는 여러가지 편의 시설이있어 비교적 기숙사 보다는 편리하였다 .한방에 둘이 거주할수있게 되어있었는데 먼저 살던 한국인이 졸업후 귀국 하는 바람에 혼자 독방으로 쓰고있었다 .
이때 이방에 자주 나타난 친구가 죽은 고기려라는 중국 학생이었다 고기려라는 학생은 중국 학생들 보다 한국학생인 이동유를 더 좋아하는 눈치였다 .
이동유가 고기려라는 학생을 알게 된것은 우연한 사연이있었다
북경 대학은 중국에서는 제일로 치는 대학이었다. 한국의 서울 대학의 전신이 일제 식민지시대 경성 제국 대학 이었듯이 북경 대학도 1912년 장개석 총통하에 중화민국 정권이 수립 되면서 1896 년 청나라의 경사대 학당을 북경 대학으로 개편 새롭게 개교한것이다 .
이 대학은 1916년 채원배 학장이 취임하면서부터 빛을 보게되는데 그는 신 문화운동을 일으키어 학술연구와 토론의 학풍을 전통화 시킨장 본인이었다 . 1949년 중국이 공산화 되어 중화 인민 공화국이 성립되면서 1952 년 연경(燕京)대학과 청화(淸華)대학을 합처 명실공히 종합대학으로의 면모를 갖추게된다 .
그가 부모의 성화에도 불구하고 역사학과에 입학 하게 된것은 수학 실력이 부족한 그에게 부모님의 의학 전공에대한 강한 권유에대한 반발 심리도 어느정도 작용하였고 그가 고등학교 시절부터 동양역사에 심취 했었던 경력이 있었기 때문이었고 중국이라는 날에 온이상 한국의 역사를 한자 영역권인 중국에서 찾아보고자하는 호기심도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석달전일이었다 이동유는 북경대학 우연히 강의실에서 나오다가 국제 정치학과 강의실이 학생들로 떠들석 한것을 목격하였다 이동유가 이 강의실에 기웃거린것은 학생들의 수강열기가 대단했기때문이었다 이날의 강사는 정치학 전공의 이윤청 교수였다
"학생 여러분,앞에서도 말 하였지만 우리 중국의 역사관이라는것은 다른나라의 역사관과는 다릅니다 ,아시다 싶이 현재 내몽고, 티벳,위구르등의 문제를 살펴볼때 그들의 역사의식대로 우리가 끌려 간다면 우리 중국은 앞날이 어떻게 될까는 뻔합니다 . 우리는 과거가 중요한것이아니라 현재가 중요한것입니다 .
다시말하면 중국 사람들은 과거의 역사가 아니라 현재의 정치적 상황과 사회 상황에 맞추어 역사를 엮어나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기때문에 현재 동북지역에 있는 많은 고구려 유적들은 엄연히 중국의 정치권과 사회권내에 있기 때문에 우리의 역사라고 할수 있는것입니다 고구려가 몇 천년전에는 그들 민족의 땅이 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엄연히 중국땅입니다 .그러므로 고구려는 중국땅에서 세워진 국가라는데 이의가 없을것입니다
따라서 고구려는 당시 중국의 지방정권에 불과 했던것이고 고구려와 수당간의 전쟁에있어서도 알고보면 중국내부의 국내 반란에 불과 한것입니다 .그후 고구려가 망하고 왕씨가 정권을 잡아 고려를 세운것은 엄밀히말해서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볼수 없습니다 "
이동유는 강의를 듣다말고 듣기가 거북하여 밖으로 뛰쳐나왔다 이동유는 가래침을 보도에 탁 뱉으며 "미친놈들" 하고 혼자말로 뇌까리었다 "그래도 역사는 역사지 ....." 등뒤에서 눈군가가 말을 던지었다 "중국 교수들이 매양 저런식으로 생각 하니까 동양의 평화가 잠잠 할 날이 없지..."
이동유가 고개를 돌아보니 같은 학과 생인 중국인 학생 고기려였다 .그는 아까부터 자기학과 출신이 국제정치학 특강에 와 있다는데 의아하여 주시하고 있던 참이었다. 이중국인 학생은 이동유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혼자 말로 계속 지껄여대었다 " 이윤청교수는 현재만 있고 과거는 없다는 얘기아닌가?" 이동유는 그때서야 제정신을 차려 이 중국학생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중국학생 고기려는 이동유의 눈초리가 약간 따가운듯 시선을 다른곳으로 돌리었다 이동유는 "당신은 중국사람아니야 ? 어찌 그런 말을 ..." 하고 반문하자 "중국사람도 중국사람 나름이지 ....자네는 그래도 행복한 나라의 사람이야 .그자들은 200 만명이나 무자비하게 죽이고도 끗떡 없는 사람들인데..." "그게 무슨 말인가?"
"자네는 잘몰라 . 자네는 아까 이윤청교수가 말하는 동북공정(東北工程)의 뜻이나 아는가?" "나도 어렴풋이 듣고는 있었는데 오늘강의 내용같이 노골적인지는 몰랐지 ..." "자네는 그럼 서북공정(西北工程)이라는 것은 아는가?" "동북공정은 익히 듣고 있었네만은 금시 초문인데 ?"
"서북 공정이란 엄연한 독립 국가였던 티벳을 흡수 통합 하기 위하여 만든 것일세...현재 중국의 자치구로 전락한 티벳은 달라이 라마를 비롯하여 젊은 티벳 청년들이 인근국가로 망명하여 독립 운동을 벌리고 있지만 어느 강대국도 강대국간의 정치 이해 때문에 그힘을 발휘 못하고있지 ...나라를 잃으면 이렇게 서름만 당하는 것이라네...중국이라는 나라는 힘이 없을때는 큰 숨 한번 못 쉬다가도 조금 강해지면 인근 국가를 흡수 통합 하려는것이 못된 버릇이 있지 " "허 자넨 중국인답지 않구먼 ..."
"허. 나? 나는 90%가 한족(漢族)인 중국인에 틀림없지........ 하지만 나는 한족은 아닐세" "그러면?" 고기려는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이동유는 직감으로 닿는것이있어 "혹시 서장족(西臟族)?......." "나는 티벳족도 아니야 " "........... " 이동유는 이 중국인의 애매한 태도에 다소 의아했다 .머무거리는 고기려의 반응을 끄집어내기위하여 먼저 자기 정체를 밝히었다 "나는 한국인 일세..." "아 , 한국인.....나도 자네가 한국인 인지 조선족 인지 구별은 못하고 있었지만 대략 눈치는 채고 있었지 ...." 고기려는 부러운듯이 "내 신분을 밝히지.....나는 티벳족에 속하지...자네 나라는그동안 외세에 의해 독립은 되었지만 잘 살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있지... 하지만 자네들도 명심 해야 할것은 지금의 한국의 독립이 외세의 힘만도 아니라는것일세 ...... 그동안 만주와 중국 미국 쏘련등지에서 독립을 위해 싸워 온 선조들의 덕택이라는 것을 잊지말아야 겠지... "
고기려는 역사 학도 답게 다음 말을 이었다 . " 하지만 한국도 독립 했다하지만 남북이 갈라저 있지 않은가? 우리 티벳트가 중국과 서역간의 갈등의 땅이었듯이 한국도 중국과 서양과의 갈등의 땅이었고 현재도 여전하지..... 나는 아까 이윤청 교수의 강의를 듣고 섬뜩했네 ......한국도 조심 하지 않으면 않 된다는 것을....."
중국이 동북 공정을 들고 나올적에는 그 저의를 알아야 하네 .솔직이 말해서 순수한 한족(漢族)은 인종학적으로 보아 말레이 계통의 남방족으로 25%가 고작일세 그런데도 그들이 중국인의 90%가 한족 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중국 당국의 발표는 새빨간 거짓말일세 그들이 말하는 한족은 중국어 모국어(母國語) 로 삼느냐 않느냐하는것 뿐일세 ."
고기려라는 학생은 아직도 티벳 소수 민족의 학생으로 중국 정부에 대하여 감정이 많은 학생 같이 보였다 이동유가 한족이 아니라는 말에 일단 안심하고 고기려의 비관적 말에 위로겸 한마디 던지었다 "그래도 피는 물보다 진하지" "큰일이야 , 우리 티벳족도 이러다가는 독립국가가 될수있을지....." "하지만 유럽을 보게...... 민족별로 국가가 형성 되어 있지 않은가 ? 이태리의 라틴계열, 독일의 게르만족 , 앵글로섹슨족의 영국 을 보게..... 머지 않아 티벳국으로 독립할 날이 올것이야 "
"아니야 그건 이군이 잘 모르고 하는 소리일세 , 예를 들어 중국의 일부인 만주족의 예를 보세. 중국의 호적에는 민족이 만주족으로 되어있는사람들의 99%는 만주어를 전혀할줄도 모른단 말이야 .그사람의 신분증을 보기전에는 만주족인지 한족인지 구별할수가 없지 ......만주족은 완전히 지구상에서 사라지는거야 따라서 결국 우리 티벳국도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말거야" 고기려는 비장한 목소리로 한탄을 하였다
고기려의 말은 계속되었다 중국은 그동안 티벳 역사를 중국화 시키기 위하여 중국은 1980 년도부터 서북공정을 시작 했을 뿐만아니라 단대 공정이라는 이름으로 자기들의 역사를 미화 시키고있다는 것이었다
이를 테면 지금 일반적으로 역사에 오르 나리고 있는 5000 년의 중국역사를 1 만년이나 된다며 그들의 시조가 삼황 오제를 신격화 시키고 있다는 것이었다 고기려의 말에 의하면 고구려를 중국의 지방 정권이라는 엉터리 같은 이론을 내세우기위하여 중국 정부로 부터 5조원이라는 동북공정 비용을 산정하였다니 놀라지 않을수 없는 사실이었다
이동유는 한국 같이 자유롭게 정부를 성토 할수 있는 나라와는 달리 중국이라는 나라는 철저한 사회주의 독재 국가인데도 고기려가 거침없이 중국을 비방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데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이날 이후 고기려는 이동유의 방에 거의 매일 같이 찾아 왔다 .이동유로서는 그의 역사 의식을 이야기 해주 는것도 재미 있었지만 중국의 생활에익숙치 못한 이동유로서는 그가 밉지않았다 . 이동유도 물론 고기려가 있는 기숙사에 안 찾어 간것은 아니었다 .고기려의 기숙사를 찾아가 보면 예의없이 항상 떠들석하였다 . 7 명의 티벳 출신 학생들이 같이 기숙했었는데 역시 비좁고 어수선하였다 .이런 불편한 생활을 하면서도 불편을 느끼지 않는 이들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이들 티벳 학생들은 침대 옆에 자기 사물통을 가지고 다녔는데 사물 통속에는 몇벌의 옷과 편지, 중국어 사전, 다라이 라마의 성물(聖物)이 예에 없이 갖고 다녔다 .
그런데 이상한것은 고기려가 최근 그의 사물통을 이동유의 허락을 받아 그의 방에다 옮겨 놓고 잠은 기숙사에서 생활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 이동유는 처음으로 고기려를 만났을때는 기숙사의 열악한 환경이 싫어서 그를 찾아오는것으로 만 생각하였다 .밤 10 시만 되면 기숙사 관리원이 나타나 메인 스위치로 각방의 전등을 꺼 버리기 때문에 공부를 더 할수 없는환경 때문에 찾는것으로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고기려 학생의 언동을 보아서는 그런것 때문 만은 아닌것 같았다
고기려는 평소 이런 말을 자주하였다 "동유군, 자네는 그래도 부강한 나라에 살고 있어 행복해 보이네....우리는 나라가 없어 어찌 이지경이되었는지 .." "..........." "중국이라는 나라는 55 개 민족이 섞여 살고 있지만 한족(漢族)이 다른 민족을 전부 집어 삼키고 있어 ,듣는바에 의하면 중국 공안 당국이 변방 심사구류소에서 다른 소수민족 보다도 우리 티벳 에 대하여만 더 강하게 탄압하고 있다고 소식을 듣고 있네 .6 개감방중 5 개감방은 저항하는 티벳인들을 수감 시킨뒤 걸핏하면 피투성이가 되도록 구타를 한다는것이야 .."
이동유는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할 이런 이야기를 듣고 놀라지 않을 수없었다
"낭설이겠지 ....올림픽을 개최 한다는 국가에서 설마 그런 야만적인 행동을 하겠어?" "허.....자네는 잘 모르는 말일세 .티벳트는 1950 년 중국 공산당의 인민 해방군에의하여 강제 점령 당하기 전 까지는 중국땅이 아니었지...현재는 서장 자치구(西藏自治區)로 통하지만 중국 당국은 우리 민족을 동화 시키려는 회유책을 써 보는등 이중 전략을 구사 하고 있지 ...하여간 중국 당국은 다른 소수민족에게는 관용을 베풀면서도 우리민족에게 만은 강압적이야 말하자면 대한족주의(大漢族主義)와 지방민족주의 (地方民族主義)의 갈등이랄가?" "세계 여론으로 독립을 쟁취하면 않되나?"
"일단 나라를 빼앗기면 다른 세계국가들도 자국 이익에 만 집착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네 '이것이 비극이야. 어쨋든 티벳트에는 중국 당국이 한족을 이곳에 자꾸만 이주시켜 예를 들면 1957 년경만해도 티벳트에는 한족이 한명도 없었는데 1990 년에는 티벳 인구 222 만명중 4.9%의 한족이 들어와 살고있으며 동화시키고있는것이 시간문제일뿐 일세 이제는 티벳트라는 나라는 지구상에서 없어질거야 ...."
고기려는 심각한 어조로 말하였다 이동유는 그를 를 안심시키려고 한마디 던지었다 "중국 이라는 나라도 결국은 소수 민족들의 목소리를 무시 못할것이야" "허, 그것을 당신이 잘 모르는 소리지,중국은 티벳 여성들에게 임신 중절 까지 시키는 나라야...또 독립 흭득을 하기 위해 비폭력으로 시위하는 민중을 향해 무차별 사격을 가한 장본인 들이야 .솔직히 말해서 나는 우리 조국이 독립 하여야 한다고 생각하네 중국과 마찰을 피하려고 하는 국제사회가 돌보지 않더라도 ....우리는 싸울것이야 "
고기려의 티베트 독립에 대한 집념은 대단했다 이동유는 고기려의 독립 의지를 처음에는 하나의 감상적 민족주의자로 만보고 가볍게 넘기었다 이동유가 고기려에 대한 관심을 바꾼것은 또 다른 이유가있었다 .
고기려는 그의 이름 그대로 그의 먼조상이 고구려 장수였던 고선지 장군이었다했다 그의 아버지가 이름을 지어준것도 그런 내력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 그의 말 대로라면 그의 먼조상은 고구려인이 되는 셈이다.
그런 얘기를 들어온 고기려인지라 한국인을 보면 유난히도 마음이 갔다는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이동유가 알아 본 고선지의 사적에대한 자료로는 구당서(舊唐書)에 고선지 열전에서 읽어 볼수 있었다
구당서에 의하면 고구려가 망하자 포로로 잡힌 고구려 유민 일부는 당나라로 편입되고 대부분이 신라로 망명하였고 또다른 유민들은 발해를 건국하였다 당에 들어간 유민중 고선지는 아버지 고사계(高舍鷄)를 따라 당나라 안서 지방로가서 살다가 음보로 유격 장군이되어 20 세때 장군이 되었다.
그는 젊은 나이에 안서 절도사 인 부몽령(夫蒙靈)의 눈에 들어 언기진수사(焉耆鎭守使)라는 벼슬을 얻는다 그는 천산산맥 서쪽에 있는 달해부라는 곳을 점령한 공으로 안서 부도호(安西副都護)로 승진되고 이어 사진도지병마사(四鎭都知兵馬使)라는 벼슬 까지한다
서기 747년 당나라는 고선지를 행영절도사(行營節度使)로 임명하여 군사 1만명을 주어 티벳트(吐蕃)를 공격한다 .고선지는 험악한 파미르 고원을 넘어 티벳트를 점령하여 항복을 받아 내었다 . 그 공로로 좌금오전대장군(左金吾全大將軍)으로 까지 특진한다 .
그후 그는 타슈켄트 (石國)정벌에나서 타슈켄트 국왕을 포로로 사로 잡아 당나라 서울 장안 까지 호송하여 개부의 동삼사(開府儀同三司)라는 벼슬 까지 얻는다 , 그런데 당나라 조정에서는잡혀온 타슈켄트국왕이 거만하다하여 목을 베어 죽이게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티벳트와 타슈켄 트연합군이 분개하여 당나라를 공격하여 들어왔다 당나라 조정에서는 고선지에게 7 만병력으로 전선으로 내 보내어 대항 토록하였으나 전사상 전무후무한 소떼 공격에 여지없이 대패하게 된다 .그때 까지 당나라에 순순히 따르던 천산산맥 북쪽에서 유목생활을 하고있던 카르르크 종족이 티벳족과 사라센족의 설득으로 당나라를 배반 한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당나라 조정은 국내 정치문제와 겹쳐 골치아픈 서북지역을 결국 포기하고 고선지장군에게는 밀운공군이라는 작위를 주어 집에서 칩거하게 하였다 고선지장군의 패배로 서북 국경지역을 차지한것은 테벳트였다.티벳트는 돈황 까지 처들어와 난샨의 통로까지 점령까지 하였으나 권력 싸움에 눈이먼 당 조정에서는 변방에대한 관심을 아주 잊어 버린 것이었다
서북지역을 티베트에 점령 당하고도 당나라 조정이 힘을 쓰지않은 이유는 순전히 당나라 내부 사정 때문이었다 . 당나라는 서북 지역문제는 농병 일치제도 였던 당나라 병역제도의 문란으로 능력있는 장수인 절도사에게 변경지역에 번진(藩鎭)을두고 절도사에게 민정권과 군정권을 주어 절도사가 주민들에게 땅을 나누어주는 대신에 농민들에게 병역을 부과 시키는 동시에 군수물자도 자체에서 조달 하도록하는 제도가 문제가 된것이었다
결과는 절도사의 권한은 강화되었지만 황제의 권한은극도로 약화 되었던 것이다 바로 이때 등장한 인물이 안록산이었다 . 안록산은 현종때 당시 재상이었던 이임보가 등용한 인물로 헌종의 신임을 얻자 이때 당나라조정의 유력자인 양국충이 이를 시기하였다 .안록산은 양국충을 제거하기위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양국충은 현종을 꼬득여 관군을 동원 안록산과 대치하게 된다 .
그러나 당시 관군의 총사령관인 기서한은 황제의 명령을 받고 생각하기를 적극적 공격보다도 군량미가 부족한 안록산을 피곤케한뒤 이들이 지친틈을 타서 공격하려고 지연작전을 쓰려 했다 . 그러나 양국충은 기서한을 평소 미워하던 사이였으므로 이기회에 기서한 조차 제거시키기 위하여 적극 공세로 내몰도록 현종께 꼬드겼다 .
기서한은 황제 명령에 거역을 못하고 공격하다가 크게 패하고만다 안록산은 승전 여세를 몰아 현종 황제 궁궐 이있는 경기지방을 위협하고있었다 현종 황제는 집에서 쉬고있던 고선지를 부른다
고선지는 현종의 명을받고 군사들을 모아 보니 모두 사기가 떨어저 안록산에게 이기기에는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 고선지는 우선 안록산군의 군량미의 목표가되어 있는 태원 창고를 감군(監軍) 변영성의 반대를 무시하고 창고를 열어져치고 양곡과 귀중품 까지 모두 소각하거나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 그리고는 작전상 동관으로 일단 군사들을 물리었다 .
동관은 천험의 요새로서 그동안 쫓기던 고선지의 병사들이 다시 사기가 다시 회복되는듯했다 .안록산군이 바싹 뒤를 쫓았으나 워낙 험한 지역이라 안록산군은 진격을 멈추었다 한숨을 돌린 당나라조정에는 심상치않은 난기류가 흘렀다 .
감군 변영성이 고선지를 모함한것이었다 .태원 창고 소각사건을 중지할것을 고선지에게 부탁한것을 일어지하에 거절한 사건에 감정을 품고 황제가 화를 내도록 꼬득인것이었다 "페하 , 고선지는 적군에 겁을 먹고 군사들을 물리 었으며 섬서의 땅 수백리를 버리고 태원창고에 있던 귀금속 까지 절취하였나이다 "
감군 변영서의 상소문을 읽은 황제는 대노하였다 "이놈이 그렇지 않아도 토번족(티벳)과 내통 하지 않나하고 있었더니 이번에는 안록산과 싸우는 척하고 짐을 속여? 당장 효시하라"
고선지는 참형 당하고 말았다 고선지 뿐만이 아니었다 .당나라에서 큰공을 세우며 활약을 했던 왕모중, 헌성등 고구려 출신 장수들도 모두 국가 반란을 했다는 이유로 모두 참형을 당하였다 .고선지의 참형 여파는 그 가족까지 영향을 미치었다 .마침 고선지의 가족은 서북지역 예날집에 그대로 머물러있다가 직접 화는 면했으나 당나라 조정에서 파견된 관원이 고선지 가족을 몰살하라는 명령을 받고 장안을 출발하였다는 말을 전해듣고 관원들이 들여닥치기전에 한밤중에 살던집을 온가족이 탈출하였다 .
주위사람들 말에 의하면 티벳트로 도망치었다는 말도있고 사라센족방향으로 도주 했다는 말만있었다 이동유가 알아본 고선지의 약력이었다
(그러한 고기려가 죽다니 ....) 그는 공안 파출소를 나와 자기방에 남긴 고기려의 사물통에 대한 호기심을 이르키었다 . (그렇다면 그 사물통엔.....?) 이동유는 부지런히 자기 숙소로 향하였다 사물통은 잠가 있지 않았다 . 예상대로 사물통 안에는 옷가지와 책, 사전이 나왔고 유서인듯한 종이 쪽지가 접혀있었다
"이동유군, 그동안 동유군에게 폐가 많았어 . 나는 그동안 티벳족으로서 북경 대학에 티벳트인으로 행세하고 다니면서 티벳트 독립운동에 앞장선 나였지만 사실은 한시라도 동유군의 조국 한국에 대한 생각을 떠날수 없었어 . 어렸을때 나는 아버지의 말씀 을 잊을수가 없었지 .우리아버지는 먼저 동유군에게도 잠간 말을 한적이있었지만 우리 조상이 고선지 장군의 후예라는 말씀 하시는것을 여러번 들었었지 ...
하지만 나는 엄연히 티벳에서 태어 낳았고 티벳에서 자랐으며 , 티벳에서 교육을 받았단 말이네 . 그래서 내조국은 티벳 이라는 것을 떠날수 없었단 말이야 아버지가 아무리 고선지장군이 우리 조상이라고 주장 한다해도 내귀에는 공념불 같이 들리 었었으니 무리도 아니었지 . 솔직이 말해서 고선지 장군은 한국에게는 조금도 의미가없는 동족일 뿐일세 그는 일생중 중국사람으로서 중국에 충성을 다 하였다가 중국인손에 모함을 당하여 중국인으로 죽은 평범한 당나라 장수에 불과 했지
동유군 . 분명히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하였지 ,그러나 무한한 시공을 초월하는 진한 피라는것이 과연 있을수 있을까? 나는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이런 생각을 해보았네 .그가 병마 절도사로 있었을때 갖고있던 군권과 행정권을 쥔 막강한 힘으로 한번쯤은 당나라와 당당히 대적하여 고구려 부흥을 위해 왜 투쟁을 못했었을까?
특히 그의휘하에는 고구려유민들이 포로로잡혀와 많이 살고있었을 터인데도 왜 부흥운동을 못했을까? 어쨋든 나는 고구려의 피를 받고 살고 있지만 나라 잃은 티벳족에 불과한 중국인일따름이네
동유군 ,나는 동유군을 만나고 난 다음부터 고구려인인가 ?아니면 티벳인 인가 한시도 머리에서 떠난적이 없었네 . 그러나 나는 현실에 티벳인임에는 틀림 없어 . 그래서 나는 내조국 티벳의 독립을 위해 그동안 무척이나 노력했던 학생이었다는 것을 후회하지는 않네 나는 무력을 싫어하는 평화주의자야 .그래서 우리 티벳인들이 티벳을 세계에 알려 중국에서 독립 해보려는 노력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고 있었지 ...
그러나 나라를 잃지 말아야지 나라를 잃고나면 아무 소용 없다네 중국과 외교적 마찰을 위해 국제 사회에서도 외면하는거야 . 티벳의 억울함을 알리기위해 국제 사회 언론에다가도 보도 자료를 여러번 보내도 모두 헛것이야 심지어는 세계 불교계에도 호소해 보았어도 불교계에서도 등을 돌렸지 ...
동유군 나는 지금 티벳 독립 운동을 하는 운동권 학생으로 중국 공안 당국으로 부터 지목받아 공안국에 몇번 출두 한적이 있었지 ..... 별다른 증거가 없자 나를 풀어놔 주었지만 그들은 항상 내 주위를 맴돌며 나를 감시 하고 있다는 말일세 우연히 이윤청교수의고구려 역사에 대한 특강을 듣고있다가 자네의 돌발적 행동을 보고 자네의 뒤를 쫓아 나갔던 것이 자네와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의 만남이라는 인연이었지
동유군 ,나는 지금 세상이 모두 안개속으로만 보이니 어찌된것일까? "죽어야하나 살아야 하나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쉑스피어의 햄릿의 독백이 새삼 떠오르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동유군 특별한 ,정말로 특별한 부탁이있네 만일 내가 이 세상에 없어 질때 내 사물 통 깊숙히 있는 책을 눈 여겨 보아주게, 중국어로 쓰여 지었지만 우리 할아버지가 쓴 고구려에 관한 글이있어 자네에게 뵈워주겠으니 여겨 보아 주기 바라네 "
이동유는 고기려의 사물통 깊숙히 숨겨저있는 때묻은 필사본 책뭉치를 발견할수있었다.붓글씨로쓴 책장 표지의 제목은 "고구려(高句麗)"였다 붓글씨로 새까맣게 써나간 때묻은 책 두께가 엄청 났다 ,한문 글씨로 또박 또박 써나간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 이동유는 호기심이 가지 않을수 없었다 . 고구려 문제가 도마 위에 올라 있는 이때이니 만큼 더욱 그랬다 그가 남겨놓은 고구려 이야기는 다음과 같았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