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왜 이토록 집요하게 한국을 집어 삼키려고 하였을까?
여기서 잠간 당시의 일본 정세를 간단히 살펴보자
일본은 1854 년 미국의 페리제독이 이끄는 10 여척의 중 무장한 해군이 동경만에 들어오기전 까지는 한국과 중국이 선망의 대상국이었다 .
당시 일본 정부는 덕천막부 (德川幕府)라는 소위 사무라이 라는 무사(武士) 정치 의 봉건 정치를 하고있었다.
덕천막부 정부는미국 해군과 싸우느냐 이들과 좋게 지나느냐 기로에서 고민 하다가 결국은 이들과 화친조약을 맺기로하였다
현명한 판단이었다 .
대원군이 쇄국을 부르 짖었던과는 아주 딴 판이었다
그러나 일본도 홍역을 치러야 했다 .이러한 막부정부의 대외 친선 관계에 불만을 품은 소위 사무라이 들은 막부 타도 운동을 벌린다
이 사무라이 들은 대부분 서양과의 조약 자체를 부인하고 있으면서 그들이 중국이나 조선에서 배운 주자학을 그들의 신조로 삼았다
그들이 유일하게 갖고있는 주자학의 사고는 "오랑캐를 몰아 내고 왕을 존중 한다"는 존왕양이(尊王洋夷) 사상이 고작이었다
그들은 이 존왕양이를 내 세워 막부 정권에 도전한다
"이놈들아 나라를 옳바르게 세우려면 오랑캐를 몰아 내고 왕을 존중 하여야 한다고했느니라.그런데 너희들은 무엇이냐? 너희들은 미국 군함에 굴복을 않나? 폴트갈 서양 오랑캐들에게 굴복을 하지 않나 ?
너희들 같은 무능한 사무라이 들에게는 정권을 맡길수 없다"
이들이 내 세운것은 정부를 장악하고 있는 장군들이 아니라 임금이 라고 그럴듯하게 내세웠다 .
당시 일본이라는 나라에도 임금은 있기는 있었다
그러나 당시 대부분의 일본 사람들은 임금이 있는지 조차 잊고 있었고 혹시 임금이 있었다 치더라도 경도라는 도시에서 왕이 치르는 제사 형식의 제사장 정도가 아닌가 할 정도로 미미하였다
그만큼 사무라이 라고 부르는 막강한 장군(將軍) 들의 힘이 나라를 좌우하였다
그러므로 당시 일본이야 조선, 중국 조차도 일본의 군주는 당연히 막부의 장군으로 만 알고 있었다
막부 정부에 불만이 있는 사무라이들이 내 세운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이 사무라이들이 막부 정부를 무너뜨리자면 명분이 필요 했는데 마침 존왕양이의 좋은 구호가 있었던 것이다
이들 사무라이 하급 무사들은 왕을 존중 해야 한다고 명분을 내세워 그들이 말하는 천황에 대한 불충을하고있는 장군들을 타도하는 것만이 정통성이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젊은 사무라이 무사들은 막부정권을 공격하였다
이에 앞 장선 사람이 바로 젊은 이등박문이었다
"너희들은 천황 폐하로 부터 부여 받은 정이 대장군(征夷大將軍)이었다 .그러므로 너희들이 부여 받은 직책이란 바로 오랑캐를 토벌하는 장군이 거늘 외적은 물리 칠 생각은 않고 오히려 오랑캐들과 내통하고 있으니 이런일이 있을수있다는 일인가?"
이등박문이 내건 구호는 국민들로 부터 호응을 받았다
결국 240 년이라는 긴 일본의 역사를 주름 잡던 막부 정권은 이 하급 무사들의 반란으로 무너진다
전면에 나선 이등박문은 막부정부를 타도는했지만 주자학에서 주장하는 존왕 양이론으로만은 나라를 이끌수없었다
장래에 대한 청사진도 없었고 그당시불고있던 외국침략을 막아낼 힘도없었다 .
" 중국의 송나라가 처한 존왕양이 사상과 지금의우리 현실과는 아주 다르다.
우리는 우리대로 서양의 발전된 문물을 받아 들여야한다"
이등박문은 몇몇 청년들을 외국유학을 보낸다
오랑캐 타도가 아니라 오히려 오랑캐와 철저히 협력하는 정권으로 바뀐다.
그들만의 민첩한 변신술을 발휘한것이다
그들은 대원군과 달리 막부 정권때 부터 쇄국하면서도 네델란드와 교역은 부분적으로 계속하여 왔던 나라 이었기 때문에 우수한 서양문물을 일찌기 접할수있었다
일본정부는 오랜 덕천막부(德川幕府) 봉건 정치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자 외국의 좋은점을 본 받아 일본을 이끌어나가려고 생각 했던 것이었다
1868 년 일본정부는 이제 일본이 장군 정치인 막부 정치를 끝내고 왕이 정치를 하게 되었다는 왕정복고(王政復古)를 조선에 알리기 위하여 사신을 보낸 적이 있었다
고종이 임금이 된지 5 년째 되던 해 이었다
당시 대원군은 일본을 전적으로 무시하는 척왜정책(斥倭政策)을 강조하여 일본이갖고온 문서를 트집 잡아 접수조차 하지 않았다
" 아니 이걸 외교 문서라고 가지고 오는가? 서계(書契...외교문서) 양식이 이게 무어야?"
하고 트집을 잡아 일본 사신과 만나 주지 조차 하지 않았다
당시 조선과의 외교는 대마도주인 종(宗)씨가 도맡아서 사신으로 보냈으나 일본은 조선이 강하게 나오자 종씨를 해임 하고 일본에서 직접 화방질의 (花房義質...하나부사)라는 외무부 대승이란 벼슬을 하는 자를 내 세워 일본 군함을 타고 부산에 들어와 조선과 대화 하자고 하였다
"이놈들이 이제는 군함 까지 끌고와 위협해 ?"
조선정부는 화의 하러 온자들이 군함 까지 가지고와 협박 한다고 이들을 되돌려 보내고 말았다
일본 정부의 살주(薩州)출신인 명치 신 정부의 참의라 서향융성(西鄕隆盛...사이코다카모리)이 발끈했다
"조선놈들이 뭐 그리 대단 하다고 우리 사신을 문전 박대한다는 말이오?"
판항퇴조(板抗退助...이다카키 다이스케)가 말을 받았다
"그것 뿐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보낸 외교 문서를 양식이 틀리다고 트집을 잡아 접견조차 해 주지 않았다는 군요"
외무경(外務卿) 복도종신(福島種臣..소외지마)이 강경발언을 한다
"이놈들을 완전히 박살 냅시다 "
"너무 성급하게 나오면 않됩니다 . 조선에서도 무슨 사정이 있겠지요"
군벌 출신인 사이고가 대안을 내놓았다
"아니오, 이것은 우리 일본을 완전히 무시 하는 것입니다 .정 안 되면 내가 직접 조선을 방문 하여 우리를 박대 하는이유를 묻겠소"
"하지만 지금 외국에 나가 있는 이와쿠라(岩倉具視) 우 대신과 상의 한후 해야지요"
사이고는 이말에 더 반발하였다
"하여간 오랑캐를 물리치고 천황 폐하를 잘 모시겠다는 것들이 외국에는 뻔질 나게 드나 들면서 조선 문제 하나 쯤도 해결 못하고....쯧쯧 ...내가 직접 조선에 가보겠소 .만일 그래도 조선이 저렇게 게속 나온다면 조선에 군대를 보내 무력으로 조치 하는수밖에 없어요"
이렇게 옥신각신하고있는 사이에 외국에 나갔던 우상 이와쿠라가 외국에서 돌아와 이들의 주장을 막았다
"지금 우리는 조선에 군대를 파견 하였다가는 큰일납니다 외국에 나가 보니 조선을 합방시키기에는 우리나라는 너무나 왜소합니다 .우선 나라의 국력을 키워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내정을 더 바로 잡아야 할때입니다 "
일본 왕은 이와쿠라를 수상으로 만드는동시에 강경파들의 의견을 잠재웠다
이로서 조선에 대한 사절건은 잠시 잠잠 해지었다
그러나 조선 침공을 강력히 요구하는 사이고 파들은 계속 군대를 동원 조선을 칠것을 요구한다
수상 이와쿠라는 아직 조선을 칠때가 아니라고하자 반란을 일으키었다
일본정부는 무력으로 이를 진압하여 이제는 조선 침략이 잠재워 지는듯하였다
그러나 일본이 점점 힘을 얻자 이들의 주장은 힘을 받기시작하였다
나라가 강해지려면 서양 각국 모양으로 식민지를 일본도 만들어야 한다고 강경파들이 주장 한다
1875년 일본은 드디어 강화도에 나타나서 강압적으로 강화도 조약을 맺게한다
이등박문이 이일을 앞장 선것은 물론이었다
일본의 명치정부는 세계 각국에 뒤 떨어지지 않으려면 우선 한국을 합방시키지 않으면 안된다고 입을 모았다
이것을 앞장서서 실행 시킨사람이 이등박문 이었 던것이다
이등박문이 안중근의 저격으로 사망하자 일본정부는 더욱 강경 일변도로 변하였다 .
육군대신 데라우찌(寺內正毅)를 한국 통감으로 임명 한것이었다
한국에서 일어 나고 있는 각종 소요 사태를 진압 할수 있는사람은 육군 대장 출신 인 육군 대신 밖에 없다고 생각 한것이었다
그는 부임전 부터 도꾜에서 한국의 경찰권 까지 통감 손안에 넣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 앞으로 있을 합방 에대한 조선 백성들의 폭동을 진압 하려면 경찰권 이양이 필수적이라는 것이었다
그의 주장대로 그가 부임 하기전 이완용은 이 마저도 이양 문서에 조인하고말았다
이리하여 경찰권 마저도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 가고 말았다
데라우찌는 헌병 경찰체도라는것을 만들어 놓고 헌병이 경찰 업무를 보았다 .
경찰권을 손에 쥔 데라우찌는 이번에는 한국의 입과눈을 막기위하여 신문사들을 정간시키기 시작하였다 .
데라우찌는 일본인인 자기가 직접 합방에 앞장서지 않기위한 술책으로 송병준, 이용구등의 일진회를 적극적으로 밀어주어 이들을 통한 한일 합방의 불가피성을 부르짖게 하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