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견대 대장 유명규(劉明奎)는 원주 진위대가 강원도 일대를 휩쓸고 다는 소식을 듣고 힘을 내어 병사들과 주민들 500 명을 이끌고 강화도 주재소를 습격 왜병을 모두 죽이고 강화 군아(郡衙)를 습격. 그동안 일본군과 함께 주민을 괴롭혀 온 군수 정경수를 처단하고 강화성을 점령 하였다
그는 그 여세를 몰아 황해도로 들어가 황해도에 사는 의병들을 규합 거의 1 년 동안을 일본군에 대하여 기습 공격 하였다.
해산 된 정규 진위대의 의병 발생지역은 거의 전국 규모로 번지었다.
강화의 유명규, 원주의 민긍호, 선산의 허위, 지리산의 김동식, 홍성의 이인영, 정주의 이승훈 ,삼수 차도선, 갑산의 홍범도 ,춘천의 이소응 을 비롯 하여 북청, 원산, 황주, 해주, 개성, 장성등 곳곳에서 일본군과 마찰이 일어 났다
정규군에서 해산 된 진위군과 의병을 지원한 일반 백성들과 함께 의병 항거는 전국에 걸쳐 14 만명이나 되었으며 도합 2 천여회에 걸처 일본군과의 접전이 발생 되었는데 싸우다 죽은 의병 숫자만 해도 1 만여명이나 생기었다
이처럼 정규 육군이었던 군인들이 이제는 의병이라는 이름으로 전국 각처에서 일본군에 대항 하였으나 정규 군인이었을 때 처럼 보급이 좋을리 없고 무기 조차도 낡아 일본군과의 전투에는 항상 불리한 입장에서게 되었다
일본군은 강력한 병력과 무기로 의병을 서울을 중심으로 하여 남쪽과 북쪽으로 분산하여 밀어 부쳐 북쪽 지방으로 몰아 부친 의병들은 결국 간도와 연해주로 활동무대를 바꾸었고 남쪽으로 밀어 부친 의병들은 충청 전라도 쪽으로 밀려가다가 일본의 초토화 작전을 피어 김제와 순천에서 완전히 궤멸되었다
다만 북쪽으로 물러간 의병들이 만주 지방에서 독립군으로 명칭을 바꾸어 항일 전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의병들은 이렇게 집단으로 항거 하로 소란스러운때 미국 쌘프란시스코에서는 한인이 미국인을 쏘아죽인 사건이 발생 하였다
일본의 요청으로 대한 제국의 고문으로 있었던 미국인 스티븐스라는자가 미국에 가서 한국은 일본의 보호국이되어야 한다는 발언을 하고 돌아 다니고 있다가 이에 격분한 한국인 전명환 , 장인환이 기차를 타려는 스티븐스를 권총으로 쏘아 죽인 사건이 었다 .
이소식을 대한 매일 신보는 연일 보도하였다
1909 년 일본은 이등박문을 일본으로 불러 들여 추밀원 의장으로 다시 복귀시키었다 .
일본은 후임 발령을 보류하고 부 통감인 소네 아라스케(曾爾荒助)가 통감으로 임시 임명하였다
그러나 추밀원 의장 이등박문은 무슨 생각인지 또 이상한 문서를 하나를 들고 다시 한국에 나타났다
소위"한국 사법및 통감 사무 위탁에 관한 각서"고부르는 문서였다 .역사서에는"기유각서"라 부르는 문서이었다
"기유각서(己酉覺書)"란 쉽게 말해서 기유년(닭띠해)에 맺은 5개 조항으로 되어 있는데 한국의 사법권(司法權)과 감옥에 관한 사무를 한국 정부에서 일본정부에 위탁 하라는 각서였다
새로 임명된 소네 통감과 추밀원 의장 이등박문 그리고 대한제국 총리대신,및 박제순 이 한자리 앉게 되었다
이등박문은 가지고온 "각서"라는것을 펴 놓았다
"두 대감도 아시다시피 이각서는 이미 맺은 한일 협약의 세부사항을 시행 하기 위하여 후속 조치로 작성한 것입니다 .읽어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각서는 한국이 사법및 감옥사무가 완비 되었다고 인정 될때 까지 만 한시적입니다 "
이등박문은 각서가 대수롭지 않다는듯이 날인 할것을 요구하였다
박제순이 읽어보니 엄청난 내용이었다.
1조가 사법(司法) 사무를 일본에게 위탁 하라는데 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다음 조항들이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일본인을 한국 재판소의 관리로 임명 한다는 것이었고,한국 관리는 일본 관리의 지시를 받아야 하고 한국 정부는 사법과 감옥에 관한 모든 비용은 한국이 부담 한다는것이었다
박제순이 문서를 들고 가늘게 떨고있자 이완용이 도장을 꺼냈다
"이건 좀,,,,,,"
박제순이 망설이는 말을하자 이완용이
"무얼 망설이십니까 ? 한국이 사법 사무가 완비 될때 까지라고 하지 않습니까?"
하고 박제순을 나무라는듯이 하며 문서에 도장을 서슴치 않고 찍었다
박제순도 이등박문과 소네 통감을 슬쩍 처다 보고 울며 겨자 먹기로 도장을 찍고말았다
여기서 이완용은 실로 엄청난 각서를 또 써주고 만셈이었다
이 각서에 따라 한국의 법부와 재판소는 폐지되고 그 사무를 통감부의 사법청에서 사무를 보게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결국 한국 정부는 외교권, 경찰권, 사법권을 차례로 일본에게 강탈 당한 꼴이되었다
게다가 군대 까지 해산되었으니 그 다음 수순이 어떻게 될것인가는 명약관화(明若觀火)하다 할것이었다
이 각서는 한국 사람이 항일 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끌려 가 수감되는 경우에도 지금까지는 한국 법정에서 재판을 받았으나 이제는 일본인의 심문을 받게 되어있었다
기유각서를 받아 놓은 이등박문은 의기양양 하게 돌아갔다
그러나 이등박문의 야욕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후 안동에서 할빈을 거치는 철도 부설권을 주장하고 있었으나 러시아도 러시아로부터 만주 안동에 이르는 철도를 놓겠다고 서로 으름장을 놓고있었다
두 나라 사이에 이해 상충으로 해결이 않되자 이등박문과 러시아의 재무상 코코프체프가 서로 만주 할빈에서 만나 이문제를 가지고 회담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날이 1909 년 10 월 26 일이었다
이등박문이 정각 9 시에 특별열차로 할빈역에 도착하게 되어 있었다
기차가 들어오고 수십명의 일본 고관들이 영접하려고 플랫홈으로 나갔다
드디어 허연 수염의 이등박문이 차에서 내리고 러시아 재무상 코코프체프가 악수를 청하였다
러시아군이 늘어서서 두사람의 사열을 받게 되어있었다
이등박문은 코코프체프 뒤를 딸아 사열하기 시작하였다
""탕"
총소리가나며 이등박문의 가슴에총탄이 박이고 이등박문이 그자리에서 쓸어지었다
"탕,탕,"
또 두발의총성이 이등박문이 미처쓸어 지기 전 확인 사살인 듯 두개의 총성이 또 울렸다
"탕,탕 탕"
또 세발의 총성이 들리더니 일본 고관 3 명이 폭 고꾸라지었다
한동안 어리둥절 하던 러시아 경비병이 그때서야 범인을 알아내고 총을 쏜 괴한에게 달려갔다
"나는 대한민국의 안중근이다 .
나라를 강탈한 도적을 죽였노라
대한독립 만세, 대한독립만세"
안중근 의 손에는 어느새 한국의 태극기가 들려 있었다
러시아 헌병에게 체포된 안중근은 일본 영사관에 넘겨지었다.
일본군은 안중근을 여순 감옥에 가두워 놓고 갖은 고문을 하며 문초하였다
"배후를 대라 , 누구냐?"
"이놈들아 너희들이나 배후가 있지 나는 없느니라 , 죽일테면 어서 죽여라"
"그러면 이또각하를 저격한이유는 무엇인가?"
"열다섯 까지 죄때문이다"
"말하라 "
"첫째 우리의국모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이다 "
"그다음은 ?"
"두째 고종황제를 강제로 퇴위 시킨 죄이니라 "
"계속 말하라 "
"셋째는 을사조약과 한일신협약을 너희들 마음대로 맺은 죄이다
"다음은 ?"
"네째는 독립을 요구하는 한인을 왜 죽이느냐?"
"그다음"
"다섯째 왜 우리 정부를 무시하고 통감부를 두었으며 철도,광산, 농지를 왜 너희들마음대로 건드리며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시행하여 우리경제를 뒤흔들었는가 ?
"그다음은,?"
"대한 제국군을 어찌하여 너희들 마음대로 해산시키며 전국 각지의 우리 민족 학당을 어찌하여 폐쇄시키고 일본학교를 세우는 저의는무엇이냐?"
"계속하라"
"우리나라는 너희들 식민지가 아닌데도 어찌하여 한국사를 못배우게 방해하며 한국이 일본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고 미국인고문을이용하여 헛소문을 외국에 퍼뜨리게 하였으며 더구나 우리와 너희나라는 갈등 관계에 있는데도 이등박문은 아무일이없다고 너희 왕에게 허위 보고하였는가 ?".
"........"
"마지막으로 너희들은 중국대륙을 침략하여 동양평화를 깨뜰인 죄가 있느니라
"........"
안중근의 거침없 는 이등박문의 단죄를 듣고 있던 일본 심문관은 안중근의 동양 평화론 대목에서 야릇한 미소를지으며 안중근의일본 침략 정책 규탄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안중근은 재판정에서도 조금도 굽힘 없이 떳떳히 말하였다
"이등박문은 우리나라를 보호하려 왔다고 큰 소리 치고 약속과는 다르게 일본의식민지로 만들려 했으니 원수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이냐? 내가 바라는것은 한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바랄뿐이다 그래서 이등박문을 죽인것이다 "
그러나 악랄한 일본 법정은 안중근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이렇게 애국심에 불탔던 안중근은 그다음해 3 월 여순에서 32 세의 청년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안중근의 애국심은 나라안이 온통 술렁이었다
그러나 이완용 , 송병준등의 태도는 안중근을 애석하게 생각 하기는 커녕 오히려 순종황제에게 나아가 통감부로 직접 찾아가서 이등박문의 죽음을 조상하라고 까지 하였다
또 각료회의를 열어 이등박문에게 문충공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장춘단에서 제사까지 지내자고하였다
일본은 이등박문이 죽자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소네통감을 교체하고 정식으로 사내정의(寺內正毅....데라우찌 마사다케)라는자를 새로 부임 시키었다
데라우찌라는 자는 일본의 육군 대신을 한자로 군인 출신이었다
데라우찌는 부임 하자 마자 곶 경찰 제도를 뜯어고쳐 헌병 경찰제도를 만들었다
헌병 경찰제도란 헌병이 경찰업무를 본다는 뜻이다
데라우찌는 서울에서만도 헌병을 2 천명이나 증원하였다
한국의 경찰권을 빼앗아 앞으로 있을 큰일을 대비 하여야 한다는 포석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