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등박문은 계속하여 고종에게 자기가 데리고 앞잡이로 있던 통감부 농사과 촉탁 조선인 직원 조중응(趙重應)을 법부대신으로 바꾸도록 고종에게 압력을 넣고 그동안 공사관에 적극적으로 협조한 일진회 송병준을 농상공부대신으로 , 임선준을 내부대신으로, 이병무를 군부대신으로,이재곤을 학부대신으로, 고용희를 탁지부대신으로 하는 내각을 만들도록 압력을 넣었다
그리고 고종이 환원했던 의정부제를 폐지하고 내각제로 다시 바꾸도록 요구하였다
이에 의정부는 없어지고 내각제로 바뀌었고 내각 총리 대신에 이완용을 임명 할것을 이등박문이 강력히 요구하여 그대로 임명되었다
드디어 1907 년 5 월 22일 이완용 내각이 성립되었다
이완용 내각은 모두가 나라를 생각하기 보다 통감부의 눈치만 살피었다
그러면서도 이완용은 말끝 마다 자기들은 구태의연한 수구 세력을 몰아 내고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는 개혁 세력이라고 주장하였다 .
이렇게 궁궐내에서는 통감부의 입맛대로 개혁이라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우며 일본의 비위 맞추기에 급급하고 있는사이에 최익현은 전라도 태인에서 유생 80 여명을 모아놓고 순창에 일본군이 주둔 하고있던 헌병대를 습격하여 점령 하였으나 중앙에서 급파된 일본 정규군에게 패하고 그는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 되었다가 일본당국으로 부터 징역 3 년형을 받고 일본 대마도로 보내었다
그런데 대마도 감옥에 가 있던 최익현은 감옥안에서 죽어도 일본 음식을 않 먹겠다고 벋히었는데 보다 못한 일본 헌병이 부산에서 곡식을 갖다가 식사를 해주었더니 그때서야 먹었다.
그는 73 세의 늙은 몸으로 감옥안에서 병들어 일본 대마도 귀양지에서 죽었다
강원도 유인석도 , 경상도 신돌석도 의병을 일으키어 일본군과 대항 하였으나 현대식 무장을한 일본군을 당해 낼수 없었다
일본은 이렇게 의병들과 전투를 벌리면서도 한쪽으로는 한국의 철도,은행, 공장등을 차례로 손을 뻗히기 시작했다 .
이런 정책으로 국민들의 생활은 날로 빈곤해지었다
모든이권이 일본의 손 아귀에있고 백성들은 가난에 쪼들리니 세금을 걷을수가 없으므로 대한제국은 나라 살림을 하기 위하여 일본의 비싼 이자로 돈을 꾸어 쓰지 않을수 없었다
광무11년 한국 정부가 일본으로부터 진 빚이 천삼백만원이나 되었다
빚쟁이가 된 한국은 더욱더 일본 당국에게 큰소리 칠수 없게 되었다
대구 갑부 서상돈과 김광제가 보다못하여 자기도 출연 할터이니 나라 빚갚기 운동을 벌리자고 제의하였다
이운동은 전국적으로 번지어 국내 언론기관인 대한 매일신보, 제국신문, 만세보가 의연금을 모집하였다
이것을 일본 통감부가 가만히 보고 있지를 않았다
"아니 이놈들이 이제는일본을 배척하는곳으로 몰고 가는군"
나라 빚 갚기운동 본부장 양기탁을 잡아 가두자 이운동은 자연히 흐지 부지 되고 만다
이럴즈음 인 1907 년 홀랜드 수도 헤이그에서 만국 평화회의를 개최한다는 소식이전해왔다
고종은 평리원검사 이준과 참판 이상설을 몰래 불러들였다
고종은 두사람의 손까지 잡으며 간곡히 당부하였다
"이번에 홀랜드 헤이그에서 만국 평화회가열린다는데 경들이 이회의에 참석하여 일본의 간악한 침략정책을 폭로 하여 일본이스스로 물러 갈수있도록 하오, 이렇게 되면 세계 각국이 일본을 압박하여우리나라가 일본의 간섭을 받지 않고 독립국 다운 독립국이 될것이오 특히 경들은 내가 비밀히 보내는것이니 특사자격으로 이일을 꼭 성취시켜주기 바라오"
이준과이상설은 눈시울까 지 붉히며 고종의 애원 비슷한 부탁의 말에 모두감격하여 말하였다
"폐하 소신들 같이 보잘것 없는사람들에게 특명을 내려주시니 몸 둘바를 모르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황제는 여비와 신임장을 손수 주면서 재차 손을 굳게 잡고 당부하였다.
이준과 이상설은 그길로 기차를 타고 시베리아 벌판을 거처 러시아의 수도인 페테르스부르크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러시아공사 참사관인 이위종을 만나 같이 헤이그로 떠났다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 헤이그는 완전히 축제 분위기였다
세사람은 우선 러시아 대표인 넬리토프를 찾아갔다
"우리는 대한제국의 대표입니다 .황제 폐하의 신임장도 가져왔으니 회의장에 들어갈수있도록 힘써주십시요"
그러자 러시아 대표는 반색을하였다
"아니 대한제국은 이미 일본과 조약을 맺어 외교권이 없지않소?"
"대표님 , 바로 그것을 밝히려고 온것입니다 .그 조약은 무효입니다.일본이 강압에의하여 할수 없이 맺어진 것일 뿐 우리의 의사가 아닙니다 .따라서 일본의 침략 정책을 세계에 알리고 우리나라가 독립국이라는것을 알리러 온것이니 협조해주십시요"
"딱하기는 하오나 이문제는 주최국인 홀랜드 정부가 승락 여부를 판단할 문제이지 저에게는 힘이없습니다 제가 주최국에 알아보지요"
러시아 대표는 이 문제를 바로 홀랜드 정부에 넘기었다
그러나 홀랜드 정부는 한국이 이미 외교권을 일본에 넘기었고 여러나라에서도 이사실을 승인한 상태이니 참석을 거부한다는뜻을 분명히했다
일본대표가 알게 된것도 초청국인 홀랜드 당국이 통보를 해왔기때문이었다
일본은 그때서야 고종이 밀사를 보낸것을 알게 되자 본국에 급히 이를 보고 하고 일본 외무성은 조선 통감 이등박문에게 연락 대한제국은외교권이 없으니 회의에 참석할수 없음을 통보하는동시에 이준등 밀사 파견 경위를 알아 보라 타전하였다.
이소식을 들은 세사람은 이국땅에서 오도가도 못하고 길거리에서 통곡만하고있었다
이등박문이 이완용을 불렀다
"이대감 ,이럴수가 있는거요?외교권을 일본에 맡긴 이상 일본을 믿어야지 황제께서 경솔하셨소"
이말을 듣고 이완용은 고종을 찾아갔다
"폐하 어찌 그런 엄청난 일을 벌리셨습니까? 총리 대신인 저도 모르게 밀사를 보내시다니 .....폐하께서는 일본 당국에 사과하십시요"
고종은 이제 아무 실권도 없는 황제였다 .믿을 수 없는 이완용이 내각 총리 자리에 앉아 이등박문에게 시시 콜콜한 일까지 모두 보고 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는 이번 사건을 이완용에게 전혀 모르 는일이라고 잡아 떼었다
역시 고종은 유약한 임금에 불과했다 먼저 러시아 대사관으로 피신시켜 달라고 했던 춘생문 사건도 자기가 시켜 놓고 사건이 터지니까 자기는 모르는일이라고 잡아 떼었던적이 있었다 .
한국가의 책임자가 책임지지도 못할 일을 저질러 놓고 뒷 수습도 못하면서 발뺌만하고있으니 나라가 제대로 돌아 갈리가 없었다
황제의 이 한마디가 헤이그로 즉시 일본 외무성을 통하여 전송되었다
대한제국 황제는 헤이그에 특사를 파견한 적이 없다고....
이준은 이소식을 듣고 충격으로 그 자리에서 쓸어지었다 1907 년 7 월 14 일 그는 머나먼 이국 땅에서 이세상을 떠났다
일본이 이번사건을 그냥 넘기지 않았다
통감부는 총리대신 이완용을시켜 이등박문이 시킨대로 내각 회의를 열라고 하여 고종을 압박하였다
그내용은 고종황제가 을사조약을 어겼으니 황제자리를 황태자에게 대리하고 일본까지 직접가서 이번 사건에 대하여 일본왕에게 사죄하라는것이었다
이완용 내각은 모두가 통감부의 추천으로 된사람들이라 이의가 있을수없었다
이완용은 대신들과 이 문제를 거론하였다
"폐하께서는 아직도 세상이 어떻게 돌아 가고 있는지 모르는 철부지 같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겠소? 어쩌자고 이준과 이상설 같은 자들을 외국 까지 보내어 나라 망신을 시킨다는 말이오?"
이제 이완용의 입에서는 고종을 비하 하는 말 까지 튀어 나왔다
내부대신 임선준이 말을 받았다 .
"그러게 말입니다.그런데 황제께서는 밀사를 보낸적이 없다 하지 않습니까?"
이말에 이완용의 목소리가 커지었다
"그래서 탈입니다 . 자기가 책임질 일이있으면 떳떳히 책임저 야지 그런일이 없다고 잡아 뗀단 말이오?"
송병준이 나섰다.
"어쨋든 황제 폐하는 못 말리신다니까요 .지금 폐하는 우리를 못 마땅하게 생각 하실겁니다 "
학부대신 이재곤이 말했다
"어쨋든 통감부 이또후작이 매우 흥분되어 있어요
이또 통감이 황제 자리를 황태자에게 대리 하라는 말은 황제 자리를 내 놓으라는 말이아닙니까?"
탁지부대신 고용희가 말했다
"하지만 양위 까지 하라면 폐하께서 노하실터인데요 "
송병준이 이 말을 받아 이완용에게 말하였다
"아무래도 이또 통감의 요구를 무시 했다가는 더 큰일이 벌어 질지 모르니 차제에 황제께 양위를 말씀드리시지요 "
탁지부대신 고용희가 말을 받는다
"그것을 누가 말하겠어요?"
"당연히 내각 총리께서 해야지요"
이말에 이완용도 좀 꺼림직했으나 순간 이등박문의 험악한 표정이 떠올랐다
"알겠소 내가 총대 메리다"
이완용은 그길로 고종을 찾아갔다
"폐하, 내각에서 결정한 사항이니 이번사건의 책임을지시고 황태자에게 황제자리를 양위하시지요"
"뭐라고?"
고종은 기가 막혔다 .내각 총리란자가 황제자리를 내놓으라니.....
"이또 통감의 제의입니다?"
고종은 더욱 기가 막히었다
"이럴수가있는가?"
"페하 , 사실은 이또 통감이 을사조약을 위반한 책임을 물어 본국의 지시라며 양위 문제를 들고 나와 내각의 결정사항으로 폐하께 전 하라 하였기에 말씀 드리려 한 것입니다 "
" 짐은 이나라의 황제로서 양위를 거부하겠소 "
"폐하 , 더큰일이 생기기 전에 양위 하십시요"
"못하겠다"
고종은 완강히 사퇴를 거부하였다
이번에는 조중응과 송병준이 고종을 찾아가 고종이 동경에가서 사과 하던지 일본군사령관 장곡천호도에게 나아가 죄를 빌라는 얘기까지 서슴치않았다
결국 이완용은 이등박문을 의식하여 재차 끈덕지게 요구하여 황제를 황태자에게 넘길것을 받아 내었다
결국 고종은 7 월 20 일 고종이 물러 앉고 황태자인 순종이 등극한다
고종은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왕이된지 44 년만에 황제자리를 양위시키고 물러난다 .
이소식을 들은 백성들은 분노에 복받혀 이지용, 이근호, 이완용의집에 불을 지른다
이날이 정확히 1907년 7월 24일이었다
이완용은 불탄 남대문밖 약현 고개위의 집을 뒤로하고 이등박문의 배려로 왜성구락부에 들어가 살다가 옛 남영위궁으로 들어가 살았다 .이 화재사건으로 이완용이 손해본것만해도 당시돈으로 10 만원정도였다니 적은 액수는 아니었다
순종이 황제가 된지 나흘뒤 이등박문은 또 하나의 엄청난 ""한일신 협약"이라는것을
총리 대신 이완용에게 내놓고 이를 승인하라고 요청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