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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들어가 꼼짝 하지 않고 자기 들을 만나 주지 않자 난감하였다 .더구나 자기들의 수족 처럼 부려 먹던 김홍집 내각이 무너 지자 한 동안은 러시아를 상대로 전쟁이라도 벌리고 싶었으나 러시아는 그리 만만한 상대가 아니므로 포기 하였다
그러치 않아도 러시아는 미국 영국 독일등 서방국가와 결탁하여 일본이 청나라와 조선을 뒤흔드는데 대하여 여러 가지로 압력을 가하고있어 일본으로서는 여간 부담스러운것이 아니었다 .
결국 일본은 러시아와 어쩔수 없이 외교적으로 협상 하기로 하였다
일본의 외상 대리 서원사 공망(西園寺公望..사이온지)과 새로 공사로 부임한 히트로 보와 협의 하여 서로 조선 내정에 깊숙히 간섭 않기로 서로 합의하였다.
그후 베베르와 일본의 소촌수태랑(小村壽太郞..고무라)과 만나서 협의 한결과 일본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한 소위 아관 파천 의 이해와 고종이 새로 구성한 새 내각을 일본이 인정 하기로 하였고 을미년에 일어난 민비 살해 사건에대한 책임이 일본에 있다는것도 시인하며 한국에 주둔 하고 있는 일본군을 대폭 줄이든가 철수 하기로 하되 러시아도 일본이 하는태도에 따라 러시아군의 수를 조정 할것등을 내용으로 제1차 러.일 협정을 체결하였다 .
이 조약은 일본으로서는 굴욕적이지 않을 수 없는 반면 러시아는 총칼을 쓰지 않고도 일본을 제압 할수 있는 외교적 대 승리였다 .
이 조약에서 일본은 청이나 조선에는 강하였으나 서방 국가에게는 약하다는 약점을 들어 내 놓고 만것이었다
일본은 거대한 러시아 제국에 대하여 조그마한 섬 나라로서의 콤프렉스를 벗어 날수없었던 것이었다
일본은 그후 직성이 풀리지 않았는지 산현유붕(山縣有朋...야마가다)을 특사로 하여 러시아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 하러 러시아로 가는길에 모스코바에서 러시아 대표인 상 로바노프와 마주 앉아 조선 문제를 다시 비밀히 타협 하자고 했다 .
일본의 제안 내용은 조선을 조선 반도의 38 도선을 기점으로 하여 러시아와 일본이 남북을 나누어 점령 하자고 과감한 제안을 했고 러시아는 일본의 속셈을 알아 채고 적당한 시기에 러시아와 일본이 서로 나누어 점령 하자고 밀약을 했다
일본은 곁들여 자기들 군대가 제1 러.일 협정에도 불구하고 조선에 계속 남아 있을것이니 간섭 하지 말라고 러시아측에 요구 하였다 .
이에대하여 로바노프는 일본 군대의 조선 주둔 문제는 감축이나 철수중 일본이 알아서 하되 러시아는 일본군이 하는 대로 러시아군도 동일하게 행동 할것이라고 못을밖았다
대신 조선에 대하여는 일본도 "권고" 라는 이름의 간섭을 할수도 있도록 하기로 소위 "로마노프 야마가다 의정서"를 교환하였다
조선의 의지와는 관계 없는 러시아와 일본간의 비밀 협정은 이렇게 엄청난 음모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조선의 관계자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으니 한심하다고 할까 불상하다고 할까 말로서 표현할수가 없을뿐이다
어쨋든 조선의 임금과 새정부는 러시아를 굴뚝 같이 믿고 만 있었다.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이 마련해준 임금의 방에서 그동안 강녕전에서 일본 낭인들이 행패를 부릴까 전전긍긍 하던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편한 생활에 초췌했던 얼굴도 아주 좋아지었다
왕에게 온갖 편의를 제공 하고 있는 러시아는 표면적으로는 조선과 고종을 극진히 위하는 척하면서도 국내적으로는 엄청난 일을 저지르고있었다
러시아는 함경도의 경성과 종성의 광산 채굴권을 차지하는가 했더니 어느새 인천에 저탄소 설치권, 압록강 유역과 울능도 삼림 벌채권, 등 경제적 이익권을 조선 정부로 부터 받아내었다
그뿐이아니었다
러시아는 알렉시에프라는자를 조선의 재무를 다루는 탁지부 고문으로 보내어 조선의 재정을 요리하기도 했다. .
러시아가 일본과 니콜라이 2 세의 대관식을 하는 동안 조선의 대표인 민영환을 불러 사탕 발림도 하였으니 조선에 다섯 가지의 원조를 해주는 대신 위 권리 이외에도 17 가지의 이권을 추가 요구하였다
러시아가 이렇게 나가니 미국,영국 ,독일등도 정치적으로는 일본과 러시아에게 서로 간섭하지 말라고 얘기 했지만 그들은 그들대로 뒷구멍으로는 자기나라의 이권 챙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
자기들도 기회등의 원칙에 의해 권리를 달라는것이었다
전차,철도 부설권, 삼림 벌채권, 금광,광산 채굴권, 등 요구를 해왔다
일본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서양각국이 하는대로자기들도 이권을 챙기기 시작했다
조선은 스스로 나라의 이권을 모두 남에 나라의손에 넘기고있었던것이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문지 1 년이 가차워 지었다
왕이 러시아 공관에 있으므로 인하여 나라의 주권과 이권이 흔들리고 있다면서 고종의 환궁을 요구하는 유생들의 상소가 빗발치었다
고종은 경복궁이 싫었다 .
민비가 죽은 악몽이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러시아 공관에 무한정 있을수만은 없었기 때문에 옮기기는 옮겨야 겠는데 경복궁이나 창경궁은 싫고 경운궁을 염두에 두고있었다
경운궁을 염두에 둔것은 근방에 미국 공사관이 있어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미국 공사관에서 도움을 받을수 있다는 계산에서 였기 때문이었다
왕의 환궁을 바라는것은 유생들 뿐만이 아니었다 .미국에서 돌아온 서재필의 독립 협회 라는 단체가 왕이 러시아 대사관에 있기 때문에 정부가 외국에게 이권을 찬탈당하고 외세에 의존 하여 나라가 흔들리고 있다며 고종의 환궁을 강력히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고종은 더 이상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를수 없었다 .
경운궁을 알아 보니 마침 수리중 이어서 갈수가 없다고 했다
결국 고종은 파천 1 년만인 1897 년 2 월 20 일 경운궁이 수리 되는것을 기다렸다가 조금 늦게 경운궁으로 환궁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