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이야기(113회)-일본그리고 러시아 -

by 5443738 posted Jan 01, 1970 Views 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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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문에서 남쪽으로 청계천 오간수교를 건느면 훈련원이 나온다
이 훈련원에는 밤이 깊었는데도 오늘 따라 불이 환히 켜지어 있었다
이곳에는 임최수등 무관 30 여명이 모여 아까 부터 무슨 얘기 인가를 하고 있었다.
이곳에는 비밀히 연락 받고 달려온 군인 들로 김홍집 내각 의 군 개편 작업으로 있기전 시위 제1 연대 에있던 군인들이 대부분이었다

시종(侍從) 임최수가 갖고 나온 고종 임금의 밀지를 읽어 나가고 있었다

" 최근 일본 낭인들의 망동으로 왕비가 시해 되는등 온 나라가 흔들리고 있는바 과인도 이러한 일본 경비대에 에워 싸여 있는 궁궐에서 하루 지나기가 불안 하노라.
최근 미국인 군사 교관 다이와 선교사들의 얘기와 러시아 공사의 말을 들어 보니 일본인들의 행패를 피하여 임시로 러시아 공관에 피신하면 좋다고 권고 하고 있으니 과인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안내 하여 주기를 바란다 "

이 고종의 밀지를 갖고 나온 사람은 시종원 소속으로 임금 옆에서 어복(御服...임금옷)과 어물(御物....임금이쓰는 소지품)을 맡고 있는 임최수였다. 마침 임금은 내각과 일본인 경비병의 눈을 피하여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하려고 마음을 굳히고있었는데
최측근인 시종 임최수를 불러 구 시위대 제1연대장에게 밀서를 전하게 했고 다시 구 시위대 간부들이 모두 훈련원에 모이게 한후 이 장소에서 임최수가 낭독하게 된것이었다

왕의 밀지 낭독을 듣고 있던 친위대 제2 대대장 이진호가
" 상감께서 이런 밀지를 내 보내셨을때 신하된 자로서 가만히 있을수 있을수 있습니까? 거사일 건춘문을 열도록 하는것은 내가 책임 지겠소"
하고 제의하였다
" 문을 연다 한들 곳곳에 김홍집 일파들이 있는데 병력을 공공연하게 동원 하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
듣고있던 친위대 이도철이 되묻자 임최수가 다음과 같이 대안을 내놓았다
그것은 왕이 민비 사망후 새로운 왕비를 간택 하기 위하여 정화당 김씨를 만나 보러간다는 핑게를 대고 건춘문을 통과하여 나온후 곧바로 러시아 대사관으로 탈출한다는 계획이었다

고종 32 년 11 월 28 일 새벽
800 여명의 구 시위대 병력이 안국동을 경유하여 건춘문을 향하여 이동 하고 있었다
그러나 약속된 시간 인데도 제2 대대장 이진호가 약속한 건춘문을 열어 놓지 않고있었다
"않되겠소.이진호가 아무래도 사고가있는듯하오. 삼청동쪽의 춘생문(春生門)쪽으로 가서 담을 넘어 문을 열고 습격 하여 상감을 모셔 나오도록 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

시위대가 삼청동을 거처 춘생문에 도착하였다 ,한명이 먼저 담을 넘어가 문을 열어주기로하였다 시위대원 한명이 담을 넘으려는 찰라 미리 잠복 해있던 친위대 숙위병들에게 무두 붇잡히고말았다
이진호가 변심하여 군부 대신 서리 어윤중에게 이들 계획을 미리 밀고 한 때문이었다.

춘생문 사건의 주동자들은 왕이 내린 칙령에 의해 구출 작전을 폈건만 죽는 장소에서까지 왕비가 일본놈들의 의해 시해 당한것이 분해 거사 했다고만 주장했다
왕의 밀지건에 대하여는 철저하게 잡아떼고 자기가 왕의 밀서를 위조하여 거병 하도록 하게 하였다고 거짓 주장 한후 남아답게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었다
임최수는 당시로서는 드믈게 보는 충신이었다 .

한편 임금의 이러한 불편한 심경과 는아랑곳 하지 않고 단발령에 대한 백성들의 불만은 날이 갈수록 더했다
"조상 대대로 물려온 내 생명 같은 머리를 깎다니...."
거센 반발에도 순검들은 인정 사정 없이 닥치는 대로 지나가는 행인을 잡아 잡아 상투머리를 강제로 풀어 깎았다 .

흥선 대원군의 실정을 상소하여 사직되었다가 동부 승지로 기용되어 만동묘 폐지와 서원 철폐를 하려는 대원군을 비판을 했던 최익현도 이번에 단발령의 폐해에 관한 상소문을 또 올렸다.
백성들의 불평은 날이 갈수록 더해 갔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백성들의 거센 반발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단발령을 누그러 뜨리지않고 오히려 더 강도가 심해지었다 .이것이 문제였다

"아니 읍내 장에 갔다 오더니 그게 무언가?"
장날 길가에서 순검에게 붇들리어 머리를 깎여 마을에 들어오는 사람들을 보고 모두 혀를 찼다
"죽일놈들 ,일본놈들의 앞잡이들이 되어 왕비 까지 죽이더니 이제는 일본놈들 하고 똑 같이 머리까지 깎으라고?"
불평만 하던 백성들은 급기야 조정의 김홍집내각을 원망하기시작하였다
"김홍집, 김윤식. 어윤중 ,같은 대신놈들 때문에 나라가 망하게 생겼다"

단발령으로 촉발 된 감정이 반일 감정으로 ,다시 내각 대신들에게로 번지더니 결국은 망국론 까지 번지었다 .
"일본놈들의 앞잡이 노릇을 하기 위하여 왕비 까지 죽였다"
단발령에 대한 반발이 왕비 살해사건의 동정론으로 까지 확대되었다

강원도 관찰사 조인승이 춘천으로 새로 부임 하여 오던날이었다
이소응을 위시한 춘천 유생들이 새로 부임해오는 조인승을 맞이 하러 백성들과 함께 동헌에 나왔다가 보지 못할것을 보았다
머리를 짧게 깎고 나타난 신임 삿도라는 사람이 나타났다
"저게 삿도야"
"그렇다네"
"저런 저놈도 일본놈 앞잡이 임에 틀림 없어 "
모두들 수근거리었다
갓쓰고나온 유생들이 보기에는구역질 나는일이었다
누군가가 소리를 질렀다
"이 나라의 국모를 살해한 일본놈의 앞잡이를 몰아내자 "

유생들이 손에 닥치는대로 몽둥이를 들고나가 사정 없이 조인승을 두들겨 패어 그자레서 죽이고 말았다
이소응은 그길로 유생들과 그를 따르는 동지들과 같이 원주의 이춘영 안승우와 합류과하여 원주관아를 공격하여 무기고를 열고 완전 무장하고 관군에 정면 대응하기시작하였다 .이들은 어느새 글만 읽는 유생이 아니고 의에 죽고 의에사는 의병으로 변해있었다
이런 양상은 전국 8 도에서 발생하였으니 . 진주 관찰사 조종필, 나주 관찰사 조한국, 강원 관찰사 후임 백낙윤등은 유생들의 반발로 부임도 못하고 쫓겨 가고 안동 관찰사 김석중, 충주 관찰사 김규식등은 군수들 까지 포함해 머리를 깎으려고 행인을 잡다가 유생을 포함한 무리들에 의해 수십명이 맞아 죽었다.

단발령으로 촉발된 백성들이 이제는 반일, 반 내각 으로 화살을 돌리게 되고 이들은 관아를 습격 무기고를 부수었다.이른바 무장화된 의병으로 변해있었다

조정에서는 그때서야 사정이 급박한것을 느끼고 서울에 주둔하고 있던 친위대 군사를 모두 각 지방으로 내 보내어 배치시켰다
그러고보니 서울이 공백상태가 되었다
조정은 불안할수 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임금이나 대신들을 지켜주는것은 친위대 밖에 없는데 말이다..
더구나 이때는 민비의 시해 사건으로 일본도 위축이 되어 있는상태라 믿고 있었던것은 친위대 뿐이었기 때문이었다.
모든 군대가 수도 서울을 비우고 지방 의병 진압을 위해 나가 있다는것은 언제 무슨짓을 할지모를 세력이 부상할까 걱정이었다

과연그러한 우려는 현실로 나타났다
러시아 공사와 자주 러시아 대사관에서 회동을 갖고있던 이범진과 이완용이 서울의 군대가 없는 공백을 그냥 넘기지 않았다
춘생문 사건으로 러시라로 도망갔던 이범진이 귀국하면서 이완용에게 의미 심장한 말을 던지었다
"전하께서 민왕후가 시해된후 일본놈들이 왕비에게 하듯이 상감께 행패를 부릴가봐 전전 긍긍 하고 계시는 모양인데 차라리 후유증이가실 때 까지 러시아 대사관에 계시게 하면 얼마나 좋을까?"
"전하가 스스로 가실 수도 없는일...... 지금 일본군 수비대와 친위대 일부가 반씩 나누어 경비하고 있는데 임금께서 자진하여 궁궐을 나서는 기미가 보이면 일본공사가 가만히 있을 줄 아나?"
"방법은 있지 ..."

그들은 귓속 말로 하더니 곧바로 러시아공사 베베르에게 찾아 갔다 .
베베르는 기회를 놓질세라 인천에 정박 중인 러시아 군함으로 해군수병 100 여명, 대포1문, 48필지말 을 인천항을 통하여 불러 들이며 각처에서 봉기 하고 있는 의병들로부터 공사관을 경비하기 위하여라며 서울로 불러들였다.

러시아군이 진주 하자 힘을 받는것은 평소부터 러시아 대사관을 문턱드나 들듯이 하던 이범진과이완용으로 그들은 러시아힘으로 일본을모라내고 자기들의 친러정권을 세워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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