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이야기 (112회)-유생과 양반만 있는 조선사회-

by 5443738 posted Jan 01, 1970 Views 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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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은 일본이 민비 문제로 발뺌 하는 것을 틈타 민비의 폐위 되었던 위호(位號)를 다시 복위 시키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왕은 왕비 시해사건의 부역자인 군부 협판 이주회를 잡아 들이라 하여 사형시키도록하고 그의 추종자 몇명을 왕비 시역 사건의 하수인으로 처형 하게하였다 .
일본은 자기들이 민비시해 사건과는 무관 하다고 내세우는 이유 때문인지 자기들이 민비 살해 사건에 끌어 들인 이주회의 구명에 대하여는 말 한마디도 못하고 이주회의 처형을 바라 보고 만 있었다.

나라가 온통 시끄러운때 총리 대신 김홍집은 나름 대로 세상을 개혁 하겠다 면서 여러가지 시책을 발표했다 .
궁궐 시위대를 훈련원에 편입 하였다가 다시 친위대와 진위대로 분리 편성 하였으며
11월에는 지금 까지 청나라를 의식하여 써오던 고종 32 년이라는 연호 (年號.....임금이 자리에 오르는 해에 대하여 짓는 칭호)를 고쳐 다음해 부터 독자적으로 건양(建陽)라는 연호를 쓰기로하였다 .
청나라 사신이오면 극진히 대접하던 모화관옆에있는 영은문(迎恩門)을 깨뜰여 헐어버리었다
또 11월 17일을 조선개국 505년 1월 1일 원년으로 정하기로 하고 양력을 사용하기로 하였다

김홍집은 나라가 발전 하려면 서양 문화 부터 받아 들여야 한다는것이었다 .서양 문화를 걷워 들이려면 백성들의 정신을 뜯어 고쳐야 한다는 것이 그의지론이었다 .

대원군은 일본 공사와의 약속에 의해 내각이 하는 일에 이래라 저래라 할수 없는 위치로 되어 있었다 . 민비 시해 사건으로 아직도 일본의 위세에 대한 눈치를 보지 않을수 없기 때문이었다.

김홍집은 임금에게
"전하, 세계는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서양 문물을 받아 들이지 않으면 우리나라는 완전히 퇴보합니다 ."
하고 임금에게 건의하였다
"어찌 하면 좋겠소?"
왕은 민비 시해 사건후 잠도 오지 않고 매우 심경이 좋지 않았다 .일본인들이 언제 궁궐내로 침입해 들어와 행패를 부릴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
그러나 나라의 정사는 정사였다 .김홍집의 의도를 모르는 바가 아니었기 때문에 힘없이 반문을 했던것이다

"전하, 개혁을 하려면 우선 간단한 일부터 해나가는것이 옳을 줄압니다"
"그게 무어요?"
"우선 지금 까지쓰는 음력을 버리고 양력을 쓰고 연호도 통일해야 합니다"
"지금 까지 우리나라는 음력으로 모든 것이 생활화 되어있는데 되겠소?"
"전하 서양 각국과 일본은 양력으로 생활 하는데 우리는 그것을 외면해 가지고 그들을 따라 잡을수 없습니다"
"그 다음은 ?"
" 그 다음 개혁을 하려면 우리의 신체 부터 개혁을 해야 합니다"
"그게무슨 뜻이오?"
"상투를 없애야합니다"

상투를 없애자는데 왕은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지금 까지 이 나라는 남여를 불문하고 머리를 자르는일이 없지않은가? 이 무슨 회괴한 소리인가 ?
더구나 남자 경우에는 여자와 같이 어릴때 머리를 길게 길러 땋고 있다가 어른이 되면 머리를 말아 상투를 틀어 머리에 올리고있었다
"머리를 자르다니 그건 너무 하지 않소?"
"아니옵니다 ,선진국에서는 모두 머리를 짧게 깎아 간편한 생활을 하고있습니다"

"하긴 일본인 들이나 외국 대사들의 머리나 복장을 보니 편해 보이고 깨끗해 보이더군...."
"전하 단안을 내리십시요"
"백성들 보고 머리를 자르라면 불만이 많을텐데 ....."
임금은 머리를 자르는것은 좋은데 과연 백성들이 하루아침에 자진해 머리를 자르겠느냐가 걱정이 되지 않을수 없었다
"그런데 백성들이....."
왕은 계속 머뭇거리었다

"전하...무엄한 말씀을 올려도 되겠습니까?"
김홍집은 무엇을 결심했는지 왕에게 심각한 표정으로 묻는다
"말하오"
"다름이 아니 오라"
"무슨 말이오?"
"전하 께옵서 시범으로 머리를 깎으시고 전국에 단발령을 내리시옵소서"
".............."

김홍집의 단도 직입적 말에 임금은 순간 당황 하였으니 이내 표정을 바꾸어
"좋소, 그렇지 않아도 서양 대사들의 머리를 보고 얼마나 깨끗하고 간편 한가를 생각해 오던 참이오 "
김홍집은 임금이 역정이라도 낼까 걱정하다가 쾌히 승락하는것을 보고 마음이 안도되었다

고종32 년 11월 15일
임금은 놀라웁게도 김홍집의 건의에 따라 어명으로 단발령(斷髮令)을 내렸다

고종은 일본군이 궁궐을 둘러 싸고 있는 상황하에서도 정치는 소흘히 할수가 없었다 . 대신들과 같이 모두 머리를 짧게 깎았다
마침내 단발령이 내린것이다

"과인이 머리를 깎아 시범을 보니노니 모든 백성들도 임금인 나와 같이 같이 머리를깎도록 하라 "
어명에이어 내부대신 유길준도 머리깎는것 이외에 복장 제도 변경에관한 것도 추가발표하였다

"백성들에게 고하노라
지금 까지 우리나라는 머리를 깎지 않고 긴 머리를 상투를 틀어 올려 무슨 일이든지 불편하기이를데 없었다.이러한 생활 습관은 국가 발전 하는데도 큰 지장의 하나였다 .
머리를 깎으면 우선 보기가 좋고 깨끗하며 행동하기에 간편하다
이에 임금께서 시범으로 머리를 깎으시어 시범을 뵈웠으니 백성들도 머리를 모두 짧게 깎도록하라
이에 내각은 어명에의하여 단발령을 내리노라
단발과 동시 상복은 베옷이 아니더라도 좋고 망건도 쓰지 않아도 좋다.또 두루마기나 저고리 바지 아니고 양복을 입어도 좋으니라 "

그러나 백성들은 이에 따르지 않았다.
"아니 세상이 망해도 유분수지 이럴수가 있는가? 머리를 깎으라니....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이몸에 가위를 들여대어? 조정에서는 어디서 못된것을 배워가지고 백성들에게 강요하는가?"
제일 먼저 반대운동을 일으킨것은 유생들과 양반들이었고 백성들이 모두 들고 일어났다
사람의 몸은 부모로 부터 물려 받은것이니 머리카락 하나라도 칼을 들여대면 불효가 된다는 유교사상에 젖어있는 백성들이기 때문이었다 .

반만년 역사 이래 천지를 뒤흔드는 벽력 같은 조치가 아닐수 없었다
김홍집 내각에서도 그것을 모르는바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루라도 빨리 개혁(?)이라는 기치를 내세워 한번 나라를 바로 잡아보겠다는 집념이었다

무슨일이든지 정치적인 개혁이라는 허울 좋은 기치는 함부로 성급히 내세우면 안된다
대원군도 경복궁 중수를 위해 단 시간내 일을 처리 하려다 부작용을 초래 하지 않았는가?
김옥균도 벼락 같이 개혁이라는 그럴듯한 기치를 내세우다가 결국 일본으로 쫓겨가 암살까지 당하지 않았는가?
역사는 상황만 다를 뿐이지 반복하는 법이다 .

김홍집내각은 개혁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역사와 전통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고 백성들의 감정은 전혀 고려치 않은채 밀어 부친 것이다
역시 김홍집 내각은 백성들의 마음을 생각해서 서서히 추진해 나가야 할일을 너무 성급하게 서두른것이다

내각에서는 그렇지 않아도 이 문제를 가지고 대신들 간에 왈가 불가 하였다
궁내부 대신 이재면이 우려를 표명하였다
"백성들이 반대하니 단발령을 걷우워 들이면 좋겠습니다 "
내부대신 유길준이가만히 있지 않았다
"무슨 말씀이오 ,지금 까지우리나라가 이렇게 살아 왔기 때문에 외세에 밀려 나라가이꼴아닙니까?
일단 어명이 내린 이상 밀고 나가야지 여기서 밀리면 않됩니다 .유림과 양반들이 더 야단 들인데 먼저 국태공께서도 서원 철폐를 할때 유생들의 반대가 얼마나 거셌었습니까 ? 결국은 서원을 모두 없애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유생과 양반들 뿐만 아닙니다 천년이나 뿌리깊은 전통을 하루 아침에 시행하기에는 좀 무리가 아닙니까? 앞으로도 시간을 두고 해나는것도 좋지요"
두 사람 간의 언쟁에 탁지부대신 어윤중이가 끼어들 었다
"여러 말씀 하실 필요가 없어요, 어명이요, 지금 전하께서 시범을 보인이상 그대로 밀고나가야 합니다"
외부대신 김윤식은 한술더떴다
"강제로 하기전에는 않 될 것입니다"
법부대신 장박이 나섰다
"알겠습니다 .내일 부터라도 채두관을 각도에 내려 보내 실행 하도록 하겠습니다"
"..........."

채두관이란 머리를 깎는 관리였다
이들은 각지의 순검들에게 이발 기구를 나누어주고 이발 시범을 보인뒤 이발기구를 들고 길가에 지나는 사람 마다 붙들고 강제로 머리를 깎아 버렸다

백성들은 가만 있지를 않았다
개혁도 좋지만 절차와 백성들의 감정도 생각해서 천천히 서둘러야 할 사항임에도 불구하고 밀어 부치기 때문이었다

학부대신 서광범은 꼴이보기 싫다하여 사표를내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
후임으로 임명된 이도재 까지 벼슬을 내 놓고 왕에게 단발령 시행이 너무 성급하다는 상소문을 내 놓고 시골로 귀향 해 버리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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