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이야기(111회)-일본놈들이라고 불러야 하는 이유--

by 5443738 posted Jan 01, 1970 Views 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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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당국은 은 박영효가 일본으로 다시 쫓겨 오자 박영효로 부터 그간의 조정에서 일어난 일을 자세히 듣고 그간에 조선 조정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태에 대하여 서울에 공사로 나가 있는 이노우에(井上)공사에 대하여 좋지 않게 생각 하고 있었다

"바보 같으니 그까짓 왕비 하나쯤 요리 못하고 여자에게 휘둘려 총리 대신을 몇번씩 바뀌게 해?"
일본 정부는 즉각 정상 공사를 불러 들이고 장군 출신인 삼포오루(三浦梧樓...일본명,미우라)를 신임 공사로 내 보내었다 .

미우라 공사는 겉으로는 젊잖은 척하면서도 교활하고 잔인한 사람이었다.
그는 일본 당국이 두려워 하는 민비 제거 계획을 처음 부터 마음 속에 넣고 조선에 들어온 사람이었다.
그는 우선 자기 휘하에 일본에서 낭인라고 불려지는 일정한직업 없이 권력이나 돈있곳에 붙어사는 건달들을 데리고 들어왔다 .
이자들은 유도,검도 등 무술에도 능하였다.일본인 특유의 몇십명씩 떼를 지어 몰려다니며 온갖 못된 행패를 다부리고 다니는자 들이었다 .

미우라가 노린 것은 이 건달들을 이용한 민비 제거 음모였다 .
(민비를 없애려면 며느리와 사이가 나쁜 대원군을 다시 포섭해야지.....)
미우라 공사는 우선 박영효가 소개한 군부 협판 이주회를 불러 술잔을 나누며자기일에 적극협조 할것을 부탁했다

"일본에서 내부 대신께서 조선에 나가면 이 협판과 모든것을 상의 하면 협조가 잘될것이라고 들었습니다 "
"온 별말씀을 ,제가 무어 그리 큰 도움이 되겠습니까?"
"아니오, 지금 조선은 큰일입니다 .김옥균이나 박영효 대감 같은 혁명가를 도외시 하고 지금 역사를 거꾸로 돌리고 있읍니다 .대원위 대감이 정치를 할때만 해도 나라가 제대로 돌아 가는가 했더니 민비를 위시한 민씨들이 정권을 잡더니 이게 나라 꼴이 무업니까?"
"..........."
"더구나 민비는 이총리의 직접 측근이라는이유로 조희연 군부 대신을 갈아 치게하는등 횡포가 말이 아니지요"
"왕비 마마께서 설마 그렇게 했겠습니까?"
협판 이주회는 그래도 자기 나라 왕비를 비방하는것이 못 마땅했는지 변호를 했다

"아니오, 일본으로 망명한 박영효 내부 대신이 하시는 말을 들어 보니 그동안 왕비가 몇번인가를 만나자고 하여 갔더니 군부 대신을 제거 하자고 하더라는것입니다 "
군부 협판 이주회는 미우라공사의 얘기를 듣고 놀랐다
(역시 왕비의 짓이였구나.....)

삼포공사는 이주회의 표정을 보더니 본색을 들어 내었다
"협판 대감, 이 나라는 개혁을 해야 합니다 .아직도 민씨 일가들은 청나라 아니면 러시아에 추파를 보내고 있지만 후회 하고 말것입니다 .청나라는이제 얼마 못갑니다 .러시아는 내부 분열로 불안정한 나라입니다 . 일본이야 말로 떠오르는 해처럼 희망이 있는나라입니다 .조선도 일본과 손을 잡고 떳떳한 독립국으로 발돋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주회가 들어보니 미우라의 개혁 타령도 구구절절 그럴듯 하였다.
"대감, 나에게 협조만 해 주신다면 나중에 응분의 보상을 해 드리리다 .그냥 협판 자리에 만족하실 겁니까?"
"........."
미우라공사의 달콤한 말에 이주회는 마음이 동하였다

"그러면 제가 할 일이 무엇인가요?"
"대원위 대감을 우리일에 협조 하도록 하게 해주시면 됩니다 "
"그거야 뭐.....

두사람의 회동 있은후 일본공사가 보낸 낭인 강본유지조(崗本柳之助 ...오카모도 류우노스케)와 이주회가 대원군을 찾았다
"대원위 대감께서 다시 일어 나셔야합니다"
하고 이주회가 부축이었다 .
"그렇습니다 "
오카모도는 언제 조선말을 배웠는지 서툰 조선 말로 같이 맞장구를 치었다

그러나 대원군은 일본 이라면 한 두번 속은 사람이 아닌지라 묵묵 부답이었다
미우라 공사는 두 사람을 계속 대원군에게 보내 설득 하라고 보채었다
결국 대원군은 몇가지 조건을 내세웠다

내용은 대원군이 다시 복귀 하되 궁내 일에만 전념하고 김홍집 내각에 적극 협조 하겠지만 대원군의 장남 이재면을 궁내부 대신으로 임명케하고 귀양 가 있는 손자 이준용을 불러 들여 일본 유학 보내 주기로 하고 하는것등이었다
이런 조건 이라면 일본이 하는 짓에 협조 하겠다는 것이었다

"됐다 , 대원군이 승락했다면 즉시 행동에 옮기자"
미우라는 발빠르게 계획을 진행시켜 나갔다 .
미우라는 그날밤 서기관 스기무라가와 구체적으로 민비를 죽이는 계획을 설명하고 실천하는 방안을 의논 하였다

서기관 스기무라는 민비를 죽이는데있어서 일본이 직접 개입하면 나중에 후유증이있을것이니 조선군 훈련대를 직접 이용하는것이 좋겠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미우라는 아무래도 피는 물보다 진 하다라는 속담이 있듯이 조선군 행동대 만으로서는 민비 죽이는 일이 믿업지 않다고 했다.
아무래도 서울에 주둔 하고 있는 일본 수비대 병력을 행동대 주축으로 삼고 조선군 훈련대는 따르게 하는동시에 서울에 거주하고있는 낭인배를 참여시켜 일본군이 주력 행동대로 나갈 것을 주장 하였다.

서기관 스기무라는 신중한 사람 이었다
"하지만 조선 훈련대를 어떻게 끌어 들일 작정 이십니까?"
하고 스기무라가 질문하자 미우라는 조선 훈련대 동원문제는 군부 협판 이주회가 팩임진다고 했다.
이주회는 그의 대부격인 군부대신을 민비가 갈아 치우게 한데 불만을 품고 있는데다가 민비가 훈련대 군인들은 해산시킨다는 는 소문이 퍼져있어 조선 훈련대가 저극 참여 할것이니 걱정 할것 없다고했다

고종 32 년 8 월 20 일 새벽이었다 ,
광화문 앞에는 일본군 수비대와 조선의 훈련대가 미명에 궁궐문 앞에 집결하기시작했다 .채 어둠이 가시기 전이었다 .일본인 건달 낭인들도 어제 진고개 파성관에서 미우라가 베푼 오늘일을 위해 사기를 북 돋으려는 회식술에서 덜깬 눈으로 현장에 속속 나타 났다 .
모두 칼,곤봉,권총을 차고있었다.그들중에 어떤자는 장검을 어깨 멘자도있었다., 날이 밝아오자 미우라 공사 가 나온고 조금있다가 대원군이 탄 교여(轎輿)가 가 오카모도가 인솔한 일본군과 같이 나타났다

대원군은 공덕리에 있는 대원군의 별장에 아침 일찍 오카모도 가 찾아와 새벽잠을 깨웠다
"무슨일이오?"
오카모도는
"국태공 각하, 약속대로 지금 조선군 훈련대와 우리 수비대가 광화문에 집결 되어 공격 준비가 완료 되었습니다 .어제 부탁드린 고유문(告諭文)은 다되었는지요?"

하고 약속 한대로 거사 성공후 백성들에게 알릴 공고문을 달라고 했다
"그것은 다 되었소만 그것 때문에 새벽에 온것이오?"
"국태공께서 광화문에 직접 나가시어 계셔야 거사 명분이 설텐데요.어서 나가시지요"
대원군은 이미 던저진 주사위였기 때문에 이미 전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갑시다"
할아버지 집에 머물고있던 손자 이준용이 대원군이 일본군과 같이 광화문으로 행차하는모습이 불안 했던지 따라 나오며
"제가 모시겠습니다"
하자 오카모도가
" 걱정 마시오 우리가 잘 모실터이니 ..."
하고 만류 했다
이준용이 그래도 대원군에게 따라나서자

" 준용아, 걱정말아라 , 일은 잘될거다. 혹시 오늘 거사가 실패하거든 일본으로 망명하여 후일을 기하거라"
하고 대원군의 교여가 광화문 입구를 향하여 움직이었던 것이다.

대원군 교여가 서대문을 지나자 아침 잠에서 깨어나 밖을 쓸던 백성들이 의혹의 눈길을 보내었다
"아니 국태공 어른 아니야? 새벽 같이 광화문쪽으로 가시는것을 보니 나라에 무슨 큰일이라도 났나?"
"글쎄, 아까 일본군이 부리낳게 움직이는것을 보니심상치 않아..."
장안 백성들은 자기들 끼리 수군거리었다 .

대원군 교여가 서대문을 지나자 그때서야 대원군을 호위할 예정된 일본군 수비대가 뒤늦게 나타났다

현장에는 일본군 제1수비대 선두 50 명, 2 진에는 우범진의 제1훈련대, 제3 진에는 오카모도가 인솔하는 일본인 건달 낭인 ,제4진에는 일본군 제2 수비대 제5 진에는 이두황의 제2 훈련대가 하기로되어있었다.
총지휘는 오카모도와 구스노세 중좌였다.
대원군의 교여가 먼저 광화문을 들어가기로 하고 뒤딸아 이를 호위하던 일본군과 훈련대가 경복궁으로 진입하기로 했다

일본군이 먼저 대원군 교여를 호위하며 궁궐로 들이닥쳤다
"웬 놈들이냐?"
대장 홍계훈이 마침 순찰중에 있다가 앞에 나타난 일본군을 보고 소리쳤다
"사격 하라"
일군 수비대와 조선 훈련대가 궁궐을지키는 시위대를 향하여 일제히 사격을가하였다 .

대장 홍계훈이 그자리에서 쓸어지자 일본 수비대의 사격을 당한 궁궐 시위대 병사들은 총한번 응사하지 않은채 당황하여 군복을 벗어버리고 총을 집어던지며 도망치기에 바빴다.
삽시간에 궁궐안은 조선군 훈련대와 오동나무 무늬 옷을 입은 일본인들이 피묻은 단검을 뽑아들고 궁궐안은 쫓고 쫓기는 난장판을 이루고있었다 .이들은 난입 목적이 왕후 살해였으나 문제는 민비의 얼굴을 본사람이 한사람도 없다는데 문제가있었다.

임금과 왕비의 침전이있는 건청궁(乾淸宮)으로 제일 먼저 난입 한것은 일본군 제1수비대와 낭인 들이었다 .제1수비대 군인들은 국왕의 침전이있는 곤녕전(坤寧殿)쪽으로 향하였고 낭인들은 왕비의 침전인 옥호루(玉壺樓)쪽으로 난입하였다 .

일본군 제1수비대 3 명중 1명이 왕태를 발견하자 상투를 휘어 잡고 끌어내어 칼로내려치어 의식을 잃었는데 나중에 의식을 차려보니 다행히 칼등에 맞아 의식은 찾았다

낭인 여러명이 옥호루로 달려 가는것을 보고 궁내부 대신 이경식이 왕비의 침전으로 달려갔다
폭도들이 침전의 방문을 걷어차고 들어가니 이경식과 궁녀복의 여섯 여인들이 몰려있었고 한 궁녀 앞에서 이경식이 낭인의 앞을 가로 막고 있었다
이경식이
"네이놈들 여기가 어디인데 무엄하게 난입 한다는 말이냐"
하고 호통을 치었다

순간 낭인 한명이 그에게 칼을 내려 치자 피투성이가 되어 쓸어 지었다
이경식이 가로막고있던 한궁녀도 폭도들의 칼에 맞아 같이 쓸어지었다
궁녀들이 이경식 뒤에 있다가 쓸어진 궁녀를 모두 얼싸안고 목을놓아 울자
건달 두목인듯 한자가 칼을든 건달에게 눈짓을했다
"에잇"
무차별 내려치는 폭도들의 칼에 궁녀들이 모두 처참한 시체로 변했다

시체중 왕비도 죽었는지 살아있는지 폭도들은 확 인하려 하였으나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폭도중 누군가가
"왕비가 도망갔다 "
하고지껄이자 폭도들은 더 난 폭해지었다
이들은 왕비가 누군지 모르기때문에 더 초조하여 피묻은 칼을 들고 여기저기 빈방을 찾아 다니기 시작 한 것이다.
폭도들은 닥치는 대로 잠긴 문은 때려 부수는 자가 있는가 하면 다른자 들은 마루 밑까지 피한 궁녀가 없는가 기어 들어가 보는자 까지 있었다.
그들은 다시 방으로 들어와 아직 숨이 넘어 가지 않 은 피투성이가 된 궁녀에게 칼을 겨누며
"왕비가 있는곳을 대어라 ,안대면 죽인다 "
하고 일본말로 협박 하였으나 조선 궁중 여인이 일본어를 알아 들을 턱이 없었다.
"아이고 "하는 신음 소리만 내고 있을 뿐이었다

후일 조선에 왕비시해 에대한 기록이없는것은 왕비 시해현장에 있었던 조선의 궁녀들이 모두 죽었는지 아무도 왕비를 살해하는 장면을 뒷날 전해준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모두 살해 당하였기 때문이다

다만 당시일본인 폭도의 한 사람이었던 국지겸양(菊池謙讓)이란 자가 쓴 근대 조선사 을미사변 본기에 생생한 목격담만 그대로 남아 있는데 그 대목 일부를 인용해보자

"맑은 물이 흐른다는 건천궁의 정문에서 내전을 들여다보니 동쪽 내전안에 국왕과 왕세자가 함께있었다.나는 조선말에 능통한 오카모도의 부하인 스즈기를 만나 얘기를 들어보니 방금 전 임금은 왕비의 행방을 물으셨다고 했다 .
이에 스즈기는 대답 하기를 왕비의 안부는알수 없고 아마도 북문쪽으로 피난한것 같다고 답변 하였다고 한다.
이때 국왕께서 걱정을 하시면서 스즈기에게 목이 타니 물좀 가져오라 하시었다 .그래서 스즈기는 조금전 국왕에게 물을 떠다드렸다고 했다.
나는 왕비의 침전인 옥호루로 무리를 따라가보았는데 궁내부 대신 이경식과 고상해보이는 한 궁녀복의 여자가 서편궁전 내실에 죽어 넘어저 있었다.
그중 한여자는 비만하고 고상해보이는 부인으로 아직안면에 핏자욱이남아있었다"

일본 건달들은 궁녀들과 함께 왕비의 시체를 끌어다 불을 질렀다 .증거를 없애기 위함이었다 .철저하게 일본은 왕비 살해 현장을 음폐 하였던것이다.
이때 민비의나이 42 세였으니 애통하기 그지 없었다.

날이 밝이지자 궁궐내에는 일본군 수비대 제1대만 남기고 모두 궁궐 밖으로 나갔다 .총소리와 화약터지는 소리도 어디로 갔느냐는 듯이 궁궐은 금새 조용해지었다.

대궐의 강녕전에는 대원군과 미우라공사가 궁궐내에 서일어나고있는 상황을 지켜보며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주위가 조용 해지자 외무성경부 오기하라가 들어와 미우라 공사에게 무엇인가 저의들말로 보고를 마치었다

보고를 받은 미우라는 만면의 미소를 지으며
"이제는 국태공께서도 걱정 하실일은 모두 없어지었습니다. 전하를 뵈옵지요 "
하고 의미있는 말을 던지었다 .민비를 해치웠으니 걱정말라는 얘기리라
"..........."
대원군은 더이상 묻지 않고 공사를 따라 임금이있는 장안당(長安堂)으로 향하였다

이제 다시 대원군의 세상이 다시 되는가 싶었다
대원군은 이제는 자신 만만하게 새로운 정치를 해 보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대원군은 새로운 내각을 만들었다.
총리대신에 김홍집, 궁내 부대신에 이재면, 외부 대신에 김윤식, 탁지 부대신에 어윤중, 내부 대신에 유길준, 군부 대신에 조희연, 농상부 대신에 정병하,학부 대신에 서광범,법부 대신에 정박등이었다

김홍집이 내각회를 열고 죽은 왕비 문제를 거론하였다 .대원군이 세워놓은 대신들은 이구동성으로 왕비를 폐위 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왕은 폐위 문제를두고 고민하지 않을수 없었다
(왕비가 무슨죄가있어 폐위 시킨다는 말이냐?)
왕이 결단을 못내리고있다가 겨우
"민비가 평소에 죄가 많다 그러므로 서인으로 폐한다"
하는 간단한 발표로 가름했다 .

그러나 왕비의 시해사건은 그렇게 간단히 끝날 일이아니었다 .
러시아와,서양각국 대사들이 의혹을 제기 하고 나올것은 뻔하였다 .게다가 백성들이 알면 일은 더 커질것이 분명하자 일본은 일본공사를 일본으로 귀국시켰다

그리고나서는 외무성 정무국장 소촌수태랑을 조선에 보내 진상을 조사하는 시늉을한후 미우라 공사후임으로 고무라를 새로 공사로 임명하는 동시 오카모도등 관련자 48명을 히로시마 감옥에 구금하였다.
그리고 한다는 소리가
"이번 왕비 시해사건은 조선의 훈련대와 궁궐의 시위대 간에 자기네들 군사들간에 싸움으로 일어난 사건이니 우리는 알바아니다 "
하고 발뺌을 하였다
민비 시해 현장에 있던 미우라공사, 오카모도등과 건달들도 궁궐 침입죄가있다고 구속시켰다가 증거 불충분이라는 그럴듯한 핑계를 대어 뒷구멍으로 모두 빼주었을 뿐이었다 .

이 상황하에서 고종은 사실상 일본에의하여 유페상태에 있었다
일본이 발뺌 하느라고 조선에서 잠시 손을 떼고있는동안 이완용 이범진등 친러파들이 다시 고개를 들기시작하였다
"이번 왕비 마마 시해 사건은 일본군의 책임이 있는데도 발뺌하는것이 분명합니다 .다만 왕비의시체를 찾을수 없으니 어느것이 진실인지는 모르나 차제에 훈련대를 해산하시고 궁내를 탄탄히 지킬수있는 친위대와 진위대를 두어 만일에 대비 하셔야 합니다"
이범진의 건의를 받아들여 임금은 훈련대를 해산 시키었다.

이범진은 다시
"전하 ,왕비마마가 무슨죄가있습니까? 서인으로 폐하는것은 옳지 않습니다 .서인은 너무 심하오니 왕비 보다 격이낮은 빈으로 하시옵소서"
하고 민비를 격상시킬것을 건의하였다 .
그렇지않아도 서인으로 폐한것이 마음에 차지 않던 임금은 빈으로 할것을 명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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