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이야기(102회)-개벽-

by 5443738 posted Jan 01, 1970 Views 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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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을 일으킨 최제우는 순조 24 년 경주에서 출생했다 .
그의 부친은 유생으로서 시골에 낙향 하여 오랫 동안 벼슬을 못한 양반 신분 출신으로 첩 소생의 외 아들이었다.
그는 유교 사상이라는 것이 낡고 헐어 빠진 공자를 원조로 하는 교학일 따름이라고 생각하고 유학 책을 불 살라 버리고 집안의 적출과 서출이라는 갈등에 견디다 못하여 20세에 가출하여 도를 구하는 길에 올랐다 .

그는 전국의 명산 대찰을 섭렵하며 신선의 술법을 배워 보려고도 하였으나 공중에 뜬 도술이라는 것은 허무할 뿐이라고 생각하고 직접 사회 내부에 뛰어 들어 생활 속에서 진리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
그는 이상 주의자인 동시에 엄격하고 바른 현실 주의자였다.
그가 국가의 안녕과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고 내 세운 보국 안민 (輔國安民) 사상은 그의 이상인 동시에 현실 문제였다.

이런 문제를 실천 하기 위하여는 하느님의 뜻을 세상에 널리 전도 하여 펼치므로서 (布德天下),세상에 모든사람들을 널리 구제 하여야 하며 (廣濟蒼生) 지극히 안락하고 걱정이 없는 사회 를 막연히 하늘에서 구하지 않고 사람이 살아 가고 있는 이 땅위에서 구하는 것이 선도를 닦아 도에 이르는것(地上神仙)이니 그렇게 하자면 먼저 개인의 정신을 세상이 천지를 뒤섞여 새로운 천지를 만들어 내듯이 새 정신을 만들 정신 개조를 해야 한다(後天開闢)고 주장 하였다
그는 정신을 개조(開闢)한다는것은 육체 따로 정신 따로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고 물질과 의식 행동은 어디 까지나 병행하여 일어 난다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백성들은 우매하고 무지함으로 스스로 느껴 자각을 하게끔 하는 것은 어렵다는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정신 개벽이 필요 하다고 주장 하였다
그는 현실을 도탄에서 구하여 건지고 이상된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는 사상, 철학, 종교적 신념의 토대를 세우려고 노력해야 하기 때문에 사람은 말 하자면 하느님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인내천(人乃天) 이론을 내세웠다 .

그는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들이 살게 좋게 하려면 정신을 개조 해야 한다고 했는데 그 정신을 개조한다는 용어를 개벽(開闢)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
그는 개벽을 3 대 개벽으로 나누었다

3 대 개벽이란 1. 정신개벽, 2. 민족 개벽 , 3. 사회개벽 으로 나누었다

정신 개벽은 인간성에 대한 자연적 역사를 고찰 함으로서 역사에서 그 원인을 찾고 장래 일어날 일을 고찰 함으로서 냉정한 이지로 그 사리를 분별 한후 기존의 윤리나 정치체제 내에서 모순을 발견하여 그 결점에 대하여 의지로서 대적 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민족 개벽에 있어서는 민족이란 인류 주의 사상 이나 사회 주의 사상에서 보면 별의미가 없는 것 같이 보이지만 인류 주의나 사회 주의도 결국 이론적 근본을 민족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각 민족은 문화 정도의 차이,경제 우열의 차이 ,정치 윤리,도덕, 관습에 따라 차이가 있는 것이 므로 무조건하고 세계 인류를 무조건 획일적으로 인류 주의나 사회 주의로 본다는것은 잘못 이라는 것이다 .우선 민족내에서 민족적 평등과 민족간의 차별을 융화하여 민족간에 서로 행복을 추구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

사회 개벽에 있어서는 보통 사회 개혁은 사회의 이상론을 경제에서 찾는 것이 일반론이다 .
그러나 동학에서의 사회 개벽은 단순히 경제 문제에서만 찾을 것이 아니라 인간이 중심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주의는 경제 문제는 인간이 살아가는데 있어서의 첫 단계 일뿐,사회 개벽의 인간 중심주의는 인간 이 추구하는 이상적 최고 우주생활리라는 것이다.
그는 사회 주의 같이 경제 문제로 인간들이 치고 받고 서로 싸우는 것은 인간으로서 수치 일뿐 만 아니라 인간들은 경제 밖에 모르는 수치스러운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된다는것이다

어디를 가나 경제 밖에 모르는 더러운 인간들이 서로 소유 하고자 하는 투쟁으로 인간의 순수성을 상실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
결국 동학의 사상은 현실 이상 주의(現實理想主義)로 요약 된다

최제우는 동학을 내 세운지 3 년만에 전국에 접소라는것을 설치하고 각 지방 마다 덕망이 있는자들을 접주라 부르고 경주, 영덕, 영일 안동, 단양, 영양,울산등에 우선 접주를 임명하였고 최시형을 북접도주로 임명 종무를 보게하였다
이러한 철저한 조직으로 2 년도 채지나지도 않았는데 교도수가 엄청나게 불어 나갔다.
철종 14년에 최제우가 대구 감영에서 죽임을 당할때는 교도수가 수천명에 달했다.

최제우의 뒤를 이은사람은 최시형이다 .최시형 역시 경주 출신으로 최제우의 먼 친척으로서 뛰어난 능력으로 날로 교세가 더 확장되었다
최시형은 조직의 명수로 각지역에 포(包)라는것을 두었고 각포에 접주를 두었으며 그위에 도접주, 대접주를 두었다 .

이제 동학의 교세는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충청도로 것 잡을수 없이 확대 되어 나가고있었다 .동학이 추구하는 현실 이상주의는 인간을 중시하는 인간 평등 사상과 인간 중심의 사회 개혁사상에 힘입어 농민들이 동학에서 힘을 얻지 않을수 없었다
지금 까지 전국에서 산발적으로 일어 났던 민란은 관권으로 거의 좌절 되었으나 이번만은 상황이 달랐다 .

동학의 세력이 날로 커지자 동학 교도 들은 정부로 부터 떳떳한 종교로서 대접 받기를 원했다 .그러기위하여는 대구 감영에서 효수당한 교주 최제우부터 억울한 죄명을 벗어 주어야 했다 .
그러나 충청 감사로 부임해온 조병식은 오히려 동학교도에 대한 탄압을 더 강화하였다
그해 말 최시형은 충청감사의 탄압에 반발 각도 접주에게 명령을 내려 전라도 삼례역으로 교도들을 모두 모이게 했다

엄청난 교도들이 모인 장소에서 최시형은 충청 전라감사를 상대로 최제우의 억울한 죄명을 씻겨 달라는것과 동학교도 탄압을 중지 할것을 탄원하였다
놀란것은 충청,전라 감사였다
" 최제우는 조정에서 한것이니 마음대로 할수 없고, 앞으로 탄압 만큼은 자중하겠다"
라고 답변서를 보내었다 .충천 전라 감사가 동학의 위세에 겁이 났던것이다

동학도 들은 양도 감사들이 교주의 억울한 누명이 자기들 소관이 아니라고 발뺌하자 이번에는 조정에다 상소를 하기로 하였다
손병희등 40 여명의 동학 교도들이 상소문을 가지고 상경 경복궁 앞에서 가마니를 깔고 상소문을 올렸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눈하나 깜짝 하지 않았다.

이에 분노한 동학 교도 들은 다시 충청도 보은 땅으로 구름 같이 모여들었다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동학도들은 3 만명이나 되었다.

고종 30 년 3 월 17 일이었다
조선 개국 이래 이렇게 많은 백성들이 모여 한 목소리를 내기는 처음이었다 .
처음에는교주 신원(伸寃....원통한일을 푸는것)을 주장하던 동학도들은 엉뚱하게 조정을 공격하기시작하였다.
"썩어 빠진 관리들을 처벌하고 외세를 몰아내라"
여러 군중 앞에서 누군가가 나와 소리 치자 여기 저기서 똑 같은 목소리가 모여저 한목소리로 변하였다

조정에서는 깜짝 놀랐다
조정에서는 충청 ,전라도 선무사 어윤중을 파견하여 이들을 해산 시키도록 명령 하였다.
내금위 홍계훈에게도 700여명의 군사를 주어 선무사를 따르게 하였다
어윤중이 충청도 보은땅에 이르러보니 정말로 놀라운 일이 벌어 지고있 었다
넓은 벌판이 온통 사람들로 꽉차있고 여기저기 붉고 노랗고 파란 깃발이 날리고있었다
"아니 저 깃발에 무어라고 썼는고?"
어윤중이 기가 질리는지 홍계훈에게 물었다
"교주 최제우를 신원(伸寃) 해달라는 깃발인것 같습니다"
"깃발을 보면 그런데 저기 앞에 나가 떠들고 있는자의 말이 심상치 않군..."
"듣고 있던대로 상감을 모독하는 발언을 하고 있는듯 합니다"
"반드시 선동자가 있을것이야 "
" 최시형이 주모자 인듯합니다 "
"일단 그자를 체포 합시다 "
명령은 내렸지만 3 만여군중을 단 700 명의 군사로 진압하기는 계란으로 바위치기나 다름 없었다

교주 최시형은 조정에서 어윤중이 부른다는 글을 읽고 잠시 망서리었다.
박광호가 옆에 있다가
"않됩니다 .선무사 옆에는 홍계훈의 군사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교주님을 체포할지모릅니다 . 선무사를 이쪽으로 오게 하도록 하시지요"
하고 만류한다
최시형은 앞서 최제우도 관군에게 어이 없게 체포 당한 전철을 밟지 않기로 작정하고 어윤중의 특사에게 어윤중과 최시형이 동학도 진영에서 단독으로 만 만나자는 글을 써주었다

어윤중은 글을 읽고
"허. 이놈 들이 보통 단수가 아니구먼 내가 그곳으로 가리다 "
하고 나섰다 .
홍계훈이 말린다
"아닙니다. 저놈들을 급히 만날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놔 두었다가 며칠 있다가 저놈들의 거동을 살펴 공격을 하든가 아니면 만나든가 해야지 섣뿔리 성급히 만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 저놈들에게 먼저 만나 주면 의기 양양해서 더 날 뛸 염려가 있습니다 "
"아니오. 상감을 모독하는 말이 점점 커지면 문제가 더 심각 해진다는 것을 아시오?"
"그러시지말고 저놈들중 극렬분자 몇 놈과 동반하여 최시형을 이리로 오게하면 되지않겠습니까? 그런다음에 주모자 몇 놈만 함께 체포 하면...... "
"하긴 그렇기는 한데 놈들이 말을 들을까?"
"한번 시도해보시지요"

700여명의 군사로 3 만군중을 해산 시키라는 조정의 발상도 문제지만 현장에서 이를 수행하는 두 관리들의 고충도 말이 아니었다
"그런데 먼저도 교주 최제우만 죽이면 끝 날줄 알았는데 최시형이란 놈이 다시 나와 저 지경이니 저걸 어떻게 처치 한다...?."
" 아까도 말씀 드렸지만 저런 군중을 움직이는 데는 반드시 선동자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놈들을 잡아 들여야 합니다"
"그 주동자가 누구로 생각하오"
"제가 파악해 놓은게 있습니다 .서인주, 서병학, 손치민, 손병희 등입니다 "
"허...치밀 히시기는 하군요 .그러면 다시 이들 명단과 함께 같이 회담장에 나오도록 글을 보냅시다 "

최시형에게 다녀와 내 놓은 글을 읽은 어윤중은 당황하였다 .
"이놈들이 눈치 챈 모양이오.굳이 자기 진영으로 오라는 군 "
홍계훈도 그렇게 나올줄 줄 알았다
" 그렇다면 대감을 호위할 사람도 보내지 말고 단독으로 가셔야 한다는 얘기인데 위험해서 되시겠습니까?"
어윤중은 망서리지 않을 수 없었다
"설마 이놈들이 나를 잡아 난동을 부리겠소? "
"대감, 군중이라는 것은 언제든지 뇌화 부동 할수 있는것입니다 .감정에 의해 어떻게 나올지 모릅니다 ,며칠만 기다리시면 저놈들의 숫자를 보아 양식이 떨어저 자연 해산 하기가 십중 팔구 입니다 "
어윤중은 홍계훈의 말이 귀에 들어 오지 않았다

그는 고종으로 부터 신속하게 처리 하고 보고 하라는 명을 받고 나온 사람이다 .고종이자기를 선유사로 보낼때는 자기의 능력을 시험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홍계훈 말대로 무장도 되어 있지도 않은 군중이 무서워 일을 늦춘다는 것은 말도 않되었다
문관과 무관의 의식의 차이점이 완연히 들어나는 순간이었다

어윤중은 말을 타고 군중을 헤치고 최시형의 막사로 찾아갔다
최시형은 예상과는 달리 어윤중을 선유사로 깎듯이 맞이했다 . 동학도 만큼은 관군측이 생각하던 오합 지졸들이 아니라 조직이 탄탄한 조직 이었기때문이었다
어윤중은 최시형에게 찾아 드는동안 3 만여 눈초리가 자기에게 따갑게 집중되는데 겁까지 더럭 났다

어윤중은 최시형을 보자 종전까지 도도 하던 태도가 변하여 사정 조 말투가 되었다
"국가가 이토록 어려운때 이렇게 수만 군중이 나라릉 향하여 성토해서 쓰겠소? 해산좀 해주시오"
하지만 최시형은 훤히 까진 머리에 턱밑에 긴 수염을 쓰다듬더니 한마디로 거절했다

"선유사 대감, 우리의 뜻은 조정에 이미 전달 하지 않았소? 이 나라의 탐관 오리들이 온 나라를 좀 먹고있는데도 나라가 한일이 무엇 있습니까? 또 왜놈들과 서양놈 들을 이나라에서 몰아내지 않는 이유가 무어요? 우리는 이 나라를 해치 자는게 아니라 나라를 바로 세우자는것 뿐이요 .따라서 우리의 이뜻이 해결 되기전 까지는 해산 할수 없소"

최시형은 이제는 최제우의 신원에서 한 단계 뛰어 넘어 국정 까지 떠들고 있었다 .
"외세를 몰아 내는 문제는 이미 천진 조약으로 물러 갔고 탐관 오리 문제는 내가 상감께 보고하여 엄중히 조치 하겠으니 자진 해산이나 하시오"
어윤중은 간곡히 부탁하였다

어윤중이 돌아 왔으나 막막 하기 만 하였다
해결 한다고 이곳 까지 왔지만 그냥 돌아 가서 임금에게 보고 하기에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어윤중은 이틀후 다시 최시형을 찾았다
"상감께 보고 들였더니 수긍 하시고 탐관 오리를 일소하도록 할터이니 걱정맗고 자진 해산 하도록 하라 하오 "
물론 왕에게 보고 해서 대답을 받아 냈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 이었다

최시형은 일단 임금 까지 동학도의 말을 받아 주었다니 만족 하지 않을수 없었다 .사실 최시형은 그말을 받아 내는것도 그랬지만 그보다도 우선 3 만 동학도들에게 먹여 살릴 식량이 더 큰 문제 였기 때문에 해산 하지 않을수가 없었다
최시형은 동학도 들을 일단 해산 시키었다

이번 집회로 동학은 큰 수확을 얻은바 있었으니 이번 집회는 조정이 관권력에 의해 강제로 해산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어둠속에서 동학 강의를 하던 교주는 이제 백일하에 터놓고 강의를 할수있도록 되었으니 그만한 수확이 또 있겠는가 ?
최시형이 얻은 또하나의 소득은 역시 집단 행동이라는 것은 폭력으로 진압만 않되면 떼쓰는것 이상 더 좋은 방법이 없다는것을 알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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