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이야기 (109회)-우왕 좌왕 이하음-

by 5443738 posted Jan 01, 1970 Views 559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news_0000425.jpg







부산과 원산으로 상륙한 일본군은 청군을 추격 9 월15 일에는 평양을 점령하고 계속 여세를 몰아 중국 안동으로 진공하여 봉황성, 개평,을 점령 하였다.

인천에 상륙하여 서울로 들어온 일본군은 천안,죽산, 충주로 남하하여 동학군 섬멸 작전은 계속 되었다 .전봉준이 관군과 일본군에게 체포 되고 난 다음에도 동학군의 항거는 계속 되었으나 고창에서 남접 손화중이 체포되고 김개남이 전주 서교장에서 잡히는등 남접의 동학군은 완전히 와해 되었다.

북접 손병희는 공주 패배후 청산 황간에서 지역 방위군인 민보에게 쫓겨 북실로 도망치었으나 관군과 민보군의 공격으로 다시 강원도 홍천으로 피하였다.
결국 동학농민군은 이러한 파국에도불구하고 결코 항복 하지 않고 벋히다가 고종 32년 1 월 24 일 일본군과 관군에에 쫓기던 패잔 농민군 26 명은 충청도 대둔산 정상에서 최후를 맞이 하였다 .이 마지막 전투에서 25 명 모두가 죽고 데리고 다니던 어린애 하나만 살아 남았을 뿐이었다.

전봉준, 손화중, 최경선, 김덕명등 동학 간부들은 모두 교수형에 처하였다

한편 조선의 풍도 앞 바다에서 청나라 북양 함대의 주력을 격파한 일본군은 중국 본토를 점령하여 들어 가다가 중국 땅 금성 까지 깊숙히 진출하였다
부패한 청나라 조정은 청군의 사기 까지 저하시켜 만주의 관문인 여순항 까지 일본에게 점령 당하고 말았다.일본군은 여순에서 반항하는 중국인들 6 만여명을 죽이고 시가지를 불태웠다.

일본을 얏 잡아 보던 청나라 조정은 일본에게 연전 연패 당하자 강화 대사로 북양대신 이홍장을 일본 하관항으로 보내어 휴전 하자고 일본에 제의 하였다.
일본은 이를 수락하고 이홍장이 하관항에 도착 하기 전에 청측에 요구할 조약안을 미리 준비 하였다

1. 청나라는 조선에서의 종주권을 포기하고 조선이 독립국임을 인정한다 .
2. 청나라는 대만과 만주의 요동 반도,팽호도등 청나라 땅 일부를 일본에게 떼어준다
3. 청나라는 영국등 서양나라와 똑같이 청나라와 일본간의 조약도 동등하게 행사한다
4. 청나라와 전쟁 중 입은 손해 배상 2억냥(일본돈 3억엔)을 배상한다.

그러나 청 나라에서는 이홍장이 직접 오지 않고 대표단 만을 일본에 파견 하였다
일본은 발끈 했다 .일본을 무시 한다는 것이었다.
일본은 청나라 대표단의 권한 부족을 트집잡아 이들을 돌려 보내었다
청나라 대표단이 귀국하는 동안 일본은 또다시 중국 산동반도의 제일 큰항구인 위해위로 처들어갔다.

사태 급진전에 놀란 이홍장은 본인이 직접 일본 하관항으로 출발하여 일본측이요구하는 조약안 대로 받아 들였다
다만 요동 반도 만큼만 부동항에 욕심을 갖고있던 러시아가 독일,프랑스를 꼬드겨 포기하게 하여 물러 났을 뿐이었다 .
대만도 조약후 대만인들의 항거가 있었으나 일본은 무력으로 진압 일본의 식민지로 확보하였다 .

청나라는 이제 꺼저가는 촛불같은 나라가 되어가고있 었다 .

그러나 대원군은 청나라가 일본군에게 일시적으로 젔을 뿐이지 이거대한 나라가 조그마한일본에게 굴복하지 않을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일본 따위에는 관심 조차 없었다
무슨 일이있든지 조선땅에서 일본을 몰아 내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일본 놈들이 이나라에서 활개치는것은 무능한 임금 때문이야 .왕비하나 손아귀에 휘어 잡지도 못하는 주제에 임금이라고 앉아서......)
그는 마침내 고종을 페위시키려는 마음 까지 갖게 되었다.

대원군이 고종 다음으로 임금을 삼고자한 인물은 장남의 아들인 손자 이준용이었다
그는 평소 똑똑하게 구는 이준용이 쓸만 하다고 생각 한것이었다 .

이때 나라 안에서는 한창 개혁작업(?)이 진행 되고있었다
대원군은 자기가 집권 초기에 대대적 개혁이란 이름의 치적을 다시 한번 회상해 보았다
(그때는 지금 같이 일본놈들이 없어도 잘만 해나갔지....그런데 지금은 무엇이냐? 일본놈들의 힘이아니면 개혁이 안된다는 말이냐? 문제는 며느리를 싸고도는 민가놈들때문이야)
대원군은 여기 까지 이르자 일본이 더 미워지었다
(그래...청나라와 손을 잡아야 한다 )
그는 일본군이 평양을 점령 하기전에 일본을 경계하고 청나라군에게 협력 하라고 이미 평양 감사에게 밀서를 보낸일을 상기했다
(그때 내가 생각을 잘했었지...)

그러나 그것은 대원군의 착각이었다.대원군의 밀서가 큰 화근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던 것이다
평양에서 청군이 이길줄 알고 있었던 평양 감사가 일본에게 패하고 일본군이 쏟아저 들어오자 겁이 더럭났다 .
평양 감사는 일본군의 비위를 맞출려고 대원군의 밀서를 일본군에게 내 준것이다

밀서 내용을 읽은 일본 당국은 화가났다
"병신 같이 ....지금껏 대원군이 실력자 이므로 그를 앞장 세워야 한다더니 이런 엉뚱한 짓을 하고 있는데도 그를 믿고 있었다니 ...공사를 불러들여 "
일본 공사를 본국으로 불러 들이고 새공사로 정상(井上)을 공사로 임명하였다.

새로 부임한 일본 공사 정상(井上...일본명 이노우에)은 어떤 일이 있든지 조선과 청나라간의 손을 끊어놔야 한다고 확신했다.조선과 청나라가 손을 잡으면 아무래도 골치아프기 때문이었다
계속



Articl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