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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은 동학군의 전열을 살펴보았다 .
각지역의 동학 연락소와 집강소에다 서신을 보내었다
여기서 집강소란 어떤곳인가를 잠간 집고넘어가자.
집강소란 동학 농민군 끼리 모든 의사 결정을 할때 수직적 명령이 아니고 합의에 의해 결정하는 조직이 있는곳을 말한다 .
동학 농민군의 구성을 보면 농민 뿐만 아니라 몰락한 양반들로 부터 지방 향리 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이 섞여 있었는데도 마찰이 없었던 것은 그때 까지 내려온 조선사회의 신분 제도와는 상반된 호칭을 서로 사용하였기 때문이었다.
집강소를 드나드는 간부들이나 농민들은 서로가 서로를 부를때 접장(接長)이라고 통일하여 부르게 했다.
말 하자면 여자인경우는 부인 접장,어린이인 경우는 동몽 접장, 형님 뻘인 경우는 형님접장,동생 뻘인 경우는 동생 접장등이었다 .
신분, 존귀와 비천,남자와 여자 ,연령 차이 구분 없이 접장으로 통하게 한것은 동학의 교리에 따라 모든 인간은 평등 하다는 교리에 의한 것이었다.
동학은 전통적 토속 신앙과 유교 불교,도교를 망라하여 생긴 이래 전통적 조선의 양반 상놈의 신분제와 토지 제도의 차별을 반대 하고 모든 백성의 평등을 내 세운 사회개혁 운동의 주류를 이르키었기 떄문에 쉽게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 잡았던 것이다
더구나 토지에 있어서는 양반과 지주들이 수천석 수만석 씩 쌀을 걷우워 쌀이 남아 돌아 갔어도 정작 직접 농사를 짓는 소작인 들에게는 80%-90%의 소작료를 물렸다.
따라서 농민들은 죽어라고 농사 지어 보아야 봄철 춘궁기가 되면 굶어 죽는 사람 까지생기었다 .
그런데도 국가에서는 양반들이나 지주들의 이런 횡포를 제한 하거나 농민들의 소작료의 고충을 들어 주려는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았다 .
그러므로 농민들은 이러한 평등치 못한 제도에 서 벗어 나려고 민란을 일으켰으나 번번히 좌절되고 말았다. 양반과 지주들은 이러한 농민들의 봉기를 경원시했고 농민들은 때 마침 동학의 기치를 높이든 평등 사상에 매료 되어 집강소 활동을 통해 신분제도와 토지제도의 불평등을 해소하려 하였다 .
동학란이 터지자 제일 먼저 반긴 사람들은 노비와 백정들이었다 .노비들은 관청의 노비문서 부터 불 태웠고 백정들은 패랭이모자를 벗어 집어 던지고 일반 양민들과 또같이 행세하고다니었다.
또 소작농들은 과도한 소작료나 고리채를 내지 않고 이를 거부하거나 국가의 수탈에 저항했다.
그래서 집강소야 말로 그들에게는 성지나 다름없었다
전봉준이있는 전주 집강소는 집강소의 총 본부로서 대도소(大都所)라부르고 각처에 집강이 있는데 호남 지방의 집강 활동 무대를 두고있는 전주, 고부,고창, 부안, 영암, 해남, 보성,순천, 광주,순창,남원,장수,금산,진산,함열, 군산등에 남접이라 부르고 충청 경기강원 지역의 공주, 홍주, 덕산, 당진,청주 충주,여주,이천, 안성,원주 횡성,홍천 지역을 북접이라고 불렀다.
전봉준은 남접 집결지를 삼례로하고 봉기 하기로 하고 북접 집결지는 충청도 청산으로하고 북접 집강인 손병희 접주가 봉기하기로 하였다 .
전봉준은 전주와 삼례를 임시 총지휘 본부로 하고 전주와 삼례는 김개남에게 지키게하고 손화중에게는 광주를 지키게 한 다음 북접 손병희에게 논산으로 집결 할 계획을 수립하였다.
드디어 모든 작전 계획은 끝났고 각 집강소에서 삼례로 농민들이 모여 들기 시작했다.
전봉준은 모여든 농민들에게 연설을 시작하였다
" 여러분 ,이제 이 나라에는 주인이 없습니다. 일본놈들이 네 활개를 펴고 우리의 궁궐을 마음대로 드나들고 일본 군인들이 온나라를 짓 밟고 다니고 있는데도 막을 사람이없으니 누가 주인입니까?
부패한 정권을 몰아 낸다는 것도 이제 뒷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이 나라에서 일본놈들을 몰아 내어야 합니다 .
여러분 우리의 적은 일본입니다.
여러분 모두 일어납시다"
전봉준의 피 끓는호소가 번저나갔다
"가자 서울로 가자, 서울에 있는 일본 일본 공사놈과 일본놈들을 때려 잡자"
누군가가 소리치자 우뢰 같은 박수가 쏟아 지었다
드디어 삼례에 모여든 동학 접주들과 농민은 10 만명이나 되었다
모여든 농민 말고도 각 지역에서 전라도 까지 오지 못하는 접주들은 집강 별로 동학군을 만들었다 진주에서도 동학 농민군들이 방을 써 붙이고 항일 투쟁을 호소했다 , 이에 안성,밀양, 하동,사천,고성,등에서도 자체적으로 동학군을 편성 항일 투쟁을 선언하였다
9 월18 일
일본공사는 이 소식을 듣고 군국기무처를 통해 조선 관군도 동학군을 물리칠 기구를 만들라고 압력을 넣었다.
이에 조선 조정에서는 동학 농민군을 진압 하기위한 양호 순무영을 설치하고 도 순무사로 신정희를 임명하는 동시에 선봉장에 이규태를 임명하고 일본군에게도 동학 농민군 토벌 지원을 요청했다
일본군은 기다렸기라도 했듯이 즉각 토벌 지원 요청을 수락하였다.
일본군은 충청, 전라, 경상도 등 세방면으로 각지 동학군 토벌 작전으로 들어갔다.
제1대는 강원도와 충청도지역을 거처 전라도로 투입하고 제2 대와 본국에서 추가지원 받은을 정예 기동 타격대는 직접 충청도로 투입하고, 제 3 대는 전라도 남쪽 강진근방에 배치 하도록 하기로 하여 물샐틈 없는 작전 계획을수립 하였다
드디어 일본군과 관군은 작전에 들어갔다.
세 방면으로 향하는 작전 지역인 상주, 이천, 안성, 진천, 등에서 관군과 일본군의 무자비한 습격으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되었다
동학군의 위협이 전국적으로 번질 기미가 보이자 본국에 요청한 1 개 진압 기동 특별대대를 본국에서 추가 지원 받아 인천항에 도착 하자 마자 바로 충청도 공주 방면으로 투입하였다
일본군은 이미 서울 말고도 인천,부산, 문경,원산에 이미 많은 군대가 들어와 작전중에있음에도 불구하고 동학군을 치기 위하여 특별 훈련을 받은 정예 기동 타격대를 보낸것이다
10 월 15 일 북접 손병희가 남접 전봉준과 합류 하기 위해 논산으로 갔다.논산은 여러곳에서 쌀을 모아 두는 집하 창고가 있어서 10 만대군을 모여 있기에는 아주 적당한 곳이었다
남 북접 동학군 총사령관으로 전봉준으로 정해지었다.
북접 손병희는 중군 통령으로 하기로 부대 편성을 매듭지었다.
북접 중군 통령이 작전 근거지를 마련하는 문제를 제기했다
"서울을 공격 하려면 작전 근거지를어디로 했으면 좋겠습니까?"
전봉준은 그렇지 않아도 전주 임시근거지가 서울과 먼 거리에 있었으므로 서울과 가까운곳을 택하려 평택 근방으로 생각 했었으나 그곳은 아산만이 가차워 만일에 있을지 모를 일본군 상륙 가능성 지역을 피하여 공주 정도로 생각 하고 있었다.
"제가 처음에 삼례에서 거병 할때는 전주를 근거지로 삼으려 했는데 전주는 서울과 너무 멀고 지리적으로 유리한 형세가 못되어 충청도 공주땅이 좋을것 같습니다.공주는 공산성이 있고 만일 일본이 아산만에서 공주까지 침공 한다 하더라도 시간을 벌수가있습니다. 우선 공주에 거점을 정하고 일본군을 격파한후 서울로 들어갈 준비를 합시다 "
전봉준은 우선 동학군을 공주로 이동 배치 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알아 보니 일본군은 공주 까지 이미 내려와 논산에서 공주로 들어가는 효포(孝浦)근방과, 부여에서 공주 땅으로 들어가는 우금치(牛金峙) 우금 고개,이인(利仁) 등에관군과 일본군이 우글 거린다는 것이었다.
일본군이 세 갈래로 협공 작전에 들어간것은 동학군을 전라도 남쪽 한곳으로 몰아 섬멸학고 말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동학 농민군도 10 만명이라면 적지 않은 숫자였다.그러나 안타깝게도 동학군은 조직적 훈련 조차 없는 오합지졸에 불과했다.
갖고 있는 무기래야 죽창아니면 몽둥이, 농기구가 대부분이었고 가물에 콩나듯 총을갖고있었으나 탄약 구경 하기란 힘들정도였다 .
이러한 동학군에 비한다면 일본군은 신식 무기로 무장하고 철저하게 훈련을 받고온 사나운 군인들이었다 .청나라군 까지 격파한 실력이니 말이다.
동학군은 공주로 들어가는 세 갈래 길중에서 효포와 감화산을 배경으로 공주를 공격하기로 가닥을 잡았다 .
동학군이 화은 마을에 도착했을때 잠복중인 일본군의 사격으로 공주 점령은 실패하고 많은 사상자가 발생 하였다.동학군은 일단 물러서지 않을수 없었다 .
중군 통령 손병희가 전봉준에게 작전계획을 바꿀것을 건의하였다
"우리가 효포를 택한것이 잘못된것 같습니다 .지형을 보니 많은 부대가 이동 하기에는 적합치 않습니다"
"통령의 의견은 어찌하는게 좋겠소?"
"일본군과 관군의 세가 강하니 전주에있는 김개남 접주에게 연락 지원군을 보충받아 산이 험한 우금치(牛金峙)를 택함이 좋을듯 합니다"
" 김개남의 5000 병력이 전주를 떠나면 일본군과 관군이 그곳을 공격 임시근거지 조차 빼앗기면 어쩌려고요?"
"장군, 우리가 지금 목표로하고 있는것은 서울입니다 .서울에있는 일본군을 몰아내는데 있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오만....."
전봉준은 전주가 함락되면 자기의 정신적 지주가 무너지는듯한 기분이었기에 가급적이면 긴개남을 전주에 머무르기를 바라고 있었다.
"장군 결단을 내리십시요,두말 할것 없이 목슴을 걸고 싸움에 임한다는 배수지진(背水之陣)의 고사를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
결국 전주에 남아있던 김개남의 5000 병력이 공주 남쪽으로와 합류하였다
김개남의 지원군의 힘을 받아 다시 공주성 공략을 위해 우금 고개로 진군 하였으나 관군과 일본군의 최신무기인 기관총에 많은 사상자를 내고 다시 물러났다 .
싸움은 거의 1주일이나 계속되었다.
동학군은 거의 두차례나 공격을 시도했으나 희생자만 남기고 더이상 나갈수가 없었다
또다시 세번째 공격을 시도하였으나 회생만 늘어났다 . 남은 군사를 점검 해보니 3000명정도 밖에 되지않았다 .
"남은 한사람 까지 싸우자"
전봉준은 군사들을 더 독려했으나 불과 500명에 불과 했다
동학군은 결국 패주하기시작했다
일본군과 관군은동학군을 무서운 기세로 추격하였다.
동학군은 거듭패하면서 전주, 태인,을거처 금구에까지 후퇴하였다 .일본군은 동학군을 닥치는대로 잡아죽이고 가는곳마다 동학 간부 접주라면 무조건 잡아 처형하였다
싸움은 고종32년 1월9일에 끝이났다
동학군은 싸움을 결의하였던 원평에서 모두해산하였다 .
전봉준은 입암 산성으로 몸을 피하여 다시 동지들과 의논하였으나 답답한 나머지 변장하고 서울 사정을 알아 보려고 순창으로나갔다가 민병에게 잡히고 말았다 .
그의 목에는 1천량의 현상금이 붙어있었다
전봉준은 관군에게 넘겨저 서울로 압송 되었고 그를 따르던 동학 교도들도 숨어있다가 매일 같이 관군과 일본군에게 잡히어 죽임을당하였다.
전봉준은 고종 32 년 3 월 29 일 사형을 당하였다.
나이 42세였다.
다시 일어 났던 동학군의 혁명이 실패하자 제일 실망한 사람은 대원군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