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이야기(101회)-백성들ㅡ

by 5443738 posted Jan 01, 1970 Views 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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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은 3 년전 타고 청나라로 떠났던 배를 타고 귀국 길에 올랐다 .그가 청나라에 붙잡혀 왔을 때와는 달리 이홍장은 배웅 까지나와 대원군을 환송 해주는 척하며 위로의 말을 잊지 않았다
대원군은 이홍장의 위로 말에 대꾸 한마디 없이 묵묵히 귀국선에 올랐다 .
청나라 북양함대 두척이 대원군의 배를 호위 하며 황해 바다 물살을 가르기 시작하였다 .

제물포에 배를 댄것은 깊은 밤이었기 때문에 제물포 객사에서 하룻 밤을 묵었다
다음날 고종은 아버지 대원군의 귀국을 환영하는 잔치 상 까지 궁궐에 차리고 맞을 준비를 하고있었다.
대원군이 궁궐에 들어서자 가마에서 내려 왕에게 나가자 임금이 먼저 절을 하였다 .부친에대한 최대의 경의 였다
"그동안 정사에 얼마나 수고 많았소이까?"
대원군은 임금의 절에 대한 답례로 한 마디 던지고 다시 가마에 오르며
"피곤하여 일찍 운현궁으로 가겠소이다"
하고 묵묵 부답 표정으로 가마에 올라 탔다

거리에는 대원군이 귀국 했다는 소식을 듣고 많은 인파가 나와 대원군의 행차를 바라보며 환영 하였다 .
" 청나라 놈들과 일본놈들이 서울에 들어와 저의 나라나 되는것 처럼 싸움질 하더니 이제는 좀 조용하려나 ?"
" 대원위 대감이 오셨으니 이제는 조용하겠지..."
백성들의 기대는 대단했다.

그러나 대원군은 운현궁에 처 밖혀 꼼짝도 하지 않고있었다
민씨 일파의 조정에서는 대원군에게 관심 조차 도 갖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를 경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라가 이렇게 긴장 되어있을 때 죽어 나는것은 백성들 뿐이었다 .
나라가 일본이 요구하는 배상금을 갚으랴 , 외국 군대의 주둔 군량미를 대랴 눈코 뜰새 없이 조정은 엄청난 돈을 지출하고 있었다 .이렇한 재정 결핍을 메꾸려면 백성들로부터 많은 세금을 걷우지 않고는 않되었다. 백성들의 주머니를 털어 가는 세금 명목도 생전 보지도 못했던 세금이 신설되었다
산세, 바다세 ,주세, 연초세, 육류세, 소금세 미역 채취세, 대밭세, 모시밭세, ....별 희한한 세까지 부과 하였다 .
"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아무 쓸데 없는 산 까지 세금을 내라는데 이거 날 벼락아닌가?"
"술 좀 해먹는다고 술세 까지 받아 간다며?..."
"담배 잎을 심어 담배 좀 핀다고 담배세 까지 생긴다며?"
"바다에서 그냥 건저 먹는 미역 까지도 세금을 내지 않으면 그것도 못 건져 먹는다며?..."

나라가 외국 군대 배상금으로 들어가는 등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사이에 부패 관리들은 나라의 재정을 충당 한다며 사리사욕 채우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니 백성들이 내는 세금은 점점 불어 날수 밖에 없었다
있는 돈 없는 돈 모아서 세금을 받치고 나면 농민들은 당장 먹고 살 돈이 없었다 .세금을 못 받치는 사람은 관청에 끌려가 매를 맞거나 땅 문서 집 문서까지 빼앗었다 .그러지 않으려면 빚을 내어 서라도 세금 부터 받쳐야 했으니 백성들의 원망은 하늘 끝 까지 뻗쳐있었다.

게다가 천진 조약 이전에 조선에 들어온 일본 상인들은 조약이후 일본군이 철수 후에도 조선에 남아 일본에서 만든 생필품을 팔아 재미를 톡톡히 보고 있었으니 조선의 경제는 일본인들 까지 끼어 들어 엉망이 되지 않을수가 없었다
일본은 조선에 전부터 왜관이라는것을 설치 해놓았다 . 왜관이란 조선의 주요 지방에다 세워 놓은 상업기관으로 필요한 물자를 무역해가는 기관이었다

일본인들은 서울 말고도 인천, 부산, 원산에 200 여군데나 되는 상점(왜관)을 차려 놓고 저들이 만든 물건들을 팔아 쌀 , 콩, 금은 등을 가져 갔는데 그것도 모자라 일본인들은 조선 농민들이 관청으로부터 세금명목으로 수탈당하여 가난하게 사는것에 눈독을 들여 농민들 상대로 고리 대금업을 하였다 .가난한 농민들은 조선에 마땅한 금융기관이 없을뿐만아니라 돈을 꿀래야 꿀수도 없는 처지라 울며 겨자먹기로 일본 상인들의 1활이 넘는 고리 대금을 얻어써야 했다

봄철에 농사 짓기위해 필요한 돈을 일본 상인들로 부터 얻어 쓰고 가을에 갚아야 하는데 이때면 벌써 원금 만큼 이자가 부풀려 있었다 .
농민들이 갚을 방법이 없자 교활한 일본 상인들은 쌀이나 콩으로 대신 받아갔다.
그것도 제대로 값을 처 사가는것이 아니고 헐값으로 받아 갔다

김옥균이 조정을 흔들어 놓고 청일 양국군이 조선에서 분탕질하는 동안 조선은 백성들이 먹고 입을 대책은 뒷전이고 세금을 걷워 들이기에 혈안이 되고 있었기때문에 백성들에게 생필품 공급을 못하자 백성들은 우선 옷이며 농기구, 솟, 기름등을 모두 일본 상인들로부터 사서 쓰고 있었다

우리나라에도 대장간이있고 염전이 있건만 어찌된 일인지 조선에서 생산되는 물건보다 일본에서 나오는 물건이 더 날개 달린듯 팔리고 있었다 .교활한 일본 상인들은 돈을 꿔주는 조건으로 자기들의 상품을 팔아 주지 않으면 않되게 만들었기때문이었다 .
그것도 싯가 보다 비싼 값으로 사도록 유도했다.

조선의 농촌은 이렇게 해서 조금씩 몰락 해가고있었다
농민들은 일본인들에게 당하고 뒤로 그들을 욕하기 시작하였다
"병주고 약주는 놈들...이놈들이 도대체 장사하러 조선에 온것이 아니고 도둑질하러 온것이나 마찬가지지 아니고 무엇이야...... 이 몹쓸 세상 , 관리들이 세금이란 이름을 붙여 도둑질 하지 않나 ? 일본놈들이 상거래를 한다며 교활하게 조선 농민들을 울리지 않나? 이게 도둑 세상이 아니고 무엇이야 ?"
"글쎄 말이야 , 말세야 ,말세..."
"차라리 도둑세상에 우리 혼자만 고고하게 살면 무엇하나? 같이 도둑질이나 하지...."
"............"
백성들의 의식이 이지경에 이르렀는데도 관리들은 세금 걷기에만 혈안이 되어 농민들은 숨통이 막힐 지경이었다
농민들중에는 곳곳에 도둑이 생기고 떼강도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도둑이 되어야만 먹고 살수있는 세상이라면 그야말로 무서운 세상이 아닐수 없었다 .

백성들이야 죽거나 말거나 나라 전체가 흔들리거나 말거나 조정은 백성들로 부터 세금 걷워 들이기에 혈안이 되어있고 청.일 양국과 게다가 러시아 까지 합처서 조선조정에 온갖 수작을 걸어 오는데도 조선 조정은 갈피를 못잡고 비틀거리고있었다.
다행히 성공한것 하나가 있었으니 거문도에 상륙 했던 영국이 러시아가 조선에 간섭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거문도에서 물러 나게 하였다

고종 25 년
하늘도 무심하게 가엾은 조선 농민들을 울리는 경상, 충청, 전라도 지역에 흉년 까지 들었다 . 평안도 지방에는 대홍수 가지고 함경도는 한해로 농사를 모두 망치었다
마침내 함경도 지방에서 민란이 터지었고 전라도 전주, 광양,에서도 민란이 일어났다
특히 함경도에서는 함경감사 조병식이 민란을 진압시킨후 소위 방곡령을 발포한다

"함경도에는흉년으로 살수 없는 백성들이 부지기수이니 앞으로 함경도내에서 생산되는 곡물은 일본 상인들에게 파는것을 일체 금한다 "

놀란것은 일본 상인들이었다
일본 상인들은 일본 공사관에 압력을 넣었다 .일본 공사는 조선 조정에 조약 위반을 들어 강력히 항의 하였다
"함경 감사가 방곡령이라는 것을 발표하여 우리 상인들의 손해가 말이 아니오 .우리가 봄에 꾸어준 돈을 받아 내려면 돈은 없으니 대신 양곡으로 받아 내어야 하는데 방곡령을 풀지 않으면 우리가 누구에게서 배상을 받는 다는 말이요?"
결국 조선 조정은 방곡령을 취소하고 농민 대신 배상금 까지 일본에 해주기로하고 마무리지었다 .
어처구니없는 해결이었다

전국에서는 크고작은 민란들이 일기 시작했고 정부는 이들을 막내기에 정신을 차릴수가없었다 .여기 저기에서 날뛰는 떼 강도들이 세상을 더 불안하게 하였다
조정에서 걷운 세금을 운반 도중 떼 강도들이 습격 탈취 하는가 하면 서울 안에 있는 청국 상인들의 상점을 습격 탈취해 가기도 하였다
"화적(뗴강도)들이 날뛰니 세상 무서워 살수있나?"
청나라 상인들도 불만이 보통이 아니었다
"얘기를 들으니 화적들이 산속에 소굴을 설치하고 물건을 엄청나게 빼앗아 갔다는데 모두 우리네 청나라 상점 아니면 일본 상점이라네....도대체 조선 정부는 무엇하는 거야?"
외국상인들도 장사를 할수 없겠지만 조선의 백성들은 어디에 더 마음을 붙일데가 없어 전국을 방황 하였다

백성들의 한숨이 끊이지 않을때 공허한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 잡는 동학이라는 종교가 발생 하였으니 이는 도탄에 빠진 농민들에게는 보통이상의 위안이었던 것이다.
동학을 일으킨 최제우는 고종 30 년 대구에서 사형 당하였다 .이유는 요사스러운 종교를 퍼뜨려 백성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조정은 교주 최제우 만 죽이었지 동학 은 죽이지 못하였으니 그 후임으로 최시형이 그 대통을 받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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