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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오군란은 조선에서 일본 세력을 일단 저지 시킨 결과를 가져왔다.
대신 청나라가 큰 소리치는 세상으로 바뀌어 버렸다 .조정 대신들도 청나라를 떠 받드는 사람이 더 많아 지었다 .
일본에 관해서도 도 조약을 맺었기 때문에 이를 지키지 않으면 않되었다.그들이 요구조건 몇개 조항중 우선 일본의 사절을 보내는 것이 제일 쉬운 방법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택하기로 하였다.
일본에 임오 군란 사건을 사죄하는 사절로는 20 대의 젊은 선비들을 보내기로 하였다
철종의 22살의 사위인 박영효를 비롯하여 김옥균, 홍영식,서광범,서재필등 모두 새파란 20 대였다 .모두들 명문집 자식들로서 일찍 부터 개화에 관심이 많은 청년들었다
이 청년들은 조선이 청나라에 너무 의존하는데 대한 반감을 평소에 갖고 있었다 .더구나 대원군이 납치 아닌 납치를 당하고 청나라에 가 있는마당에 세상 물정을 전혀 모르는 청년들이 아니었다 .
그들은 청나라의 영향을 받지 않는 독립 국가를 원했다
(일본은 처음 부터 중국에 영향을 받지 않고 일찍부터 서양 문물을 받아 독립국가로서 강하게 나가고있는데 우리나라는 왜 청나라의 압력에서 벗어나지 못할까?)
회의에 빠지지 않을수 밖에 없었다 .
(그렇다 ,강하지 않으면 않된다 고구려가 강했을 때는 고구려의 영향으로 중국땅에서 수나라가 망하고 당나라가 들어서지 않았는가? 중국이 강하기 때문에 조선이 힘을 못 쓰는 것이다 )
그들은 일본이 이룩한 명치 유신을 연구하였다.
명치 유신이란 일본 왕의 명령으로 세상이 새로워 진다는 뜻에서 만들어진 명칭으로 일본이라는 나라가 그때 까지 형식적인 왕아래 실제적 권력을 갖고 있던 여러 제후들이 각자의 땅을 갖고 제멋대로 나라를 흔들어 대고 있었는데 명치시대 혁명으로 국가조직을 왕에게 권력을 집중시켜 획기적 발전을 이룩한 것을 말한다
여기서 제후들이란 소위 칼을 잘쓰는 소위 장군(將軍)들로서 이들이 정무를 맡아 보던 곳인 막부(幕府)의 실력자를 말한다 .
이른바 왕이 힘을 못쓰는, 장군들의 시대를 일본에서는 막부시대(幕府時代)라 부른다 .
이러한 일본의 막부의 실력자 들은 자기네들 끼리 의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으로 인한 실정으로 나라가 어지러워 질대로 어지러워 지었다 .막부의 장군들은 재정이 궁핍해지자 돈이 필요 했다.
그들은 농민들에게 기존 세금에다 덧붙여 마구 새로운 세금을 부과 시켜 백성들은 불만이 팽배 할대로 팽배 되어 있었다 .도시도 마찬가지였다 .도시의 하층민들은 생계수단이 없는데도 막부는 마구 세금을 부과시켜 도시민들의 불만도 고조 될대로 고조 되어 있었다
이때 미국의 동인도 함대 사령관 페리 제독의 일본 의 문호 개방 요구 국서까지 전달되었다 .
이에 국내외적으로 일본은 큰 위기에 처하자 일본의 젊은 청년들은 외세의 무력적 침략 책동과 국내 불안을 의식 제각각의 막부를 통합 시켜야 겠다는 운동이 발생 되었다.
결국 통일과 강화를 위한 천황정권 수립을 청원하게 이르렀다 .
이때부터 일본은 왕의 권위를 극대화 하기위하여 그때 까지 부르던 왕이란 칭호를 천황 이라고 고쳐 부르고 세금으로 이반된 민심을 결집 하기위하여 백성들과 지방 호족을 상대로 막부세력의 무력화를 기도한다
새로운 천황정부는 개혁 정책을 발표 했는데 주요 시책은 다음과 같다
1. 통일 국가의 건설,천황의 권력 강화,
2. 서양 문화의 섭취로 부국 강병 실현,
3. 신분 여하를 불문하고 의무 교육제도 실현,
4. 국민 개병제 실시로 전국민이 병역의무를지되 지금까지의 무사군대(武士軍隊)폐지,
5. 지금까지 갖고 있던 장군들의 토지를 몰수하고 농민들에게 토지 분배
이러한 천황 정부의 발표는 모두가 유럽과 미국 제도를 모방하여 제정 된것으로 법령,제도,내용등의 형식면에서 완전 서구식 이었다.
이에 한때는 일본 무사들의 대변인이라 할수있는 막부가, 전쟁을 일으키어 천황정부에대한 반기를 들었으나 이를 진압 하자 통일국가 건설과 자본주의 경제의 활성화로 일본은 국가기반이 든든할대로 든든해지었다
조선의 박영효, 김옥균, 홍영식, 서광범, 서재필등 젊은 청년들은 일본의 이러한 사정을 어느새 다 파악하고있었다 . 모두가 양반집 자손이고 모두 똒똑한 청년들이었다
(우리 나라도 일본 처럼 서양 문물을 받아 들이고 일본의 명치유신의 본보기를 배워 나라를 바로 일으키자)
이것이 이들의 생각이었다 .
반면 김홍집, 어윤중, 김윤식,민영익등은 청나라에 자주들며 청나라를 통하여 개화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본에 대한 수교를 위하여 떠나는 박영효는 표면적으로는 임오군란 사죄를 위하여 일본의 수신사로 간다 하지만 내심으로는 일본의 명치 유신을 더 자세히 알아 보기 위함이 더 컸다.
고종 19년이었다.
그들이 남양만을 떠나 명치환이라는 배를 타고 일본으로 향 할때에는 감개가 무량하였다 .서해 바다의 푸른 물결이 그의 앞날을 축복 해주는듯 하였다 .
박영효는 갑판위로 올라왔다 .배의 엔진소리가 서양의 문물덕이라고 생각 하고 있다가 문득 갑판위에 높이 세운 일본 국기를 목도하게 되었다
푸른 바다를 헤치고 달리는 뱃전에 휘날리는 일본국기......
박영효는 일본 국기를 보자 강화도 사건이 생각났다 .
당시 강화도 초지진 앞바다에 나타난 일본배에도 일본기가 계양되었는데 왜 어느나라배냐고 물어 트집을 잡아 포격했느냐고 했던 일본공사의 주장이었다.
물론 우리나라에는 국기가 무엇인지 조차 모르고 있었으니 말이다 .
박영효는
(우리도 당당히 조선 수신사라는 국기가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고 문득 떠올랐다.
그는 자기방으로 돌아와 열심히 국기를 그려보았다 .
(우주 만물은 해와 달이있고 남과 여가 있듯이 음과 양이있다 .그것이 통합 하여 우주를 만들 듯이 우리나라도 음과양이 어루어진 국기를 만들자 )
그는 음과양으로 나누어진 빨강색과 파랑색으로 나누어 그것을 둥근 원안에 집어 넣었다 .
( 그리고 만물의 표시인 하늘, 불, 물, 토지가 우리나라를 감싸고 영원히 이끌어주리라는 뜻에서 여덟 괘를 표시하자 )
그는 열심히 그리었다
(이만하면 자손만대에 내 놓을 만한 국기가 되겠지... 그런데 이름을 무어라 할까? 가운데 둥근것이 통합을 의미하는것이니 태극기라하자.....)
마음에 들었다.
배는 일본 신호항에 닿았다
조선 수신사 일행은 객관으로 인도되었다 . 일본 공사가 찾아왔다
"먼길 오시느라고 수고 많으셨오 ,조선의 사신이 오셨으니 조선 국기라도 걸어 놓으셔야지요"
일본공사는 조선 국기가 없다는것을 미리 알고 일부러 능청을 떨었다 .상대의 기를 꺾는 방법도 여러가지였다 .
박영효는 하나부사 일본 공사의 눈을 쏘아보며 품속에서 아까그린 태극기를 꺼내었다 .
"여기 우리나라 국기를 가져 왔소이다"
일본 공사는 자세히 들여다 보더니
"잘 그리시기는 했는데 우리나라 국기 모양으로 태양을 표시 하시지 웬 파랑 빨강으로 나누시었소?"
"허....... 공사....... 세상에는 태양 만있습니까?"
"달도 있지요 "
"세상에는 남자만 살아가지고 살수있습니까?"
"여자도 있어야지요"
"거 보시오 ,세상 우주 만물은 음과 양이 조화가 되지 않으면 존재 할수가 없는것이오 . 주위의 팔괘는 천지 만물이 가호하는것을 의미합니다"
"허... 놀랍습니다"
하나부사는 그때서야 감탄사를 연발한다
이날 신호항에는 조선 최초의 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이고있었다.
일본측은 조선 수신사를 극진히 대접하였다
임오군란으로 약화된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발휘 하자면 이러한 청년 들이 필요했기때문이었다.
이들이 일본에서 돌아 왔을때는 조정에서는 민영익을 비롯하여 조영하, 민태호, 윤태준등이 세력을 공고히하고있었다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