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이야기 (91회)-일본의그림자-

by 5443738 posted Jan 01, 1970 Views 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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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다시 부산하에 군함 3 척이 먼저 들어 오고 나중에 상선 3 척이 추가로 부산항에 들어왔다 . 도합 6 척에는 군사 800 명이 탑승 하고 있었다.
일본 전권대사 흑전청융(黑田 淸隆)은 부산항에 들어오면서 주위의 반응을 살피었다 .흑전은 혹시 조선군이 포사격이있을지몰라 만반의 준비를 하고있었다 .만일 조선군과 싸움이 벌어지면 한바탕 결전의 태세를 갖추고 자기본토 하관(下關)에는 2개여단 병력까지 대기 시켜 놓고왔다 .

흑전은 동래부사와의 면담을 요청하였다.
"우리가 이번에 조선에 온것은 요전번 강화도에서 청나라로 가기위하여 항해중 길을 잘못들어 초지진 근방을 항해중이었는데 귀 포대에서 아무런 이유없이 평화적으로 항해중인 운양호에 포격을 가했기에 우리가 응징하기는 했지만 당시 우리로서는 승패를 불문하고 우리를 무시한 처사임으로 귀국의 국왕을 만나뵙고 따지고자함이오"
동래부사는 흑전의 얘기를 듣고 어이가 없었다
"그 전투로 손해본것은 우리가 더 많은데 무엇을 따진다는 말이오?"
"그것은 부사께서 현장에 없었기때문에 하는 얘기요"
"그래서 어쩌겠다는것이오?"
"내가 국왕을 뵈러 강화도로 가겠으니 항로 방해나 하지마시오"
"......"

흑전은 다음날 동래부사의 대답도 듣지도 않고 강화도로 함대를 몰았다
고종 13 년 1월 10일이었다
흑전은 일본함대를 이끌고 황해바다의 거센 물결을 헤치고 강화도 초지진 앞바다에 닻을 내리었다 .초지진은 운양호사건 때와는 달리 조용하기만 하였다 .
흑전은 남양부사와 강화부 판관을 만나 조선 국왕과의 면담과 조선 조정과의 회담을 요구하였다 .말이 통하지않아 글로서
"국왕께서는 몸이 불편하여 만날수 없고 조정에 이사실을 알리리다"
하고 답변하고 조정에 이사실을 보고하였다

다급해진 조정은 오경석 당상 역관을 보내 일본의 진의를 알아오라하였다.
역관 오경석은 중국어뿐만아니라 일본어에도 능통한 역관이었다 .그는 청나라에있다가온 경험이있기때문에 항상 조선의 쇄국정치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있던 사람이었다 .그는 조선의 살길은 외국과 문호를 개방하고 선진국의 기술을 받아 들임으로서 국가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어쨌든 흑전을 만나고온 오경석은 조정에 돌아와 국가의 문호를 개방하여야 한다고 역설하고 일본이요구하는 회담을 일단 열엉야 한다고 주장했다 .

그러나 조정은 유생들의 반대와 대원군의 의중이 무서워 회담을 응하느냐 마느냐 문제로 우물 쭈물하고있었다.
고종도 처음당하는 일이라 어쩔줄 모르고 있다가 이런경우 대원군의 판단은 어떨까하고 차라리 대원군에게 물어볼까 하는 생각을 하고있었다
이 눈치를 알고 민비가 나섰다

"전하, 회담을 거부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지금까지 어느나라와도 대화를 나누지않았기 때문에 우리나라는 대외적인 모든일이 청나라를 통하지않으면 않되었습니다 .청나라는 지금 외국에 모든것이 개방되어 눈코 뜰새 없습니다 .일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이대로만 있어서 어떻게 하시겠다는 말씀입니까?
이시점에서 일본과 회담을 거절 하겠다면 일본과 한바탕 전쟁을 벌려야 합니다 . 회담 하나 하면 될것을 가지고 전투를 벌려 피를 흘려서야 되겠습니까 "
".........."
고종은 민비의 말이 옳은것 같았으나 선뜻 일본의 회담요구를 받아들이기를 망설이었다 .

결국, 조선은 민비의 주장대로 외국과는 제일 처음으로 일본과 정식 회담을 하기로하였다.
일본은 흑전 전권대사를 비롯하여 47명의 대표단을 구성하였고 조선에는 어영대장 신헌을 판중추부사로 임명하여 회담 대표로 하고 도총부부총관 윤자승을 부사로임명 회담에 임하게 하였다
회담 결열시 불상사가 일어 날지 모른다는 이유로 어영중군 양주태,금위중군 신숙에게 명하여 행주와 염창을 지키도록 하였다

회담장에서 흑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역사적으로 두나라가 사이가 좋지못하였는데 오늘 풀도록 합시다"
"좋습니다,두나라가 그동안 사이가 나쁜것은 우리 조선이 나쁜것이아니라 귀국이 항상 우리나라 해안을 침범했던 역사때문이오"
흑전의 표정이 좋지않았다
"과거의 귀국이 말하는것은 귀국이 항상 말하는 왜구를 말하는 모양인데 왜구는 우리가 살기 어려웠던 시절 선진국이었던 귀국에 붙어서 살려고 들어간것을 귀국이 박대 했기때문이오, 지금 우리는 구차하게 그런 짓을 않합니다,지금 왜구 사라진지가 언제라고 그런 말씀을 하오?
쓸데 없는과거얘기는 그만두고 요전번 우리 운양호가 청나라로 가는길에 길을 잘못 들어 귀국 해안을 본의 아니게 지나게 되었는데 귀국의 군대가 무차멸 포격을 가하여 우리의 손해가 보통이아니었습니다 .이것이 이웃나라인 일본에게 할짓이오?"

"초지진은 우리의 안보와 직결된 제일 중요한 지역입니다 .그런데 귀국의 배가 아무런 예고도 없이 들어왔기에 우리 군사가 어느나라 배이냐고 물었는데도 대답도 없이 계속 들어오지않았습니까? 그러니 발포할수 밖에 없지요 "
"그건 얘기가 않됩니다 .우리 운양호에는 당시 일본 국기가 계양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나라 배냐?하고 물은 것자체가 트집을 잡기위한 것이아니고 무엇입니까?"
조선은 그때 까지도 국기라는것이있는줄 모르고있었다
"국기라는것이 무어요?"
"나라를 상징하는 기입니다"
"그런것은 우리로서는 아랑곳 할바아니오 . 오징어잡이배라는 표시인지 ? 만선이라는 표시의 배 깃발인지 우리가 어떻게 안다는 말이오?

조선과 일본은 얘기가 통하지 않았다
"지금 이런것 가지고 소모전을 벌릴때가 아니고 단도 직입적으로 말씀드리리다 "
흑전은 별안간 화두를 바꾸었다
"무슨 말씀이오?"
"수호 조약을 맺을거요? 않맺을거요"
흑전이 약간 고압적으로 나왔다
"도대체 조약이 무슨 필요 있다고 조약 조약 하십니까?"
부사 윤자승이 못 마땅 하다는 표정으로 대답 하였다 .판중추부사이며 회담대표인 신헌이 윤자승을 따로 불렀다
"저자들이 조약 하자고 자꾸 얘기 하고 있는데 조약을 하자면 절차가 어떤거요?'
어영 대장이나 하면서 왕을 호위하던 무관 출신 신헌이 조약에 관하여 알턱이없었다.
윤자승이도 마찬 가지였다 지금 까지 쇄국정책으로 조약을 맺은 국가가 없기 때문이었다

신헌은 결정을 못하고 조정에 보고하고 조정에서 결정한 결과에 따라 임하기로 하였다 .
조정도 마찬 가지였다 .고종도 뾰죽한 방법이 없었다 .또다시 대원군의 의견을 듣고싶은 생각이 불현듯 떠 올랐다
"않되겠소, 이런 일은 아버님께 엿쭈어 보고 하는게 현명 하겠소"
하고 말하자 윤비가 가만 있지 않았다.
"전하, 그런 문제를 가지고 새삼스러히 임금이 아버지나 찾아 다니며 일일히 물어보고 다닌다는 얘기가 나오면 임금의 체면이 무엇이 되겠습니까? 대신들 중에도 지혜로운 사람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조정에서 어떻게 하든지 결정을 내리십시요 "

고종이 얘기들어보니 맞는 얘기다 .일일히 지금에와서 대원군에게 묻는다것도 어불성설이다. 강화도에서는 신대표로 부터 어서 결정을 내려달라고 독촉이왔다
잠시후 조정 경연장에는 회의가 다시열렸다
"일본측에서 국교를 맺자고 조약문 까지 보내왔는데 어떡하면 좋겠소? 일본과 조약을 맺느냐 전쟁을 치루느냐 두가지중에 한가지를 택하여야 하오 "
임금의 질문에 대신들도 몸을 사리고 대답 없이 침묵만 흘렀다.전쟁이냐 조약이냐 를 결정 할 중대사를 함부로 지껄일 수 없기 때문이었다

고종이 조약문을 조목 조목 읽게 하여 대신들의 의견을 물었다 .
"제1조를 보면 조선을 자주 독립국으로 인정 한다고 하는데 ..."
"전하 만일 청나라가 알면 어찌 하시렵니까? 청나라는 황제가 이것을 알면 조선을 그냥 두지 않을 것입니다"
이유원이 이유를 대었다 .
"조선이 독립국 이라는 것은 세계가 다 아는데 청나라가 무슨 소리를 한다는 것이오?"
박규수가 나서서 반박하였다
왕이 듣다 못하여
"우리나라는 자주 독립국이오 여러말 마시오"
하고 못을 박자 주위가 잠잠해지었다
"다음을 읽어보라 "
"제2조 두나라는 서로 사신을 보내 통상의 사무를 보게한다 "
"그럼 됐다 "
고종은 일사 천리로 결정해 나갔다
"그다음 계속 읽으라 "
"조선국은 부산, 경기, 충청,전라, 함경 5도중 항구 두곳을 개방하고 "
"그다음...."
"일본은 조선의 해안선을 측량하도록 허락하고 측량도중 조선법에 어긋나더라도 그부분에 대해서는 일본이 알아서 처벌 토록한다 "
"안되옵니다 .일본이어찌 우리 해안을 측량 할것이며 불법 행위시에는 우리법에 의해 처벌 하는것이 지당한데 저의들 법으로 한다니요?"
홍순목이 저극 반대하고 나섰다
"측랼은 우리 기술로서 못하고 있는 것을 저들이 해준다는데 뭐가 나쁘다는 말이오?그리고 일본인들이 우리 나라에 와서 불법 행위 할일이 무엇 있겠소? 그냥 승인해도 무방 할것 같습니다 "김병국이 조약 맺을 것을 건의 하였다

고종은 결국 조약을 맺도록 승인하고만다
"그러면 일본인들이 측량선 이외 우리나라에 들어 올 염려가 없을 것이니 맨나중 조목만 삭제하고 조약을 맺도록 하시오"

조정은 결국 조약문 중 몇자만 고치고 조약을 맺으라고 영을 내리고 말았다.
고종 13 년 2 월 3 일
외국과의 조약을 처음으로 맺는 강화도 조약이 체결된다
병자년에 이루어 지었다 하여 병자 수호 조약 이라고도 부른다 .
대원군이 만든 쇄국 정책이 일순간에 무너지는 순간 이었다 . 외국의 사나운 물결이 봇물처럼 쏟아저 들어 오는데 대한 아무런 준비도 없이 빗장을 풀은 셈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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