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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이 정권을 잡고있는 동안 조선은 일본에 대해서도 쇄국 정책으로 일관 하였다.
일본은 몇 차례 사람을 보내 외교 관계를 맺자고 하였으나 대원군은 만나 주지 않았다 .
고종 8년 8월이었다.
화방의질(花房義質)이라는 일본 관리가 군함 두척을 끌고 부산 앞 바다에 나타났다 .
훈도 안병준이 통역을 데리고 화방의질과 마주 앉았다
"통상을 하자면 일반 배를 갖고 와야지 군함을 두척이나 끌고 온 저의가 무어요?"
하고 안병준이 흴란 하자 화방의질은
"우리 일본은 목선이 없어진지 오래입니다 ,보시다 시피 이배는 군함이 아니라 화륜선일 다름이오"
하고 변명을 늘어 놓았다
화륜선은 서양이 벌써 개발한 배로 군함에나 쓰는 배였다 .조선의 동정을 살피러 온것이었다.
"우리 조선은 외국과 발을 끊은지 오래 되었오 ,이렇게 무례하게 예고도 없이 남의 나라 바다에 나타나도 되는거요? 당장 물러 가시오"
동래 부사 정현덕이 부랴부랴 나타나 화방의질에게 일침을 가했다
"그게아니고...."
"여러 말 필요 없소..어서 돌아 가시오 ,만일 안 물러가면 우리가 알아서 할터이니 그리아 시오"
안동준과 정현덕은 약속이나 한듯이 회담장을 나와 버렸다. 동래부사 정현덕은 대원군의 심복으로 이곳에 벼슬하고 지내온 유력자였다 .
"아니 통상 문제를 협의 하자고 왔는데 이렇게 무례할수있소?"
화방의질도 만만치 않았다 .
(요시 어디 두고 보자 )
화방의질은 더 이상 말을 못하고 물러 갈수 밖에 없었다
이사실이 고종에게 보고가 들어갔다.
민비가 고종에게 일본에 대한 외교 문제를 거론하였다
"전하 , 이웃 나라인 일본은 우리와 이해 관계가 많은 나라입니다 .일본은 일찌기 서양에 문호를 개방항여 새로운 문물이 들어와 날로 발전하고 있다는데 구태어 일본과 외교 관계를 거부 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일본은 삼국 시대 부터 얼마 전 까지 계속 우리나라 해안을 괴롭힌 나라가 아니오? 임진왜란 이후 일본과 국교가 소원한 상태 인데다가 아버님의 쇄국 정치로 일본과도 교류를 끊고 살았는데 지금에 와서 어찌한단 말이오?"
"전하, 세계는 한 없이 넓습니다. 그러므로 나라가 흥하고 쇠하듯이 외교라는것도 서로가 평화롭게 지날때가 있고 서로 적대시할때가 있습니다 이와같이 서로가 다른것은 왜 그렇겠습니까?그것은 정치를 하는 사람들이 현명하든가 아니면 우매하기때문입니다 .
삼국 시대 부터 얼마 전 까지 우리는 이러한 모든것이 하늘의 운세에 따라 저절로 그럴때가 왔으니 온것이라고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나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
전하 ,왜 두려워 하십니까 ? 일본이 저 토록 발전하고 있는것도 서양 문물을 받아 들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앞으로 적극 대처 하여야 합니다"
"옳은 얘기요"
고종도 대원군이 없는 마당에 무엇인가 외교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전하 , 듣자니 일본측에서 안병준과 정현덕의 소행이 외교의례상 무례 하다고 하고갔다는데 굳이 적대시 할필요가 없습니다."
"동래부사 정현덕이 더 그런 모양이더군 ......"
"전하 그들을 인사 조치하고 일본을 달래는것이 좋을듯합니다"
다음날 고종은 동래부사 정현덕을 갈아 치우고 새 부사로 박제관을 , 훈도도 현석운으로 갈아 치웠다. 훈도 안동준에게는 귀양 까지 보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일본 정부의 이사관 삼산무(森山茂)와 외무성 관리 광진홍신(廣津弘信)가 다시 동래로 나타났다 .삼산무가 일본의 외무대신이 조선의 예조판서에게 보내는 서한도 가지고 왔다
서울의 조정에서는 그들을 잘 대접 해보내라하였다 .뜻밖에 환대를 받은 일본 관리들은 잘 있다가 돌아갔다
이소문을 들은 유생들이 가만히 있지를 않았다
상소문이 쇄도하였다
일본은 서양 오랑캐나 다름 없는 놈들이니 국교를 맺어서는 않된다며 대원군도 이것을 알고 일본의 국서 조차 받지 않았는데 국왕이 친정을 하는 마당에 이를 받는다는것은 한심 하다는 것이었다 .이럴바에는 차라리 대원군을 다시 모시자는 내용이었다
고종은 이를 받아 들이지 않고 모두 잡아 넣고 유배를 보내 었지만 끊일 줄몰랐다
민씨 일색인 조정에서는 외국과 통상을 반대하는 자들은 모두 대원군파로 몰고 구속하고 귀양 보내고 죽이기 까지 하였다 .
민심이 다시 동요하기 시작했다
이 사이에 불탓던 경복궁이 수리되어 다시 돌아왔다 .
일본으로 돌아간 광진홍신은
"조선은 대원군파와 민비파가 서로 갈등관계로 국론이 분열 되어있습니다 .지금은 민비파가 정권을 잡고있으나 언제 바뀔지 모릅니다.우선 대원군이 다시 정권을 잡기전에 우선 조선의 각 해안을 점검하고 조선에대한 대책을 세워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하고 의견을 피력하였다 .
일본정부의 외무성과 해군성은 광진 홍신의 의견을 받아들여 조선 해안을 정탐하기로 하였다 .
처음에는 군함 3척으로 해안을 살피더니 5척의 군함이 되어 남해안을 두루 살피다가 슬금슬금 강화도 까지 나타났다
초지진까지 접근 한것이었다
초지진 포대에서는 일본 배에 포를 쏘았다 .대원군이 만들어 놓은 초지진 포대는 어느나라 배를 막론하고 들어오면 포를 발사하게 되어있었다
조선군이 대포를 발사하자 일본 의 운양호(雲楊號)도 대포를 쏘기 시작하였다 .
그러나 싸움이 벌어지자 조선군이 형편 없이 불리했다
사정거리 1km를 넘는 함포와 사정거리 700m를 넘지 못하는 초지진 포로는 어림도 없었다 조선의 대포알은 운양호로 날아 가다가 도중에 힘없이 떨어지고 한방도 맞지않았다.반면 운양호에서 쏜 대포알은 여지없이 초지진포대를 때리어 박살을 내었다 .
운양호는 일단 먼 바다로 다시 나갔다가 다음날 영종진으로 본격적인 상륙전을 벌리었다
조선군은 질겁을 하며 도망 하기에 바빳다 영종진 첨사 이민덕도 병사들 틈에끼어 도망치기에 바빳다 .일본군은 결국 영종진을 점령하였다 이 싸움에서 조선군은 전사자가 35 명이나 나왔고 16 명이 포로로 잡히었다 . 일본군은 2 명만 겨우 부상했을 뿐이었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패배였다.
조정은 어처구니 없는 패배로 대원군파나 유생들로 부터 비난 받을 가 두려워 조선군이 먼저 운양호에 대포를 쏘았기 때문에 일본이 대응 한것뿐 이라고 조선군을 두둔하기커녕 일본을 감싸는듯한 엉뚱한 보고를 고종에게 했다 .
민씨 일색인 조정은 이일이 흐지부지 넘어가기를 바랐다 .
일본은 조선에 막대한 손해를 끼치고 조선의 반응을 또 살피기 위해 부산 왜관에 물건을 댄다는 이유로 다시 부산 앞 바다에 나타났다 .운양호 사건으로 혹시 조선이 강하게 반발하여 나오지 않을 조바심하며 조심스럽게 부산 앞 바다에 들어 섰는데 뜻 밖에 일이 벌어지었다 .
조선 관원은 우려와는 달리 일본인들에게 웃는 낯으로 환대하며 맞이 하는게 아닌가?
조선 조정은 일본과의 갈등이 노골화 되면 오히려 대원군파나 유생들에게 비판의 빌미를 줄까 두려워 되도록이면 일본과 마찰을 빗지 말고 조용히 끝내라는 지시를 한것이다
어느새 조선에게는 일본이라는 나라는 무서운 존재로 변하여 있었고 일본은 조선을 깔보는 위치로 변해 있었다
일본 전권 대사 흑전청융(黑田淸隆)은 평화적으로 들어간 운양호에 조선군이 먼저 포를 쏘아 일본을 업신 여긴것이라고 하며 조선의 당상역관 오경석을 통하여 조선 정부와 통상 회담을 요구했다.
그러나 조정대신들은 유생들의 반대가 두려워 우물쭈물하고있었다.
게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