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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은 왕의 위엄을 보이려고 경복궁을 중건하는 과정에서 원납전을 걷워 내고 결두전이라는 세금을 고율로 올려 징수하고 있지도 않던 4 대문 출입세 까지 받는 것도 모자라서 전국 가가지의 노송과 돌을 강제 징발하는 등 백성들의 원성을 사서 받아 들였다.

고종2 년에는 경복궁 중건 재정 염출을 빙자하며 엉뚱하게 포교들이 천주교 신자 홍봉주의 집을 수색하여 천주교 외국인 신부의 소지품까지 조사를 했고 다음해 1월 5일에는 천주교도 중에서 이름이 널리 알려진 베드로 , 마태오, 베르누라는 외국인 신부와 조선인 전장운, 최형, 남종삼을 체포하여 모두 참수하였다.

국내에 잠복 하고 있던 신부12 명중에서 9 명이 참수 당한 것이다.
외국인 신부가 참수 당하자 조선인 신도들이 속속 잡혀 들어 왔는데 고종 3 년 조선인 천주교도 학살자 수는 자그만치 8 천명이나 되었다

이때 잡히지 않은 프랑스 신부 리델이 구사 일생으로 조선인 신도11 명과 같이 배를 타고 청나라로 도망하여 청 나라 에있는 불란서 벨로네 공사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
프랑스 해군 제독으로 청 나라에 머물고 있던 로즈 제독은 3 척의 군함으로 산동성을 떠나 황해 바다를 건너와 한강 하류에서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마포 서강 근방을 정탐후 일단 돌아갔다 .

마포강근방의 지리를 알고간 로즈제독은 일곱척의 군함과 병력 1000 명을 이끌고 강화도를 점령 하였다 .조선군은 이들과 격전을 벌렸으나 그들의 우수한 화력에 대응하지 못하다가 제주 목사 양헌수의 분전으로 정족 산성에서 승리하여 서울 침공을 중단하고 일단 퇴각했다 .
대원군은 프랑스군이 힘이없어서 물러 간것이라고 자만하며 자신 만만하게 더욱 외국인 신부들의 접근을 못하게 하였다 .역사는 이를 병인 양요라 부른다 .

고종이 철종의 3 년상을 마치자 왕비 책립 문제가 대두 되었다.
시아버지가 될 흥선 대원군은 며느리를 맞아 들임에 앞서 순조,헌종 , 철종의 3 대의 걸친 60 년의 경주김씨, 안동김씨, 풍양조씨 외척 세력을 엄두에 두지않을수 없었다 .
(외척들이문제야...)
10 대의 어린왕을 허수아비로 세워 놓고 대왕 대비들이 수렴청정을 밥먹듯이 하였고 대비들을 싸고도는 친정 오라비들이 나라의 정치를 주물러왔기 때문이었다 .
외척들 농간에 그동안 왕실은 그떡 하면 역모로 몰려 왕이 자기형을 죽이고 동생을 죽이는 악 순환이 계속 되었던 것이다.

대원군은 며느리감을 관례에 의하여 대신들의 딸 중에서 간택 하는것이 일반이었으나 대신들 이래야 안동 김씨들과 풍양 조씨들이 전부인데 그들의 딸들을 왕비로 책정하는것은 호랑이 새끼를 키우는것이나 다름 없었다 .
(배경도 없고 외척의 득세 가능성이 없는 규수감을 골라야 한다...)

대원군은 며느리감 고르는 원칙을 가지고 고민하다가 결론을 내렸다
대원군은 자기부인 민씨 중에 쓸 만한 규수감을 골라 보라 하였다
"대감, 지금 까지 왕비는 대신들의 딸 들중에서 간택 되는것이 상례인데 하필이면 친정 친척에게서 고를려 하시는 이유는 무어요?"
대원군의 부인 민씨는 남편의 엉뚱한 생각에 반대를 하였다
"부인 , 지금 명복이가 누구요? 왕의 부인이 잘 들어서야 나라가 잘되고 왕실이 번창하는거요, 예를 들면 선왕3 대에 걸처 왕비 간택이 모두 안동 김씨 아니면 풍양 조씨들의 집안에서 나와 왕실이 그동안 얼마나 피해를 보았소?"
"물론 그렇기는 하옵니다 만은....."
"그러니 왕비 하나 잘못 간택하여 안동 김씨나 풍양 조씨집안에 또 세도 정치의 빌미를 주고싶지 않은거요"
"그럼 어떻게 하시려고요?"
"아까 말 한대로 부인의 친정 친족 중에서 규수감을 골라보시오"
"어떤 기준이 있어야지 친정 식구라고 아무나 할수 없는 것이 아니겠어요?'
"내가 기준을 말하리다.왕비가 될 처녀의 부모가 정치에 관여 못할 사람을 골라 보시오"
"하기야 어릴때부 터 영리하고 똑똑한 규수감이있는 하옵니다만 그 규수 감이 부모가 없어요"
"부모가 없다니? 누구를 얘기하는거요?"
"여성부원군 민치록 대감의 딸이 괞찬기는 한데......"
"민대감은 돌아 간지가 오래 되지 않았소?"
"어미도 일찍 여의고 혈혈 단신이지만 보통 영특한 아이가 아니랍니다"
" 그것참 안성맞춤이오 , 부모가 없으니 외척이 발호할 염려가 없어 좋고 영특하다니 왕실의 안정도 될 뿐만아니라 외척의 간섭이 없을것이니 정권의 안정도 될것이니 얼마나 좋은 일이오?
"............."

이렇게하여 흥선 대원군 부인 민씨가 천거 하는 형식으로 부모 없이 친척집에서 살고있던 고종보다 한살위인 민치록의 딸 민씨를 왕비로 간택하여 가례를 올리고 입궐한다
왕비의 나이가 당시 16살이고 고종의 나이가 15살이었다 .
이때는 경복궁 공사가 마무리된 때이고 고종은 신혼생활을 새로 지은 경복궁에서 하게 되었다 .
새집에서 신혼 생활을 맞이 하니 조정 대신들은 모두 이렇게 경사 스러운 일이 겹치는것은 고종이 복이 많은것이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추켜 올렸다

며느리를 새로 맞이한 대원군은 앞서 강화도에서 프랑스군을 몰아 낸데 고무되어 서해안 여러곳에 포대를 새로 세우고 함경도 변경에도 포대를 설치 언제든지 외침을 막아내도록 준비하였다
신무기 개발에 관심도 갖고 방비 대책도 소흘히 하지 않았다.
그러나 세계의 거센 물결은 한반도로 접근해 오고있었으니 미국 상선이 장사를 할 목적으로 대동강에거슬러 올라와 통상을 요구하다 평양 군민의 공격으로 불타 버린 사건이 발생했다 .미국은 이 사건의 손해 배상을 요구하며 강화도 초지진에 상륙 하였다가 미국으로 돌아간 사건이 발생하였다.

외국군이 우리나라에 상륙하여 통상을 요구하다 물러간 사건이었기때문에 한성을 침범 하거나 하는 정치 목적과는 애초 부터 없는 단순한 침범 사건이었다
그런데 대원군은 침략군을 물리 쳤다고 자만심에 빠저 전국 곳곳에 척화비를 세우는등 점 점 외국과 담을 쌓는 쇄국정치를 더욱 강화 하였다. 급박하게 세계 정세가 돌아가고있는데도 조선은 서양 사람들에게는 감추어진 은둔의 나라로 만 보고있었다.

그무렵 , 청나라 상해에 사무실을 둔 독일인 오페르트라는 상인이있었다.
오페르트는 두번이나 조선에 와서 대원군으로부터 통상을 요구 하다가 툇자를 맞고 돌아갔다
대원군은 외국인이라면 상대를 해 주지않았다
(어디두고보자)
로페르트는 원래 고종 3 년때 이미 프랑스 로즈 제독이 조선 원정때 안내원으로 왔다간 인물이었다.
더구나 당시 프랑스 신부 리델과 같이 청나라 프랑스 공사에게 찾아가 구원을 요청한 조선인 신도 11명과 조선과의 선교와 통상 방법을 의론하자 조선인 신도들이 대원군은 고집이세어 특단의 방법을쓰지않으면 응하지 않을것이라고 하며 그방법으로 충청도에 있는 남연군묘를 파내어 시체와 부장품을 가지고 대원군과 선교 문제와 통상문제 를 흥정 해야지 그냥은 응하지 않을것이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오페르트는 미국인 젠킨스, 프랑스인 페롱, 선장 묄러 ,조선인 안내자 2 명 ,유럽,필리핀,중국인등 140명으로 구성된 발굴 단을 구성하고 기선 2척을 충청도 구만포에 상륙하여 아라사인으로 사창하며 남연군 묘로 행진 하였다 도굴단은 가는 길에 민가를 습격 발굴 도구를 빼앗았다.
그들은 조선인들은 자기 조상의 시신을 소중히 다룬 다는 얘기를 듣고 협상 카드로 사용하기 위한 포석 이었다.

도굴단은 야간에 도굴을 시작했으나 묘지가 너무 견고하게 만들어 파내려 갈수가 없었다. 당초 남연군 묘를 만들때 관 주변에 양회를 발라 삽이나 곡괭이가 함부로 들어갈수 없도록 단단히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도리 없이 다음날 새벽 까지 목적 달성을 못하고 철수하고말았다
이사실은 덕산 군수로부터 즉각 운현궁에 보고되었다
"무엇이라고?"
대원군은 남연군묘 도굴 사건의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그놈들이 어느 나라 놈들이냐?"
"아라사라는 말을 들었습니다만 조선인 2 명이 따라왔는데 그들 입에서 사실은 독일인이라는 말을 들었다합니다 "
" 몇명 쯤 되던가 ?"
"150 여명쯤 되는데 모두 총으로 중무장을 하고 민가를 습격 ,도굴 도구를 빼앗아 가지고 도굴을 시작했다합니다"
"아버님 무덤은 어찌 되었느냐?"
"무덤이 견고하여 일단 시신 훼손은 면 하였습니다"
"허....이런 괫심한 일이....."

대원군은 자기아버지에 대한 애정이 지극한 사람이었다 .다행히 시신 까지는 건드리지 못하였다는 말에 일단 안도하였으나 화가 풀리지 않았다.
"분명히 이 사건은 천주교 사류들과 그 들에 편승한 양이들이 나를 굴복 시키기위한 장난이 분명하렸다, "
".........."
대원군은 즉각 대원위 분부를 발동한다
"여봐라, 안되겠다 .전국의 천주학 쟁이 들을 모두 색출 발본색원하라"

이사건을 계기로 대원군은 더욱 강하게 천주교 탄압령을 내리고 대외적 강경 대응주의자로 변하고 말았다.
결국 대원군은 대외적으로는 코 큰 양이(洋夷)들을 신뢰 못할 대상으로 보았고 대내적으로는 쇄국 양이 정책 강화와 천주교 탄압이라는 철퇴가 내려젔다.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시대에 역행하는 자기만의 아집을 낳았다
삼국 시대만해도 신라의 경우 장보고등 해상 왕국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당나라나 왜국과 활발한 교류로 세계정세와 보조를 맞추어 나갈수 있었다.백제도 왜국과 중국의 남조와의 교류가 활발하였고 고구려도 당나라와 교류를 멈추지않았다 .고려시대도 우리나라를 KOREA라고 불리 었을 정도로 멀리 멀리 아라비아 까지 상인들이 드나들었다 .
그러나 조선은 전통적으로 중국과 일본만의 사대 교린 정책을 고수 해왔기 때문에 서양의 문물과는 담을 쌓아왔다.

일본은 이미 문호를 개방 폴튜갈인으로부터 배운 조총이나 조선 기술을 가지고 임진왜란때 우리나라를 짓밟은 경험도있었다 .
그러나 우리나라는 굳게 문을 닫고 양이(洋夷)라고 부르면서 무슨 괴물이나 되는양 접근을 못하게 하였다.
헌종이후 우리나라에 급 물살을 타고 들어온 천주교를 따라 서양 각국들은 문호 개방을 요구 해왔다. 조정이 광범위한 문호 개방을 않자 서양 각국들은 천주교를 이용 접근 해오기 시작했다.

서양 각국은 천주교 선교단을 이용 교육,학문, 예술에 이르기 까지 광범위하게 포교 활동을 전개 하였기 때문에 군사력에 의한 포교에는 실패 했어도 기존의 주자학의 신념체계로 살아온 조선인들에게는 사상적으로 혼란이 올수 밖에 없었고 더구나 조선 왕조의 정책 결정 근본이 주자학적 사상에 젖어있던 위정자들에게는 큰 충격이 아닐수 없었다..

19세기의 세계정세는 힘있는 나라가 약한나라를 점령하여 식민지를 만들고 무지한 식민지 국민들을 제치고 많은 부(富)를 본국으가지고가서 영화를 누리던 시절이었다.이상황 하에서 조선의 선택은 서양 각국에 문호를 개방하고 외교 관계를 수립하고 새 문물을 받아 들이느냐. 아니면 철저한 쇄국 정책으로 외세의 침투를 적극적으로 배척하는냐 하는 두가지 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대원군은 쇄국을 선택했다.
대원군은 남연군 도굴사건이후 서울의 종로 네거리를 비롯한 전국 주요도시에 척화비를 세우고 서양 오랑캐와 결사 항전의 태세를 취하였다. 조선 정부가 그동안 외교 교섭을 요구하는 미국의 요구도 묵살 하자 미국도 조선과의 교류를 포기하고 물러갔다.

대원군은 득의 만만하였다
그는 두번에 걸친 양요를 계기로 자신이 생겨 서양을 얕보고 쇄국의 결의를 더욱 공고히하였다.
나라안의 정치를 개혁 한다며 밀어 부치던 대원군은 엉뚱하게도 경복궁 중수라는 거대한 공사로 재정은 파탄되고 .대외적으로는 쇄국정책을 밀고나가며 눈코 뜰새없던 동안 나라안에서는 대원군을 비판 하는 소리가 점점 커지기 시작하였다

권불 십년이라던가 대원군이 정권을 잡은지 10 년되던해 뜻밖에 만만치 않은 상대가 고개를 들고 일어났으니 그가 바로 구중궁궐 깊이 들어 있던 왕비 민씨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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