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보수라 부르지만 객관적 연구태도 갖춘 공산주의자 홉스봄(역사학자) 존경"
"개인적으로는 어떤 잘못된 시각에서 우리 역사가 제대로 조명되는 것을 원치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느낌까지 들었다. 좀 더 널리 학자들을 불러 모으고 힘을 모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한국현대사학회는 정치·경제·서양사·한국사는 물론 생활사 연구자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의 학자들로 구성됐고 대학자부터 신진학자까지 인적 구성도 전례가 드물게 넓은 편이다. 서양사학자이자 한국 최초의 여성 대사를 지낸 이인호 서울대 명예교수는 이 작업을 두고 "역사가 아닌데도 바로잡지 않으려는 경향을 정정하는 작업"이라고 설명했다.
◆사료조차 받아들이지 않는 현실
―한국현대사학회 출범의 의미는.
"우리 자신을 이해하려면 세계사적 맥락에 우리를 위치시켜 놓고 봐야 한다. 현실 관계를 사회과학적, 문화적 맥락에서 제대로 조명할 필요도 있다. 북한은 실패했고 대한민국은 성공했다. 그런데 아직도 마치 북에 정통성이 있는 것처럼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역사학이 현실을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다. 폭넓은 성향과 전공의 학자들이 참여해 근현대사 연구를 본격화하고, 그 성과를 확산시켜 국민 역사의식을 바로잡는 적극적 활동을 시작한다는 의미가 크다."
―기존에 뉴라이트 진영이 만든 한국현대사 대안 교과서도 있었다.
"기본적으로 잘 된 책이었다. 처음 책이 나온 뒤 보급도 잘 됐는데, 갑자기 신문 몇 군데에 좋지 않은 서평이 나오고 북한 로동신문까지 매도하는 논평을 내더니 책이 '죽어 버렸다'. 책이 죽는 것을 보고 역사가 제대로 조명되는 것을 원치 않는 배후 세력이 있다는 개인적 느낌도 들었다."
―'해방전후사의 인식'이 반(反),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이 정(正)이었다면, 이제 양쪽 시각을 아우르는 '합(合)'의 작업을 시작한다는 의미인가.
"학문은 항상 발전하는 것이다. 그 책들이 나왔을 당시를 생각하면 잘 몰라서일 수도 있겠고, 혹은 이념적 지향이 잘못돼 있으니 있는 사료(史料), 자료조차 보이지 않을 수도 있었을 거다. 이젠 상황이 다르다. 공산체제가 무너진 뒤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관계와 관련, 새 사료가 많이 나왔다. 이념적 편향을 극복하면서 있는 그대로 역사를 바라볼 수 있는 시기가 온 것이다. '해방전후사의 인식' 집필에 참여했던 학자들까지 참여하는 의미는 그래서 더 크다."
―현행 역사 교과서의 한국현대사 서술에는 어떤 한계가 있나.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는 증거가 분명한데도 교과서 쓰는 사람들이 고집해서 고쳐지지 않는 것들이 많다. 예를 들어 동학혁명 때의 '12개조 폐정개혁안' 같은 경우, 정확한 사료가 아니라 소설(1940년 출판된 오지영의 '역사소설 동학사')에만 실린 내용이라는 것이 이미 밝혀졌다. 해방 후 소련군과 미군의 포고문도 그렇다. 선전문구와 실질적 내용의 '부정교합'을 보지 못하고 '소련군은 해방군, 미군은 점령군'이라는 식의 시각이 여전히 존재한다. 교과서 집필 지침의 문제도 크다. 우리 역사에서 제일 중요하게 짚어가야 할 거대한 사건과 인물은 넣지 않고, 아주 지엽적인 것만 강조하기도 한다. 교과서는 분량이 한정되어 있으니 분명한 사실만 넣어도 부족하다. 그런데 그걸 놓고 싸움을 벌이고, 집필위원들이 다수결로 표결하는 말도 안 되는 일도 발생한다."
◆한국현대사연구는 이제 초보단계
―보수·진보를 막론하고 역사 서술에 한계가 분명히 존재했다.
"연구라는 건 항상 정화되고 극복되는 것이다. 철학이 달라서 다른 해석이 나오는 건 서로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기본적 사실의 골격은 같아야 하며, 왜곡해선 안 된다. 중요한 기본 사실을 알리지 않으면 역사 인식이 삐뚤어진다. 예를 들어 이승만을 '미국의 주구(走狗)'라고 표현하는 것이 그렇다. 사실 이승만은 미국이 가장 부담스러워했던 한국 지도자였다고 정확히 가르쳐야 한다."
―좌우 시각차이를 떠나, 한국 현대사연구가 미진했다는 지적으로 들린다.
"미진한 정도가 아니라 아주 초보 단계다. 역사 연구에는 그 시대를 산 사람들의 증언이 매우 중요하다. 초대 공군참모총장을 지낸 김정렬(1917~1992) 전 총리처럼 실제로 건국에 참여한 사람들의 회고록이 이제야 나오기 시작했다. 그들이 살았던 시대상과 맥락을 알고 있어야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보인다. 나 자신도 계속 공부하고 있다. 자기가 살아보지 않은 시대에 관해 편향된 몇 가지 사료만 보고 현실적 환경이 오늘날과 같다고 가정하고, 추상적으로 개념화해 이념적 입장을 갖고 해석하려 하면 안 된다. 다만 친북(親北)이냐 친(親)대한민국이냐의 구분은 중요하다. 대한민국에 있으면서 북한 쪽 시각에서 역사를 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직도 자기들이 그런 줄 모르는 사람들도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달라.
"어느 시대나 정치란 가장 덜 나쁜 쪽을 선택하는 것이다. 51명에게 이롭고 49명에게 불리하면 51명을 택하니까 49명은 피해자가 된다. '원래 의도가 나빴던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역사를 자세히 공부할수록 그런 속단을 안 하게 된다. 전체적 맥락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 6·25사변 때 공산 치하에서 우리 국민의 수난은 모르면서, 전쟁 중에 일어난 미국의 민간인 학살만 들고 나온다. 억울한 죽음은 밝히고 위로해야 한다. 그렇다고 민간인 폭격 피해를 미국이 보상해줘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그러면 공산당에게 당한 우리 국민은 어디서 어떻게 보상받아야 하나. 역사를 추상화하고 이념적 오리엔테이션(지향)을 갖고 보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 거다."
―국사 교과서가 필수과목으로 재지정됐고, 수능에도 필수로 넣자는 움직임도 있다.
"역사를 보는 눈, 국사 교과서의 내용, 역사 교육의 방식을 바로잡는 게 더 시급하다. 교과서가 제대로 돼 있지 않은데 필수가 되면 위험도 따른다. 국민적 합의를 거쳐 세계사적 맥락에서 우리 역사를 보는 교과서를 만들고, 그 뒤에 필수 얘기를 해야 한다. 한국현대사학회가 하려는 작업을 서둘러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학회의 외연은 크게 넓어졌지만, 아직도 젊은 진보 학자 참여는 충분치 않아 보인다.
"보수·우파 꼬리표를 다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그들의 참여를 가로막게 된다. 사람들은 내 학문적 입장을 '보수적'이라고 하는데, 에릭 홉스봄(93)이 내가 존경하는 학자 중 한 명이다. 그는 공산주의자다. 하지만 학자로서 객관적이고 책임 있는 연구 태도와 성과를 존경한다. 좌파 우파를 나누면서 출발한다면 그건 처음부터 편향이다. 나는 학자로서 최장집 교수도 존경한다. 그런 분들이 더 많이 참여해야 좌·우, 보수진보를 넘어선 다양한 연구성과가 집대성된다."
한국현대사학회는 정치·경제·서양사·한국사는 물론 생활사 연구자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의 학자들로 구성됐고 대학자부터 신진학자까지 인적 구성도 전례가 드물게 넓은 편이다. 서양사학자이자 한국 최초의 여성 대사를 지낸 이인호 서울대 명예교수는 이 작업을 두고 "역사가 아닌데도 바로잡지 않으려는 경향을 정정하는 작업"이라고 설명했다.
- ▲ 한국현대사학회 고문인 역사학자 이인호 서울대 명예교수는“386세대는 과도한 반공교육에 시달린 탓에 오히려 북한과 소련의 선전물을 통해 역사를 보는 책에 혹했던 측면이 있다”며“이제 그런 한계를 넘어 엄정한 현대사 서술을 시작해야 한다”고 했다. /조인원 기자 join1@chosun.com
―한국현대사학회 출범의 의미는.
"우리 자신을 이해하려면 세계사적 맥락에 우리를 위치시켜 놓고 봐야 한다. 현실 관계를 사회과학적, 문화적 맥락에서 제대로 조명할 필요도 있다. 북한은 실패했고 대한민국은 성공했다. 그런데 아직도 마치 북에 정통성이 있는 것처럼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역사학이 현실을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다. 폭넓은 성향과 전공의 학자들이 참여해 근현대사 연구를 본격화하고, 그 성과를 확산시켜 국민 역사의식을 바로잡는 적극적 활동을 시작한다는 의미가 크다."
―기존에 뉴라이트 진영이 만든 한국현대사 대안 교과서도 있었다.
"기본적으로 잘 된 책이었다. 처음 책이 나온 뒤 보급도 잘 됐는데, 갑자기 신문 몇 군데에 좋지 않은 서평이 나오고 북한 로동신문까지 매도하는 논평을 내더니 책이 '죽어 버렸다'. 책이 죽는 것을 보고 역사가 제대로 조명되는 것을 원치 않는 배후 세력이 있다는 개인적 느낌도 들었다."
―'해방전후사의 인식'이 반(反),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이 정(正)이었다면, 이제 양쪽 시각을 아우르는 '합(合)'의 작업을 시작한다는 의미인가.
"학문은 항상 발전하는 것이다. 그 책들이 나왔을 당시를 생각하면 잘 몰라서일 수도 있겠고, 혹은 이념적 지향이 잘못돼 있으니 있는 사료(史料), 자료조차 보이지 않을 수도 있었을 거다. 이젠 상황이 다르다. 공산체제가 무너진 뒤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관계와 관련, 새 사료가 많이 나왔다. 이념적 편향을 극복하면서 있는 그대로 역사를 바라볼 수 있는 시기가 온 것이다. '해방전후사의 인식' 집필에 참여했던 학자들까지 참여하는 의미는 그래서 더 크다."
―현행 역사 교과서의 한국현대사 서술에는 어떤 한계가 있나.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는 증거가 분명한데도 교과서 쓰는 사람들이 고집해서 고쳐지지 않는 것들이 많다. 예를 들어 동학혁명 때의 '12개조 폐정개혁안' 같은 경우, 정확한 사료가 아니라 소설(1940년 출판된 오지영의 '역사소설 동학사')에만 실린 내용이라는 것이 이미 밝혀졌다. 해방 후 소련군과 미군의 포고문도 그렇다. 선전문구와 실질적 내용의 '부정교합'을 보지 못하고 '소련군은 해방군, 미군은 점령군'이라는 식의 시각이 여전히 존재한다. 교과서 집필 지침의 문제도 크다. 우리 역사에서 제일 중요하게 짚어가야 할 거대한 사건과 인물은 넣지 않고, 아주 지엽적인 것만 강조하기도 한다. 교과서는 분량이 한정되어 있으니 분명한 사실만 넣어도 부족하다. 그런데 그걸 놓고 싸움을 벌이고, 집필위원들이 다수결로 표결하는 말도 안 되는 일도 발생한다."
◆한국현대사연구는 이제 초보단계
―보수·진보를 막론하고 역사 서술에 한계가 분명히 존재했다.
"연구라는 건 항상 정화되고 극복되는 것이다. 철학이 달라서 다른 해석이 나오는 건 서로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기본적 사실의 골격은 같아야 하며, 왜곡해선 안 된다. 중요한 기본 사실을 알리지 않으면 역사 인식이 삐뚤어진다. 예를 들어 이승만을 '미국의 주구(走狗)'라고 표현하는 것이 그렇다. 사실 이승만은 미국이 가장 부담스러워했던 한국 지도자였다고 정확히 가르쳐야 한다."
―좌우 시각차이를 떠나, 한국 현대사연구가 미진했다는 지적으로 들린다.
"미진한 정도가 아니라 아주 초보 단계다. 역사 연구에는 그 시대를 산 사람들의 증언이 매우 중요하다. 초대 공군참모총장을 지낸 김정렬(1917~1992) 전 총리처럼 실제로 건국에 참여한 사람들의 회고록이 이제야 나오기 시작했다. 그들이 살았던 시대상과 맥락을 알고 있어야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보인다. 나 자신도 계속 공부하고 있다. 자기가 살아보지 않은 시대에 관해 편향된 몇 가지 사료만 보고 현실적 환경이 오늘날과 같다고 가정하고, 추상적으로 개념화해 이념적 입장을 갖고 해석하려 하면 안 된다. 다만 친북(親北)이냐 친(親)대한민국이냐의 구분은 중요하다. 대한민국에 있으면서 북한 쪽 시각에서 역사를 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직도 자기들이 그런 줄 모르는 사람들도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달라.
"어느 시대나 정치란 가장 덜 나쁜 쪽을 선택하는 것이다. 51명에게 이롭고 49명에게 불리하면 51명을 택하니까 49명은 피해자가 된다. '원래 의도가 나빴던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역사를 자세히 공부할수록 그런 속단을 안 하게 된다. 전체적 맥락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 6·25사변 때 공산 치하에서 우리 국민의 수난은 모르면서, 전쟁 중에 일어난 미국의 민간인 학살만 들고 나온다. 억울한 죽음은 밝히고 위로해야 한다. 그렇다고 민간인 폭격 피해를 미국이 보상해줘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그러면 공산당에게 당한 우리 국민은 어디서 어떻게 보상받아야 하나. 역사를 추상화하고 이념적 오리엔테이션(지향)을 갖고 보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 거다."
―국사 교과서가 필수과목으로 재지정됐고, 수능에도 필수로 넣자는 움직임도 있다.
"역사를 보는 눈, 국사 교과서의 내용, 역사 교육의 방식을 바로잡는 게 더 시급하다. 교과서가 제대로 돼 있지 않은데 필수가 되면 위험도 따른다. 국민적 합의를 거쳐 세계사적 맥락에서 우리 역사를 보는 교과서를 만들고, 그 뒤에 필수 얘기를 해야 한다. 한국현대사학회가 하려는 작업을 서둘러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학회의 외연은 크게 넓어졌지만, 아직도 젊은 진보 학자 참여는 충분치 않아 보인다.
"보수·우파 꼬리표를 다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그들의 참여를 가로막게 된다. 사람들은 내 학문적 입장을 '보수적'이라고 하는데, 에릭 홉스봄(93)이 내가 존경하는 학자 중 한 명이다. 그는 공산주의자다. 하지만 학자로서 객관적이고 책임 있는 연구 태도와 성과를 존경한다. 좌파 우파를 나누면서 출발한다면 그건 처음부터 편향이다. 나는 학자로서 최장집 교수도 존경한다. 그런 분들이 더 많이 참여해야 좌·우, 보수진보를 넘어선 다양한 연구성과가 집대성된다."
이태훈 기자 libra@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