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태원에 있는 이슬람 성전.. 가운데 글씨는 '알라'
'야훼(여호와)'는 히브리어, '알라'는 아랍어, '하나님'은 우리말
요새 이슬람교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던 중 카톨릭이나 기독교
이슬람교 에 많은 부분이 일치 함을 알았답니다..
그 중 사라와 하갈의 얘기를 소개합니다..
아래글은 한국 이슬람중앙회 ( Korea Muslim Federation ) 카페에서 퍼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성약을 만드셨는데, 그 내용은 그의 가족과 후손들을 크게 번성하게 하고 은혜
받게 하라는 것이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하나님께서 이 약속을 지키시리라 믿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미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나이를 훨씬 넘어섰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아브라함에게 이집트인 하녀 하갈을 부인으로 맞을 것을 권했고, 둘 사이에서는 이스마일이 태어났다.
그리고 이스마일이 자라서 할례를 받은 후에 두번째 아들이 기적적으로 사라에게서 태어난다. 이 아들이
이삭이다. 그런데 사라는 그 후 이삭을 위한 유산 상속문제를 염두에 두고 장자이자 합법적 상속자인
이스마일에게 질투를 느끼게 되었고, 하갈과 이스마일을 집에서 쫓아 내라고 아브라함에게 강요하게
된다.
수일간의 여행끝에 타는 듯한 사막 한 가운데에 버려진 하갈과 이스마일은 한방울의 물도 남지
않게 되었다. 이스마일을 살리기 위해 하갈은 물을 찾아 싸파와 마르와라는 두 언덕 사이를 일곱
바퀴나 돌았으나 허사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또 다른 기적의 은총을 내려주었다. 이스마일의 발밑에서
잠잠이라는 샘이 솟게 하셨던 것이다.
이슬람 전승은 하갈과 이스마일이 버려졌던 파란의 광야가 메카 근처의 사막지대였다고 말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그 뒤 하갈과 아들의 생사가 궁금하여 찾아와보니 모자는 하나님의 보호를 받으며 메카에서
잘 살고 있었다. 아브라함은 사막에 떨어진 운석을 운반해 와 제단을 쌓고 이스마일과 함께 예배소를
세워 감사의 예배를 드리니 이것이 오늘날 카아바이다.
검은 천으로 둘러쌓인 육면체 모양의 카아바는
무슬림 세계에서 가장 신성한 곳이고 이슬람의 가장 친근한 상징중의 하나이다. “꾸란”에서는 이때의
광경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아브라함과 이스마일이 그 집의 기석을 들어올리면서, 주여, 저희가 드리는 예배를 받아주소서. 실로
당신은 모든 것을 들으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이스마일은 이집트 여인과 결혼하여 12명의 아들을 낳았으며 137살까지 살았다고 전해진다.
유대인들과 무슬림의 전통은 토라와 “꾸란” 또는 고대 전승에 근거하여 이와 같은 여러 이야기들이
일치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슬람 전통에서는 먼저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약속을 매우 중시한다. 이
약속은 이삭이 태어나기 전에 맺어진 것이므로 이스마일은 ‘약속의 아들’이고 아브라함의 합법적
상속자임을 내세운다.
그리고 “이스마일의 자손이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고 말하신 이 위대한
민족이 마침내는 예언자 무함마드를 배출하는 아랍민족이라고 말한다. 또한 신께서 아브라함의 신앙을
시험하기 위해 그의 아들을 희생물로 바치라고 명령하셨을 때 주저 없이 오직 신께 복종했던 아브라함의
신앙을 다른 어떤 것보다 중요시한다.
무슬림은 하나님으로부터 번제(燔祭)의 희생물로 지목된 아들이
이스마일이라고 믿는다. 그는 장자였고, 할례를 했으며, 약속의 합법적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꾸란”의 성구는 다음과 같다.
“아들이 그와 함께 일할 나이에 이르렀을 때 그(아브라함)가 말하기를, 오, 내 아들아, 실로 내가
너를 제물로 바치는 꿈을 꾸었는데 너의 생각은 어떠하냐. 그가 말하기를, 오, 아버지, 명령하신
대로 하시옵소서. 하나님의 뜻이라면 당신께서는 제가 인내하는 자들 중의 하나임을 아시게 될
것입니다.”
“그 둘은 하나님께 복종하였고 그가 아들로 하여금 이마를 땅에 대고 엎드리게 하였을 때
우리(하나님)은 그를 불러 오, 아브라함아, 이제 너는 그 꿈을 실행하였노라. 실로 우리(하나님)는
이와 같이 선을 행하는 자들에게는 보상을 내리니라.”
한편 “구약성서”에서는 제물로 바쳐질 뻔했던 주인공이 이삭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이삭은 아브라함의
나이가 100살이었을 때 태어났고, 이스마일은 그 보다 14년 전인 아브라함의 나이 86살에
태어났다. 그러니까 이스마일은 이삭보다 14살 위였고, 이 14년 동안 이스마일은 아브라함의
독자였다.
“창세기” 22장 2절에는 “하나님께서 말씀 하시기를 네 아들, 너의 사랑하는 유일한 아들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너에게 가리켜 주는 산의 한곳에서 그를 번제로 바쳐라” 라는 내용이 있다.
번제의 대상이 독자임은 같은 장 12절에서도,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 네가 정녕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아노라”라고 언급된다. 이삭이 태어난 후에도 형
이스마일은 계속 살아 있었기 때문에 이삭을 독자라고 할 수는 없다. 또 무슬림 학자들은 모리아
땅이, 이스마일이 어린 시절을 보낸 메카에 있는 마르와 동산이라고 말하고 있다.
많은 무슬림들은 창세기에서 이삭의 이름이 이스마일의 이름을 대신해 쓰여진 것은 유대-기독교 전통의
구원의 역사에서 헤브루의 역할을 강조하기 위해 그렇게 언급된 것이라고 보고 있다. “꾸란” 계시의
목적이 앞선 경전 내용이 인위적으로 왜곡되고 생략된 부분을 순화하고 원형의 것으로 완전하게 하는데
있다고 믿는 것이 그들의 신앙인 것이다. 무슬림들은 이슬람에서 최고의 예언자들 가운데 한 분으로
존경 받고 있는 이삭의 지위가 이러한 해석으로 인해 조금이라도 손상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이슬람 전통에서는 아브라함과 관련된 신앙관이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무슬림의
성도인 메카의 성립에서부터 이슬람 신앙과 실천의 다섯 기둥 가운데 하나인 순례의식을 행하는 모습에
이르기까지 이슬람은 아브라함과 이스마일의 종교적 행적과 많은 연관을 맺고 있다. 전세계의 무슬림들은
이들이 재건한 카아바를 향해 하루 다섯 차례 예배를 드리고 있다.
그리고 이슬람 전통에서 가장 큰
축제인 희생제는 바로 아브라함이 이스마일을 제물로 바치려다가 대천사 가브리엘의 중재로 양을 대신
바친 사건에서 유래한다. 무슬림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라고 외치며 양을 잡아 이웃끼리 서로 나누어
먹으며 5일 정도의 연휴를 보낸다. 메카로 성지순례를 간 무슬림 순례객들은 카아바를 일곱 바퀴
돌고, 가능한 그 안에 놓여있는 아브라함의 운석인 ‘흑석’에 입을 맞추거나 그것을 손으로 만져보려
한다.
그 뒤 카아바 동쪽의 ‘아브라함의 발자국’이 있는 곳에서 두번 절하고 남쪽에 위치한 성천
잠잠샘의 물을 마신다. 이 샘물은 신의 은총 때문인지 아직도 수량이 풍부하고 맑은 수질을 유지하고
있어 많은 순례 객들이 이 성천의 물을 고향으로 가져가 무슬림들이 마시게 한다. 또한 하갈이 물을
찾아 헤메던 싸파와 마르와 두 언덕 사이를 7번 왕복(이를 싸이라고 한다)한다.
이러한 순례의식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물론 아브라함의 순종하는 신앙관이다. 이슬람이 ‘신의 의지에
복종하는 종교’이므로 아브라함의 복종은 그만큼 돋보이는 것이다. 지나친 표현 같지만 이슬람을 ‘아브라함교’
라고 까지 말하는 사람도 있다. 게다가 아브라함은 예수, 모세이전의 신의 사자로서 한 점 흐트러짐이
없던 순정의 일신교도였다. 물론, 모세, 예수 또한 순정의 일신교도였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꾸란”에는 다름과 같이 명시되어 있다.
“아브라함은 유대교인도 기독교인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하니프 무슬림이었으며, 우상숭배자의 한
사람이 아니었도다.”
이슬람적 논리는 아브라함, 모세, 예수의 진정한 추종자들 모두가 무슬림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그들의
후대에 인위적으로 첨삭된 교리관이다. 앞의 “꾸란”에서 언급된 하니프(성실한 일신교도)라는 단어가
중요하다.
진정한 무슬림의 궁극적인 목표는 바로 아브라함과 같은 하니프의 길을 걷는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 유대교인들에게도 똑같이 그 길을 걸어갈 것을 권유한다. 그 길이 곧 하나님이 말씀하신 “씨라트
알 무스타낌(올바른 길)”의 길이고 결국 ‘이슬람의 길’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