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직동문을 만나기는 좀체 쉽지 않았다. 미국, 일본으로 출장이 연이은 데다가 국내에서도 서울뿐 아니라 경주공장 안산공장 등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이동하는 바람에 취재 일정을 잡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결국 전화인터뷰로 진행하게 되었는데, 전화선을 타고 들리는 음성은 무척이나 활기 차고 쾌활하며 신중하여 인간적으로나 사업가로서나 상대에게 호감과 신뢰를 주는 분이라 느껴졌다.
광진상공(www.kwangjin-kr.com)은 지난 73년 권영직동문이 창업한 자동차부품제조업체이다. 자동차부품 중에서도 주력상품은 자동차 유리승강기(Indoor Regulator). 국내에서 생산되는 자동차의 75%를 점유하고 있을 뿐 아니라 세계적인 자동차회사인 미국 제너널 모터스사에 연간 5백 억불씩 수출하고 있다. 지난 94년에는 3천 만불 수출을 달성하여 금탑산업훈장까지 수상한 명실상부한 중견기업체로서 1천 여 명의 직원이 일하고 있으며 산하에 광진기계, 광진아메리카, 광진폴란드, 심양진베이광진 등의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다.
권동문은 부고 1학년 때부터 기업가로 입신하겠다는 꿈을 키웠다고 한다. 자연스레 상과대(고려대)에 진학, 중소기업체에 입사하여 이곳에서 10년 간 경험을 쌓은 후 독립하여 창업한 것이 오늘의 광진기계이다.
`기업체를 운영한다는 것은 보람도 있지만 고행의 길`이라고 말하는 권동문은 문자그대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되게되어 있는 걸 하는 게 아니라 안 되는 것을 되게끔 하는 게 남자의 일`이라는 그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그가 사회에 첫발을 내딛은 이래 처신한 길을 돌아보면 고행이라는 것이 괜한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지금이야 그가 경영하는 회사라 그렇다 치고 남의 밑의 봉급쟁이 시절 10년 동안의 근면과 성실은 혀를 내두르게 한다. 그 10년 동안 오전 7시 이후에 출근한 적이 없고 밤 11시 이전에 퇴근한 적이 없으며 1년 중 쉬는 날은 유일하게 음력 정월 초하루, 성묘와 벌초를 위한 단 하루였다고 한다.
그는 그 10년 간 보고 배우고 느낀 모든 것이 교훈이 되었다고 믿는다. 특히나 당시 그가 모시던 사장의 감화는 평생을 지배할 만큼 큰 것이었다고 하니 인덕도 남다른 편인가 짐작케 한다. 그래서인가 사람이 살아가면서 맺는 인간관계에 대한 그의 신념은 남다르다. 이해관계가 엇갈리거나 절대 만나서는 안되었던 사람이라 할지라도 원만하게 지나도록, 몇 십 년 지나 만나도 반갑게 악수할 수 있도록 마무리하라는 교훈은 `우리 젊은 후배들에게 꼭 당부하고 싶은 말`이라고 강조한다.
일에 대한 추진력도 남달라 그가 GM의 판로를 뚫고 들어간 후일담은 각 대학 경영학부 교수의 강의록에도 자주 등장하는 쾌거이다. `89년에 무작정 미국에 쳐들어가 몇 년을 헤매이며 집념을 불태웠는데 그때는 미친 사람이라는 소리도 들었다`고 회고했다. 오늘날 한국에서 생산한 자동차 유리승강기가 캐딜락에도 장착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GM에서 생산하는 30종의 자동차 중에서 8차종에 광진의 제품이 쓰여지고 있고 그것은 GM전체의 15%를 차지한다. 그뿐인가 GM은 해마다 `올해의 가장 뛰어난 제품`으로 광진의 유리창 승강기를 뽑아 시상한다.
그는 곧 일본의 혼다자동차와 비즈니스를 개시하고 오는 12월8일에는 중국 심양에 공장을 차려 대류진출을 시도한다. 대우자동차사태의 여파를 피해나가는 일련의 돌파구로서 특유의 저력을 과시하고 있는 것이다.
`공부가 부족한 상태에서 시험을 치르는 악몽을 이 나이가 되도록 가끔 꾼다`는 우스개를 하면서 부고시절 학업에 다소 소홀했던 것을 후회한다고 말하는 그는 `자식을 키우면서 비로소 모교가 여러모로 우수한 학교였다는 것을 느낀다`고 한다. 모든 것이 합리적이고 불편부당했다는 것이 그가 손꼽는 부고의 미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