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농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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ꊱ “이문구 씨?”
전화로 나를 확인하는 산뜻한 여인의 목소리다. 씨? 학교에서는 ‘선생님’ 또는 같잖은 ‘교수님’으로, 그리고 교회에서는 ‘집사님’으로 불리다가 요즘은 거룩해 보이는 ‘장로님’ 소리를 듣고 있는 터에 웬 ‘~씨’인가?

“나 양은숙인데 이문구 씨예요?”
“난데, 오랜만이군요.”
“요즘 별일 없었어요? 쪽회를 아무래도 멀리 있는 이문구 씨 사정에 맞추려고 그러는데 어느 요일이 좋겠어요?”
쨍쨍한 양은숙의 그 밝은 목소리, 시골 훈장을 위한 배려의 정이 고맙다.
“이제는 우리도 다 늙어서 어디 남자 여자라고 하겠어요. 그냥 옛날 친구로 만나는 거지. 안 그래요?”

이런 저런 얘기 끝에 이 쪽회(쪽쪽회)의 날자 타협이 끝날 무렵 양은숙은 조금은 풀죽은 듯한 힘없는 목소리로 이 모임의 정당성을 이렇게 변명하려 한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요. 늙어도 여자는 여자지. 오히려 원숙한 매력이 돋보이는데.”
“응, 정말 그래요?”
갑자기 반가운 듯 양은숙의 목소리에 맑은 생기가 돋는다.
전화를 끊고 나니 찌든 현실에 시달리다가 오랜만에 잠시 40년 전으로 돌아갔다 온 기분이다.

ꊲ 딸 하나 있는 것 시집보내 멀리 로마에 보내 놓고 그나마 의지하던 아내마저 먼저 하늘나라에 보낸 후 실의에 빠져 있던 나에게 희한한 전화가 온 것은 지지난 해 말이었던가? 대전에 내려온 지 20년 가까이 되어서 그렇지 않아도 그런 저런 이유로 남녀 공학인 서울사대부고 동창회나 동창들의 만남과는 거리가 멀었던 나에게 부고 졸업앨범의 같은 페이지(쪽)에 실린 얼굴끼리 만나자는 엉뚱한(?) 제의였다. 그 때에도 역시 이 일의 공로자는 양은숙이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대답으로 얼렁뚱땅 전화를 끊고 옛날 졸업앨범을 뒤져서 양은숙 얼굴부터 찾아보았다. 그제서야 약간 낯이 익은 모습이란 생각이 들었다. 물론 부고 시절에는 한번도 말을 나눈 적도 없는 ‘여자’다. 그 옆의 장온상, 심영자 등의 여자들과 이삼열, 하기용, 현형규, 이의일, 김종년, 등 남자들이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가 아련하게 떠오르는 모습들이 어쩐지 그립단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기상천외한 이 엉뚱한 모임에 나가 보기로 마음을 굳히게 되었던 것이다.

쪽회가 처음 만나는 날이었다. 어색할 거라는 예상을 뒤엎고 우리는 만나자마자 자연스럽게, 그러나 다정스럽게 악수를 나누었다. 부고 때에는 어쩌다 부딪쳐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는 일부러 아는 체도 안하고 새침을 떼던 처녀, 총각들이 이제는 능글맞을 정도로 원숙해 져 있었다.

우리는 음식을 나눈 후 늦게 호텔 로비에서 차까지 마시면서 외국인 가수의 옛 팝 음악까지 신청해 듣고 취한 듯 헤어졌다. 그리고 얼마 후 쌀쌀한 날씨에 옛 앨범 촬영 장소인 명동성당에서 다시 만나 옛날 모습 그대로 사진을 찍었다. 실로 37년 만인가의 옛날이 되살아 난 것이다. 좁은 옛날 짜장면 집에 바짝 바짝 끼어 앉아 부라보를 외쳐 대는 얼굴에는 비록 주름이 늘고 희끗한 백발이 날리는 데도 마음은 소년 소녀 그대로 마냥 즐거워들 한다. 이것은 정말 기적이었다. 이 기적은 경향신문 한 면 전체에 대문짝 만하게 보도되었고 뭇 동창들의 부러움을 사게 되었다.

ꊳ 지난 모임은 먼 곳에 있는 나를 위해서 토요일 낮에 만남을 가졌다. 저명 인사인 마누라 등살(?)에 시달리는 교수 이삼열은 이 모임에 가장 충실한 멤버의 하나다. 별로 유우머 감각도 없는 이 친구가 여기만 오면 신이 나서 여자 친구들과 포옹까지 해 가며 가장 잘 어울린다. 마누라보다 이 여자들이 더 편안한가 보다.

“이문구 씨, 우리는 친구 사이지요?” 식사가 끝나가고 한참 이야기가 무르익어 갈 무렵 장온상이 갑자기 소녀처럼 수줍은 듯 맑게 웃으며 엉뚱하게 묻는다. “그럼, 친구지.” 어벙하게 대답하자 “그러면 이걸 부담없이 가져 가요.”하면서 보따리 하나를 내어 놓는다. 홀아비인 나를 생각해서 반찬거리를 만들어 왔다는 것이다. 옛날 고3 합반 수업 때 나는 다른 교실로 가고 대신 우리 교실 내 자리에 앉았던 어느 여학생이 장난으로 몰래 내 도시락에서 반찬을 꺼내 먹은 일이 있었는데 그 장본인이 바로 장온상이라는 걸 지난번에 들어 알았지만 실로 40년만에 ‘우정’이라는 이자까지 두둑이 붙어서 되돌아 오다니! 눈물겹도록 고마움을 느끼면서

‘늙어도 여자는 여자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그대들은 그냥 순수한 고등학교 시절의 영원한 소녀다’ 하고 역시 세월이 흘러 희끗희끗한 머리결의 한 늙은 소년이 마음 속으로 외치고 있었다.

(96.서울사대부고 11회 동창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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